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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47:14

장항 수심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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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실상3. 근처 주민들의 반응4. 그것이 알고싶다 보도와 형사처벌5. 사후처리, 생존자의 행방6. 여담7. 참고8. 둘러보기

1. 개요

본 사건의 배경인 장항 수심원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송림리[1] 유부도에 위치해 있던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이다.[2] 이는 1974년 공권력 인가를 받은 뒤 최초 설립되었던 정신요양시설로써[3] 1997년 폐쇄 당시 재단의 소유자들은 강모씨 일가로 되어 있었다. 사건 이후 수심원 건물은 굳게 닫힌 입구 안으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나 거의 호러스팟을 연상케 하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폐건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수심원은 '마음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로 修心院이라고 이름을 지었겠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재단장 이하 관리하던 사람들의 정신상태와 근무태도는 가히 인면수심(獸心)에 가까웠다.

최대 수용인원은 얼추 세자릿수 좀 넘는 정도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100명도 넘게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2. 실상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자

장항 수심원 근무신조
위 근무 신조와는 정반대로 비인간적인 장소였다.

심각한 인권유린이 행해졌던 곳으로 1997년 그것이 알고싶다 보도 후 23년간 이어진 폭력의 현장은 폐쇄되었다. 당시 프로그램 담당이었던 송영재 PD가 훗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인터뷰에서 밝히기로는 제보를 받고 나서 수심원에 잠입을 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취재진을 보호해 줄 사람들과 잠입 작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송 PD는 가장 먼저 서울특별시 소재의 경찰서[4]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위험할 것 같다며 도움을 요청해 강력반 형사 8명을 섭외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혹시 모를 불안감에 현직 국회의원에 더해 수심원 입소인들의 상태를 점검해 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섭외했는데 이들이 바로 후술될 이성재 변호사(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와 김병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다.

입소의 형태는 보통 '보호자'가 접선 장소에서 입소 대상자를 관계자에게 넘겨서 끌고 가는 형식이었다. 일례로 모 여성 원생은 어렸을 적 쑥을 뜯고 있다가 막내오빠가 바람을 쐬자며 바닷가로 차를 몰더니 배 타고 온 관계자에게 넘겨 버린 케이스였다. 심지어 심신에 장애가 없는 멀쩡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끌려오는 사람들도 수두룩했다.[5]

원생들은 보통 시설 내 강제노동에 동원되었지만 '수감자'라는 글씨가 씌여진 요상한 앞치마를 겉에 걸친 조잡한 작업복[6]을 입고 유부도 주민들의 염전이나 밭, 기타 마을 잡역에 차출되어 사실상 섬노예로 생활했다.[7] 게다가 이들의 일당은 모두 수심원 측이 가져갔을 뿐만 아니라 보호자들에게도 돌봐주는 비용으로 매달 10만원씩 받아 챙겼다.

당연하게도 시설과 보건위생은 열악했다. 7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빨지 않은 담요에서 악취가 어마어마하게 났고 원생들의 피부 상태도 좋지 못했다. 근데 이상한 것은 분명 잘 갖춰진 샤워 시설이 있어도 씻지 못했는데 이는 물이 귀한 섬 특성상 충분한 빗물이 모여야 씻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점검 나온 공무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컸다. 옆에 있는 큰 통에는 한 눈에 봐도 더러운 구정물이 고여 있었는데 당시 피디가 마셔보고 짠물이라 했는데 정황상 바닷물이나 염수화된 지하수를 퍼올린 듯 하다. 게다가 변소 역시 문이 없는데다 화변기 주변으로는 위가 휑하니 뚫려 있고 당연히 휴지는 주어지지 않았다.[8]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수심원을 둘러보는 중 자물쇠로 잠긴 문이 있었는데 직원이 따로 열어주니 거기에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료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48일간 독방에 구금되었던 김삼식이었다.[9] 당시 손은 묶여 있었고 상반신은 탈의한 채 그냥 독방에 갇혀 있었다. 그는 오늘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면서 자신을 꼭 좀 구해 달라고 취재진에게 간곡히 부탁하였고 그날 취재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국회의원과 탈출한 위중자 9명 중에 들어 배에 탔다.

1997년 방송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병후 의사와 동행취재를 하러 갔던 이성재 변호사에 따르면 거의 동물 사육장 수준으로 비참했다고 하며 1990년대 정신질환자 인권에 대한 인식 수준을 고려하면 육지에도 이러한 시설이 많았는데 심지어 바다에까지도 가두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내가 가야 했을지도 모른다며 술회했다.[10] 김병후 전문의도 당시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의 동행취재 요청을 받았을 때 송영재 PD의 설명을 듣고 나서 수심원 사건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요청에 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폐쇄 후 방송에서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시설 관계자 및 재단장이 때릴 힘을 아낀다는 이유로 원생이 다른 원생들을 때려 죽이게 한 살인교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 3차 방영분에서는 이러한 살인교사를 저질렀다고 고백하는 원생 정모씨(6개월간 수용. 1986년 탈출)가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구타, 살해는 정모씨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람 죽는 것이 일상이에요 진짜"라고 술회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러다 보니 감시가 소홀할 때를 노린 탈출 시도가 상당했고[11] 그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거주민들이 막섬이라고 지칭하는 인근 섬의 야산에 암매장[12]되었는데 하필이면 썰물 때에만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인근 보령시의 무창포해수욕장 명소인 석대도(일명 모세의 기적)와 비슷한 원리다.

