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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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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루돌프 회스
Rudolf Höß
파일:루돌프 회스.jpg
1944년, 아우슈비츠 근교 휴양시설 솔라휘테에서의 회스
본명 루돌프 프란츠 페르디난트 회스
Rudolf Franz Ferdinand Höß
출생 1901년 11월 25일
바덴 대공국 바덴바덴
사망 1947년 4월 16일 (향년 45세)
폴란드 인민 공화국 오시비엥침
국적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정당
[1]
소속 나치 친위대 해골부대[2] (1934 ~ 1945년)
직책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부소장
(1939년 12월)
아우슈비츠 소장
(1939년 12월 ~ 1944년 7월 29일)
최종 계급 상급돌격대지도자[3] (친위대)
가족 배우자 헤트비히 헨젤(1929년 8월 결혼)
자녀 5명
손자 라이너 회스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제1차 세계 대전2.3. 정치깡패 활동과 살인2.4. SS와 수용소 근무2.5.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2.6. 회스 작전(Aktion Höss)2.7. 사생활2.8. 체포 및 재판2.9. 사형 집행2.10. 가족들의 후일담
3. 매체에서
3.1. 영화

[clearfix]

1. 개요

파일:_methode_sundaytimes_prod_web_bin_e86d3138-3169-11ea-81b4-81217bc4782e.jpg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중령이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의 책임자이며, 덤으로 나치가 그다지 세력이 크지 않았던 시절에도 정치깡패로 일하며 무고한 사람에 대한 살인까지 저지른 적이 있던 악인 중의 악인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자 '최후의 나치'로도 유명한 루돌프 헤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01년 11월 25일 바덴바덴의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1남 2녀[4]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근무한 전직 육군 장교였으며, 커피 사업을 운영했으며, 신앙심이 극도로 깊어 권위적인 사람이자 맹신적인 가톨릭교도였다. 자식들에게 군대와 같은 규율을 강요하며 죄, 죄책감, 회개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모든 어른을 존경하고 공경해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가르쳤고, 이런 환경 속에서 어린 회스는 도덕적 삶에서 의무의 중심 역할에 대한 거의 광적인 믿음을 가지고 자랐다. 이 영향으로 그는 평생 동안 윗사람들에게 무조건 공손했고, 주어진 명령에 조건 없이 순종했다.

어릴 때 일찍 성직자의 길을 걷다가 접었다.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 이유는 회스의 회고록에 따르면 13세 때 김나지움에서 친구를 계단에서 밀어 다치게 한 일을 신부에게 고백했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회스에게 벌을 준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이후 회스는 고해 신부가 고해성사를 자기 아버지에게 일렀다고 생각하고 종교라는 존재에 대해 큰 배신감을 느껴 신부가 되기로 한 마음을 접었다. 그 뒤 성직자가 되기를 요구하던 아버지마저 회스가 14세 때 사망하면서 회스는 교회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차 대전이 벌어지자 아직 미성년자였던 회스는 만하임에서 적십자 보조원으로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했다. 여기서 본인도 부상병의 고통에 충격을 받았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는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때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연히 미성년자가 전쟁터에 가는 것에 회스의 어머니는 물론 주변 어른들도 모조리 반대했고, 병영기차에 몰래 탔다가 헌병에게 들켜서 집으로 보내진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다 결국 1916년 15세의 나이에 한 육군 기병대위 덕에 육군 제21용기병연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회스는 중동에 배치되어 이스탄불과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싸웠다.[5] 1917년에 회스의 어머니는 죽었지만 회스는 그럭저럭 생존해서 17세의 나이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부사관이 된다. 그렇게 기병 소대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다마스쿠스에서 종전을 맞고, 독일에 돌아왔다.

