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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959년 ~ 1994년 7월 18일 | |
장소 | |
르완다, 부룬디 | |
교전 국가 및 세력[1] | |
[[르완다 애국전선| | [[르완다|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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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르완다 애국전선| | [[르완다| |
1. 개요
"다시는 투치 안 할게요! 살려 주세요!"
- 후투족 민병대에게 살해당한 어느 투치족 소년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다수파 피지배계급 후투족과 소수파 지배계급 투치족의 부족 간 갈등이었다.- 후투족 민병대에게 살해당한 어느 투치족 소년
수십 년 동안의 끔찍한 학살 및 질병과 기아 등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죽었고, 특히 1994년 4월~7월까지 단 100일 만에 대략 50~80만 명이 학살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 매우 유명하다.
2. 분쟁의 시작
원래 르완다와 부룬디는 후투족과 투치족 둘로 나뉘지 않고 여러 부족들이 각자 살아가던 원시사회였다. 물론 당시에도 투치족이나 후투족, 트와족 등 르완다 내 민족들 간의 구분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양반-평민-천민처럼 영향력이 약한 신분제에 가까웠거나, 혹은 옆에 있는 부족 마을 정도로 취급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건 후투족은 농경부족이고, 투치족은 소와 염소를 기르는 반유목부족이었다. 거기다 이들은 언어[2] 및 문화와 풍습도 어느 정도 공유하여 이질감이 큰 다른 부족들끼리 묶이던 아프리카 여타 국가와 다르게 잘만 했으면 하나의 부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질 수도 있었고, 더 나아가 르완다와 부룬디는 한 나라를 이루었을지도 몰랐다.그런데 이 두 나라를 식민지로 병합한 벨기에 제국이 식민지 내 부족들이 한데 뭉쳐 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모호한 기준으로 부족들을 분류하고, 또한 이를 기준으로 차등 대우하여 분열과 재앙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분할통치(Divide and rule)는 옛부터 강대국들이 피지배민들을 이이제이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즉, 특정 그룹에게 특혜를 몰아줘 여타 그룹은 소외시키거나 학대해 이들이 서로 싸우게끔 조장하여 설령 저항하더라도 각개격파하기 쉽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중동·동남아시아·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내전과 민족/종교 간 분열은 대부분 19세기~20세기 초 이래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건설할 때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하여 이러한 저의로 이간질한 것에서 기인되었다.
벨기에가 부족을 구분한 기준은 바로 키와 콧대 길이 혹은 재산으로, 제국주의자들의 부족 구분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를 알려 주는 좋은 사례다. 투치족이 후투족보다 키가 컸던 진짜 이유는 혈통이 달라서가 아니라 목축을 하는 투치족이 농사를 짓는 후투족보다 우유와 고기를 많이 섭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방식은 잉글랜드 탐험가 존 해닝 스피크가 했었던 것이었다. 스피크는 당시 만연한 골상학 등 인종주의 이론을 겹쳐보면서 일지에 대다수가 상위층이던 투치족을 키도 크고 정치상으로 민첩하다고 적어 놨으며, 이후 귀국과 함께 르완다와 부룬디의 생활상을 유럽에 전했다. 그 뒤 점차 투치족은 우월한 부족, 후투족은 열등한 부족, 피그미 트와족은 반인반수의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이후의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르완다와 부룬디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독일 제국이 그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독일 제국은 르완다와 부룬디가 풍요로운 자원을 보유하고 있음을 알아채어 이 지역을 정복하기로 결정했으나, 르완다와 부룬디는 나미비아,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과 같은 독일의 다른 식민지와는 다르게 내륙 지역에 위치했기 때문에 점령과 자원 획득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국은 특정 부족들을 구분하여 현지 족장이나 왕에게 지원을 제공하고 상징적인 건축물을 세워주며, 이를 기반으로 자원을 얻는 방식하에 해당 지역을 통치했다. 다만, 독일 제국은 벨기에에 비해 한쪽을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지는 않았다.[3]
그러나 1918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 제국 대신 벨기에가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위임통치하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이른바 함족 이론을 내세워 투치족 왕들을 앞세우고 후투족 족장을 강제로 폐위시켜 왕국을 없애고 토지 개혁의 명목으로 땅을 몰수했다. 분열 차별 정책을 통해 소수의 상류층 투치족과 다수 하류층 후투족을 분열시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유효하게 지배했다. 게다가 식민지배가 고착화되면서 벨기에에 붙은 부역자들도 생겨나 강제노동 정책과 무거운 세금, 가혹행위, 사법 집행들이 투치족의 이름으로 실시되었지만 이에 반발하는 투치족은 딱히 없었다. 특히 투치족 족장들이 후투족 근로징발의 대리인으로써 상술한 행위들에 대한 권한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벨기에로부터 제공받으면서 후투족에 대한 착취를 주관하고, 부족 공동체를 식민지 통치 체제에 복속시켰으며, 투치족의 자식들은 벨기에가 세운 서구식 학교에 다니며 얻은 지식들로 행정과 정치 분야를 독식하면서 벨기에의 식민지 통치에 협조하여 대를 이어 부역했다. 덤으로 투치족이 르완다의 독립을 외친 것도 그 실제 목적은 외세에 부역하며 얻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많은 젊은 후투족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느라 농사에 힘을 쏟을 수 없게 된 상황속에서 높은 세금과 (비옥한 토지에도 불구하고) 기아까지 발생하자 이에 벗어나려고 우간다로 이주도 했지만, 우간다도 헬게이트였다. 벨기에는 1935년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귀화한 외국인을 식별하는 카드를 도입해 계급 간의 이동을 막았으며, 이렇게 쌓인 서로에 대한 편견과 증오는 외양으로 구분된 부족 사이의 선을 고착화시키고, 이러한 감정은 독립 후에도 이어졌다.
