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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F51BA><colcolor=#ece5b6> 유송 제7대 황제 후폐제 | 後廢帝 | |||
출생 | 463년 3월 1일 | ||
유송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쉬저우시) | |||
즉위 | 472년 5월 11일 | ||
유송 단양군 건강현 (現 장쑤성 난징시) | |||
사망 | 477년 8월 1일 (향년 14세) | ||
유송 단양군 건강현 신안사 (現 장쑤성 난징시) | |||
능묘 | 단양군 말릉현 남교 단서 | ||
재위기간 | 유송의 황제 | ||
472년 5월 11일 ~ 477년 8월 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F51BA><colcolor=#ece5b6> 본관 | 팽성 유씨 | |
휘 | 욱(昱) | ||
부모 | 부황 태종 모후 창오왕태비 | ||
형제자매 | 11남 4녀 중 장남 | ||
배우자 | 강간규(江簡珪) | ||
아명 | 혜진(慧震) | ||
자 | 덕융(德融) | ||
작호 | 창오왕(蒼梧王) | ||
제호 | 후폐황제(後廢皇帝) | ||
연호 | 원휘(元徽, 473년 ~ 477년) |
[clearfix]
1. 개요
중국 육조시대 유송의 제7대 황제. 명제 유욱(劉彧)의 장남으로 그야말로 인간도살자이자 쾌락살인을 일삼은 최악의 폭군이다. 아버지와 이름의 한자는 다르지만 음이 같기 때문에 소(小) 유욱이라 부른다.폐위를 당한 황제라서 묘호도 시호도 없으므로 폐제(廢帝)라고 하는데, 유송에는 폐제가 유욱 이전에 전폐제 유자업[1]이 있었으므로 후폐제(後廢帝)라고 하거나 황제가 되기 전 봉호인 창오왕(蒼梧王)으로 불러서 구별한다.
2. 생애
대명(大明) 7년(463) 정월 아버지 명제 유욱과 어머니 진묘등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총명해서 의복을 재단하거나 모자를 만드는 모습을 한 번만 보아도 곧장 만들었고 한 번도 불 어본 적이 없는 악기도 금방 배워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2] 어릴 때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어서 높은 장대나 천막 기둥에 기어 올라가길 좋아했고 밥 먹을 때가 되어서야 내려오곤 했으며 어머니한테서 핀잔을 자주 듣고 종아리까지 맞을 정도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고 한다.그는 겨우 9살이라는 나이에 즉위한 어린아이였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서 연장을 만들었는데 자기 재능과 열정을 총동원해서 심혈을 기울여 집게, 끌, 송곳, 망치, 톱 등을 만들어 소중히 다루고 직접 하나하나 이름까지 붙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나이대에 흔한 모험심이 강한 개구쟁이 어린이처럼 보일 것이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역사에 특이한 취미를 가진 황제로 남았을 뿐이겠지만 그는 심각할만큼의 잔인함과 포악함을 가지고 있었다.
2.1. 잔혹성
문제는 그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만든 연장들로 나무나 돌이 아니라 산 사람을 썰고 분해하며 노는 쾌락살인을 즐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황제 즉위 초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려 태후와 태비는 물론이고 여러 대신들을 무서워해서 그들에게 멋대로 굴지 못했지만[3] 원복(元服)을 마친 12세 무렵부터는 안팎에서 통제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절제력이 완전히 결여된 모습을 보였는데 수레와 두세명의 기병들을 데리고 궁성 밖 10~20리에 있는 시장에 난입하여 상인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476년 7월에 유경소가 일으킨 반란이 진압되자 더욱 난폭해져 하루도 빠짐없이 창과 몽둥이를 든 부하들을 대동하여 의관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짧은 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가 '저녁에 나가면 새벽에 돌아오고, 새벽에 나가면 해질 무렵에 돌아왔다'고 한다. 이때 수도 건강의 길가에서 그와 마주친 사람이나 동물들은 단 하나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가 이런 짓을 하루에 수십 차례나 하다 보니까 대낮에도 상인들은 물건을 팔지 않았고 길에는 사람들의 인적이 끊겼으며 사람들은 날카로운 무기를 항상 자신의 곁에 두었고 작은 것이라도 뜻을 거스르면 즉시 죽여서 갈랐다고 한다.