2.3. 정치깡패 활동과 살인

독일에 돌아온 직후 회스는 큰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가출, 이후 북 독일에서 자신들을 의용군으로 부르던 정치 깡패집단에서 활동했다. 회스가 1936년 6월 19일에 다하우 SS 인사부에 제출한 이력서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프로이센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로스바흐(Roßbach)'라는 이름의 의용군에 들어가 이후 메클렌부르크, 루르, 상실레시아 등지를 돌아다니며 국경경비 및 의용활동이라 자칭하면서 조폭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1922년 11월 뮌헨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감회를 받고는 히틀러가 속한 군소정당인 나치당에 입당 번호 3240번으로 가입하고는 가톨릭 신앙을 포기했다. 군소정당 시절 나치당은 일부러 당원을 많아보이게 하려고 500번 부터 당번호를 부여했으므로 회스는 2740번 째 가입자인 셈이다.
파일:Shlgt.jpg
프랑스군에 의해 처형당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
파일:Fxdf-2vXoAE4Nw_.jpg
회스에 의해 살해당한 발터 카도
회스는 조폭짓을 하면서 자칭 비밀재판(Vehmgericht)이라 불리는 린치 활동을 많이 벌였다. 그러던 중 1923년 5월 31일에 회스와 그의 부하들은 발터 카도(Walther Kadow, 1900–1923)라는 23세의 학교 교사를 루르 지방의 철도를 폭파하다가 동년 5월 26일에 처형당한 알베르트 레오 슐라게터(Albert Leo Schlageter, 1894–1923)[6]를 프랑스측에 밀고했다는 혐의를 적용하여 파르힘(Parchim) 시의 한 식당에서 술에 취하게 하고는 인근의 숲으로 끌고간 후 비밀재판을 열고 독일의 배반자라는 이유를 붙여서 5명이 무자비하게 구타하고는 강제로 눕혀 주머니칼로 목을 그은 후 머리에 두 발의 총을 쏴 처형했다. 참고로 카도의 머리에 총을 쏜 사람은 회스의 부하인 카를 차벨(Karl Zabel)과 회스 본인이었다. 이렇게 살해된 카도의 시신은 다음날 회스의 지시로 숲에 암매장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후 공범 중 한 명이 지역 신문에 자수하면서 회스 일당은 1923년 6월 28일 체포되었으나, 그리고 재판 과정중 뮌헨 폭동으로 자신은 해방되거나 가벼운 형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것 때문인지 1924년 3월 중순에 사람을 살해해놓고는 징역 10년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으나, 그나마도 1928년 7월 14일에 대사면이 발표되면서 겨우 5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그리고 마르틴 보어만 역시 살인에 가담한 혐의가 적용되었는데도 징역 1년형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7]. 마르틴 보어만은 나치의 집권 시점이던 1938년 9월에 이 사건으로 투옥된 것에 대해 '피의 훈장[8]'을 수여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회스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살인 사건의 주범이 아니었지만 슐라게터의 우정과 동료가 무죄로 풀려나게 해주려고 의리있게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고 주장했으나, 정작 그 다음 문단에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 피해자를 살해했다고 언급하며 자신이 살인자임을 스스로 인정해버렸다.

참고로 카도에게 적용된 혐의는 누명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실제로 살인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카도가 슐라게터를 밀고했다고 의심했을 뿐이지 이 밀고와 구체적으로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며, 이 사건에 참여한 마르틴 보어만은 이전에 카도우에게 30,000RM를 선급금으로 빌려준 적이 있었기에 카도우에게 자신에게 진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자 오랜만에 돌아온 카도우를 보고 보어만이 카도우가 자신의 빚을 갚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없으며 '구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이를 간단히 정리하면 고작 자신이 돈을 빌려준 사람이 돈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사람에게 반역자 누명을 뒤집어씌운 뒤 목숨을 앗아간 셈이다.

2.4. SS와 수용소 근무

출소한 회스는 농업지원청년운동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고, 이후 1929년 8월에 헤트비히 헨젤(Hedwig Hensel, 1908–1989)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하고 2남 3녀를 가지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1934년 4월 1일에 회스는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으로 정식 SS 돌격대원이 되었다. 이 인연으로 회스는 힘러를 너무나 숭배한 나머지 힘러가 말하는 모든 것을 '복음'이라 여기고는 그의 사무실에 아돌프 히틀러의 초상화보다 힘러의 초상화를 더 높이 걸 정도였다. 이후 회스는 1934년 11월부터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토텐코프 연대(Totenkopfverbände)[9]에서 근무했다. 그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장이었던 테오도어 아이케를 만나게 되었고 아이케는 회스에게 수용소 운영에 관한 노하우를 전수했다. 아이케는 회스를 비롯한 '다하우 학교'의 친위대원들 앞에서 이렇게 연설하기도 했다. "국가의 적들을 동정하는 놈은 SS에 있을 가치가 없으며, 그러한 나약한 자들은 우리 부대가 아닌 수도원에나 보내야 한다. 우리 부대는 용서없이 명령만을 수행할 뿐이며, 해골훈장은 멋으로 달린 게 아니다."