3. 증오의 연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완다에서는 독립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했고, 기존에 투치족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을 후투족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졌다.1959년 르완다 왕국이 세워졌지만 후투족의 반투치 감정이 촉발되면서 투치족과 후투족 사이의 내전이 일어났다. 이때도 후투족과 투치족의 소규모 학살이 있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스운 점은 그동안 투치족을 우대하던 벨기에는 이제 와서 후투족을 지원하여 투치족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결국 투치족이 후투족에게 밀려나면서 국왕 키겔리 5세는 폐위되어 망명을 했고 1961년 1월 르완다는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리고 1962년 7월 르완다와 부룬디가 갈라졌고, 벨기에가 독립을 승인하면서 두 나라는 완전한 독립을 달성했다.
독립 후에 많은 투치족이 외국으로 쫓겨났고 1963년 이웃나라 부룬디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기습 공격하여 후투족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후투족들의 복수로 르완다의 투치족이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도 당대 영국의 유명 학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 이후, 가장 끔찍하고 조직적인 대량 학살"
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파장이 컸다. 쫓겨난 이들 중 군주제를 지지하던 투치족은 끈질기고 아무리 죽여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스스로를 '바퀴벌레'라고 부르며 반후투 게릴라 활동을 했고, 이후 바퀴벌레는 르완다, 부룬디 등 두 아프리카 신생국에서 투치족에 대한 멸칭으로 굳어지게 되어다.그러다가 1966년에 부룬디에서도 왕정이 뒤엎어졌으나 부룬디는 대체로 투치족들이 득세하는 양상이었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1973년 후투족의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투치족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이때 살아남은 투치족들은 이웃 나라인 우간다로 도망쳐 1987년 르완다 애국전선(RPF; Rwandan Patriotic Front)을 결성했다.
1990년, 대다수가 투치족 난민들로 구성된 RPF가 우간다의 지원을 받으며 르완다 북부로 침입했다. 프랑스와 프랑코포니 아프리카의 지원을 받는 후투족 정권과 우간다의 지원을 받는 RPF 간에 벌어진 르완다 내전으로 인해 르완다 국내의 인종간 긴장이 높아지고 후투 파워(Hutu Power)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데올로기로서의 후투 파워는 투치족이 후투족을 노예로 만들려하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르완다는 경제 성장으로 동시기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서 사정이 아주는 아니라도 꽤 좋은 나라였지만[4], 이 경제 성장이 커피 등 일부 작물의 수출에 의존한 것이다 보니 원래부터 고도성장과 마이너스성장을 번갈아갈 정도로 경제 상황이 불안정했던 데다가 198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커피값이 폭락하자 외화 수입이 급속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1987년부터 1991년까지 1988년 한 해를 제외하면 4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며[5], 1993년에는 -8.1% 성장을 기록했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한 민둥산의 확산으로 농업 상황이 나빠지면서 르완다의 경제적인 쇠퇴에 쐐기를 박았다.[6] 이로 인해 빈민층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후투족 기득권층은 빈민층으로 전락한 후투족들의 불만을 투치족들에게 돌리려는 목적으로 후투파워라는 프로파간다를 널리 보급했다.[7] 당시 후투족 촌락에는 투치족을 죽여야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하루 종일 방송되었다고 한다.
계속되는 민족 갈등과 반군에 의해 상당수의 후투족이 르완다 북부에서 밀려나고, 투치족이 남부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쥐베날 하뱌리마나 정부에 대한 압력의 결과 199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아루샤 조약[8]이 소급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후투족 기득권층의 반발을 더욱 불러일으켰는데 이 조약을 준수하면 후투족이 독차지하고 있었던 르완다 정부와 군대의 고위직을 투치족과 나눠 가져야 하는 데다가 후투족 몫에서 또 여당인 MRND가 야당들과 나눠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남부의 부룬디에서는 반대로 투치족 독재정권 시대가 마무리되면서 민주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후투족 출신의 멜키오 은다다예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은다다예는 복수심에 사로잡힌 막장은 아니라서 신중하게 정책을 펼쳐 투치족을 고위직에 임명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이로 인해 의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한편으로는 투치족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기 위해 군대 재편과 토지개혁 정책을 실행하면서, 후투족 난민을 귀환시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기득권을 잃을까봐 두려워한 투치족들과의 긴장관계는 더더욱 고조되어, 결국 투치족 장교들이 은다다예를 살해하는 쿠데타 미수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쿠데타가 진압되고 난 후 1994년에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총리를 투치족으로 임명하는 화합정책을 계속 유지했지만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갈등은 위험수위로 올라갔다.