거기에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몹시 슬픈 것처럼 즐거워하지 않았으니 궁궐 안의 사람들은 근심과 두려움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 먹거나 숨을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477년 6월 22일에 산기상시 두윤문, 사도부의 좌장사 심발, 유격장군 손초[4]가 반란을 모의했다는 보고가 오자 그는 호위하는 무사들을 대동하고 직접 세 사람의 집에 엄습해 이들을 모두 손수 죽인 것도 모자라 톱으로 썰고 해부하였는데 한술 더 떠서 그들의 가족들에게도 이런 짓을 똑같이 했고 심지어 젖먹이 아기까지도 그의 악행을 피하지 못했다.
심지어 당시 심발은 상을 당했던 상황이었는데 호위 무사들이 도착하자 그는 칼을 휘두르며 홀로 심발에게 왔고 심발은 황제의 뺨을 손으로 때리고 너의 죄는 걸주를 뛰어넘는 것이니 도륙되는 것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 후 살해당했다. 거기다 그는 이 잔혹한 악행 직후 반역자 숙청 성공을 기념하는 의미로 죄수들을 대거 사면했다고 한다. 본래 전근대에는 군주 본인이나 그 배우자 및 자녀가 병을 완치했다거나 적군이나 반란군을 토벌하는 등의 경사에는 죄인들을 사면하는 일이 잦긴 했지만 그는 그냥 죄없는 사람의 일가족을 도륙내고 이를 거국적인 경사랍시고 이런 일을 벌였다.[5] 심지어 전술한 내용들은 야사가 아니라 자치통감에 기록된 엄연한 정사의 내용이다.
거기다가 그는 항상 쇠몽둥이를 옆에 끼고 살았는데 매일 그 쇠몽둥이로 사람을 패서 죽여야 밥을 먹고 잠에 들었다고 하며 시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이 와중에 목격자 중 살인 광경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부하라도 손수 긴 창으로 찔러 죽였다. 모반을 꾀한 죄목으로 잡혀온 죄수들을 직접 살해한 후 능지형에 처하거나 심지어 불심이 깊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며 승려를 묶어서 몸을 해체한 후 죽을 때까지 끌고 다니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매일매일 10명 이상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다.[6]
당연히 태비는 그의 태도에 경악하여 여러 번 훈계를 했는데 그는 자신의 잘못은 전혀 반성조차 하지 않은 채 친어머니에게 독주를 먹여 죽이고자 했으나 좌우에서 만류하여 그만뒀다고 한다. 그가 받아들였다는 충고의 내용이 참 기가 차는데 대략 "태비가 죽으면 폐하는 복잡한 상례를 치러야만 합니다. 그러면 놀러 나갈 시간이 없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고. 살인을 그렇게 즐기는 놈이 밤에 자려 하면 다음 아침이 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고 한다.
사실 그의 부친 명제 유욱도 이와 비슷한 일로 전폐제에게 살아난 일이 있었는데 전폐제의 첫 아기가 태어날 때가 다가오자 기념으로 유욱을 죽이려고 하다가 다른 삼촌이자 유욱의 이복동생 유휴인이 전폐제에게 아직 황자께서 태어나시지 않았으니 태어난 뒤에 죽이셔야 의미가 있을 것이옵니다라고 설득하여 죽지 않고 넘어갔다. 살아서 풀려나온 유욱이 이후 사람을 시켜 전폐제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되었다.
2.2. 출생의 비밀
그는 명제 유욱의 장남이라고 하지만 명제가 어느 순간 고자가 되어[7] 불임이 됐기 때문에 친자식이 아니었는데 아버지 유욱이 부인이었던 진묘등을 총애하는 심복 이도아(李道兒)에게 하사했다가 임신하자 나중에 돌려받은 다음 낳은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고자라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일종의 씨내리로 사용한 듯하다.그래서 항간에서는 이도아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가 즉위한 후 ''짐은 이장군(李將軍)이다!''라고 자칭함으로써 유씨가 아니라 이씨의 혈통임을 스스로 폭로했다.[8]
왕조에서 제왕 자신이 황실의 혈통이 아니라고 밝히는 것은 사실상 자신은 황제지만 황실의 혈통과 아무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자기 스스로 정통성을 없애는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하극상 내지 내란의 명분을 완벽하게, 그것도 자발적으로 제공한 셈이다.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9]
2.3. 소도성에 대한 위협
이 일로 계양왕(桂陽王) 유휴범이 난을 일으켰지만 유휴범은 폭군 유욱의 정통성을 명분으로 삼은 게 아니었으며 무능한 주제에 자신이 유일하게 남은 숙부라면서 재상으로 임명해 달라고 유욱을 꼬셨으나 말을 듣지 않자 앙심을 품고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물론 송서가 남제 때 편찬되었기 때문에 이 일화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우위 장군 소도성은 거짓 투항으로 유휴범을 안심시킨 뒤 그를 살해함으로써 난을 평정했다.이어 원휘 4년에 유욱의 폭정을 보다 못한 24세 건평 난왕(建平赧王) 유경소의 난도 소도성이 평정했다. 유경소가 옹립된 이유는 단 2가지였는데 장성했으며 정신도 멀쩡했기 때문으로 더 이상의 조건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소도성은 잇따른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점점 명성을 높이고 친위군의 실권을 장악해 나갔다.