회스 본인은 회고록에서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반인륜적 처벌을 혐오하고 피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이케를 뒤 이은 수용소장이던 로리츠는 힘러에게 회스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그 덕인지 SS 병사였던 회스는 단 2년만에 SS 장교 계급인 하급돌격지도자(Untersturmführer, 소위)까지 진급했다. 반인륜 범죄를 본인이 어떻게든 회피했다고 보기에는 이 진급은 설명이 되지 않고 적극적인 가담자로밖엔 안 보인다.
파일:August_Dickmann_(1910–1939).png
회스에 의해 처형당한 아우구스트 디크만
이후 1938년 8월 1일에 회스는 SS 대위로 승진하고는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부소장으로 근무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인 1939년에는 무장친위대에 합류했으며,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였던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아우구스트 디크만(August Dickmann, 1910–1939)을 손수 총살했다.

회스는 '무장친위대로서의 능력'이 탁월했다고 하는데, 그 일례로 1940년 1월 18일에 회스는 작업에 배정되지 않은 모든 수감자들에게 섭씨 영하 26도에 이르는 극한의 환경에 장갑과 코트도 없이 밖에 서 있으라고 명령했고, 비교적 나이가 많은 수감자들이 얼어붙은 수감자들 중 일부를 의무실로 끌고 가자 회스는 의무실 문을 닫으라 명령하여 그 결과 단 하루 만에 145명이 엄청난 추위에 죽어나갔다.

2.5.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

파일:Heinrich_Himmler,_IG_Farben_Auschwitz_plant,_July_1942.jpg
1942년, 모노비츠(아우슈비츠 III)의 이게파르벤 건설 현장을 시찰하는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국가지도자(앞 줄 맨 왼쪽)를 안내하는 루돌프 회스 수용소장(앞 줄 맨 오른쪽)[10]
기술적으로 (유대인 학살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더 많은 수를 박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인 자체가 가장 적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30분이면 2,000개의 머리를 처리할 수 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불태우기였습니다. 살인은 쉬웠습니다. 그들을 방으로 몰아넣기 위해 경비원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샤워를 기대하고 들어갔고 물 대신 독가스를 켰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루돌프 회스
회스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소장으로 악명이 높은데, 사실 회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창설에도 크게 개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폴란드 서부에 강제 수용소 설립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파견된 회스는 '호의적인 보고'를 올렸고, 이로 인해 1940년 5월 4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창설되었다. 물론 회스는 이 수용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처음에 아우슈비츠는 소련과 폴란드의 포로들을 수용하는 곳이었으나, 1941년 6월에 회스의 우상이던 힘러가 회스를 소환하여 '최종 해결책'에 대한 명령을 내린 후 그로부터 4주 뒤에 아돌프 아이히만으로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든 작전 명령을 받게 되면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홀로코스트와 사실상의 동의어가 되었다.

회스는 이 수용소에서 치클론 B를 사용하여 최소 100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거나 요제프 멩겔레 같은 의사들을 동원해 잔혹하게 생체실험하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목숨을 앗아갔다. 회스는 수감자 한 명이 탈출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한 감방에서 임의의 수감자 10명을 굶어죽게 한 적이 여러 번이나 있었으며, 덤으로 가스실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가스 처리 실험을 가장한 유대인 처형을 자행했다.

최초의 치클론 B를 이용한 가스 살해도 아우슈비츠에서 벌어졌는데 1941년 9월 3일 아우슈비츠 1번 수용소 11번 구역에서 회스 수용소장 등이 참관한 가운데 600명의 소련 포로와 250명의 민간인 수용자를 대상으로 치클론 B를 투약했다. 이 실험에 대해 회스는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총살에 관여할 때 군중이나 여자들과 아이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참혹함과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나는 히틀러나 국가 보안본부의 명령에 의한 인질 처형이나 집단적 총살에는 진절머리가 나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보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으로는 희생자들도 최후의 순간까지 친절하게 돌보아줄 수도 있겠고 해서[11] 나로서는 마음이 편했다.
그 후 1943년 11월 10일에 아우슈비츠의 소장은 비교적 온건파였던 아르투어 리베헨셸(Arthur Liebehenschel, 1901–1948)로 교체되었는데[12], 회스는 그동안 강제수용소를 운영하던 SS-WVHA에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의 관리를 담당하는 Amt D.의 수장으로 일하다가 1944년 5월 8일에 다시 아우슈비츠 소장으로 복귀했다.

