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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22:21:22

전우원

<colbgcolor=#101429><colcolor=#ededed> 전우원
全祐院[1] | Chun Woowon
파일:전우원프로필1211.jpg
미국명 Jamie Chun (제이미 전)
출생 1996년 1월 23일 ([age(1996-01-23)]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완산 전씨 (完山 全氏) 25세손[2]
조부모 친할아버지 전두환, 친할머니 이순자
부모 아버지 전재용, 어머니 최정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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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어머니 박상아
형제자매 형 전우성 (1993년생)[4]
이복 여동생 전혜현 (2006년생), 전가현 (2008년생)[5]
신체 179cm[6]|82kg|O형|285mm[7]
학력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 (졸업)
연북중학교 (중퇴)
St. George's School[8] (고등부 / 졸업)
뉴욕 대학교 스턴 경영대학 (금융경제학 / 학사)
경력 나스미디어[9] 미디어채널팀 광고컨설팅 인턴
모겐에반투자은행 M&A 그룹 분석 인턴
아카디아인베스트먼트파트너스 투자관리 인턴
크레디트스위스 LFO&R 그룹 투자은행 인턴
EY 파르테논 재무 전략 및 실행 분야 과장[10]
종교 개신교 (예장통합)
병역 육군 병장 만기전역[11]
(육군사관학교 근무지원단 / 2015.8. ~ 2017.5.)
MBTI INF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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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어록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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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두환 전 대통령손자이자 전재용의 차남으로 미국의 前 금융인.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의 당사자이다.[15]

2. 생애

1996년 1월 23일 조부모의 집인 연희동에서 태어났으며 한 달 전쯤 이미 구속된 상태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11명의 손주들 중 유일하게 전우원의 탄생만 못 보았다. 할아버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그가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1997년 12월 22일[16]에 처음 만났는데 당시는 생후 23개월이었다. 당시 아버지 전재용일본으로 유학을 가 있었고 어머니 최정애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갔기 때문에 사실상 할머니 이순자가 직접 키웠다고 한다. 이순자의 주장이다.[17]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가 대학까지 졸업한 뒤[18] 뉴욕에 거주하다가 2023년 3월 28일 한국으로 귀국했다.

전두환의 인맥과 숨겨진 재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전씨 집안의 왕자로써 풍족하게 살았지만 본인의 주장에 의하면 전두환은 매우 가부장적인 인물이었고 가족 모두가 그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전우원 본인에게도 전두환은 자상한 할아버지이기보단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사로잡힌 무서운 할아버지였다고 기억하며 자식들이 전두환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유산을 타 가려고 전두환에게 아부하면서 효도 경쟁을 했다고 한다.[19] 남편의 외도와 끼인 위치[20] 불안감 때문인지 친모 최정애는 시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가급적이면 아들들을 전두환 부부에게 자주 데려가 애교를 떨게 했으며 가족여행이라도 가는 날에는 시부모가 탄 차에 아들들을 억지로 태웠다. 본인이 공개한 어린 시절 영상에서도 어머니 최정애가 전우원을 안고 시아버지 곁에 내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후 2023년 내내 폭로와 반성, 사죄행보를 이어가며 인터넷 방송으로 얼굴을 비추며 언론에 모습을 오르내리다 폭로를 중단하고 2023년 6월 이후 마약 투약 혐의에 대한 재판을 받으면서 잠적했다. 2024년 3월 마약 퇴치 운동을 벌이는 교회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262/0000017256?sid=102

2.1.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손자 폭로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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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약 투약 소동

2.2.1. 1심 서울중앙지방법원


'마약 투약 혐의' 전두환 손자 전우원, 10월 첫 재판

2023년 10월 31일 첫 공판에 참석했다. 검찰은 징역 3년을 구형했고 338만원 추징을 요청했다. #

전우원의 변호인은 전 씨가 자발적으로 미국에서 귀국해 범행을 자백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전우원 본인도 최후 진술을 통해 "마약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지 알았다"면서 "매일 반성하고 있고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말했다. 재판부엔 전우원을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가 1만명 넘게 접수됐다.