이렇듯 소도성이 유휴범, 유경소의 반란을 평정한 것이 되려 소도성이 찬위의 뜻이 있었다고 보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유송 왕조에 충성심이 남아있던 신하들은 대부분 유경소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대(소도성)에게는 아무리 황제라도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정상이지만 그는 그 정도의 개념조차 갖추지 못했다. 소도성을 질투하여 나무로 소도성을 조각하고 조각상을 과녁 삼아 시종들과 함께 활을 쏘았으며 심지어 한여름 더운 낮에 낮잠을 자고 있는 소도성의 막사에 몰래 들어가 윗통을 벗은 뚱뚱한 소도성의 배에 그가 자는 동안 과녁을 그려 놓고 활로 쏘아 즉사시키려고 한 적도 있었다. 놀란 주변 내관들이 "이렇게 좋은 과녁을 한번만 쓰고 버리시렵니까?"(...)라고 간언한 덕에 진짜 화살로 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 소도성의 배를 쏘면서 자신의 활 솜씨를 자랑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파멸을 초래한 최악의 선택이었다. 자기가 황제이고 소도성은 그저 장군이라는 사실 때문에 소도성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소도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의 밑에 이대로 있다가는 본인도 언젠가 죽게 될거라는 생각에 소도성은 월기교위 왕경칙(王敬則)과 힘을 합쳐 양옥부(楊玉夫), 양만년 등 유욱의 심복 10여 명과 비밀리에 손을 잡았다.
2.4. 최후
7월 7일 칠석날 밤 그는 변복을 하고 절간에 가서 개를 훔쳐 삶아 술과 함께 먹고 궁궐에 돌아온 뒤 양옥부에게 "너는 오늘 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는 것을 보면 당장 보고하라. 하지만 보고하지 못하면 내일 죽으리라"는 으름장을 놓고 잠들었다. 하지만 양옥부는 사전에 소도성에게서 지시를 받은 터라 그가 깊이 잠들자 그가 아끼던 수제 살인 도구를 꺼내들고 그의 목을 베었다. 살해당할 때의 나이는 오늘날로 치면 중학교 2학년밖에 안되는 고작 만 14세였다.양옥부는 후폐제를 암살하고 그 머리를 왕경칙에게 바쳤다. 왕경칙은 후폐제의 머리를 가지고 소도성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소도성은 그가 이렇게 죽을 거라는 것을 예상 못한 터라 처음에는 놀란 나머지 믿지 않았으나 후폐제의 머리를 연못에 씻고 확인하니 과연 맞았다. 이에 소도성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황궁을 점령한 다음 정권을 장악했다. 왕경칙은 그의 죽음에 기뻐하며 소도성에게 바로 황제에 즉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무관이라도 유학자 뇌차종(雷次宗)에게서 학문을 어느 정도 배운 소도성은 선양이라는 미덕을 알고 있어서 일단 선양의 선배들[10]처럼 바로 황제가 되지 않았다. 소도성은 진태후를 협박해 폐제 유욱을 창오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정변을 정의를 위한 정당한 반란으로 인정하게 했다.
