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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17 00:47:53

박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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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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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박승직
(1896~1946)
초대
박두병
(1946~1973)
제2대
정수창
(1977~1981)
제3대
박용곤
(1981~1991)
제4대
정수창
(1991~1993)
제5대
박용곤
(1993~1996)
제6대
박용오
(1996~2005)
제7대
박용성
(2005~2009)
제8대
박용현
(2009~2012)
제9대
박용만
(2012~2016)
제10대
박정원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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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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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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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이중재
제1-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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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순
제6-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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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3대
박용만
제24대
최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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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EB8><colcolor=#ffffff> 두산그룹 초대 회장
박두병
朴斗秉 | Park Dubyung
파일:박두병 회장.png
출생 1910년 10월 6일
경기도 경성부 종로4정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사망 1973년 8월 4일 (향년 6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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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밀양 박씨[1]
연강(蓮崗)
학력 경성유치원 (졸업)
동대문심상소학교 (졸업)
경성공립중학교 졸업)
경성고등상업학교 (졸업)
부모 아버지 박승직, 어머니 정정숙
형제자매 누나 5명
남동생 박우병, 박기병, 박규병
배우자 명계춘[2]
자녀 장남 박용곤
장녀 박용언
차남 박용오
삼남 박용성
사남 박용현
오남 박용만
육남 박용욱
종교 가톨릭(세례명: 바오로)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관계5.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두산그룹 초대 회장.

2. 생애

1910년 10월 6일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4가 92)에서 매헌 박승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3] 1916년 4월 경성유치원,[4] 1918년 4월 동대문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1924년 3월 동대문소학교를 졸업하고 4월 경성중학교(現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해 1929년 3월 졸업했다. 1929년 4월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의 전신)에 입학해 1932년 3월 졸업했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명계춘과 경성고상 졸업학년인 1931년 5월 결혼하고, 1932년 3월 경성고상 졸업 후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1932년 4월 장남 박용곤을 낳았고, 1933년 10월에는 장녀 박용언이 출생했다. 1936년 4월 조선은행을 사직하고 (주)박승직상점에 입사하여, 1936년 7월 상무취체역에 선임되었다.

부친의 박승직상점 경영에 나선 박두병은 박승직의 재래식 경영을 일신하여 인적 쇄신을 단행하고 야구부를 만들었으며, 조선을 넘어 중국, 미국의 면화 시장까지 관찰하여 면직물 거래를 하는 등 경영혁신에 나섰다. 때마침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만주와 중국 일대의 면직물 수요가 급증하면서 순이익이 연 600%씩 증가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전시 총동원 체제로 돌입한 일제는 가격통제와 배급경제를 실시했고, 박승직상점은 삼목상사(주)로 개칭되어 할당된 강원도 일대 배급활동에 종사하다가 1942년부터는 소화기린맥주 대리점 경영에 전념하며 명맥만 잇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일제 패전과 8.15 광복 이후 1945년 9월 박승직상점을 휴업하고, 10월 6일부터 박승직이 1933년 창립시부터 주주로 참여해 취체역으로 선임되어있던 소화기린맥주(주)에서 상근하였다.

미군정에 의해 박두병은 쇼와기린맥주의 지배인으로 선임되었고, 정수창을 영입하여 대관업무를 맡겼다. 1947년 6월 소화기린맥주(주)의 상호를 동양맥주(주) 변경하였고, 상표도 Oriental Brewery로 바꾸었다. 이때 동양맥주는 박승직과 함께 소화기린맥주의 창립주주이자 취체역을 맡고 있던 수당 김연수가 해방 이전 만주국에서 인수해 경영하던 오리엔탈 비어와 동일해 논란이 있었으나 관철하였다.

1948년 7월 박두병은 동양맥주 취체역 사장에 취임하였고, 두산상회를 설립해 무역업에도 뛰어들어 1950년 홍콩에 게살 통조림을 수출했다. 그러나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2월 부친 박승직이 별세하는 등 난리를 겪으며 부산으로 피난했다.

1951년 3월 귀속재산 불하계획을 발표한 정부는 동양맥주를 34억 원에 불하하겠다며 계약금 3억 6천만 원, 잔금은 9년 분할상환 조건을 내걸었다. 박두병은 1951년 10월 두산상회를 주식회사로 설립해 사장에 취임하고, 18대의 트럭을 확보하여 동양맥주 불하경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1952년 5월 동양맥주(주)를 불하받는 데 성공하여 비로소 오늘날 두산그룹의 창업기를 개창하였다.

