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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25 14:23:04

서묘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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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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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徐苗
(? ~ 302)

서진의 인물. 자는 숙주(叔胄). 청주 고밀군(高密郡) 돈우현(淳于縣) 출신. 조위 시기 상서랑을 지낸 서소(徐邵)의 손자.

2. 생애

서묘는 어릴 적부터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공부를 좋아하여, 낮에는 쟁기를 들고 일하고, 밤에는 경전을 읊으며 학문에 매진하였다. 이후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동생 서가(徐賈)와 함께 제남군의 박사 송균(宋鈞)의 제자로 들어가 그의 수업을 들었다.

서묘는 항상 열정이 넘치고 재산을 경시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유학에 통달하고 여러 지식인들의 귀감이 되었다. 또, 형제 간의 우애도 깊어, 동생이 농궤(膿潰)를 앓자 서묘가 직접 고름을 빨아주기도 했고, 형제가 요절하면 서묘는 홀로 남겨진 조카들을 거두어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서묘의 이런 선행은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주변 지인들에게도 미쳐, 이웃이나 그와 함께 수학하던 문하생 등도 그의 대가 없는 도움을 받았다. 서묘의 순수함과 의로움이 이와 같으니, 그의 스승인 송균도 그 행실을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군(郡)에서 효렴으로 살펴져, 주(州)에서 서묘를 종사, 별가, 치중으로 징소하고, 조정으로부터 5차례나 박사로 초청받았으나, 서묘는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서묘는 끝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여 《오경동이평》(五經同異評), 《현미론》(玄微論)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영녕 2년(3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명에 따라 장례는 매우 소박하게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