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0:12:00
}}}}}}}}} ||
<colbgcolor=#000><colcolor=#fff> 아우구스트 에들러 폰 마이츠너 August Edler von Meyszner |
|
출생 | 1886년 8월 3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라츠 |
사망 | 1947년 1월 24일 (향년 60세) |
유고슬라비아 FNR 베오그라드 |
국적 |
#!if 행정구 == null && 속령 == null
[[나치 독일|{{{#!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나치 독일}}}{{{#!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속령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특별행정구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행정구}}}{{{#!if 출력 != null
}}}}}}]]
#!if 국명 == null && 행정구 == null
[[틀:국기|{{{#!wiki style="display: inline; color: ;"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 middle; border: .0625rem solid #ddd;" dark-style="border-color: #383b40;"
[[파일: 기.svg|width=24]]}}} {{{#!if 출력 == null
속령}}}{{{#!if 출력 != null
}}}}}}]] |
직업 | 군인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슈투름압타일룽 슈츠슈타펠 질서경찰 |
신체 | 193cm |
계급 | 돌격대 상급돌격대지도자 친위대 집단지도자 질서경찰 중장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clearfix]오스트리아 출신 독일의 정치인,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질서경찰 중장이다.
2. 초기 행적
아우구스트 폰 마이츠너는 1886년 8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귀족 루돌프 에들러 폰 마이츠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폰 마이츠너는 왕립 연대에서 장교 생활을 했으며, 1914년 오스트리아 헌병대에서 복무하기 사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폰 마이츠너는 헌병대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하지만 패전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무너지면서 사회적 지위를 상실했다.
3. 정치 및 경찰 행적
1925년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입당한 폰 마이츠너는 우익 정치인, 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엥겔베르트 돌푸스가 나치당을 금지하면서 폰 마이츠너는 의원직을 상실했고, 헌병대에서도 강제적으로 은퇴했다. 이후 폰 마이츠너는 돌격대에 들어갔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나치 지도자들을 만났다. 7월 폭동으로 체포된 폰 마이츠너는 탈출하여 유고슬라비아로 도주했고, 동료였던 콘스탄틴 카머호퍼도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했다.
독일에 도착한 폰 마이츠너는 일반친위대에 입대 신청을 하여 1935년 2월 14일 상급대령 계급을 부여받았다. 또한 5월에 독일 시민권을 얻었으며 질서경찰에도 합류했다. 그는 돌격대에서 명예 제대를 했고, 아직 경찰이 친위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10월 친위대에서 사임했다. 이후 1937년 10월 친위대 재입대가 허용되었고 상급대령으로 복귀했다. 1938년 3월 18일 경찰 대령으로 승진했고, 4월 12일부터 오스트리아 질서경찰의 감독관으로 에른스트 칼텐브루너에게 배정되었다. 그러나 폰 마이츠너는 칼텐브루너와 충돌했고 결국 쿠르트 달루게가 개입해야 했다.
1939년 4월 20일 경찰 소장으로 진급한 폰 마이츠너는 6월 카셀의 질서경찰 감독관으로 1940년 9월 10일까지 복무했다. 1940년 4월 20일 친위대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여전히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1943년에 입당하여 나치당원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한후 폰 마이츠너는 여러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1940년 초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에 의해 풀다-베라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임명됐다. 9월 10일 하인리히 힘러는 노르웨이에서 친위대 대장 빌헬름 레디스와 협력할 질서경찰 지휘관으로 폰 마이츠너를 지명했다.
1942년 1월 1일 폰 마이츠너는 친위대 집단지도자 및 경찰 중장으로 승진했다.
폰 마이츠너는 1942년 1월 24일부터 1944년 4월 1일 세르비아의 친위대 경찰지도자로 부임하면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다. 실제로도 "나는 살아있는 세르비아인보다 죽은 세르비아인이 더 좋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폰 마이츠너는 프린츠 오이겐의 사단장 아르투어 플렙스와 새로운 사단 형성에 대해서 논의하기도 했었으나 베를린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1944년 4월 독일로 돌아와 합병, 점령 지역의 헌병 및 보안경찰 감독관 직을 맡았다.
5. 전후 행적
전후 폰 마이츠너는 빌헬름 푹스 등과 유고슬라비아에 넘겨졌고 사형을 선고받아 1947년 1월 24일 베오그라드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