한편, 르완다에서는 아루샤 조약이 범과도정부를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성립되지 않았고, 후투족 내에서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던 와중에 1994년 4월 6일 후투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인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인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비행기 요격 사건으로 수도 키갈리 근처에서 사망했다.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르완다와 부룬디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진범은 오랫동안 오리무중 상태였다가 2012년 프랑스 조사단의 조사 결과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인 것으로 밝혀졌다. 참모총장 테오네스테 바고소라[9]는 대통령 암살 후 대책위를 조직하고, 즉시 투치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10]
4. 르완다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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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5. 르완다 애국전선(RPF): 본대와 합류 후, 수도 함락
한편 아루샤 조약에 따라 수도 키갈리에 주둔하고 있었던 RPF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나자마자 곧 공격받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북부의 본대와 합류했다.1994년 7월 4일, RPF는 반격을 개시하여 키갈리를 함락하고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를 차단했다. 이에 키갈리에 갇힌 후투족 민간인 60,000명이 투치족이 주축이 된 RPF의 보복이 두려워 탈출하기 시작했고, RPF가 르완다 제2의 도시인 부타레와 후투족 최후 거점인 기세니까지 진격하자 남아있던 후투족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동안 르완다 및 세계의 구호 기구들은 미국 정부 및 유엔의 개입을 요청했다. 학살이 일어나기 전에 Mouvement Démocratique Républicain de Parmehutu라는 단체에서 고위층에 속하는 후투족 남성이 유엔과 미국에 학살에 관련된 문서를 팩스로 송부했다. 이 문서에는 학살에 관련된 구체적인 설명이 들어 있었지만 무시당했다. 미국은 모가디슈 전투 이후 여론의 반발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고, 유엔도 서양 국가들의 눈치를 보느라 돕지 못했다.
6. 유엔군의 행적
이때 르완다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속 국가들[11]이 반대한 탓에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유엔의 '캡스톤 원칙'(Capstone Doctrine)에 따라 유엔 평화유지군은 폭력 사태를 저지하는 데는 재량권이 있었지만 강제력을 행사할지를 결정하는 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결과적으로 총 15명의 유엔군 장병들이 순직했는데, 이는 밑에도 언급된 10명의 벨기에인 장병들에 가나인 3명, 세네갈인 1명, 우루과이인 1명을 합친 숫자였다. 벨기에군을 제외한 5명의 순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앙카(Ankah) 대위(가나, 1994년 7월 8일 사망)
- 아에도(Ahedor) 일등병(가나, 1994년 4월 17일 사망): 시장을 노린 르완다군의 무차별적인 포격에 휘말려 사망했다.
- 멘사베이두(Mensah-Baidoo) 이등병(가나, 1994년 5월 9일 사망): 르완다군이 유엔의 보호를 받는 지점에까지 무차별적인 사격을 퍼붓는 바람에 아마호로 스타디움에 있던 숙소가 직격당해 파편이 심장을 꿰뚫어서 사망했다.
- 음바이(Mbaye) 대위(세네갈, 1994년 5월 31일 사망): 아가테 총리의 네 자녀를 구출한 인물이었다. 매우 용맹하게 분투했으나 오귀스탱 비지뭉구와 협상하고 돌아오던 중에 박격포 파편을 맞고 허망하게 전사했다.
- 소사(Sosa) 소령(우루과이, 1994년 6월 17일 사망): 방글라데시 평화유지군 소속의 아샨 소령과 함께 공격을 당했다. 처음에는 지뢰를 밟았다고 보고되었으나 알고 보니 르완다군이 로켓포를 발사해서 그들이 탄 차를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아샨 소령도 중상을 입었으나 어떻게든 소사 소령을 구하려고 했는데 르완다군이 사격을 가한 후에 아샨과 소사가 가진 돈을 모두 빼앗았다. 약탈을 지휘한 르완다군 부사관이 아샨을 처형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으나 아샨에게서 뺏은 돈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두고 르완다군이 다투는 사이에 평화유지군 소속의 사소노프 소령과 코스타 소령이 나타나서 이들을 구출했다. 소사 소령은 이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으나 몇 시간이나 방치된 끝에 사망했다. 르완다군은 이들이 평화유지군이란 걸 몰랐다고 했지만 외국 군복에 유엔 마크까지 있었기에 몰랐을 리가 없다.
