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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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庾懌 유역 | |
시호 | 간(簡) |
작위 | 광요현남(廣饒縣男) |
성 | 유(庾) |
휘 | 역(懌) |
자 | 숙예(叔預) |
생몰 | 293년 ~ 339년 10월 8일 |
부친 | 유침(庾琛) |
본관 | 영천군(潁川郡) 언릉현(鄢陵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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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외척으로 자는 숙예(叔預). 유량의 아우이다.2. 생애
293년 유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활달한 성격으로 형인 유량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약관의 나이에 서양왕(西陽王) 사마양이 벽소했으나 사마양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동해왕(東海王) 사마충이 장수교위(長水校尉)로 있을 때 유역은 공조(功曹)로 임명되었다가 나중에 기양령(暨陽令)으로 기용되었다. 이후 사마충의 중군사마(中軍司馬)가 되었고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전임되었으며, 좌위장군(左衛將軍)으로 옮겼다.
소준의 반란을 평정한 공적으로 광요현남(廣饒縣男)에 봉해졌다. 뒤이어 임천태수(臨川太守), 감양옹2주제군사(監梁雍二州諸軍事)를 역임했으며, 보국장군(輔國將軍), 양주자사(梁州刺史), 가절(假節)로 전임되고 위흥(魏興)에 진수하였다. 하지만 위흥이 멀고 험난한 곳에 있었고 보급 문제도 있어서 결국 유역은 반호(半洲)에 진수하였다. 뒤에 보국장군,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옮겼고 서중랑장(西中郞將), 감선성여강역양안풍4군제군사(監宣城廬江曆陽安豐四郡軍事), 가절이 되었고 무호(蕪湖)에 진수하였다.
유역은 이전에 성제 사마연에게 백우선(白羽扇)을 바쳤는데, 성제는 백우선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서 이를 돌려주었다. 시중(侍中) 유소(劉劭)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커다란 궁전은 장작대장이 먼저 들어가고, 악기를 연주할 때는 음악에 정통한 사람이 먼저 그 소리를 듣는 법입니다. 유역이 바친 부채는 새것과 낡은 것으로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유역은 유소의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사람이 황제의 곁에 있어야 한다.
342년, 유역은 짐독이 담긴 술을 강주자사(江州刺史) 왕윤지에게 줘서 왕윤지를 독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왕윤지가 이를 수상하게 여겨서 개에게 마시게 했는데 개가 죽어버리자 이 사실을 몰래 성제 사마연에게 알렸다. 그러자 성제는 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큰삼촌(유량)이 이미 천하를 어지럽혔거늘, 작은삼촌마저 이를 따르려 하는가!
유역은 결국 스스로 짐독을 마시고 죽었다. 시중, 위장군(衛將軍)으로 추증되고 간(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