2023년 12월 22일 전우원이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마약 투약' 전우원 1심 집행유예…"자수 준할 정도 수사 협조"(종합) 그러나 1주일 뒤인 12월 29일 검찰이 사실오인·법리오해·양형부당을 이유로 항소하면서 2심을 치르게 됐다. #

2.2.2. 2심 서울고등법원


2024년 3월 20일 2심 첫 공판이 열렸다. 검찰은 1심에 이어 항소심에서도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전 씨의 변호인은 전우원이 초범이며 자진 귀국해 자백한 점, 깊이 반성하며 자발적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점, 사회적 유대관계가 공고하고 주위 사람들이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 검찰의 항소를 기각해달라고 요청했다. #

전우원은 최후진술을 통해 "절대로 해선 안되는 마약을 했고, 저의 잘못을 매일 깊이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다"며 "다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지속적인 치료를 통해 이 분야에서 꼭 사회에 도움이 되겠다"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기회를 주시고 용서해 달라"고 말했다. 이날 지난해 8월부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마약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고, 최근 마약 치유와 예방 관련 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생겼다고도 말했다. #

재판부는 2024년 4월 3일을 2심에서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유지해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2.3. 귀국


파일:전우원3.jpg

2.4. 5.18 민주화운동 관련 사죄



"죽어도 눈을 감고 죽을 수 있도록, 우리 광주 시민 앞에 진실을 밝혀주길 바라요. 항상 몸 조심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5·18 유가족, 전우원을 포옹하며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30]는 여기에 묻혀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
국립 5·18민주묘지 참배 방명록
"이 사과가 이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울적해지면 망월동에 방문해 영령들과 말씀도 나누고, 언제나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중략) 용서한다고 하면[31] 우리가 용서를 받아줄 수 있어 앞으로 꼭 이것(행보)을 이어 나가길 진실로 바라요."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 여사, 전우원을 포옹하며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저같이 추악한 죄인을, 죄인에게 이렇게 소중한 기회를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늦게 찾아뵙게 돼서, 더 일찍 사죄의 말씀을 드리지 못해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 분들 중에 많은 피해자분들과 유가족분들이 계시다는 걸 압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에 있음이 그 분들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숙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더 죄송하고, 소중한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여러분들에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살면서 저의 추악한 마음 때문에 한 번도 인정하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저의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5.18 앞에 너무나 큰 죄를 지은 죄인이고 학살자임을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고, 정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저희, 우리나라가 정말 오랫동안 아픔의 역사를 겪어왔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군부독재까지 너무나 많은 희생과 아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할아버지 전두환씨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도모하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역으로 흐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말, 군부독재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이겨내고, 용기로 군부독재에 맞섰던 광주 시민 여러분들, 영웅이고, 정말 저희 나라의 빛이고 소금이신 모든 분들을, 오히려 더 고통에 있게 하고 아픔을 더 깊게 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가족들 뿐만 아니라 저 또한 너무 추악한 죄인입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 사이에 숨어, 항상 제 죄를 숨기고 그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저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사실을 항상 외면한 채 살아왔습니다.

정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이 자리에 있는 것 또한 죄악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오히려 광주 시민 여러분들께서 저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고, 저를 사람으로 봐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광주에 오고 나서…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정말 죽어 마땅한 저를 이렇게, 사죄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에, 제가 감사드리는 마음이 큰 만큼, 정말 말만 회개가 아닌 앞으로의 삶을 이렇게 살아가면서 행동으로 제가 느끼는 책임감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항상 회개하며 반성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 자리를 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저의 가족분들 대변해서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기자들과 질의응답