2.6. 회스 작전(Aktion Höss)

파일:Selection_on_the_ramp_at_Auschwitz-Birkenau,_1944_(Auschwitz_Album)_1a-LR.jpg
1944년, '회스 작전'에 의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도착한 헝가리계 유대인들
1944년 당시 헝가리는 호르티 미클로시 섭정이 유대인 보호정책을 실시중이었다. 미클로시가 소련과 단독 강화를 준비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히틀러는 미클로시를 판처파우스트 작전을 통해 쫒아낸 뒤, 헝가리 파시스트 정당인 화살십자당과 그 수반인 살러시 페렌츠를 괴뢰정권으로 옹립한다. 헝가리로 도주한 유대인 수십 만명은 더 이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국가보안본부장은 헝가리 유대인 문제 '처리'의 준비를 지시했고 게슈타포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곧바로 유대인 이송 준비 계획을 착수했다. 전황이 악화된 가운데에서도 유대인 수송을 위한 화물열차의 준비는 차질이 없었다.[13]

1944년 5월, 아우슈비츠로 돌아오자마자 회스는 아우슈비츠1 수용소장 직위를 리하르트 베어에게 맡긴 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를 총괄하는 최고 사령관이 됨과 동시에 '회스 작전'의 총책임자가 되었고 회스의 능력을 신뢰하던 아돌프 히틀러는 이를 승인했다. 회스는 아돌프 아이히만과의 협력을 통해 43만 명의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냈고, 이 때문에 한동안 매일 1만 명의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갔으며, 심지어는 가스실과 화장장 공간이 부족하자 아예 구덩이를 미리 파두고 거기에 불을 피운 뒤 이 근처에 처형할 유대인들을 인도하고는 SS 대원들로 하여금 총을 쏘게 하는 기괴한 방식으로 처형하기까지 했다. 시체 처리를 담당하는 수감자들인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들로는 부족해서 일반 제소자들까지 시체 처리 임무에 투입될 정도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이미 상당수의 강제 수용소들이 해방되거나 폐쇄된 상태였고 다른 수용소에서 이감된 제소자들까지 몰려들면서 아우슈비츠는 그야말로 포화 상태였다.

친위대 내에서도 논란이 많은 작전이었다. '비교적 온건한' 친위대는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자는 의견을 제안했지만 회스는 이 제안들을 전부 묵살하고 모조리 가스실에 넣어버렸다. 헝가리 SS 사령부의 경제부장이었던 쿠르트 베허(Kurt Becher) SS 대령은 회스 작전을 격렬히 반대하면서[14] 독자적으로 협상을 강행해 중립국 스위스로 헝가리계 유대인 1만 여명을 석방시키는 대가로 금품을 갈취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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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7월, 아우슈비츠1 수용소장으로 새로 부임한 리하르트 베어(맨 왼쪽)와 논의하는 루돌프 회스(맨 오른쪽)[16]
결국 회스는 SS 내에서도 너무 막나갔다고 찍혔고 1944년 11월,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재배치된다. 사실상 좌천성의 인사 조치였다. 회스는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간 뒤 이 곳에서도 2000명 이상의 여성 수감자들을 가스실로 보내는 작업을 총괄했다.[17]