6.1. 벨기에: 병력 파견
한편 벨기에는 여러 다국적 군대로 구성된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해서 르완다의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르완다와 부룬디, 자이르 등 옛 식민지 출신 아프리카 국가들을 이렇게까지 생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 무슨 생각으로 평화유지군을 보내자는 뻔뻔한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라고 비아냥거렸고, 결국 벨기에는 전세계의 냉담한 반응 속에 단독으로 병력을 르완다에 보냈다.결국 총리 아가테 우윌링기이마나(Agathe Uwilingiyimana, 1953~1994)를 보호하던 평화유지군 소속 벨기에군 10명이 총리 부부와 함께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가 사망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아가테는 이것을 거부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의 보호하에 국영 방송국으로 가서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고 있으며, 평화조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을 방송해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당연히 학살 주동자들에게는 절대 살려 두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아가테 총리 부부에겐 4명의 자식들이 있었는데 총리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항복하자 대통령 경호대가 그 자리에서 총리 부부를 죽여버렸다. 그나마 다행으로 수색을 철저히 하지 않고 나가서, 숨어있던 네 자녀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벨기에군까지 죽인 것은 벨기에가 자기네 병사들의 피해를 감수해가면서까지 르완다에 개입할 리 없다는 후투 파워 지도부의 계산 때문이었고, 평화유지군의 중핵인 벨기에군이 철수한다면 유엔군도 나가서 자기네들이 마음대로 설칠 수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살해당한 벨기에군은 공수부대 소속 박격포반 병사들로 총리를 보호하던 중 포로로 잡혀 산 채로 사지가 잘리고 거세당한 후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아무리 후투족 민병대가 미쳐 돌아갔다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서방을 자극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훗날 작성된 벨기에 상원 진상조사 위원회의 보고서 및 이것을 인용한 프랑스어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이들은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고 르완다군 부대로 끌려갔으나 우선 4명이 칼(마테체)로 즉시 살해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난도질하면서 죽인 건 아니고 그냥 죽였다고 한다. 이에 나머지는 중위 로탱의 지휘하에 주변 건물로 들어가 저항했으나 이 병사들을 압도하는 후투족 민병대의 공세에 전원 전사하고 말았다. 이와 달리 거세 운운하는 이야기의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에 인용된 미국 국적의 작가 스콧 피터슨(Scott Peterson)의 책《Me Against My Brother》(2001)인데 피터슨은 여기서 실제로는 중위(Lt.)와 상병(Cpl.)이었던 희생자들을 모두 이등병(all of them privates)이라고 적었으며 그 출처도 전혀 명시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 또한 미국 국적의 또다른 작가인 키스 리치버그(Keith B. Richburg)도 자신의 책 《Out of America》(2009) 서문에서 피터슨의 책을 인용한 바 있으나 이것은 이러이러한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와서 참상을 보니 다 사실인 듯하다는 취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당시 평화유지군 사령관으로 파견된 캐나다군의 로메오 달레르 중장은 최초 보고를 받고 영안실에 가서 벨기에군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이들의 시신이 처참하게 훼손(mutilated)당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10구의 시신을 2번이나 거듭 셌음에도 11구로 잘못 셌을 정도였다. 총도 아니고 칼로 죽였으니 곱게 죽지 못한 것은 맞는 듯.
벨기에군 희생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로탱(Lotin) 중위
- 르루아(Leroy) 상사
- 바신(Bassine) 상병
- 루아르(Lhoir) 상병
- 모(Meaux) 상병
- 플레시아(Plescia) 상병
- 뒤퐁(Dupont) 상병
- 아위테브룩(Uyttebroeck) 상병
- 드바티(Debatty) 이병
- 르누아(Renwa) 이병
6.2. 프랑스: 학살 조장
르완다 대학살은 20세기 후반 인류사 최악의 비극이었다.
1994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100일 동안 후투족 정규군과 민병대 "인테라함웨" 에 의해 당시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던 100만 명의 투치족들이 학살당했다.
그 100일 동안, 르완다의 카게라 강과 나바롱고 강에는 밤낮으로 마체테에 잘린 희생자들의 머리와 손발이 수없이 둥둥 떠다니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 학살에 쓰인 마체테 50만 자루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중국이 수출한 것이었고, 그 대금은 프랑스 정부가 빌려준 돈으로 지불된 것이었다.
우간다로 피난했던 투치족들로 결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7월에 반격해와 전세가 역전되었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도 잔존해 있던 후투족 살인마들에게 계속 무기를 공급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후 르완다 신정부는 살인 정권의 각종 무기 구입에 든 1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했다. 어머니의 목을 베고, 동생의 손발을 토막치는 데 사용된 마체테의 구입 자금을 유족들더러 갚으라는 소리였다. 신정부가 부채를 탕감해달라고 호소했지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주도한 채권단은 이 요구를 묵살하면서 여차하면 르완다를 재정적으로 고립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르완다의 살아남은 농민들은 이제 동포, 이웃, 가족을 죽이는 데 든 비용을 프랑스 은행에 갚기 위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 - 르완다 대량학살 사건 이후 #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12] 정권도 르완다에 파병하긴 했는데 이들은 학살을 말리는 게 아니라 되려 학살을 조장하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후투 파워의 무기 공급을 도와준 것이 프랑스였고, 심지어 민병대 훈련도 시켜 주었으며, 한술 더 떠 학살당한 투치족이 세운 르완다 신정부에게 후투족이 동족들을 죽일 때 쓴 마체테 값을 대신 지불하라고 협박했다. 이것이 훗날 폴 카가메 치하의 르완다가 반프랑스 노선을 걷는 원인이 되었다. 르완다 정부에서 이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고 미국 로펌에 의뢰한 것이 2017년에 나온《뮤즈 보고서》였다.1994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100일 동안 후투족 정규군과 민병대 "인테라함웨" 에 의해 당시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에 육박하던 100만 명의 투치족들이 학살당했다.
그 100일 동안, 르완다의 카게라 강과 나바롱고 강에는 밤낮으로 마체테에 잘린 희생자들의 머리와 손발이 수없이 둥둥 떠다니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이 학살에 쓰인 마체테 50만 자루는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중국이 수출한 것이었고, 그 대금은 프랑스 정부가 빌려준 돈으로 지불된 것이었다.
