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아우구스트 에들러 폰 마이츠너 August Edler von Meyszner | |
출생 | 1886년 8월 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라츠 | |
사망 | 1947년 1월 24일 (향년 60세) |
유고슬라비아 FNR 베오그라드 | |
국적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군인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슈투름압타일룽 슈츠슈타펠 질서경찰 |
신체 | 193cm |
계급 | 돌격대 상급돌격대지도자 친위대 집단지도자 질서경찰 중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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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와 카를 볼프 |
2. 초기 행적
3. 정치 및 경찰 행적
1925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폰 마이츠너는 우익 정치인,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당을 금지하면서 폰 마이츠너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헌병대에서도 강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폰 마이츠너는 돌격대에 들어갔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만났다. 7월 폭동으로 체포된 폰 마이츠너는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로 도주했고, 동료였던 콘스탄틴 카머호퍼[1]도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했다.SS상급대령 폰 마이츠너 |
질서경찰 제복을 입은 폰 마이츠너 |
왼쪽부터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쿠르트 달루게,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 요제프 피츠툼이다. |
1939년 4월 20일 경찰 소장으로 진급한 폰 마이츠너는 6월 카셀의 질서경찰 감독관으로 1940년 9월 10일까지 복무했다. 1940년 4월 20일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1943년에 입당하여 나치당원이 되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전쟁이 발발한후 폰 마이츠너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1940년 초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에 의해 풀다-베라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임명됐다. 9월 10일 하인리히 힘러는 노르웨이에서 친위대 대장 빌헬름 레디스와 협력할 질서경찰 지휘관으로 폰 마이츠너를 지명했다.SS중장 폰 마이츠너 |
폰 마이츠너는 1942년 1월 24일부터 1944년 4월 1일 세르비아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나는 살아있는 세르비아인보다 죽은 세르비아인이 더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폰 마이츠너와 아르투어 플렙스 |
1944년 4월 독일로 돌아와 합병, 점령 지역의 헌병 및 보안경찰 감독관 직을 맡았다.
5. 전후 행적
전후 폰 마이츠너는 빌헬름 푹스 등과 유고슬라비아에 넘겨졌고 사형을 선고받아 1947년 1월 24일 베오그라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1] 폰 마이츠너처럼 나중에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으로 승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