3. 근처 주민들의 반응

섬 주민들은 말을 아꼈는데 사실상 닫힌 사회 수준으로 묵인된 것인지 몰라도 거의 시설 근처에는 가지 않으려고 했으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2016년 그것이 알고싶다 취재에서 어느 정도 말이 통한(?) 섬에서 수십년 넘게 산 할머니도 보통은 "집에서 난동부리는 놈 잡아다 쇠고랑 채워서 데리고 반 죽여놔서 집에서 하던 버릇을 못하게 되고 멀쩡해지니 우리 같은 마을 사람과 말도 통하고 일도 잘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저 황소처럼 일하는 외부 잡역부들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연민은 있었는지 그들이 학대당하고 맞아 죽는 모습에서는 "불쌍하지, 무서워" 라면서 꽤나 전율하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4. 그것이 알고싶다 보도와 형사처벌

1992년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 초창기부터 지속적으로 고발해 오다가 1997년(송영재 PD 시절) 절치부심하고 다시 대대적 보도를 한 게 결실을 맺었다.

그 순간에도 원장 강모씨는 다른 범죄자들이 으레 그렇듯 카메라맨을 제지하며 욕설로 저항했지만[13] 그 해 보도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지 당시 정부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즉각 폐쇄 조치를 발령해서[14] 시설 자체는 바로 문을 닫았다. 1997년 외환 위기에 대한 사회적인 공포나 대선 때문에 다소 묻히긴 했지만 공권력에서 조치를 내릴 정도면 이 보도의 결실로 인한 파동이 그때까지만 해도 헛되지 않아 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갑작스레 폐쇄 조치를 받은 영향인지 관계자들에게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권력의 심판으로 넘어갔다. 당시 수용되었던 원생들 중 상당수는 긴급 탈출조치를 받았다.

이때 일부 유골도 어느 정도 발굴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치가 얼마나 신속했냐면 이후에도 폐허에서 미처 은폐하지 못한 관리장부들이 굴러다닐 정도였다. 이는 그것이 알고싶다 3차 보도에서 탈출한 원생들의 행방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원장 강모씨와 측근, 이를 묵인(근무태만)해 온 지역 공무원 등에 대한 실제 처벌은 겨우 징역 1년 6개월이 고작일 정도로 솜방망이에 그쳤으며 새롭게 드러난 범죄 사실에 따라 다시 죄를 묻는다고 해도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 버렸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전과인 살인 및 살인교사에 대한 혐의에 관한 처벌이 전혀 없었다. 강아무개는 출소 후 그것이 알고싶다 3차 취재에 따르면 어느 시골에 은거 중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고 피해자들의 살인교사 증언에 대해서는 "자기가 원하는대로 좋게 이야기할 뿐", "미친놈들이지, 미친놈을 미친놈들이라 하는거고 다 똑같은 놈이고 나도 미친놈 아닙니까?", "나도 인생 버렸는데 누구에게 보상을 받아야 합니까. 원생들의 인생을 책임지라니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라고" 등 자신도 이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식의 양비론 섞인 변명으로 일관했다.

지자체 사회복지부서 관계자에게 인터뷰해도 어쨌든 폐쇄되면서 다 끝난 일인데 좋은 일도 아닌 것을 다시 들추려고 하느냐면서 그냥 잊혀 지나갈 해프닝 정도로만 인식했다. 인사이동이 되면 근무부서 자체가 달라지는 한국의 공무원들 특성상 현재 담당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내막 자체를 모를 가능성이 높다.[15] 거칠게 얘기하면 그것이 알고싶다 제작진보다도 이 사건을 모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뷰를 시도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온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5. 사후처리, 생존자의 행방

일단 원생들을 탈출시키기는 했는데 당시 동행했던 이 변호사와 김 정신과 의사가 의논한 바에 따르면 이유 없이 갇힌 사람들만이라도 즉각 석방하는 것까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재사회화의 벽을 넘지 못했다.[16] 탈출한 이들은 임시 거류지에 있다가 그 중 몇몇은 다시 충청도 등의 여러 지역에 위치한 정신질환자 수용시설에 분산 인계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제대로 인계되지 못하거나 오래 버티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쉼터 등을 전전하다가 대다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며 자살, 사망, 병사, 고독사,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싶다 2016년 방영분에 보도된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름 뒤의 †표시는 사망한 원생들.)