우간다로 피난했던 투치족들로 결성된 르완다 애국전선이 7월에 반격해와 전세가 역전되었지만 프랑스는 그때까지도 잔존해 있던 후투족 살인마들에게 계속 무기를 공급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후 르완다 신정부는 살인 정권의 각종 무기 구입에 든 1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했다. 어머니의 목을 베고, 동생의 손발을 토막치는 데 사용된 마체테의 구입 자금을 유족들더러 갚으라는 소리였다. 신정부가 부채를 탕감해달라고 호소했지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주도한 채권단은 이 요구를 묵살하면서 여차하면 르완다를 재정적으로 고립시키겠다고 협박했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르완다의 살아남은 농민들은 이제 동포, 이웃, 가족을 죽이는 데 든 비용을 프랑스 은행에 갚기 위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 - 르완다 대량학살 사건 이후 #
프랑스의 미테랑 정권은 학살에 참여한 르완다군과 경찰을 훈련시키는 한편, 투치족 살해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고위 프랑스 관리들은 투치족에 대한 비방에 참여하여 집단학살 논리를 가다듬는 데 이바지했다고 한다.《뮤즈 보고서》에서는 프랑스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로 르완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배제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한 당시 르완다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으로 지적했다. 이쯤되면 농담이 아니라 르완다 학살의 진정한 원흉은 프랑스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13]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19년 5월에 발족시킨 조사위원회는 르완다에서 8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에 프랑스가 개입했는지 여부를 조사한 결과를 담은 보고서에서 프랑스의 "무겁고도 중대한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학살에 공모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 2021년 4월에 기밀문서를 공개하기로 했다. #
프랑스 정부가 르완다 학살을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안 해 결과적으로 80만 명 이상의 대량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르완다 정부가 펴냈다. #
7. 처벌
7.1. 배후자
배후자인 대령 투야하가는 후에 체포되어 벨기에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2020년 세계 10대 현상범으로 꼽힌 적이 있는 돈줄 펠리시앵 카부가가 체포되었다. 카부가는 당대 르완다의 유명 부호이자 이 사건의 핵심 주동자 중 한 명으로서 르완다의 거의 유일한 라디오 방송인 RTLM을 통해 "투치족이 후투족을 강간한다!", "오늘도 투치족이 후투족을 때려죽였다!" 같은 방송을 시키며 혐오를 부추겼고, 투치족 학살에 이용된 무기들을 사 오는 데 돈을 대 주었다. 골때리는 건 각각 케냐와 스위스에서 두 번이나 진작 체포할 기회가 있었으나 케냐 경찰은 뇌물을 받고 정보를 누설하는 바람에 놓쳤고, 스위스는 관리 소홀로 그를 못 알아본 채 입국/출국을 허가했다.
7.2. 가해자
실제로 르완다 학살은 가해자들의 처벌이 상당히 제한되었다. 학살에 가담한 가해자들 중 대다수가 평범한 후투족들이었고, 그 수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체 르완다 인구의 거의 1/3 정도로 추산되는데[14] 수치가 이 정도 되면 처벌하고 싶어도 처벌하기 힘든 수준이다. 이들을 일일이 잡아다가 처벌하면 기껏 내전이 끝나 평화가 정착되었던 르완다에 다시 내전이 재발하여 영영 돌이킬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내전 종식 이후에 르완다의 대통령이 된 폴 카가메는 본인이 투치족 출신임에도 국가 통합을 위해 대부분의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테오네스트 바고사라, 베르나르 투야하가, 펠리시앵 카부가 등 학살을 선동하고, 주도했던 몇 명을 제외하면 그냥 조용히 관용을 베풀고 넘어갔다.그나마 잡힌 이들도 내전의 여파로 인해 경찰도 법원도 박살난데다가, 경찰이나 판사 같은 이들도 일부는 학살당하거나 난민이 되었고, 아예 그들 자신이 학살에 가담한 일도 많았기에 재판을 할 여지가 되지 않아 그냥 풀어주는 일도 있었다. 교도소도 관리가 안 되긴 마찬가지였으나, 의외로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은 매우 얌전했고 죄수 폭동 같은 것도 없었다고 한다. 실질적인 처벌은 후투족 지도자 일부로 끝났고 나머지는 가볍거나 형식적인 형벌을 받는 수준에 그쳤다.
실형을 선고한 관리들 중 다수는 말리의 쿨리코로에 있는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8. 이후 상황
8.1. 벨기에: 병력 철수
이 사태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는 벨기에는 국내 여론이 나빠졌다는 이유로 벨기에군 병력을 철수시켰다.8.2. 유엔: 병력 감축
거기에 더해서 평화유지군의 병력은 270명으로 감축되었다. 이렇게 되자 평화유지군 총지휘관인 중장 로메오 달레르(Roméo Antonius Dallaire)는 그나마 남아 있었던 네덜란드, 가나, 캐나다인 평화유지군을 모아서 '안전지대'를 형성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의 경험을 회고한 저서인《악마와의 악수》(Shake Hands with the Devil)가 있다. 그리고 중장 달레르는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PTSD를 앓고 있다.8.2.1. 평화유지군의 활약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평화유지군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세네갈의 육군 대위 음바이 디아뉴(Mbaye Diagne)는 단순히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것으로 약 1,000명의 목숨을 구했으나 결국 후투족 민병대가 쏜 박격포탄에 맞아 사망하고 말았다. 유엔은 2014년에야 훈장(UN Medal for Exceptional Courage)을 수여했는데, 당연히 유가족이 뉴욕에 와서 수상했다.
