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 친위대 명예 상급집단지도자 프리츠 자우켈 Fritz Sauckel | ||
본명 | <colbgcolor=#ffffff,#191919>Ernst Friedrich Christoph "Fritz" Sauckel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프리츠" 자우켈 | |
출생 | 1894년 10월 27일 | |
독일국 바이에른 왕국 하스푸르트 | ||
사망 | 1946년 10월 16일 (향년 51세) |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 ||
정당 | ||
계급 | 슈투름압타일룽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슈츠슈타펠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
시민권 | 독일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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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츠 자우켈 (Fritz Sauckel) |
2. 초기 행적
하스푸르트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한 뒤 15세 때부터 선원으로 일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항해 도중 배가 연합군에 의해 배가 나포되어서 프랑스에 억류되기도 했다. 전후인 1919년 풀려난 뒤 독일로 귀국해 공장 노동자로 일했다.3. 나치당 입당
1923년에는 나치당에 입당했으며, 1927년에는 튀링엔 대관구의 관구장(Gauleiter)에 선임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수상이 된 뒤에는 제국의회 의원과 튀링엔 대관구의 제국 지도자로 승격되었으며 돌격대와 친위대의 명예 상급집단지도자 계급도 부여받았다.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카셀의 제국 국방위원을 역임했고, 1942년 3월 알베르트 슈페어의 추천으로 제국 전권 노동 감독관이 되었다. 독일 내의 많은 노동 가능 인원들이 징집되어 노동 인력이 부족해지자, 점령지에서 약 500만 명에 달하는 인력을 독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자들 중에는 자원해서 독일로 간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 강제로 징용되어서 기본적인 생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우를 받거나 탄압을 받았다.5. 전후 재판과 최후
종전 후에는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중에 자우켈은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그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실 재판관들 사이에서도 사형 선고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고, 특히 자우켈의 상관이었던 슈페어가 훨씬 가벼운 20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일부 방청객들은 슈페어가 살아남기 위해서 자우켈에게 교묘하게 책임을 떠넘겼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1]사형 집행은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교수형이었고, 교수형이 집행 직전 최후 진술에서 "나는 무고하게 죽는다. 내 형량은 불공평하다. 신이여, 독일을 보호하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사망 후 시체는 자살한 헤르만 괴링을 포함한 사형수 11명의 유해와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에서 화장된 후 유골은 미 육군에 의해 공개되지 않은 채 강에 뿌려졌다.
[1] 다만 슈페어는 연합군에게 나치 독일에 대한 광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줬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독일이 저지른 재앙은 잘못됐다며 양심 선언과 1945년 초에 히틀러 암살 작전을 계획했다며 자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