후폐제의 시신은 단양 말릉현 남교단 서쪽에 안장되었다. 당연히 그가 죽자 슬퍼해주는 백성들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많은 백성들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11]
3. 평가
사신은 말한다. 나라를 잃은 군주는 비록 마지막에 같은 길을 걷더라도 출발은 어쩌면 달랐을 것이다. 전폐제(前廢帝)는 천박하게 노늴었고 호사스러웠으며, 전령을 내려서 길을 열었다. 창오왕(蒼梧王)은 옥새를 숨겼고 노닐고 돌아가는 것을 잊었으며, 옷차림이 단정하지 못했고 홀로 말을 타고 먼 곳으로 떠났다. 목숨을 잃고 제위가 엎어지는 것에 대해서 그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희하(姬夏)의 융성과 비교하면 자질과 문덕이 오히려 달랐으니 망국의 도리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 《송서》의 <후폐제 본기> 사론
― 《송서》의 <후폐제 본기> 사론
그야말로 쾌락살인만 일삼은 최악의 폭군으로 흔히 중국 3대 폭군이라 불리는 수양제와 해릉양왕과 비교될 수준이다.[12] 과장 좀 보태면 라나발로나 1세와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폴 포트, 그리고 북한의 김씨 왕조[13]와도 비견될 수준.
후세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행동에 치를 떨었으며 심지어 어느 사관은 소도성이 제위를 찬탈하고 황족이었던 유씨를 멸족한 것에 대하여 "유욱 때문에 유씨가 황제 행세할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며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다. 유송을 멸망시킨 남제에서조차 건평난왕(建平赧王) 경소(景素), 상서령(尙書令) 원찬(袁粲), 상서 유병, 형주자사(荊州刺史) 심유지(沈攸之)를 신원하고 예로서 그들을 다시 안장했다.[14]
그나마 긍정적인 평가가 전혀 없는 이런 최악의 폭군이자 암군에게도 변명할 거리가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연쇄살인, 쾌락살인의 끼가 보였음에도 부모나 황궁 사람들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황도 마찬가지로 암군이면서도 아들의 끼를 걱정했지만 그런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별다른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15] 쾌락살인이 취미가 된다면 제프리 다머처럼 중독이 되어 끊기 어렵다. 오히려 한 번만 쾌락살인을 하고 그 이후엔 공식적인 살인이 한 건도 없는 사가와 잇세이의 사례가 신기할 정도다.
또다른 변명거리도 있는데, 유욱의 악행들에 대한 기록이 비현실적이어도 너무 비현실적인지라 최근에는 유욱의 악행은 권력 찬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소도성의 프로파간다성 날조라는 설이 우세를 얻어가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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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3f51ba><tablebgcolor=#3f51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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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전(列傳) ]
- ||<-6><tablewidth=100%><tablebgcolor=#000000> 11·12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은숙의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 진도정 · 유지용 · 배혜소 · 왕보명 · 하정영 · 왕소명 · 유혜단 · 저영거 · 왕순화 · 장상유 · 치휘 · 왕영빈 · 정영광 · 완영영 · 서소패 · 장요아 · 심묘용 · 왕황후 · 유경언 · 심무화 · 장여화 13·14권 「송종실급제왕전(宋宗室及諸王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의경 · 유준고 · 유의진 · 유의강 · 유의공 · 유의선 · 유의계 · 유소 · 유준(濬) · 유삭 · 유굉 · 유탄 · 유위 · 유창 · 유혼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무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범 · 유휴약 ·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15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16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유목지 ·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왕진악 ·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 주수지 · 왕현모 17권 「유경선등전(劉敬宣等傳)」 유경선 · 유회숙 · 유수 · 손처 · 괴은 · 상정 · 유종 · 우구진 · 맹회옥 · 호번 · 유강조 18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19권 「사회등전(謝晦等傳))」 조륜지 · 소사화 · 장도 사회 · 사유 · 사방명 · 사령운 20권 「사홍미전(謝弘微傳)」 21권 「왕홍전(王弘傳)」 22권 「왕담수전(王曇首傳)」 사홍미 왕홍 왕담수 ,왕훈, 23권 「왕탄등전(王誕等傳)」 24권 「왕유지등전(王裕之等傳)」 25권 「왕의등전(王懿等傳)」 왕탄 · 왕화 · 왕혜 · 왕욱 왕유지 · 왕진지 · 왕소지 · 왕열지 · 왕준지 왕의 · 도언지 · 원호지 · 장흥세 26권 「원담전(袁湛傳)」 27권 「공정등전(孔靖等傳)」 28권 「저유지전(褚裕之傳)」 원담 공정 · 공림지 · 은경인 저유지 29권 「채곽전(蔡廓傳)」 30권 「하상지전(何尙之傳)」 31권 「장유전(張裕傳)」 채곽 하상지 장유 ,장승, 32권 「장소전(張邵傳)」 33권 「범태등전(范泰等傳)」 34권 「안연지등전(顔延之等傳)」 장소 범태 · 순백자 · 서광 ·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안연지 · 심회문 · 주랑 35권 「유담등전(劉湛等傳)」 36권 「양흔등전(羊欣等傳)」 37권 「심경지등전(沈慶之等傳)」 유담 · 유열 · 고침 · 고기지 양흔 · 양현보 · 심연지 · 강이 · 강병지 심경지 · 종각 38권 「유원경전(柳元景傳)」 39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40권 「노상등전(魯爽等傳)」 유원경 은효조 · 유면 노상 · 설안도 · 등완 · 종월 · 오희 · 황회 41권 「제종실전(齊宗室傳)」 소도도 · 소도생 · 소요광 · 소요흔 · 소면 · 소경선 · 소적부 · · 소탄 · 소탄지 42·43권 「제고제제자전(齊高帝諸子傳)」 소억 · 소영 · 소황 · 소엽 · 소고 · 소장 · 소삭 · 소감 · 소봉 · 소예 · 소갱 · 소구 · 소현 44권 「제무제제자·제문혜제자·명제제자전(齊高帝諸子·文惠諸子·明帝諸子傳)」 소장무 · 소자량 · 소자경(卿) · 소자향 · 소자경(敬) · 소자무 · 소자륭 · 소자진 · 소자명 · 소자한 · 소자륜 · 소자정 · 소자악 · 소자문
소자준 · 소자림 · 소자건 · 소자하 · 소소수 · 소소찬 · 소보의 · 소보현 · 소보원 · 소보인 · 소보유 · 소보숭 · 소보정45권 「왕경칙등전(王敬則等傳」 46권 「이안인등전(李安人等傳)」 왕경칙 · 진현달 · 장경아 · 최혜경 이안인 · 대승정 · 환강 · 초도 · 조무 · 여안국 · 주산도 · 주반룡 · 왕광지 47권 「순백옥등전(荀伯玉等傳)」 48권 「육징등전(陸澄等傳)」 순백옥 · 최조사 · 설연 · 우종 · 호해지 · 우완지 · 유휴 · 강석 육징 · 육혜효 · 육궐 49권 「유고지등전(庾杲之等傳)」 50권 「유환등전(劉瓛等傳)」 유고지 · 왕심 · 공규 · 유회진 유환 · 명승소 · 유이 · 유규 51·52권 「양종실전(梁宗室傳)」 소경 ,소매 소발 소앙 소욱, · 소의 · 소부 · 소창 · 소융 · 소굉 ,소정인 소정의 소정덕 소정립, 소수 · 소위 · 소회 · 소담 53권 「양무제자전(梁武帝諸子傳)」 소통 · 소종 · 소적 · 소속 · 소윤 · 소기 54권 「양간문제자·원제제자전(梁簡文帝諸子·元帝諸子傳)」 소대기 · 소대심 · 소대관 · 소대림 · 소대련 · 소대춘 · 소대성 · 소대봉 · 소대아 · 소대장 · 소대균 · 소대위 · 소대훈 · 소대구 · 소대흔 · 소대지 · 소대원 · 소방등 · 소방제 · 소방구 · 소방략 55권 「왕무등전(王茂等傳)」 왕무 · 조경종 · 조의종 · 석천문 · 하후상 · 길사첨 · 채도공 · 양공칙 · 등원기 · 장혜소 · 장징 · 풍도근 · 강현 · 창의지 56권 「장홍책등전(張弘策等傳)」 