- 다른 평화유지군은 투치족 피난민들이 숨어 있는 교회 앞에서 경비를 서 투치족을 구했다. 평화유지군이 앞에 서 있으면 후투족 민병대가 그냥 침입 자체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후투족의 목적은 정복전쟁이나 무차별 테러가 아니라 투치족 말살을 통한 르완다 전체의 후투 단일민족 국가화였기 때문에 투치족이 아닌 다른 민족이나 세력은 공격하지 않았고, 나중에 이걸 강조하면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래라면 그냥 르완다로 다 인도될 상황이었지만[15] 하필 콩고 전쟁이 터지면서 백지화되었다.
9. 르완다 학살 이후
피난을 떠난 후투족들은 키갈리에서 서남쪽으로 30km 떨어진 임시정부의 잠정 수도인 기타라마로 가거나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 콩고민주공화국, 부룬디, 우간다 등 이웃한 아프리카의 국가들로 피난을 갔다. 피란 중 후투족 난민이 300만 명이나 발생했고, 식량 부족과 콜레라 등의 전염병으로 많은 피난민이 죽었다. 또한 이 피난민들 사이에 르완다 학살 사건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르완다군 탈영 장병들과 인테라하므웨 등 후투족 민병대원들이 섞여서 난민촌을 병영화시켰다. 이것은 내전이 종결된 후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옛 이름은 자이르) 간에 벌어진 국경 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1998년에 일어난 아프리카의 세계 대전이라는 별명이 붙은 제2차 콩고 전쟁의 불씨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근본 원인은 르완다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콩고 민주공화국의 불안정화를 의도하여 외부 개입의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콩고 민주공화국으로 도피한 후투족 전범들은 연합하여 르완다 해방군(ALiR)을 결성했고, 이 르완다 해방군은 훗날 르완다 해방을 위한 민주군(FDLR)으로 재편되어 지금까지도 르완다 복귀를 거부하고, 콩고 민주공화국의 북동부에 눌러 앉아 지방 토호들의 후원을 받는 용병 겸 지역 유지 집단이 되어 키부 분쟁 등 여러 콩고 내전에 숟가락을 얹으며 현지 민간인들을 위협하고 있다.한편 RPF는 7월 말에 전투 중지를 선언했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고자 후투족을 향한 사사로운 보복을 금지시켰다. 후투족 난민은 1996년 말과 1997년 초에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수도 키갈리에 있는 호텔 밀 콜린스의 지배인이었던 폴 루세사바기나(Paul Rusesabagina)가 난민 1,200여 명을 100일 동안의 학살 속에서 보호하는 업적을 이루어냈으며, 이후 <호텔 르완다>라는 영화로 각색되었다.
피그미족이라 불리는 트와(Twa)족은 이 전쟁통에 애꿎게 30,000명 중 10,000명(전체의 1/3)이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 트와족이 학살되었다는 것 때문에, 후투와 투치의 민족 문제보다 경제 문제가 더 큰 것 아니었냐는 반응도 있다. 실제로 지방에서의 학살은 대부분 마을 사람들 간, 심지어 친족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왜냐하면 학살 뒤에는 죽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농사 지을 땅, 가축 등)의 분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르완다 학살을 맬서스 트랩의 극단적인 형태로 보는 입장도 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최고의 인구 밀집 농업국가였기 때문이다.[16]
비슷한 시기에 부룬디에서도 대학살이 벌어졌었다. 차이가 있다면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면, 부룬디에서는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의 학살을 시작으로 투치족 군대가 보복하는 피의 보복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부룬디는 이미 1970년대에 투치족 군부에 의해 후투족 20만 명이 학살되었는데 20년이 지나 다시 25만 명 이상이 학살로 서로 죽어 나갔다. 그 때문에 르완다와 부룬디의 학살로 죽은 사람의 수를 합하면 적게 잡아도 1주일 내에 백만 명으로, 이것은 킬링필드로 유명한 캄보디아 학살과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서파키스탄인들에 의한 동파키스탄인 학살에 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있었던 학살 중 3위에 해당한다.
이 학살 이후,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성평등한 나라가 되었는데, 내전과 학살로 남성들이 죄다 죽어나가는 바람에 여성이 가계를 이끌어야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로 인해 발언권이 강해졌고, 내전 종식 이후 집권한 파스퇴르 비지뭉구 전 대통령과 그 뒤를 이은 폴 카가메 현 대통령이 여기에 호응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 사회문화적으로는 가부장적인 성차별이 심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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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까지 사용된 국기 | 현재 국기 |
르완다 정부는 학살에 연루된 프랑스 관리들에 대한 공식 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
2017년 3월 20일, 바티칸을 방문한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와 만난 교황 프란치스코는 르완다 내전 당시 학살에 가담한 로마 가톨릭교의 일부 성직자의 잘못을 사과했다. #
2020년 5월 16일 르완다 대학살의 배후이자 자금줄이었던 펠리시앵 카부가[17]가 도피 25년 만에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유엔 전범재판소 잔여업무처리기구[18]로 이송되었다. #
2020년 8월 31일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이었던 폴 루세사바기나가 르완다 당국에 의해 테러 혐의로 체포되었다. # 루세사바기나의 폴 카가메 정권 비판 때문에 표적이 된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에서 납치되어 르완다로 이송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가족이 벨기에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 결국 기소되었다. # 루세사바기나는 자신의 체포가 르완다 당국에 속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폴 루세사바기나는 결국 유죄 선고를 받았다가, # 다행히 2023년에 석방되었다.