2.7.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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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회스와 가족
이런 짓을 벌이면서 자기 가족한테는 잘했다고 한다. 저녁이나 주말 오후면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등. 여력이 닿으면 내내 집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과 놀아주고 시를 읽어주었다. 자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지 못한 걸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래놓고 참극이 벌어지는 수용소 바로 옆에 있는 집에 자식들을 살게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회스의 가족의 삶은 화목했고 패전 이전까지 고요하고 평화롭기 그지없게 지냈다.
루돌프 회스는 라이히의 범죄 작업을 가장 열정적으로 수행한 하수인들 중 하나다. 절대악을 저지른 이 사람, 아무도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가족에게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면서, 도덕적인 갈등 없이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중략)
그는 좋은 아버지로서 살도록 노력한 동시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확실히 죽어나가도록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수년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이중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성공한다.
타냐 크란스난스키, <나치의 아이들>
그렇다. 내 가족은 아우슈비츠에서 잘 살고 있었다. 내 아내, 그리고 내 아이들이 원했던 것은 모두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구김살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아내는 정원에 훌륭한 화단을 가지고 있었다. 억류자들이 내 처와 내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거나 혹은 주의를 끌기 위하여 모든 것을 잘 해주었다.
루돌프 회스 본인, <헤스의 고백록>[18]
부모로서 어땠는지와는 별개로 사생활은 엉망이었는지 1942년에는 아내가 집을 비우는 동안 엘레오노레 호디스(Eleonore Hodys, 1903–1964)라는 아우슈비츠 수감자[19]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는데, 이를 안 회스의 아내는 그녀를 쫓아내고 감금했지만, 회스는 밤마다 그녀의 감방을 찾아가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이 와중에 호디스가 임신까지 하자 회스는 호디스를 일본 제국이 쓰던 벽관과 유사한 감방에 가두고는 풀어준 후 강제로 낙태 수술을 시켰으나, 의외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이 스캔들 때문에 회스는 1943년에 아우슈비츠 사령부에서 소환되어 나치 당국에서 조사까지 거쳤으나,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되었다. 이 엉망진창이었던 사생활이 다뤄지는 창작물로는 마틴 에이미스의 소설로 조나단 글레이저에 의해 영화화된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있다.

2.8. 체포 및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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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폴란드 최고 국가 재판소에서 재판 중인 루돌프 회스
제2차 세계 대전 말엽 회스는 힘러로부터 '독일 해군 복장을 입고 탈출하라'는 조언을 듣고는 아우슈비츠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시점(1월 27일) 이전인 1945년 1월 18일에 탈출하여 1년 넘게 체포를 피하며 '프란츠 랑(Franz Lang)'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정원사로 일했다.

그러나 영국 정보부가 회스의 아내에게 회스의 소재를 밝히지 않으면 아들을 소련에 포로로 보내겠다고 협박했고,[20] 결국 아내가 회스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회스는 1946년 3월 11일에 영국 정보부에 붙잡히고 말았다. 회스는 당연히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하필 끼고 있던 결혼반지에 회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단박에 들통나버렸다. 체포 과정에서 회스는 청산가리 알약을 깨물려고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후 회스는 영국인 체포자들에게 채찍으로 폭행을 당해 회스 본인이 '국제군사재판에 수감된 것은 이전에 가본 곳과 비교할 때 마치 온천에 머무는 것과 같았습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물론 이는 오만 악행들에 대한 인과응보였지만 말이다.

이후 폴란드 최고국가법원에 의해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반인륜 범죄를 행한 전범으로 1946년 4월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동년 5월 25일에는 폴란드 당국에 넘겨지며 폴란드 최고 국가 재판소로부터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1947년 4월 2일에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다. 수감 기간 동안 회스는 폴란드 당국의 요청에 따라 '아우슈비츠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자서전'라는 회고록을 작성하게 된다.

재판 과정에서 '당신 손에 죽은 유대인들이 정말 죽어 마땅했나?'라는 질문에 그것은 자신이 답할 내용이 아니라고 변론하였으며 아사 등 질병으로 사망한 1백만 명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서 350만 명이 아니라 250만 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등 발뺌하였으나, 그랬던 그도 어지간히도 죽는게 두렵거나 지옥에 가기는 싫었는지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고는 1947년 4월 10일에 고해성사를 하는 등 죄를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고, 그 이틀 뒤에는 주 검사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의 양심은 나로 하여금 다음 선언을 하도록 강요합니다. 감방의 고독 속에서 나는 인류에게 중대한 죄를 지었다는 쓰라린 깨달음에 이르렀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사령관으로서 나는 인간 파괴를 위한 '제3제국'의 잔인한 계획의 일부를 수행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인류에게 끔찍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나는 특히 폴란드 국민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목숨으로 갚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언젠가 제가 한 일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폴란드 감옥에서 나는 인간의 친절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했습니다.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예상할 수 없었던 인도적 대우를 경험했고, 그것이 나를 깊이 부끄럽게 했습니다.

