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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0:34:49

요한 라텐후버


파일:슈츠슈타펠 문장.svg 친위대의 장성급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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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Johann Rattenhuber
요한 라텐후버
출생 1897년 4월 30일, 독일 제국 오버하잉크
사망 1957년 6월 30일, 서독 뮌헨
복무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중장 (집단지도자)
질서경찰 중장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초기 행적3. 나치 행적4. 전범 행위5. 전후 재판과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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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요한 라텐후버 컬러.jpg
친위대 여단지도자 라텐후버
나치 독일친위대 집단지도자질서경찰 중장.

2. 초기 행적

뮌헨 근교의 오버하잉크에서 태어났다. 뮌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입대를 희망하는 졸업예정자들을 위한 전시아비투어에 합격한 뒤 곧바로 바이에른 보병연대에서 복무했다. 이후 1급, 2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하며 군공을 올린 덕에 1918년 소위로 진급했고, 종전 후 1920년 바이에른 바이로이트에서 경찰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1922년에는 뮌헨 지부로 발령난 뒤 경찰간부로 승진한다. 이후 계속 바이마르 공화국 하 경찰로 일하다가 1933년나치당슈츠슈타펠에 입대한다.[1]

3. 나치 행적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자 바이에른 내에서 히틀러의 경호를 맡을 전문적 인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동년 바이에른 형사경찰들로 이루어진 총통경호부대[2]가 창설되었고 라텐후버도 이 곳에 참여한다. 1934년 총통경호부대는 바이에른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의 히틀러 경호 임무를 맡게 되었고 이듬해 국가보안위원회로 개칭되었다.[3] 위원회장 자리는 하인리히 힘러가 맡았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라텐후버가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로부터 직접적인 명령을 지시받을 수 있었으며 실제로 그러했다. 이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RSD는 히틀러 뿐만 아니라 여타 나치 고관들에 대한 경호 임무 또한 맡았다. 때때로 타 조직인 총통호위사령부[4]와 합동으로 호위 임무를 진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도 총괄 지휘는 라텐후버가 맡았을 정도로 고위직 경호 업무는 사실상 그가 전담했다.

4. 전범 행위

라텐후버는 히틀러가 동부전선독일군 사령부로 가서 현장 상황을 보고받고 지휘할 때에도 그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방문할 수 있는 사령부들은 건설 이전에 아예 부지부터 라텐후버가 찾아나서야 했다. 이에 라텐후버는 여러곳들을 탐사했고,[5] 1942년 우크라이나 비니치아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에도 사령부 부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6] 그러고선 뜬금없이 해당 지역 주둔 SS 지휘관들과 관계자들에게 그해 여름 히틀러가 도착하기 전에 부근의 유대인들을 모두 제거할 것을 지시했는데, 기껏 타 조직에 지시해놨음에도 휘하 RSD 부대가 유대인 237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라텐후버가 직접 지시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지시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RSD는 부여받은 임무상 인원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개전 당시 200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라텐후버가 부대의 전권을 휘어잡고 있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작은 규모인데 그의 명령 없이 처형식이 일어났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건 이후 그의 부관이 그에게 직접 보고를 한 것도 그가 지시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현실적으로 사후보고를 할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5. 전후 재판과 최후

파일:라텐후버2.jpg
1945년 1월 히틀러 및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퓌러붕커에 입주했으며, 4월 28일 힘러의 배신 소식이 히틀러에게 전해지자 그의 부관인 헤르만 페겔라인을 재판하는 군사재판을 한스 크렙스,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빌헬름 몽케와 함께 주재했다. [7] 다음날인 4월 29일, 히틀러는 라텐후버를 불러 그의 이제까지에 대한 노고에 감사하다는 뜻과 다음날인 30일에 있는 라텐후버의 생일을 미리 축하한다는 뜻을 밝히며 자신의 자살 의사를 밝혔다. 라텐후버는 히틀러를 설득했지만 이미 히틀러는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히틀러 사망 후 5월 1일 그는 퓌러붕커에서 빠져나온 세개의 그룹 중 하나를 이끌며 베를린 탈출을 시도했으나 바로 다음날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이후 1951년 11월 16일까지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히틀러의 최후에 관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5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군 군법회의에서 나치 집권 기간 동안의 고위직 신변 보호에 대한 혐의로 징역 2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955년에 석방되어 동독으로 인계되었다.[8] 1956년서독으로의 귀국이 인정되어 돌아온 라텐후버는 1년 후 뮌헨에서 사망했다.
[1] 아이러니하게도 경찰로 재직 중이던 1931년 허가받지 않은 나치당 산하 조직의 체포와 이송을 맡았던 적이 있다.[2] Führerschtzkommando, FSK[3] Reichssicherheitsdienst, RSD[4] Führerbegleitkommando, FBK. RSD가 구 바이마르 공화국 출신 형사경찰들이 시초인 것과 다르게 FBK는 순전히 히틀러의 사조직인 SS 출신 대원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이 시초였다.[5] 히틀러가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끔살당할 뻔한 곳이었던 볼프산체 또한 라텐후버가 선정한 부지였다. 다만 암살 시행자의 정체에 대해서 정말 아무도 예상을 못했기 때문에 그의 책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6] 히틀러가 방문한 사령부들 중 가장 동쪽에 있던 곳으로, 후에 베어볼프로 불리게 된다.[7] 다만 페겔라인이 도저히 재판을 받을 만한 정신적 상태가 되지 못한다는 게 이들의 의견이었기에 결국 재판을 중단하고 라텐후버의 RSD에 페겔라인을 구금시키기로 결정했다.[8] 서방국도 아니고 소련이 조기 석방시켜준 사례는 드문데, 아마 고문을 너무 심하게 해서 곧 죽을 것 같기에 내보낸 것이거나 라텐후버가 전투직이 아닌 경호직에 있었기에 다른 전범들보다 죄의 경중이 낮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