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이르마 그레제 Irma Grese | |
본명 | 이르마 아이다 일제 그레제 Irma Ida Ilse Grese |
출생 | 1923년 10월 7일 |
바이마르 공화국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 |
사망 | 1945년 12월 13일 (향년 22세) |
연합군 점령하 독일 하멜른 하멜른 감옥 |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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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악명을 떨쳤던 슈츠슈타펠 여성보조대원이자 여성 수용캠프의 감독관 및 여성 간수 지휘관.2. 생애
2.1. 나치당 가입
독일 북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에서 평범한 농부의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난 이르마는, 13살 때 어머니 베르타가 일찍 자살하여 동생들과 함께 아버지 알프레트 그레제 밑에서 자랐다. 베르타는 남편이 인근 주점 주인의 딸과 불륜관계를 가졌음을 알고, 염산을 마시고 자살했다.이르마는 15살에 이상행동을 보여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여 자퇴하였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당시 독일을 강타하고 있던 나치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아버지 알프레트도 1937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단 설이 있다. 1939년엔 아버지가 재혼했다.
1938년부터 이르마는 농장과 매장 일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의학 공부를 했고, 1940년에 독일이 여성보조대원제도란 이름으로 여군[1] 제도를 도입함에 따라 슈츠슈타펠의 SS 부상병 요양캠프의 간호보조원으로 들어가 2년간 복무하였는데 그곳의 일을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번번히 시험에 떨어져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간호사를 포기하고 간수가 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치당에 가입하고 여간수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후 레벤스르북 강제 수용소 임무를 자원하게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반나치주의자로서 딸이 수용소 임무를 지원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라벤스브뤽(Ravensbrück)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 다른 여간수들처럼 교육을 받은 후 1943년 3월에 그들의 주 근무지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이동하였다. 당시 신참 여간수들은 이곳에서 교육을 받아 아우슈비츠로 향했는데, 대부분의 신참 여간수들은 배급과 생활환경 면에서 이곳을 더욱 선호했다.
2.2. 전쟁 중의 만행
한편 이르마는 남성 수감자들을 홀려 강간하거나 자신의 성노예로 삼는가 하면 특유의 미모로서 많은 남성 간부들과 염문설을 퍼뜨리기도 하였는데, 이 중에는 그녀가 근무하던 비르케나우 수용소장인 요제프 크라머와 죽음의 천사로 유명한 요제프 멩겔레도 있었다.
1945년 1월에 아우슈비츠가 소개됨에 따라 잠시 라벤스브뤽 강제수용소에 있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다시 한 번 악명을 떨치면서 1945년 3월까지 노동서비스국장직을 수행하였다.
당시 수감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폭력을 통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듯 했다. 예쁜 여죄수들만을 골라 채찍으로 얼굴을 때리며 즐거워했다. 우리 감옥에 있던 예쁜 아이가 철조망을 통해 배관공과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아이의 얼굴을 채찍으로 내리쳤다. 그 아이는 한쪽 눈을 잃었다."
"그녀는 전쟁 후에 영화배우가 되는 것을 꿈꿨다. 재단사에게 항상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만들도록 했다."
"그녀는 모든 이유를 통틀어서 아무런 이유로 구타를 했다. 만약 이르마 그레제라는 여자가 온다면 우리는 때때로 8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무거운 돌들을 머리 위로 올려놓아야 했다."
한편 이르마는 여성 죄수들과 성관계를 가지면서 엽기적인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녀는 마그다와 니나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곤 했다. 그 대가로 여분의 음식과 그녀의 관심을 받았다."그녀는 전쟁 후에 영화배우가 되는 것을 꿈꿨다. 재단사에게 항상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만들도록 했다."
"그녀는 모든 이유를 통틀어서 아무런 이유로 구타를 했다. 만약 이르마 그레제라는 여자가 온다면 우리는 때때로 8시간 동안 무릎을 꿇고 무거운 돌들을 머리 위로 올려놓아야 했다."
마그다라는 여성의 희고록에 따르면[4] "그녀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자신과 이야기하려 했으며, 마치 나를 큰언니처럼 대하듯이 친숙하게 대했다"고 한다.
그녀가 말하길,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한때 호엔라이헨 요양원에서 카를 게프하르트 박사와 함께 일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를 '나치당의 성인'이라며 숭배했다. 당시 마그다는 게브하르트가 누군지 몰랐지만, 전쟁이 끝난 후 그가 나치가 인간 이하의 존재로 간주하는 유대인 같은 사람들을 실험한 가장 초기 의사 중 한 명인 것을 알게 되었다.