2.9. 사형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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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직전의 루돌프 회스
수용소를 인수한 연합군과 폴란드 인민공화국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의 요구 및 학살자에 대한 본보기로 아우슈비츠에 오직 회스만을 위해 특별 제작한 특설 교수대를 설치하였고, 회스는 1947년 4월 16일 자신의 옛 사무실이 내다보이는 이 현수식 교수대[21]에서 향년 45세를 일기로 공개처형을 당해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회스는 처형될 때 아무 말도 없이 매우 담담하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그 교수대는 현재에도 남아있다. 관련 기사

2.10. 가족들의 후일담[22]

전쟁이 끝나고 나서 처음에 그녀는 아버지가 한 일을 부정했고, 이어서는 아우슈비츠는 아버지의 생각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었다는 걸 강조하며 그의 역할을 과소평가했다. '아버지는 힘러나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사람일 뿐'이라면서. 하딩이 '어떻게 아주 인자한 아버지가 아우슈비츠의 소장이 될 수 있었을까요?'라고 질문했을 때 자신도 전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걸 믿지 않았고, "만일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생존자들이 있을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이때 ‘아름다운 어린 시절’과 ‘다정했던 아빠’를 회상하며, 질서 강박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된다고 엄하게 꾸짖고, 함께 식사하고 정원에서 놀고 『헨젤과 그레텔』 동화를 읽어준 아빠였다고 회스를 기억했다. “우리에게 정말 잘해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였다고도 말했다. 아버지가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살인을 자백했다고 생각한다고. 침대 위에 늘 부모의 결혼식 사진을 걸어두고 살았다. 다만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과 가까운 사람도 공포스런 일을 범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그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으며 철저히 은거하다 2023년 10월 사망했고, 사망 사실도 사망 5개월 뒤에야 공개되었다. #
이런 일이 있어도 그는 할아버지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만일 제가 할아버지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안다면, 저는 그의 무덤에다 오줌을 눌 겁니다."라고 늘 반복해서 말했다.[25] 2014년에는 유럽에서 부상하는 극단주의 단체에 대항하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단체와 함께 투표 독려 영상을 만들었다. 그는 '현재 극우 조직들이 히틀러의 독일 때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고, 국가들이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도 얻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행보와는 별개로 라이너는 꾸준히 회스의 손자라는 위치를 이용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소유였던 재물들을 야드바셈[26]에 팔아먹어 이득을 취할 속셈으로 편지를 보내질 않나. 본인은 다른 나치의 아들이 보낸 편지이고, 이런 거래를 주도한 건 궁극적으로 야드바셈이라며 부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전과 13범에 달하는 범죄자이며, 2020년 8월에는 홀로코스트 관련 영화를 제작한다는 핑계로 17,000유로의 금전 사기를 쳐 징역 8개월을 선고받기까지 했다. 라이너의 형인 카이는 "저는 라이너가 더 이상 수백만 명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을 팔며 사람들을 속이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발언했다.

3. 매체에서

3.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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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의 모습