이어 1953년 6월 (주)두산상회를 두산산업(주)로 개편해 동양맥주(주)의 총판으로 만들고, 동양맥주는 생산에 전담케 했다. 1953년 8월에는 동양맥주 생산시설 복구를 완료하고 맥주생산을 재개, 1954년 3월 상표를 단순화한 OB로 바꾸고 1956년까지 대리점을 13개소(1953년 기준)에서 32개소로 크게 늘려 OB맥주의 시장점유율을 33.5%(1954년)에서 57%로 상승시켜 크라운맥주를 추월하였다. 1957년 11월부터는 주한미군에 납품을 개시했다. 이로써 경쟁사인 조선맥주(주)를 완전히 제치고 업계 1인자의 지위를 공고화했다.

이를 기반으로 1960년대에는 사업 다각화에 나서 1960년 7월에 동산토건을 세워 건설업에 진출하고, 11월에는 합동통신사를 인수해 언론 분야에도 발을 들였다. 이후 1973년까리 연평균 1개 회사를 신설 또는 인수합병하여 재벌 두산그룹을 형성하였다. 일제시대 고등교육을 받은 기업가가 많지 않던 당시 관립 고등교육기관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박두병은 1967년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까지 맡아 3연임하며 별세할 때까지 재임했고, 1970년 5월부터는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1969년 동양맥주 사장직을 정수창에게 맡긴 후 회장으로 추대되어 그룹을 이끌다가, 1973년 8월 4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자택에서 폐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후 장례는 가족장으로 거행돼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선영에 안장됐고, 5주기 때인 1978년 그의 호를 따서 연강재단이 설립되었다.

3. 여담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인중이 상당히 길고 인중골이 뚜렷하다. 사족으로 두산그룹 오너 일가들은 인중골이 뚜렷한 사람이 많은 편인데, 박용곤 명예회장부터 박용현, 박용성, 박용만 등 후손들도 웃을 때 특유의 인중선이 드러난다. 이 유전자가 꽤나 강해서 손자대인 박정원도 인중골이 뚜렷한 편이다. 참고로 인중골은 관상학적으로 정력적이고, 식욕이 왕성하며 가정 생활이 순조롭다고 한다.

굉장히 엄한 아버지로 장남 박용곤은 장남이라서 많이 때리고 3남 박용성은 어린 시절 장난을 많이 쳐서 많이 때렸다고 한다. 딸인 박용언에게도 때리지만 않았을 뿐 엄하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다만 수재로 유명한 형제들 중에서도 더 수재였던 4남 박용현과 5남 박용만은 자녀들 중 유난히 예뻐했다고 한다.## 물론 그 박용만조차도 2025년 질문들에서 부친을 회고하길 굉장히 보수적인 분으로, 잘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지지만 잘했을땐 묵묵부답인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초등학교 1학년일 당시 선생님이 집에 온 적이 있었는데[5] 방바닥에 손을 한번 짚었다고 어디 선생님 계신데 그렇게 반쯤 기대어 앉냐고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무섭고 엄한 아버지셨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 때 돌아가셔 아련한게 있지만, 이젠 자신이 이미 아버님 사망하셨을 때 나이를 지나버려 예전만큼 그립진 않고 스스로 부친에 대한 평가도 해보고 그렇게 담담하게 산다고 한다.#

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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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2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제2선거구

8,406 (23.21%) 당선 (1위) 초선

[1] 혁거세 64세손, 충헌공파-판서공파-부마공파 23세손 ○병(秉) 항렬.[2] 다만 두 집 살림을 했다. 당장 박용만, 박용욱 전 회장이 일종의 사생아 출신이다.[3] 딸만 줄줄이 여섯명을 낳던 집안에서 태어난 늦둥이 아들이라 부친 박승직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 남동생 박우병, 박기병, 박규병 등이 태어났지만 우병만 살았고 기병과 규병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4]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이다.[5] 박용만은 사생아였기 때문에, 다른 이복형제들과 따로 살아 사실상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열여덟살 이전까진 장남처럼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형님들에게 형제로 인정받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