마그다는 그녀의 잔혹함을 그동안 보지는 못했지만, 어느 날 점호 도중 가슴에 심하게 피를 흘리는 4명의 여자가 자신에게 다가왔고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물으니 "그레제가 채찍으로 때렸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불쌍한 여자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저들은 아마 감염되어 죽을 것이다! 창피한 줄 알아라!"라고 말했으나, 그녀는 마그다에게 채찍을 들며 "나 또한 너를 공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후에 그녀는 마그다에게 용서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2.3. 최후
재판에서 그녀는 자신의 전쟁범죄를 부인하였으나 수감자들을 학대한 증거들이 드러나면서 이로 인해 결국 유죄가 확정되어, 다른 여간수 11명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았다. 후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다.[5] 처형 전날 밤 웬디 아델-마리 사티에 의하면, 그녀는 요한나 보르만과 함께 새벽까지 나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녀는 22세 생일 몇 달 후인 1945년 12월 13일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이때 마지막으로 빨리 죽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Schnell"(quickly)이라고 나지막히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형 과정에 문제가 생겨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이르마는 롱드롭식으로 처형되었는데, 교수형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이 방식은 원래 목뼈를 박살내 즉시 죽이는 것이지 천천히 질식사시키는 것이 아니다. 형 집행은 영국의 유명 사형집행인인 알버트 피에르포인트(Albert Pierrepoint)가 맡았는데, 단번에 보내기로 유명한 실력자였음에도 여기서 실수를 했다.[6]
2.4. 잘못 알려진 사진
이 사진에서 왼쪽의 채찍을 든 여성 간수가 그녀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폴란드에서 유대인 학살을 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제이 뭉크, 위톨드 레시비에치 영화 <승객>의 캡쳐 사진이다. 배우는 알렉산드라 슬라스카(Aleksandra Slaska, 1925.11.4.–1989.9.18.)로 이르마보다 2살 어리다.
3. 기타
헬렌 그레제라는 여동생이 참고인 명목으로 증언한 내용에 의하면, 어린 시절 이르마는 누군가를 때리기보다는 도망갈 성격이었다고 한다. 권력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 교수형 2주 전 이르마는 헬렌에게 편지를 썼는데, 내용을 보면 교수형을 매우 두렵고 끔찍하게 여긴 모양이다. Anneli라는 법원 관찰자와 또 엽기적인 우정을 나누었는지, 그녀가 자신에게 교수형 대신 자살할 독극물을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며 "스스로 끝을 맺음으로써 형을 피할 수 있어서 좋다"고 썼지만, 편지 내용과 달리 결국 교수형을 당했고 그조차도 본인의 우려대로 아주 고통스럽게 죽었다.
- 나치 전범이지만 파격적인 펨돔 혹은 사디스트 성향의 여성 캐릭터여서 그런지 나치를 비판, 패러디하는 코믹한 컨셉의 애로영화나 콩트, 애니메이션 등의 매체들에 그녀를 컨셉으로 한 캐릭터가 자주 등장한다. 미모의 여성이어서 매력적인 악녀 컨셉을 받고 나치에 대해 서양보다 비교적 덜 민감한 일본 등지에서는 아예 미화되어 묘사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 그녀의 아버지인 알프레트는 1899년생이며 그녀가 사형당한 지 한참 후인 1979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 1937년 나치 당원이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의식은 있어서 딸이 SS에 입대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며 그녀를 집에서 쫓아낼 정도였다.
- 그레제처럼 새파란 나이에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여성 간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도 있었다.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7]의 소장이던 딘코 사키치의 부인 나다 사키치는 16세 정도 되던 1942년 스타라 그라디슈카 수용소[8]의 간수가 되었고, 유럽 전선에서의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5월 기준 18세였다. 모든 악행을 미성년자 때에 저질렀다는 것인데, 그 그레제조차 19세에 아우슈비츠 간수가 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다가 얼마나 어린 나이에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다만 독일, 크로아티아 기준으로는 18세부터 성인이다.
[1] 군복과 계급만 있는 군무원에 가까웠다.[2] 이르마에게 맞아 죽은 수감자도 수두룩했다고 한다.[3] 특히 군견에게 여성을 공격하라고 반복적으로 명령했다고 한다.[4] 출처[5] 빨리 죽고 싶어 아무 말 없이 무덤덤하게 사형을 받아들였다는 설도 있는데, 어느 일화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교수대 앞에서 "Schnell(빨리)"라고 말한 일화가 확실한 걸로 봐선 신빙성 없는 내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6] 일부러 실수해서 고통스럽게 죽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알버트는 이런 주장에 대해 극도로 불쾌감을 드러내며 부정했다. 아버지에 이어서 2대째 사형 집행인을 하던 그는 자신의 일에 전문가 의식이 강한 남자였다.[7] 야세노바츠는 SS 병사들조차 기겁할 정도로 잔인한 수용소였다.[8]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의 부속 수용소였다. 야세노바츠 못지않은 잔인한 곳이었으며, 나다는 이 수용소의 여성 간수 중에서도 가장 잔혹한 자였다고 한다. 남편보다 더 잔혹했다는 증언까지 나왔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