기자[32]: (사죄를 마음먹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
“저는 한평생 양의 탈을 쓴 늑대들 사이에서 자라왔고, 저 스스로도 비열한 늑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작년 말부터 교회를 통해서 정말, 저 같은 죄인을 천사같이 대해주시는 너무나 의로운 분들을 많이 뵙고, 또 봉사활동을 통해서 정말 악마 같은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어린아이들을 보며 빛을 보니, 제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습니다. 죄책감이 너무 커서, 제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죄책감이 너무 커서, 이것 또한 이기적인 마음에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를 이렇게 깨끗한 마음으로 받아주신 모든 분들께 사죄의 말씀 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기자: 가족들은 5.18을 선동이라 하고 가족들이 피해자라고 배웠다고 했는데, 5.18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 혹시 전두환씨 본인의 할아버지랑 5.18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이야기를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있었다고 하면 있고, 없었다고 하면 없을 수도 있는데요, 어렸을 때부터 저도 궁금하고 배우고 싶은 마음에 저희, 전재용씨 저희 아버님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께도 가족 여러분께 많이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저희 집안의 분위기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제가 대화 주제를 바꾸거나 침묵을 하거나 아니면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다시피, 5.18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고 북한군들의 소행이고 저희 가족들은 피해자고, 오히려 광주에 용기 내서 싸우신 시민분들이 정말, 정말 위대하신 천사들이고 영웅이신데, 오히려 그 분들을 되게 안 좋게 얘기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기자: 이번 사과에 대해 가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연락하시는 게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만약에 없다면 가족분들이 향후 어떤 반응을 하시길 원하시는 여쭤보고 싶습니다.
“일단 저희 어머니께서는[33] 저의 선택을 지지를 하고 계시고 자랑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분들은, 또 연락이 너무 많아서, 또 저 스스로도 연락하기가 두려워서 연락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락이 되든 안 되든, 정말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사과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두려운 마음도 있겠지만, 이기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정말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진심 어린 사죄를 유가족분들, 유공자분들, 피해자 모든 분들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기자: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알츠하이머를 앓았던 적이 있었고, 사실 소송이나 법정 싸움에서 좀 적극적이지 않게 활동했지만, 반면에 골프를 즐기신다든지 아니면 12.12를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다든지, 이런 행동을 하셨는데요, 이에 관련해서 건강 상태는 돌아가실 때 어땠었고, 그리고 실제로 골프라든지 이런 거를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시면서도 그런 활동을 하셨는지, 혹시 그런 걸 보신 적이 있는지 한 번 얘기 좀 해주시죠.
“제가 군대를 2017년도에 제대하고 나서, 지금까지 한국을 두 번 정도밖에 못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어떻게 활동하셨는지는 정확하게는 잘 몰라서 답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자: 어제 하루 준비하면서 공부도 하고 여기 나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 나와서 유족분들과 부상자분들 이런 분들을 만나 뵈니까 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하거든요.
“제가 광주에 오고 나서 느꼈던 거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정말 영웅이시고 너무나 마음이 넓으신 천사분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저를 더 따뜻하게, 넓은 마음으로 감싸 안아주실수록 저의 죄가 더 크게 느껴지고, 이때까지 이기적으로 숨어 살아온 제가 더 창피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기자: (향후 일정에 대한 질문)
“일단 내일까지는 잡혀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추후에 더 정해지면, 제가 공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전두환씨 은닉 재산에 관해서 많은 말씀 해주셨는데, 현재로선 이미 수사된, 2013년에 수사된 사안들이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혹시 이와 관련해서 은닉재산 관련해서 추가적으로 발표할 사항들이 있을까요?
“제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밝혔다시피, 지금 사회 구조상 처벌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사죄를 안 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족 구성원인 제가, 저라도 사죄를 드리러 나온 것입니다. 용서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저의 죄가 용서될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죽을 때까지 회개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자: 여쭤봤던 점, 추가적으로 가족들의 은닉 재산에 대해서 밝혀주실 사항들이 있는지 여쭤봤는데 혹시 이에 대한 대답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이미 공개한 것 외에는 크게 없습니다.”

기자: 1980년 5월 18일, 광주 일원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십니까? 그리고 당시에 5.18 학살의 주범은 누구시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대학살의 현장이라고 생각하고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주범은, 그 누구도 아닌, 저의 할아버지, 전두환씨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를 조금 더 자세하게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5.18의 주범은 할아버지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생각하시게 된 이유나, 왜 그렇게 생각하시게 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근거를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마약 수사를 받던 과정이 생각납니다. (갑작스런 유족의 울부짖음 섞인 발언을 듣고 말이 끊김.) …… 방금 질문은 대답 안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자: 혹시 올해 열릴 5.18 추념식에 참석하실 의사가 있는지 여쭙고 싶은데요, 이에 대해서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가서 더 큰 상처를 만들지 않고, 제가 도움이 된다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김태수[34]: 전우원씨께서 오신 게 고맙고 반갑고, 그러나 딱 한 가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 생전에 계실 적에, 사저에서, 내가 광주 항쟁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발포를 시켰다, 그런 말씀을 못 들으셨습니까?
“한 번도 없습니다.”
김태수: 발포 명령을 할아버지가 하셨다고, 그렇게 말씀하신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집에서는 그런 말씀이 전혀 없으셨다는 얘기신가요?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아버지고, 본인이 천국에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김태수: 네 알겠습니다.}}}
"오늘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민주주의를 위하여 온 마음과 몸을 희생해주신 여러분이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전우원 올림
파일:전우원 편지글.jpg
* '오월 어머니들의 그림 농사' 전시전을 관람했다. 이 자리에서 전우원은 "오월어머니들의 그림을 보니 마음이 순수해진다"며 "정말 다들 그림을 잘 그리신다"고 짧은 소감을 밝혔고 5.18 전야제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며 이날 광주에서 머문 뒤 다음날 일정을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

