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발데크피르몬트 후국 공세자 무장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Josias, Erbprinz zu Waldeck und Pyrm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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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시아스 게오르크 빌헬름 아돌프 추 발데크피르몬트 (Josias Georg Wilhelm Adolf zu Waldeck und Pyrmont) |
출생 | 1896년 5월 13일 |
독일 제국 발데크피르몬트 공국 아롤젠 | |
사망 | 1967년 11월 30일 (향년 71세) |
서독 라인란트팔츠주 디츠 샤움부르크 성 | |
배우자 | 올덴부르크의 알트부르크 여공작 (1922년 결혼) |
자녀 | 마르가레테, 알렉산드라, 잉리드, 비테킨트, 구다 |
아버지 | 발데크피르몬트 공 프리드리히 |
어머니 | 샤움부르크리페의 바틸디스 공녀 |
형제 | 막시밀리안, 헬레네, 게오르크 |
복무 | 슈츠슈타펠 (1930년 ~ 1945년) |
당적 | |
최종계급 |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질서경찰 대장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1. 개요
독일의 왕공족.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여왕과 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이다.1.1. 초기 행적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수도였던 아롤젠(Arolsen)에서 태어난 요시아스는 아버지가 발데크피르몬트 후작 프리드리히였다.[1] 1912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요시아스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독일제국군 육군에 복무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1917년에 소위로 승진한 후 1, 2급 철십자 훈장을 수상한 그는 대전 말기에 독일 혁명에 의하여 독일 제국과 발데크피르몬트 공국이 붕괴하자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말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에서 요시아스는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반혁명 의용군에 참가했다.1.2. 나치당 입당
잠시 농학 공부를 하다가 1929년 11월 1일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한 요시아스는 1930년 3월 2일에 친위대 대원이 되었다. 뮌헨의 친위대 제1연대, 친위대여단 바이에른, 친위대 남방집단사령관으로 일하다가 6월에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부관이 되었다. 나치 정권이 탄생하기 전부터 친위대에 입대한 요시아스는 공족가문 출신자여서 힘러로부터 중용되었다. 1933년 11월에 뒤셀도르프 서부지구에 출마하여 나치당의 국회의원이 된 요시아스는 1934년 6월 30일에 장검의 밤 사건당시 체포된 돌격대 지도자들의 사형집행을 주도했다.1.3. 친위대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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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요시아스 |
부헨발트 강제수용소가 그가 지도자 자리를 맡은 바이마르 교외에 위치했었는데, 일반적으로 나치의 각 수용소들은 오스발트 폴이 이끄는 친위대 중앙 경제 및 행정본부[3], 특히 그 산하의 리하르트 글뤽스가 지휘하는 수용소 관리국[4]의 명령을 받았고, 체계상으로도 그렇게 되어있었다. 효율성을 위해 중앙 조직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수용소들이 지역별 친위대 지도자들에게 흔들리는 것을 방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 상급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직책은 그 지역 내에서 가장 높은 친위대 및 경찰 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시 수용소 운영과 거의 연관이 없었고, 대규모 수용 작전이나 탈주 수용자들 추격 등에 한해서 협력하는 정도가 수용소와 연관된 거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요시아스의 경우 부헨발트 수용소의 소장 카를 오토 코흐와 그의 부인 일제 코흐에 대해 감찰을 벌인다.