이 외에도 인명장부를 토대로 관련 관공서 등에 연락해 보니까 사망 사실이 접수되었거나 전산에서도 보이지 않아서 생사 여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취재팀이 발굴한 문서의 406명 중 1997년 기준으로 그나마 생존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청년 수용자 75명의 탈출 조치 후 행방을 찾았지만 그 중 사망자가 16명, 행방불명이 27명으로 집계되면서 그 당시의 젊은이들 중 절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뉘어서 상술했듯이 충청도의 여러 관련시설(정신질환자 복지시설, 요양원, 요양병원, 노인병원 등)에 분산 인계되어서 시설에 장기 수용되었다. 물론 유부도와 비교하면 훨씬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는 점이 다행이지만 문제는 장애나 PTSD 증상이 어느 정도 나아져 사회에 돌아가려는 욕구를 지속적으로 보여도 형제/자매/자식들을 비롯한 가족들이 포기각서까지 쓰면서 요양원에 맡겨 버린 뒤 나 몰라라 하며 아예 찾아오지도 않고 심지어 이와 관련해 전화하면 왜 전화했느냐고 면박을 주는 등등 여전히 무시해서 시설 안에서만 계속 머물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참하게 죽은 이들보다는 그나마 나으나 이들도 별반 다를 바 없다.

6. 여담

7. 참고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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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서천에 속하지만 유부도전라북도 군산시와의 거리가 훨씬 가깝다.[2] 섬 한가운데에 있는 ㄷ자형의 가장 큰 건물이 이곳이다.[3] 그것이 알고싶다의 보도에 따르면 폐쇄까지 23년이 걸렸으니까 이를 역산하면 1974년 쯤에 개설한 것이 된다. 염전업자는 중간에 재단장이 바뀌었거나 당국에서 보여주기 위해 내세운 법인상의 대리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 현지 경찰들은 수심원 측과 유착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 경찰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취재 결과 실제로 담당지 경찰과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발견되었다.[5] 보통 재산분할이나 먹일 입 등 가족간의 갈등이 원인인데 환자 본인의 의사가 철저히 무시되는 정신질환자 수용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다.[6] 시설에서 입게 되는 체육복인지 죄수복인지 구별이 안 되는 조잡한 파란색 옷과 별개다.[7] 이 과정에서 작업을 거부하거나 하지 못하는 수감자들은 한데 모아 몇 개월 동안 수갑으로 묶어 놓았다는데 이런 학대로 인해 발가락이 절단된 사람도 있었다.[8] 가관인 것은 여기 비치되어야 할 휴지들은 부식 및 피복류와 함께 물품 창고에 가득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광경을 본 송영재 PD가 "아니 화장실에 있어야 할 게 여기 왜 있어?"라며 기막혀하는 모습이 그대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직후 수심원 관계자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내주려 했는데 열쇠가 없어서 못 내줬다"는 궁색맞은 변명을 했다.[9] 당시 방송에서 유일하게 실명이 공개되었다.[10] 게다가 이성재 변호사 본인도 어린 시절에 앓은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11] 대표적으로 이판사판으로 수영을 하거나 수영에 자신 없는 사람은 커다란 스티로폼에 몸을 묶고 바다에 뛰어들어 표류했다.[12] "보호자들이 죽어도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묻어"라는 주민의 증언이 있었다.[13] 카메라맨을 밀치고 욕을 하자 바로 동행한 강력계 형사가 원장을 밀치고 "이 양반 봐라" 하면서 제압하자(일반인도 아니고 경찰관 신분인 형사가 원장의 멱살을 잡고 뺨을 후리려는 시늉을 했을 정도였다...) 원장은 바로 꼬리를 내리는 전형적인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추한 모습을 보였다. 21세기에 그랬다면 원장이 그 형사를 상대로 적반하장으로 민원·고소를 시전했을 것이다.[14] 과거 방영분 중 '1994년도 직원 비상연락망'이라고 원장, 군청사회과, 경찰초소, 총무, 생활보조원, 간호사 등 조직도 도표가 그려진 장부가 있었다. 1997년 방영 이후 정부에서 조치를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어느 정도 묵인이 있었음을 암시한다.[15]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을 선발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현재도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이 사회복지 업무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16]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믿었던 가족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가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수심원과 비슷한 케이스였던 형제복지원 피해자들도 재사회화의 어려움과 PTSD로 고충을 겪었으나 적어도 자신을 찾아 주는 가족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내 살아가고 국가 보상 투쟁에 나섰던 걸 봐도 알 수 있다.[17]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박영민'이라는 이름으로 가명 처리되었다.[18] 그 강도들은 내분이 일어났는지 다른 강도단원들이 한 단원을 죽였다고도 한다.[19] 바람피는 아내를 두들겨 팼다고 고발당해서? 끌려온 케이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