57권 「심약등전(沈約等傳)」 58권 「위예등전(韋叡等傳)」 장홍책 · 유역 · 정소숙 · 여승진 · 악애 심약 · 범운 위예 · 배수 59권 「강엄등전(江淹等傳)」 60권 「범수등전(范岫等傳)」 61권 「진백지등전(陳伯之等傳)」 강엄 · 임방 · 왕승유 범수 · 부소 · 공휴원 · 강혁 · 서면 · 허무 · 은균 진백지 · 진경지 · 난흠 62권 「하창등전(賀瑒等傳)」 63권 「왕신념등전(王神念等傳)」 64권 「강자일등전( 江子一等傳)」 하창 · 사마경 · 주이 · 고협 · 서리 · 포천 왕신념 · 양간 · 양아인 강자일 · 호승우 · 서문성 · 음자춘 · 두즉 · 왕림 · 장표 65권 「진종실제왕전(陳宗室諸王傳)」 진의 · 진상 · 진혜기 · 진창 · 진담랑 · 진백무 · 진백산 · 진백고 · 진백공 · 진백인 · 진백의 · 진백례 · 진백지 · 진백모
진숙릉 · 진숙영 · 진숙견 · 진숙명 · 진숙경 · 진숙헌 · 진숙제 · 진숙문 · 진숙달 · 진숙탄 · 진숙표 · 진숙웅 · 진숙중 · 진숙엄 · 진숙신 · 진숙우 · 진숙평 · 진숙오 · 진숙흥 · 진숙선 · 진숙목 · 진숙검 · 진숙징 · 진숙소 · 진숙광 · 진숙순 · 진숙모 · 진숙현 · 진숙륭 · 진숙영
진심 · 진장 · 진윤 · 진억 · 진언 · 진경 · 진건 · 진념 · 진지 · 진전 · 진번66권 「두승명등전(杜僧明等傳)」 두승명 · 주문육 · 후진 · 후안도 · 구양위 · 황법구 · 순우량 · 장소달 · 오명철 67권 「호영등전(胡穎等傳)」 호영 · 서도 · 두릉 · 주철무(1) · 정령세 · 심각 · 육자륭 · 전도집 · 낙문아 · 손창 · 서세보 · 주부 · 순랑 · 주경 · 노실달 · 소마하 · 임충 · 번의 68권 「조지례등전(趙知禮等傳)」 조지례 · 채경력 · 종원요 · 한자고 · 화교 · 유사지 · 사기 · 모희 · 심군리 · 육산재 69권 「심형등전(沈炯等傳)」 심형 · 우려 · 부재 · 고야왕 · 요찰 70권 「순리전(循吏傳)」 길한 · 두기 · 신념 · 두혜도 · 완장지 · 견법숭 · 부염 · 우원 · 왕홍궤 · 심우 · 범술증 · 손겸 · 하원 · 곽조심 71권 「유림전(儒林傳)」 복만용 · 하동지 · 엄식지 · 사마경 · 변화 · 최령은 · 공첨 · 노광 · 심준(峻) · 공자구 · 황간 · 심수 · 척곤 · 정작 · 전완 · 장기 · 고월 · 척곤 · 왕원규 72권 「문학전(文學傳)」 구영국 · 단초 · 변빈 · 구거원 · 왕지심 · 최위조 · 조충지 · 가희경 · 원준 · 유소(昭) · 종영 · 주흥사 · 오균 · 유협 · 하사징 · 임효공 · 안협 · 기소유 · 두지위 · 안황 · 잠지경 · 하지원 · 서백양 · 장정견 · 완탁 73·74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瑜) · 가은 · 곽세통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구걸 · 사각수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인 · 손극 · 하자평 · 최회순 · 왕허지 · 오경지 · 소예명 · 소교처양 · 공손승원 · 오흔지 · 한계백 · 구관선 · 손담 · 화보 · 해숙겸 · 한영민 · 유풍 · 봉연백 · 오달지 · 왕문수 · 악이지 · 손법종 · 유도민 · 등담공 · 도계직 · 심숭소 · 순장 · 길분 · 견염 · 조발호 · 한회명 · 저수 · 장경인 · 도자장 · 성경준 · 이경서 · 사린 · 은불해 · 사마고 · 장소 75·76권 「은일전(隐逸傳)」 도잠 · 종소문 · 심도건 · 공순지 · 주속지 · 대옹 · 적법사 · 뇌차종 · 곽희림 · 유응지 · 공기 · 주백년 · 관강지 · 어부 · 저백옥 · 고환 · 두경산 · 장영서 · 오포 · 서백진 · 심인사 · 완효서 · 등욱 · 도홍경 · 제갈거 · 유혜비 · 범원엽 · 유선 · 장효수 · 유승선 77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서원 · 완전부 · 기승진 · 유계종 · 여법량 · 여문현 · 여법진 · 주석진 · 육험 · 사마신 · 시문경 · 심객경 · 공범 78·79권 「이맥전(夷貊傳)」 임읍 · 부남 · 중천축국 · 사자국 · 고구려 · 백제국 · 신라 · 왜 · 부상국· 하남왕국 · 탕창 등지 · 무흥국 · 형옹주·예주만 · 고창 · 쿠처 · 우전국 · 파사국 ·연연 80권 「적신전(賊臣傳)」 후경 ,왕위, · 웅담랑 · 주적 · 유이 · 진보응 (1) 본명이 주철호(周鐵虎)로 당태조로 추존된 이호(李虎)를 피휘하여 무(武)로 개칭되었다.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000> ||