3. 어록

전 양심이 있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 비겁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러고 있습니다.
(저는) 심적으로 안정된 상태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반대로 묻고 싶네요. 범죄를 저지르고 어떻게 심적으로 안정된 상태로 계셨는지. (중략) 제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은 것보다 5.18 사태에서 죽은 자들, 불구가 된 자들, 그분들의 가족분들, 자녀분들이 받았을 정신질환의 크기가 더 큽니다. (중략) 제가 정신질환으로 매우 고통받는 상태가 아니라 저의 가족들이 다 사이코패스인 겁니다.
인간은 스스로 용서한다. 학살자 전두환처럼 스스로를 용서한다. 전두환 밑에 있던 정치인이나 군인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을 구타하고 죽여놓고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용서한다.

4. 여담



[1] '집안의 평화를 지키는 사람'이란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2] 형제와 사촌들은 남자는 "우◯", 여자는 "◯현" 돌림을 쓴다.[3] 1969년생으로 전재용의 둘째 부인이다. 전우원은 친부 전재용이 셋째 부인이자 계모인 박상아와의 불륜으로 친모가 힘들어 하다가 암에 걸렸다고 주장했다.[4] 원래 한국 국적을 가진 미국 영주권자였으나 KBS 인터뷰에서 2022년경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고 밝혔다.[5] 여동생 둘은 계모 박상아 소생이다. 배다른 남매들이고 상술한 계모 박상아와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전우원이 군복무 중일 때 면회를 가거나 위문편지를 보내는 등 원만하게 지냈다.[6] 본인 피셜[7] 뉴발란스 기준[8] 미국에 있는 보딩 스쿨이다.[9] KT 계열사로, 전두환의 비자금 은닉처라는 의혹이 있다. 전우원이 폭로 후 공개한 아버지 전재용과의 서신에 따르면 큰아버지 전재국이 인턴을 하도록 꽂아 주었다고 한다.기사[10] Transaction Strategy & Execution Senior Associate. Senior Associate는 한국 기업에서 주임~대리 정도의 직급이지만 명함에는 과장으로 나온다. 회계사도 동일하다.[11] 육군사관학교가 영문으로 발급한 전역예정증명서를 공개했다.[계정삭제] [계정삭제] [계정삭제] [15] 인스타그램 페이지를 통해 상속포기 증명서 등 가족 관련 서류를 인증하고 아버지 전재용이 조선닷컴과 인터뷰를 통해 아들이 맞다고 인정함으로써 확실히 인증되었다.[16] 제15대 대통령 선거 4일 후였다. 이때 사면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사진에 찍혔고 이게 신문기사로도 남아있다.[17] 더군다나 아버지 전재용박상아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기 전까지는 집안의 막내 손주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엔 이순자가 특히 각별하게 여겼던 것 같다.[18] 전우원이 재학한 고등학교는 한 해 학비가 4,000만원이나 되던 전형적인 고급 사립학교다.[19] 국회의원과 결혼한 고모 전효선(다만 데릴사위에 가까웠으며 전두환부터가 공식 가족행사에선 딸을 출가외인으로 대했기 때문에 그저 총애받는 고명딸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동아원그룹 회장 딸과 결혼한 작은아버지 전재만, 연애결혼이라 평범한 집안의 딸과 결혼했지만 경영 능력만큼은 뛰어났던 큰아버지 전재국과는 달리 아버지 전재용은 경영 능력도 별로고 이렇다할 혼맥도 만들지 못해서(포스코 회장의 딸과 정략결혼하긴 했지만 3년만에 자녀 없이 이혼했고 결혼기간 내내 군복무를 해서 사실상 부부생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에게 흑역사) 전두환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20] 일단 큰아주버님 전재국은 진작에 결혼해 가장 먼저 첫손주인 전수현과 장손인 전우석을 안겨줘 전두환 부부의 총애를 듬뿍 받았고 하나뿐인 딸이라 원래부터 예쁨받던 시누이 전효선 역시 외손녀 두명을 안겨준 상황이였다.[21] 라이브 중 아버지 전재용의 휴대폰 번호를 공개했다.[22] 실제로 전두환은 여타 알츠하이머 환자나 암 환자에 비해 예후가 급격하게 나빠지긴 했지만 원래 알츠하이머와 혈액암은 전조 증상 없이 갑자기 진단되는 경우가 많으며 알츠하이머는 전적으로 내인성 기전 질병이라 외부의 영향에서 발병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연결짓긴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전두환 사후 알츠하이머 투병과 혈액암 진단이 사실로 확인되었다.[23] 자기 계좌 중 약 45%에 해당한다. 다만 4월 7일 새벽 라방에서 언급한 바로는 환불 처리가 됐다고 한다.[24] 이를 통해 한국 국적자임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의 처벌을 원한다는 점과 더불어 한국은 속인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25] 전두환 손자, 유튜브 방송 중 "마약 자수"…병원으로 이송(종합). 