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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13:38:54

적탕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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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翟湯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은사. 자는 도연(道淵).[1] 강주(江州) 심양군(廣陵郡) 출신.

2. 생애

적탕은 행실이 부지런하고 성품이 순수하여 인자함과 겸손함을 겸하였고, 세상일을 하찮게 여겨 농사나 하면서 일상을 보냈다. 간혹 가마솥과 곳간이 비어있어 누군가가 음식을 지원해줘도 받기를 거부하였다. 영가 말년에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지만, 도적들은 적탕에게 덕이 있다는 명성을 듣고 적탕만큼은 감히 범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의지하였다.

동진이 세워지고 사도 왕도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적탕은 오히려 여산(廬山)으로 들어가 더욱 깊숙이 숨어버렸다. 시안태수 간보는 적탕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기에, 배를 보내 식량을 선물하게 하고, 이를 담당하는 관리에게 당부하길,
"적공(翟公)은 성정이 청렴하여 받지 않을 것이니, 경은 도착하거든 서신과 식량을 두고 즉시 배를 돌려 귀환하라."
라 하였다. 관리가 간보의 말대로 이행하니, 과연 배가 없던 적탕은 그 많은 식량을 그대로 다시 돌려줄 방도가 없었다. 이에 적탕은 하는 수 없이 식량을 전부 견직물과 교환해서 간보에게 보냈다. 선물한 것을 되돌려 받은 간보는 놀라 적탕의 깨끗함에 감탄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였다.

함강 연간에 서정대장군 유량(庾亮)이 상소하여 적탕을 천거하였다. 성제 사마연은 적탕을 국자박사로 초빙했으나, 적탕은 응하지 않았다.

건원 원년(343년) 7월, 공명을 세우길 갈망하던 안서장군 유익(庾翼)이 조정에 표문을 올려 후조성한 정벌하려는 뜻을 표명하였다. 이후 여섯 주에서 노복, 수레, 당나귀, 소 등 전쟁에 쓸 인력과 물자를 대거 징발한 뒤, 환선으로 하여금 수군을 거느리고 단수(丹水)로 나아가게 하고, 환온을 임회(臨淮)에 주둔하게 하였다. 수많은 백성들은 갑작스런 전쟁에 원망과 한탄을 퍼부었는데, 이때 적탕은 황제의 칙서 덕에 집안의 노복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적탕은 오히려 노복들을 거느리고 자진 입대하려 했지만, 향리가 황제의 명을 어길 수 없다며 가로막으니, 그 자리에서 향리에게 노복들을 일반 평민으로서 호적에 편입시키도록 하였다.

강제 사마악이 적탕을 산기상시로 삼았으나, 적탕은 노환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고 입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73세.

아들로는 적장(翟莊), 적교(翟矯)가 있으며, 둘 다 곧은 지조로 명성이 높았지만, 아버지처럼 죽을 때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였다. 심지어 적교의 아들인 적법사(翟法賜)조차 효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은거를 선택하였으니, 무려 3대에 걸쳐 관직을 거부하고 은거한 셈이다.


[1]진서》에서는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같아 "도심(道深)"으로 피휘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