[1] 그런데 이 사람은 후폐제의 아버지 유욱을 여러 차례 죽을 뻔하게 한 불구대천지원수이며 본인에게는 사촌형이다. 즉 종형이 전폐제, 종제가 후폐제다. 부친끼리 친형제는 아니고 이복형제라 친할머니가 다르기는 하지만 친할아버지는 똑같다.[2] 똑같이 폐제가 된 전폐제도 즉위 전 어린 시절에는 총명했다.[3] 다만 이럼에도 유욱은 어릴 적부터 불길한 조짐이 보였는데 인간에 대한 폭행을 즐겨 아버지와 주위의 걱정을 한 몸에 샀다고 한다. 참고로 송 명제도 아들만큼은 아니었어도 매우 음탕하고 잔혹한 폭군이었는데 그런 폭군조차 자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걱정할 정도였으니 어린 유욱이 얼마나 못된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심지어 이조차 본색을 드러내기 전의 모습이었다.[4] 아래의 각주에서 마늘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강제로 배를 갈렸다고 와전된 그 사람이다. 차하르족 출신의 귀화인이었다.[5] 설령 심발 일행이 반역을 모의했다고 할 지라도 후세 사람들은 그걸로 까지 않았을 것이다. 딱 훈 센처럼(표면적인 행각만 보면 매국노 중의 매국노였지만 그가 배반한 조국이 그래도 싼 나라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독재는 까도 그의 매국은 전혀 까지 않는다. 오히려 독재자가 되지 않았으면 성웅으로 취급받아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을 것이다)…….[6] 다만, 차하르족 출신인 손초라는 사람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자 산 채로 배를 갈라 속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확인 결과 마늘은 먹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는 일화와 심발의 살해가 심발의 집에 있다는 많은 보물을 약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일화는 전술한 내용이 과장 내지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7] 유욱의 즉위 당시의 나이나 명제 본인의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고자가 된 시점은 효무제 말기 또는 전폐제 시기일 가능성이 의심된다.[8] 한국사로 치면 조선 왕조에서 왕이 이씨가 아니라 고씨나 왕씨라고 스스로 밝힌 수준이다. 누가 출생의 비밀을 밝혀도 위험할 판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최대 약점을 밝혔다.[9] 그래서 이 대목은 후일 찬탈한 소도성이 찬탈 명분을 위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많다.[10] 왕망, 조비, 사마염, 환현, 유유.[11] 후대에 고려에 있었던 폭군 충혜왕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12] 사실 그보다 더했든 폭군으로 남제의 후폐제가 있다.[13] 역대 (사실상의) 국왕들이 전부 폭군이자 암군인, 카자르 왕조와 함께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저질 왕조다.[14] 그 가운데 유경소는 심지어 남제 건국자 소도성이 직접 죽인 사람이다. 원찬, 유병도 유욱이 죽인 게 아니라, 소도성이 황제가 되려는 것을 막다가 소도성에게 죽었다. 이 신원 회복은 정치적 목적에서의 민심 수습책이기도 했지만 유송이 망해야 할 나라이기는 했어도 황제들이 문제였지 유경소는 잘못 없고 정당한 황제였다고 유송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5] 후대의 적도 기니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도 불우한 어린 시절 때문에 정신이상의 징후를 느껴 주변 사람들이 걱정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고, 이렇게 겉잡을 수 없이 정신이 악화된 응게마는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 되자 문자 그대로 후폐제가 그나마 나아 보일 수준의 최악의 악마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응게마는 후폐제 이상의 악행을 후폐제의 집권기간보다 2배나 긴 11년 동안이나 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