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보편제국(普遍帝國, Universal empire)는 특정 민족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국민국가나 특정 민족이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는 식민제국과는 달리,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제국을 뜻한다.또한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면서도 종교적으로는 하나의 종교를 국교로 삼아 해당 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강조한 나라들[1]이 다수라서 오늘날의 다문화 국가들과도 구별되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도권을 잡은 민족이 아예 없지 않으며, 근현대의 보편제국 중에는 식민제국에 가까운 성향을 보여준 나라도 있었다. 거대한 영토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일관된 관용책과 유화책을 한 사례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2] 결국 보편제국이나 식민제국는 피상적인 용어의 차이로 실제 그 제국 내의 민족 관계나 제국 통치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2. 국가 및 칭호 목록
2.1. 한자문화권
- 중화제국 - 천자: 중화제국의 천자들은 하늘의 아들로서 유일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낼 권리가 있었으며, 천하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라 자처했고 침투왕조 및 정복왕조의 이민족 군주들 역시 천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제국을 통치했는데, 단순히 프로파간다로만 그렇게 주장한 게 아니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를 실시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국교가 아닌 종교에 대한 탄압은 서양이나 중동(중양)의 보편제국들보다 적었다.
2.2. 유럽 문화권
- 로마 제국 - 로마 황제: 로마는 초기에는 라틴계 국가였지만 다양한 민족에게 시민권을 개방하여 같은 로마인으로 대우하면서 보편제국으로 거듭났고, 3세기 이후에는 초기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과 상관없는 혈통을 가진 인물들까지 황제 자리에 올라서[3] 여기 언급된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보편제국의 성향이 강한 나라였다. 또한 이후에도 유럽에서는 1453년 로마가 멸망하고 그 이후에도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정통성 차원에서 로마 제국의 후예를 주장한 경우도 많았다.[4] 정복할 때는 학살과 노예화를 서슴치 않기도 했지만 근세, 근대 서양과 달리 피부색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 신성 로마 제국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비록 위조문서[5]를 통해 억지로 권위를 창출해냈고, 당시에 아직 살아있는 로마 제국인 동로마 제국의 존재로 인해 정교회권이나 이슬람권 등으로부터는 로마 제국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서방 가톨릭 국가들은 일단 서방의 보편제국으로 인정하기는 했다. 또한 독일인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인[6], 체코인[7] 등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나라였기에 다민족 국가로서 보편제국의 조건도 충족했다. 다만 교황이 집전하는 대관식 없이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된 막시밀리안 1세 이후부터는 독일 민족 국가로서의 특성이 강해져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국호도 등장했으며,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의 등장으로 제국 북부의 제후 상당수가 가톨릭[8]을 부정하는 루터교회로 개종하면서 통합이 약해졌고, 30년 전쟁을 통해 제후들이 사실상 독립국 군주가 된 이후에는 유명무실해졌다. 때문에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은 최후의 종교 전쟁이자 근대 민족국가 중심의 국제법 질서 탄생의 기점으로 여겨지곤 한다.[9]
- 오스트리아 제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오스트리아 황제: 제위를 세습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인 가문인데다 최대 민족 역시 독일계였지만, 다른 민족들을 단독으로 압도할 수는 없었던데다가 제국의 핵심 영토인 보헤미아 왕국-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에서 혈연에 근거한 선출[10]로 각국의 왕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보편제국의 속성을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1제국, 독일 제국 등 동시대에 공존했던 황제국들이 특정 민족[11] 중심의 국민국가였던 것과 달리, 소수민족 출신 육군 원수가 배출되고, 소수민족 정당들이 의회에서 상당한 의석을 확보할 정도로 개방적인 국가였다. 또한 말기에는 아예 제국 전체를 동등한 권리를 가진 민족들의 연방으로 재편하는 대오스트리아 합중국이라는 구상까지 나올 정도였지만, 하필 해당 구상을 내놓은 인물이 암살당하고, 그 여파로 일어난 전쟁으로 인해 제국이 해체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 교황령 - 교황: 초기 교황들은 주교들 가운데 서열 1위라는 명예만을 가진 존재였으나, 교황령이라는 독자적인 영토를 확보하고 신성 로마 황제와의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서방 세계의 모든 세속군주 위에 군림하는 보편군주로까지 위상이 높아졌다. 가톨릭이라는 명칭 자체가 라틴어로 보편적(Catholica)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전성기에는 유럽 각국의 갈등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권위가 추락하기 시작했고, 아비뇽 유수를 통해 황제도 아닌 왕의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굴욕을 겪었고, 사코 디 로마 이후 이탈리아 밖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다만 이후에도 서방 국가들은 명목상으로나마 교황을 황제와 대등한 의전 서열을 가진 군주로 대우했다. 이탈리아 통일로 교황령을 상실하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정교분리가 실현된 이후에는 군주보다는 성직자로서 가톨릭의 수장으로 인정받고 있다.[12]
-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튀르크계 국가였으나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 발전시켜 다양한 혈통을 가진 인재들을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에 등용했다. 또한 비무슬림들은 무슬림들처럼 정계에서 출세할 수는 없었지만 고유의 종교와 관습을 인정받았고,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뿐이지 상업이나 농업 등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13]. 또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정교회), 최고 랍비(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의 수장들을 임명하며 종교를 초월한 군주로 군림했다.