[1] 1922년 가입.[2] SS-Totenkopfverbände. 강제수용소의 경비와 운영을 담당하는 친위대 산하 부대이다. 해골부대 출신 인원들을 차출해서 창설한 무장친위대 부대가 바로 제3SS기갑사단이었다.[3] 국방군의 중령에 상응.[4] 여동생들의 이름은 마리아, 마르가레테.[5] 참고로 이때 회스는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목격했는데, 회고록에는 이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6] 당시 프랑스가 점령했던 루르 지역에서 민족주의자 그룹을 이끌고 사보타주를 벌여서(전술한 철도 폭파도 사보타주의 일종이었다.) 나치 등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으며, 제3제국 시대에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7] 다만 이 형량이 적용된 것은 보어만은 살인에 관여한 혐의가 가볍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8] Blutorden. 뮌헨 폭동을 기념하여 만든 훈장으로, 회스는 물론이고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힘러, 한스 프랑크처럼 쟁쟁한 전범들이 이 훈장을 수여받았다.[9] 토텐코프페르벤데, SS의 다하우 불법 사설 강제수용소 경비교도연대였다.[10] 가운데 SS대장은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이다.[11] 실제로 애초에 가스실 학살을 떠올린 계기가 초반에는 유대인 학살을 총살로 처리했더니 처형 작업에 동원된 장병들이 막대한 스트레스를 호소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만 희생자 입장에서 보면 가스 처형이 총살형보다 더 끔찍한 형벌인데, 총살형을 당한 사람은 즉사하지만 가스 처형은 공포와 아우성 속에서 15분 가량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죽기 때문이다. 당장 아우슈비츠 가스실 벽면의 손톱자국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회스의 말은 명백한 헛소리이다. 피해자들이 죽음의 과정에서 겪는 고통이 아니라 가해자들의 심적 고통을 덜어주는 것에 불과했다.[12] 물론 리베헨셸도 종전 후에 크라쿠프에서 재판을 받고는 반인도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1월 24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13] 1944년 초에는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인한 누적된 피해로 인해 수 많은 에이스들을 손실해서 아돌프 갈란트 전투기 총감이 “루프트바페의 붕괴가 코앞에 다가왔다.”라고 비명을 지를 지경이었고, 1944년 중순 동부전선에서는 곡창지대 우크라이나를 상실해버린 것에 이어 바그라티온 작전의 개시로 인해 동부전선의 핵심축인 중부집단군 45만 병력이 통째로 소멸되어버리고 벨라루스를 내주게 되었다. 동시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적으로 개시되어 서부전선까지 열려 독일은 양면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패망이 코앞에 와 총알 한 발이 더 급한 상황에서도 친위대는 유대인 학살에 몰두한 것이었다.[14] 쿠르트 베허 역시 폴란드 내 유대인 학살에 깊게 가담한 전쟁범죄자이다. 그 SS 전범조차 회스의 계획을 반대했다는 소리이다.[15] 재미있게도 쿠르트 베허는 이 행동덕에 수 많은 유대인 부호들과 법조인들의 비호를 받아 과거세탁에 대성공해 전후에 한 번도 처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심지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아이히만 재판에서도 피고인이 아닌 증인자격으로 소환되었다. 거기에다가 유대인 부호들과의 유대를 통해 얻은 재산을 통해 사업적으로도 대성공하고 서독에서도 잘나가는 갑부가 된 뒤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다. 이스라엘 정부하고도 여러 번 사업 계약을 따내기도 했다. 능력과 인간성이 별개인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16] 가운데에 있는 자는 카를 회커이다.[17] 눈치가 빨랐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회스 작전을 중단시키고 대신 동원된 열차를 부상병들을 호송시키는데 재배치시켜서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는데 성공한다. 다만 유대인들에게는 그 어떤 운송수단도 없이 수용소를 향해 도보로 걸어갈 것을 명령했고 그렇게 수 많은 유대인들이 '죽음의 행진'을 하다가 탈진해 죽어나갔다. 이 참상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에서 잘 묘사되어있다.[18] 사형당하기 전에 폴란드 당국의 명령으로 쓴 자서전. 2006년 한국에도 번역되었다.[19] 정확히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치범이었다.[20] 일설에 의하면 위의 바람 때문에 아내가 열받아서 직접 찾아갔다는 얘기도 있다.[21] 목을 단숨에 부러뜨리는게 아닌 질식사 형태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사형 방법이다. 비단 루돌프 뿐만 아니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나치 전범 모두 이런 방식으로 사형당했다.[22] 본 문단은 타냐 크라스난스키의 <나치의 아이들>을 참조하였다.[23] 놀랍게도 이 부부는 수정의 밤 당시 독일을 빠져나온 유대인들이었음에도 이런 대인배의 면모를 보인 것이다.[24] 전후 루돌프 회스를 붙잡는 데 성공한 독일의 유대인 한스 알렉산더.[25] 박승유가 할아버지 박제순에 대해 보인 반응과도 유사하다.[26] '이름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나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만들어진 기념관.[27] 한국으로 치면 전두환의 가족과 그의 손자 중 한 명인 전우원과 비슷하다.[28] 독일어명: Aus einem deutschen Leben, 영어명: Death Is My Tra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