연합뉴스. 2023년 3월 17일.[26] 전두환 손자, 라이브 방송 중 마약투약…"살려달라" 흐느꼈다. 중앙일보. 2023년 3월 17일.[27] 전우원이 자수를 하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상황에서 자수한 것.[28] 기도 유지가 필요하거나 인공 호흡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에서 기관 내로 튜브를 넣어 기도를 확보하는 시술[29] 광주의 한 분식집에서 밥을 먹고 빨래방을 들르기도 했다고 한다.#[30] 후술하겠지만 자신의 할머니이자 전두환의 아내인 이순자가 남긴 “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말을 저격한 것이다.[31] 광주광역시 일대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며 "(내가)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내가) 용서할 의지를 느낀다면"에 가까운 뜻으로 "용서"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32] 뒤에 이어지는 ‘기자’는 동일인이 아님.[33] 친모인 최모씨를 말하는 것으로 보임.[34] 시민군 출신으로 5.18 당시 총상 피해자였다. 당일 병원복 차림에 한쪽 팔에 깁스를 한 채 회견장에 참석했다.[35] 이순자가 전두환에 대해 이렇게 말한 근거는 전두환이 대통령직을 7년 단임제로 바꿨지 않냐는 것인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궤변이다. 7년 단임을 한 대신 간선제(체육관 선거)를 유지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집권했고 집권 기간 동안 5.18 민주화운동, 형제복지원, 삼청교육대 같은 인권 말살을 자행했으며 국가원로자문회의 등을 통해 상왕 노릇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36] 그리고 1980년 5월 당시 대학생들에 대한 일제검거작전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때 검거 후 수배당해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해져 이민을 선택한 경우도 더러 있다.[37] 사진을 인용해도 되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38] 뿐만 아니라 불교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스탠스를 가진 보아 위계질서, 제사 등 스스로가 보기에 개신교(특히 장로교)의 교리에서 배척받는 대부분의 요소들을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39] 파일:8A70DA04-3894-4C0F-82DC-1B85410A5BF9.jpg[40] 파일:BB7FF2E4-AA3C-4CC3-B771-A46D74CBAC7D.jpg[41] 커뮤니티에서는 자기 할아버지 재산의 절반 가량을 기부했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되기도 했다.[42] 공개된 전우원의 여권은 기간이 만료된 여권이었다.[43] 할아버지와 아버지뿐 아니라 증조부외증조부도 앓았던 유서 깊은 가족력이다.[44] 피나스테리드 계열의 약은 남성 호르몬인 DHT의 분비를 줄이는 것이라 사람에 따라서 발기부전 같은 부작용이 올 수 있다. 미녹시딜 역시 피부 질환의 위험성이 있다.[45] KBS 시사직격에 전재용의 젊은 시절 영상이 나오는데 전체적인 아우라가 전우원과 매우 닮았다.[46] 아이스 에이지에 등장하는 땅늘보 캐릭터. 라방에서 자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본인의 최애 캐릭터인 듯하다.[47] 하지만 어릴 때 치아교정을 받아서 그런지 이순자나 전재용처럼 주걱턱이 심한 것은 아니다.[48] 한국 EYP 기준 5년차 시니어는 계약 7.5이상, TC 9천 이상이다.[49] 시사직격에 전두환이 출소일에 연희동 자택으로 귀가해서 전우원을 앉히고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드는 영상이 자료화면으로 나온다.[50] 만점이 1600점인 신 SAT 기준으로 1560점대에 해당하는 상당한 고득점이다.[51] 성 미카엘 대천사는 가톨릭의 구마의식에서 호명되고 유대교와 가톨릭에서 임종 전에 전구를 청하는 등 여러모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악에 대한 극복을 상징한다. 성 미카엘 대천사 기도 참조.[52] 계모 박상아와 함께해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라고 한다.[53] 사실 인앤아웃은 미국 서부에서만 영업하므로 동부에 주로 살았던 사람은 가 볼 기회가 없었을 수 있다.[54] 만 나이로 27살이다.[55] 2015년에 입대했으니 2015년말로 추정된다.[56] 다만 자신의 친할머니하고는 절연했다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자세한 내용은 이순자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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