1941년, 부헨발트 수용소의 사망 명단을 흝어보던 그는 전직 공산당 정치인이자 사망하기 전까지 수용소의 간호 조무원으로 있던 발터 크래머의 이름을 발견했는데, 요시아스가 일전에 그로부터 훌륭하게 치료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크래머의 사망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윽고 코흐가 자신의 매독 진단을 감추기 위해 크래머와 또 다른 조무원 한명을 사형시켜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속해서 수사가 진행되자 수용자에게 수용소에서 조금 떨어진 우물에 물을 떠오도록 시킨 뒤 탈주 혐의로 즉결 처형시켜버리는 등 코흐의 온갖 잔인하고 불합리한 처형 남용이 드러났고, 나중에는 수감자의 재산에 대한 횡령 혐의도 추가되었다. 일이 다 밝혀지자 1943년 요시아스는 하인리히 힘러의 동의를 구한 후 게슈타포를 통해 코흐를 체포한 뒤 사형 판결을 내렸고,[5]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5일에 총살형이 집행된다.[6] 아내인 일제 코흐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여 구속시키고만 있어야 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우선 첫번째로, 지역 상급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가 평소에 직접적으로 수용소 운영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지역 내 최고 권력자로서 감독은 가능했기 때문이고, 둘째로 부헨발트 수용소는 유대인을 대거 수용하여 절멸 목적으로 돌리는 살육 공장이 아니라 수감자들을 군수 공장에 투입하는 노동 수용소였기 때문이다. 즉 인간 이하, 가축 이하의 무언가로써 심심하면 총으로 마구 쏴죽여도 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의 유대인들에 비하면 수감자들의 처우가 훨씬 나았다. 사망률도 전체 수감 인원 24만 명 중 5만 6천 명 사망으로 24% 정도였는데, 절멸 수용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었고 학살로 죽은 인원보다 병환이나 과로로 죽은 인원이 더 많았다. 따라서 사망 인원에 대해 감독자 위치에 있는 지역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가 살펴볼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1945년 3월 31일, 전쟁의 끝이 보일 무렵, 요시아스는 부헨발트 수용소를 비우라는 힘러의 전화 명령을 수용소장 헤르만 피스터에게 전달한다. 말이 비우라는 것이지 사실상 싹 다 처형시키라는 뜻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군사재판에서 확인되어 그가 중형을 받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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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의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와 요제프 디트리히 무장친위대 기갑상급대장 |
1.4. 전후 전범 재판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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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회부된 요시아스 |
2. 여담
- 요시아스는 니콜라우스 폰 올덴부르크의 막내여동생 알트부르크[7]과 결혼했는데, 니콜라우스는 반대로 요시아스의 유일한 여동생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와 결혼했다. 즉 남매가 겹사돈이다. 흥미롭게도 니콜라우스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사실상) 1남 3녀 중 유일한 아들이였고, 아내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나는 반대로 3남 1녀 중 고명딸이였다. 또한 자녀들의 성별도 정반대인데 니콜라우스와 헬레나 부부는 슬하에 아들이 딸보다 많지만(6남 3녀), 성별이 바뀐 요시아스와 알트부르크는 슬하에 아들보다 딸이 더 많다.(1남 4녀)
- 아들 비테긴트 추 발데크피르몬트는 슬하 3남을 두었다.
3. 대중매체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 카우카지엔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으로 등장하는데, 설정상 슈츠슈타펠이지만, 하인리히 힘러의 슈츠슈타펠 쿠데타가 진압되자 슈츠슈타펠을 빠르게 손절치고 회원증을 찢어버리는 쇼까지 해가며 힘러파라는 의심에서 벗어난 인물로, 꼼꼼하고 효율적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러시아 전쟁에서 자캅카스 빨치산에게 납치되어 고문을 받았던 흔적이 초상화의 긴 흉터로 남아있고, 고문받기 전엔 나치 기준으로 비교적 온건한 통치를 꿈꿨으나 고문받은 후엔 분노와 PTSD로 인해 빨치산 소탕과 억압통치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독일 본국이 보어만, 슈페어, 하이드리히, 괴링으로 나뉘어 내전이 일어나면, 부르군트와는 갈라섰지만 그대로 부르군트 체제를 유지하거나, 외무장관 파울 플라이거를 중심으로 하는 석유재벌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지만, 독일 본국과 연을 끊은 요지아스가 스스로를 카우카지아 왕국의 국왕 요지아스 1세라고 선언하거나 무정부상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리워크 예고에서는 카우카지엔의 지도자 자체가 바뀔 예정이라고 떴고 요지아스 루트는 사라진다고 한다.
[1] 어머니는 샤움부르크리페 후작 빌헬름의 딸인 바틸디스이다. 아버지 프리드리히의 넷째 누나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공녀는 빌럼 3세의 두번째 왕비가 되어 빌헬미나 여왕을 낳았다. 프리드리히의 다섯째 누나인 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는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와 결혼해 올버니의 앨리스 공녀와 카를 에두아르트를 낳았다. 이런 관계로 빌헬미나 여왕, 앨리스 공녀, 카를 에두아르트는 요시아스의 고종사촌이다. 또한 빌헬미나 여왕은 요시아스의 아내인 알트부르크 여공작의 외숙모이기도 하다.[2] Höherer SS- und Polizeiführer, HSSPF[3] SS-Wirtschafts- und Verwaltungshauptamt, SS-WVHA[4] Amt D[5] 직접 판사 역할을 한 것은 아니고 친위대 재판관에게 맡겼다.[6] 전선에 보내어 죄를 치르게 하던 일반적인 관행을 막기 위하여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를 떠나기 직전에 그를 총살형에 처했다.[7]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막내딸로, 알렉산드리네 왕비와 체칠리에 황태자비,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의 고종사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