2.3. 불교 및 힌두교 문화권
2.4. 중동 · 남아시아 · 아프리카
- 왕중왕
- 이란계 국가의 샤한샤
- 남아시아의 마하라자디라자: 왕중왕이 남아시아에서 현지화되면서 탄생한 칭호
- 에티오피아 제국 - 느구서 너거스트: 왕중왕을 현지화한 칭호를 사용하며 암하라인, 티그리냐인, 오로모인 등 다양한 민족을 통치했다.
- 칼리파: 민족을 초월하여 전세계 무슬림들의 수장 역할을 하는 군주의 칭호
3. 관련 문서
[1] 로마 제국(4세기 이후) - 기독교, 이슬람 제국 - 이슬람 등[2] 당장 나무위키 상에서 로마 제국~동로마 제국을 보편 제국의 모델로 삼지만 민족 및 종교 탄압, 강제이주, 제노사이드, 전쟁범죄, 노예화, 착취 같은 근현대 식민제국의 어두운 면이 앞서 로마 내에서 나타났다. 근현대 이전의 일이라 정치적, 이념적으로 문제되기 않기에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3]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아랍인으로서 황제에 오른 필리푸스 아라부스. 군인 황제 시대에 무력으로 제위를 얻은 인물이기는 하나, 그 시대의 황제들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의 지지를 받아야 황제가 될 수 있었으므로 결국 그가 황제가 되는 데에는 아랍인이라는 혈통이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는 증거이다.[4] 연결을 주장한 경우는 자신들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이니 연결점의 필요를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이나 브라질 제국처럼 무시한 경우도 있고 유럽 외 타 대륙의 황제 자리를 차지한 경우는 영국 - 인도 황제, 이탈리아 - 에티오피아 황제의 예시가 있다.[5]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를 기증해서, 교황에게 서방 황제를 추대할 권리가 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장(기진장)'[6] 구성국 가운데 하나가 이탈리아 왕국이었고, 15세기까지 신성 로마 황제들은 황제 대관식을 하기에 앞서 이탈리아 국왕 대관식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7] 황제 선거에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 선제후 중 하나가 체코인의 나라 보헤미아를 다스리는 왕이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15세기 이후 제위를 독점하는 원동력이 된 칭호 역시 '보헤미아 국왕'이었다.[8] 황제를 칭하는 근거 자체가 교황의 인정이었기에 단순한 국교가 아니라, 제국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9] 물론 사회적 변화란 게 대체로 그렇듯 그 이후에도 종교 전쟁은 있었고, 근대 국제법 질서 역시 그 이전부터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 질서의 상징과도 같았던 신성 로마 제국이 유명무실화된 베스트팔렌 조약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는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중세의 종결점으로 잡는 것과 양상이 유사하다.[10]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출범시킨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의 누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결혼했고, 러요시 2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 마리아와 결혼했다.[11] 러시아 제국 - 러시아인, 프랑스 제1제국 - 프랑스인, 독일 제국 - 독일인[12] 다만 바티칸에 한해서는 여전히 군주로 인정받는다.[13] 가령 중세~근대 기독교 국가 대부분에서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으로 악명을 떨쳤던 것은, 농사를 짓는 것도 금지되었고 상공업 분야에서도 제한이 빡빡했으므로 결국 고리대금업이 아니고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었다. 반면 오스만 제국에서는 유대인이라도 얼마든지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A] 이 당시에는 아직 아랍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서서 지배하는 체제였다.[A] [16] 남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했지만, 종교적, 문화적으로는 마그레브와 더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