2023년 9월 19일. 르완다 대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르완다의 전직 고위 관리가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 10월 3일에는 전직 육군 장교 피에르 클라베르 카랑와가 1994년 4월 무기나 대량 학살에 가담한 혐의로 네덜란드에서 체포되었다.#
2024년 4월 르완다 대학살 30주기를 맞아 카가메 대통령과 여러 나라의 전•현직 정상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다. #
10. 대중매체
- 영화 <호텔 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호텔 밀 콜린스에서 투치족과 후투족 난민 1,200여 명을 수십 일 동안 지켜낸 호텔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것으로, 주로 호텔과 부근만 묘사된다. 주연은 돈 치들이었다.
- <트리 오브 피스>
2021년에 제작하여 2022년 넷플릭스를 통해서 개봉된 영화였다. 정식 개봉전인 2021년 제36회 산타바바라 국제 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여성 감독인 알라나 브라운이 만든 작품으로, 르완다 내전 당시 알려진 실화에 기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르완다에서 대학살이 발생했던 당시 참극을 피해서 한 곳에 숨어든 4명의 여성[19]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 사이에서 영원히 지지 않을 자매애가 피어나게 되는 내용이다.
-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We Wish to Inform You That Tomorrow We Will be Killed With Our Families》. 저자는 필립 고레비치다. 저자가 르완다 내전 직후 르완다 등지를 돌아다니며 내전의 생존자와 학살 가담자 등을 인터뷰하며 모은 일화를 엮은 책이다. 매우 잘 읽히고 표현이 뛰어난 명문이니 추천한다.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와의 인터뷰 내용도 실려있는데 영화 내용의 대부분이 실화 기반임을 알 수 있다.
- <4월의 어느날>
<Sometimes in April>. HBO에서 2005년에 방영한 TV용 극영화로, 투치족 아내를 둔 정부군 소속의 오귀스탱과 반투치 성향의 라디오 방송으로 인기를 얻는 방송인 오노레, 이 서로 다른 정치 성향의 두 형제가 내전 속에서 겪는 일과 종국에 오귀스탱이 전범재판에 나간 오노레를 바라보며 일어나는 일까지를 다룬 영화다. 대학살의 발단부터 진행과 종료, 전후처리까지 모두 그려냈다. 주연은 이드리스 엘바였다.
- <CSI 라스베가스>에서 간접적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10시즌 19편).
평소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이 살해당했는데, 범인은 그와 매우 친한 사이이자 르완다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으로 알려진 학교 수위였다. 학생이 수위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 계기로 르완다 학살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는데, 수위가 사실은 르완다 학살의 주범이며 미국으로 도망쳐서 신분을 세탁한 채 살던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수위는 과거를 뉘우치며 평범하게 살려고 했지만 학생이 그의 정체를 알고 그를 몰아붙이자[20] 두려운 나머지 죽이고 만 것이었다.
- 르완다 내전 중에는 보스니아에서도 전쟁이 한창이라, 1994년은 여러모로 유혈로 얼룩졌던 해였다. 이 때문에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영화에선 르완다 내전을 언급하고, 르완다 내전을 다룬 영화에선 보스니아 전쟁을 언급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예컨대 <호텔 르완다>는 도입부에서 보스니아의 유혈사태를 말해주는 뉴스가 나오며, <노 맨스 랜드>에서는 보스니아 병사들이 뉴스를 들으며 "르완다 상황이 안 좋은가 봐~"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그해 12월엔 러시아의 캅카스 남부 체첸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제1차 체첸 전쟁이 발발하기도 했다. 파푸아뉴기니에서도 부건빌 내전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앞의 셋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
- 이 밖에 르완다 학살을 다룬 영화로 <키갈리에서의 일요일>, <슈팅독스> 등이 있다.
- 《악마와의 악수》
《Shake Hands with Devil》. 위에서 언급한 당시 르완다에 주둔하던 유엔 평화유지군 총사령관 로메오 달레르 중장의 회고록으로, 2003년에 출간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2004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다. 저자의 성장과정부터 캐나다에서 지내던 시절, 르완다 평화유지군으로 배치되어 직접 목격했던 참상을 서술하고 있다. 제목이《악마와의 악수》인 이유는, 학살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중 후투족 민병대 대장 한 명과 만났을 때 '나는 악마와 악수를 한 것 같았다'고 회상한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 신문수의 <서울 손오공>[21]
손오공 일행이 르완다 내전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어쩌다 서울로 흘러들어온 르완다 난민 아기 '봉봉'을 돌보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에서 저팔계가 르완다 내전으로 고통받는 르완다 민간인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는데, 연설 중 읽고 있는 대본이 바람결에 날아가자 얼떨결에 "여러분! 르완다가 날아갔습니다!"라는 개드립을 친다.
- 《내 이름은 임마꿀레》
르완다로 귀국했다가 내전이 터지면서 고립되어 8명의 동료와 함께 욕실에서 91일간 살아남은 임마꿀레 일리바기자의 실화를 다룬 책으로, 대한민국에도 정발되었다.
- <블랙 어스 라이징>
넷플릭스와 BBC 공동 제작이다. 투치족 생존자로 영국으로 입양된 케이트가 국제전범재판소 소추관인 양어머니 이브로 인해 과거의 학살과 전범자들을 추적하며 벌어지는 스릴러 8부작 미니시리즈다.
