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콘스탄티누스 대제. |
1. 개요
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칙령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또는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작성해주었다는 칙령서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8세기 즈음에 위조되어 등장한 위서로, 교황과 황제의 대립이 한창 격화되던 시기에 교황의 우위를 주장하는 주요 근거로 사용되었으나 르네상스 시기에 그 정체가 밝혀지며 효력을 상실했다.
2. 상세
문서의 내용은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이 제국의 동방을 관할하고 서방은 실베스테르 1세와 그 후임들에게 맡긴다는(기증한다는) 내용이다. 문서에는 문둥병을 낫게 해주고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에게 서방 제국을 기증했다고 되어 있다.8세기 중엽 교황 스테파노 2세와 프랑크 왕국의 궁재 피피누스 3세와의 킬데리크 3세 축출을 위한 회담이 있었는데, 스테파노 2세는 피피누스 3세의 찬탈을 지지해주는 대가로 교황령을 받으며 명목상 교황의 우위를 확인받았다. 이때 이 회담의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다.
이 문서의 내용을 근거로, 중세 내내 교황은 서방과 동방 황제로 대표되는 세속권력보다 자신의 종교권력이 더 위에 있음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서방 황제는 누구라도 교황보다 우위에 설 수 없으며, 철저하게 교황에 의해 옹립되거나 교체되는, 즉 교황의 수하에 불과한 자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작성했다고 하니, 로마 황제를 칭하는 프랑크 왕,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이 문서의 효력을 의심할 수 없었고, 의심해서도 안 됐다[1].
하드리아노 4세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방 세계와 그에 달린 제관은 모두 교황의 소유이고, 단지 세속 통치자인 황제에게 대리자로서 위임한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서는 서방 제국에 대한 로마 교회의 우위를 지지해주는 증거였지만, 로마 교회가 아닌 동방 정교회에서도 성직자들은 동방 황제와 이권이 충돌할 때마다 이 문서를 내밀었다. 즉 서방과 동방을 막론하고 중세 내내 종교권력이 세속권력의 위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문서였던 것이다.
중세 말까지도 문서의 효력은 의심받지 않았는데, 심지어는 교황에 적대적인, 비판적인 사람들조차도 진위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고 대신 콘스탄티누스를 비판했다. 특히 단테는 신곡에서 이처럼 말하기도 했다.
"아! 콘스탄티누스여, 진정으로 큰 악은 그대의 개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가장 부유한 사제가 그대에게서 받은 그 선물에게서 나왔도다!"
《신곡:지옥편》xix. 115~117쪽
《신곡:지옥편》xix. 115~117쪽
하여간 이렇게 중세 말 교황청과 종교계의 부패로 혼란이 극에 달할 무렵에는 이 문서를 작성해주었다는 콘스탄티누스의 행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1. 실체
그러나 위서의 실체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르네상스 시기가 도래하고 많은 인문학자들의 고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자, 차츰 이 문서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결국 로렌초 발라에 의해 이 문서가 위서였다는 게 밝혀지며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15세기, 발라는 이 문서에 쓰인 라틴어가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사용했을 4세기 경의 라틴어와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문서를 쓴 사람은 최대한 고전 라틴어 문체를 모방하며 황제의 칙령인 것처럼 만들어 놓았으나 발라는 몇 군데 이상한 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를 들어, 4세기 당시 쓰이지 않던 관직명인 'satrapes'가 문서 곳곳에 쓰였고, '깃발'이라는 의미로 'banda'라는 단어가 쓰였으나 이 단어는 4세기 이후에 프랑크어에서 유래한, 중세 라틴어에서 쓰이는 표현이다. 또한 문서가 쓰일 때의 시대적 배경을 분석하기도 하였는데, 이 문서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비잔티아 속주에서 최고의 장소에 도시를 세우고 그곳에 제국을 세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발라는 '당대에 비잔티아라는 속주는 없었고, 비잔티움이라는 작은 마을만 있었으며, 비잔티움은 그 안에서 최고의 장소를 찾겠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좁았다.'라고 말하면서 이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것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 외에도 발라는 시제의 불일치와 같은 문체의 엉성함을 지적했다.
사실 그때에도 좀만 신경써서 라틴어에 능한 지식인을 동원한다면 진짜로 로마 시대에 쓰인 라틴어를 재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문서를 위조한 사람이 생각이 짧았는지 대충 쓰고도 이런 식으로 밝혀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실제로 문서는 700년 가까이 진실을 감추는 데 성공했으니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이 맞은 셈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발라의 폭로에 분노해 그를 이단으로 판결하고 화형시키려 하였으며 그의 책도 금서로 지정하였으나, 교황청의 입장이 극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다행히 탄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에우제니오 4세의 후임인 니콜라오 5세가 발라를 사면한 데다, 오히려 그를 초청하여 교황청의 수사학 교수로 임용하는 대인배적 행보를 보인 것. 금서 조치 또한 한 세기쯤 후에 해제되었다.
해당 문서를 위조한 주체가 어디인지는 추측이 갈린다. 피피누스 3세가 교황청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 스테파노 2세의 후임자인 바오로 1세가 만들었다는 설 등이 있다.
[1] 동로마 황제의 경우 로마에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던 5~7세기에는 이런 문서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황제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애당초 교황은 황제가 임명하는 자리였다. 이 시기에는 동로마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교황도 맘대로 축출하고 갈아치우곤 했는데, 이후 이 문서가 나타나고 동로마 제국도 이탈리아를 위시한 서방 영토를 잃어버리며 영향력을 상실하자 둘은 점차 각자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