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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white>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전통주의자 팔랑헤 | |
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1]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 Sindicalista | |
등록 약칭 | <colbgcolor=#fff,#191919>FET y de las JONS |
창당일 | 1937년 4월 19일 |
해산일 | 1977년 4월 13일 |
이념 | 프랑코주의[2][3] |
스펙트럼 | 극우 |
지도자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종교 | 전통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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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합 팔랑헤(공식 명칭: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에스파냐 전통주의자 팔랑헤)는 프랑코 정권의 극우 정당이다.2. 역사
통합 이전은 팔랑헤 문서 참고.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들이 전통주의자라니 이름이 왠지 굉장히 복잡하고 근본없어 보이는데,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실 프랑코 본인보단 이런 정치공작은 인척이자 측근인 세라노 수녜르가 주도했지만) 자신에 협력한 반공 보수성향 파벌들을 한번 싸그리 교통정리하고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모아 창설했기 때문이다. 프랑코는 사상놀음 자체를 혐오했고, 반공 보수 우익 성향일 뿐 그 성향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아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았다. 프랑코 휘하에는 서로 가치관이 충돌하기까지 하는 전쟁 이전 CEDA 출신 부르주아 우파, 혁명적 파시스트 팔랑헤, 전통 교권주의 카를로스파들이 난립해 있었고 이를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독자적 이데올로기가 뚜렷한 각 정파의 중심 인물을 모두 숙청하고 무력화한 이후 단일 정당 조직에 묶었다. 그리고 본인이 의도한 대로 결국 지도자의 훈령 없이는 아무런 독자적인 정치적 행동도 할수 없는 독재자 개인의 수족으로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런 일방적 통합에 대해서는 국민진영 내에서 특히 팔랑헤 좌파와 카를로스파를 중심으로 당연히 반발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팔랑헤 좌파의 경우 에디야 같은 선을 세게 넘긴 이는 숙청해버렸고 나머지는 외국에 대사로 보내거나 지방에 발령하는 식으로 국내 정치의 영향력을 지워버렸다.[4] 카를로스파는 친프랑코와 반프랑코로 분열되었는데 소수의 친프랑코계열 카를로스파만이 정치적 안배 과정에서 법무대신, 국회의장, 국회의원[5]같은 정권의 요직을 차지했다. 정작 그 팔 콘데 같은 이들도 간간이 정권에 개기면서 감옥을 수차례 오가기도 했고 주류의 반프랑코 카를로스파는 나바라를 중심으로 한 서북부 구석에 박혀 소외되었다. 그리고 이들 주류 카를로스파들은 청색사단 파병 반대[6] 운동을 시작으로 선만 안 넘길 수준으로 정권에 삐딱선을 타더니 세대가 바뀌어 카를로스 우고 대에 이르러서는 이들 중 적어도 절반이 민주주의에도 우호적으로 변하고 좌파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알폰소 계열 왕당파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반추축국이 된 영국과 연결되어 있고, 특히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7] 때문에 잠재적인 폭탄이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자기 직속 군대 부하였던 공군의 킨델란이 이런 식으로 왕당파와도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온한 소문이 터지자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통합 팔랑헤당은 프랑코가 죽은 이후인 1976년 6월까지 스페인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지만 스페인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아돌포 수아레스 내각에 의해 1977년 4월 13일 해산된다. 1976년 10월에 창당된 신 팔랑헤[8]를 비롯해 팔랑헤의 후신을 자처하는 극우 정당들이 아직 남아 있지만 과거와 달리 존재감이 없다시피한 수준이다. 팔랑헤당의 지지기반과 마누엘 프라가 이리바르네 등 온건파 세력은 이후 이합집산을 통해 인민당으로 이어졌으며, 팔랑혜당 지지층은 민주화 직후로 주로 민주중도연맹을 지지했다가 1980년대에 인민당으로 넘어갔다.
3. 관련 문서
[1] 원래는 없었으나 프랑코가 카를리스트들과 왕당파, 기타 보수 세력들을 통합시키면서 추가되었다[2] 논쟁의 여지가 있긴 한데, 1945년 이전에는 파시스트에 더 가까웠고 1945년 이후에는 권위주의적 초보수주의자에 더 가깝다.[3] 학자에 따라 프랑코 집권기 자체 내지 프랑코 집권기 전체를 파시즘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반대로 프랑코 집권기 자체가 파시스트가 아닌 초보수주의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4] 예외로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친구인 팔랑헤 좌파인 후안 야구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가 몇 주 옥살이도 했으면서 공군대신도 지냈고 원수에 추서될 정도로 잘 나갔는데 이는 군대 내에서 프랑코의 오른팔격으로 활동한데다 국민진영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던 데 기인한다.[5] 프랑코 정권 하에서도 자문 성격의 코르테스가 있기는 했다.[6] 당장 카를로스파의 정당한 국왕인 하비에르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벨기에군 소속으로 독일군에 맞서 싸웠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참여했다가 목숨만 간신히 건진채 나치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7] 자유주의적인 성향과 왕정복고를 위해 아직 스페인 제도권 내에 있는 자기 지지자들을 테이블에 내걸고 똑같이 고향집 밥이 그리운 제2공화국 망명정부와 협상도 여러 번 했다. 그 이전에 히틀러건 아이젠하워건 가리지 않고 프랑코를 몰아내기 위해 여러 곳에 줄을 대기도 했고.[8] 다만 이 팔랑헤는 프랑코가 강제로 통합한 이후의 팔랑헤가 아니라 리베라가 만든 초기 팔랑헤의 후신을 자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