- <아버지의 마음>
종교 다큐멘터리 영화이긴 한데, 부모가 르완다 학살의 희생자이고, 본인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르완다인 메소드의 이야기에서 르완다 학살의 자세한 전말과 참상이 소개된다.
[1] 아래 나와있는 세력들 외에도 수많은 무장 단체 및 반군들이 얽혀 싸웠다.[2] 비록 르완다와 부룬디가 원래부터 다른 나라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분리되었기에 르완다어와 룬디어도 다른 언어로 분류되지만, 사투리 수준이라 의사소통에 있어서는 큰 지장이 없다. 또한 르완다와 부룬디가 프랑스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했지만 타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식민지 언어로의 잠식 정도는 상대적으로 낮다.[3] 그 덕에 지금도 독일과 르완다 및 부룬디 사이의 관계는 나쁘지 않다. 독일이 식민지 흑인들에 대해 벌인 가혹한 학살과 유혈 진압으로 식민통치한 탄자니아와 나미비아에서 반독 감정이 강한 것과는 대조된다.[4] 사실 하뱌리마나 집권 전 르완다는 미얀마를 제외하면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이웃나라이던 부룬디와 모디보 케이타가 경제를 말아먹은 말리보다도 가난한 것은 물론이고 1인당 GDP가 50달러를 넘긴 것도 1970년(55.2달러)였으니... 1974년 69달러이던 게 1975년 124달러(뒤에서 7위)로 오른 후 1978년 세계 10대 빈국을 탈출하고 1981년 약 255달러로 뒤에서 14위를 기록했으며, 이후 성장세가 주춤해졌어도 1984년 세계 20대 빈국을 탈출하고 최전성기인 1988~1990년에는 약 345달러로 파키스탄보다 잘 사는 세계 27대 빈국으로 입지가 대폭 올랐다. 덤으로 1978~1990년에는(1985년 제외) 중국보다도 1인당 GDP가 높았다. 차라리 1990년에 사임하지 그랬어[5] 1987, 1989년에는 -0%대, 1990~1991년에는 -2%대를 찍었다.[6] 1990년 345달러이던 게 1991년 254달러(뒤에서 14위)로 폭락하고, 1992년 264달러(뒤에서 21위), 1993년 247달러(뒤에서 16위)로 제자리걸음을 걷는 상황이었다.[7] 의도적으로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는 것도 고전적인 수법이다.[8] Arusha Accords, 조약이 체결된 탄자니아의 아루샤 시의 이름을 땄다.[9] Théoneste Bagosora, 1941~2021[10] 바고소라는 전쟁 무렵에 자이르, 카메룬으로 도피했다가 1997년에 집단 학살 등의 11가지의 국제 범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2008년 12월 18일에 종신형에 처해졌다. 그후 바고소라는 가석방 신청이 거절된 지 약 반년 뒤인 2021년 9월 25일에 향년 80세로 감옥에서 사망했다.[11] 비상임이사국 중 하나가 다름아닌 르완다였다.[12] 사후 르완다 내전에서 후투족 정부군이 벌인 투치족 학살에 무기를 지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비판받았다. 다만 르완다 내전이 발생한 것이 1994년인데, 이때 프랑스는 여당이었던 사회당이 하원 선거에서 대참패를 겪고, 우파가 대거 당선되어 에두아르 발라뒤르를 중심으로 2차 동거정부가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테랑에게만 책임을 묻기도 뭐하다. 실제 르완다 정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에두아르와 다른 프랑스 공직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미테랑의 실권 여부를 떠나, 본인이 프랑스 대통령으로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비판받을 여지가 있겠지만. 특히 국방, 외교 분야는 외치에 관한 것으로 대통령 본인 소관이다.[13] 짐바브웨의 구쿠라훈디 학살의 흑막이 북한인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4] 디만 2006년에 있었던 한 연구에 따르면, 내전 당시에 사람을 1명이라도 죽인 사람은 약 17.5만~21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후투족 성인의 7~8%, 후투족 성인 남성의 14~17%에 맞먹는 값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수치도 당시 르완다 인구의 2.6~3.1%에 육박하는 엄청난 비율인 것은 마찬가지이지만.[15] 20만명 정도의 후투족 난민이 전쟁 전 실종되었는데 콩고 정부가 르완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이들을 르완다로 인도하려 하자 저항했고, 결국 답이 없자 전부 죽였다는 설이 유력하다.[16] 인구 밀도 320명/km2(27위)[17] 이 인물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원티드: 세계 최악의 수배자들> 2화에서 소개된다. 다큐 제작 중에 체포되어 마지막에 실제 체포 장면이 나온다.[18] MICT, Mechanism for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s[19] 후투족 온건파 여성인 아닉(엘리안 우무하이어 분), 부모를 잃은 투치족 고등학생인 무테시(볼라 콜레오쇼 분), 후투족과 투치족의 혼혈인 수녀 자넷(샤메인 빙와 분), 미국인 자원봉사자 대학생인 페이턴(엘라 캐논 분) 등 4명이다.[20] 학생이 악의적으로 협박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사람으로서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 이러고도 진심으로 반성을 하긴 하는 거냐'라며 화를 냈다. 이 수위는 학생에게 자신의 경험담을 말할 때 두 여성의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면서 '내 가족들인데 모두 죽고 나만 살아서 도망칠 수 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수위가 르완다에서 살해한 여성들의 사진이었다.[21] 《서유기》의 손오공 일행이 서울 및 대한민국에 눌러앉으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