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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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周該(? ~ 322)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형주 천문군(天門郡) 출신. 의성내사 주급(周級)의 조카.
2. 생애
과감하고 사나운 성품을 가지고 있어 학문을 좋아하진 않았으나, 의롭고 용기가 있어 항상 유교적인 명분과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였다. 숙부인 의성내사 주급 또한 충절이 있어 왕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초왕 사마승이 상주(湘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왕돈과 맞서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 주해를 파견해 사마승에게 왕돈 토벌에 가담하겠다는 뜻을 밝히게 했다.영창 원년(322년) 정월, 주해가 장사군 임상(臨湘)에 도착해 사마승을 만나 주급의 뜻을 전했다. 사마승은 크게 기뻐하였으나 이내 왕돈의 부하인 남만교위 위예 등이 임상을 습격하러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주해와 종사 주기에게 샛길로 빠져나가 주급에게 원군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주해와 주기는 순찰돌던 적군에게 붙잡혔고, 위예로부터 어디로 향하던 중이었는지 실토할 것을 강요받았다. 위예는 주해를 고문하면서 추궁했지만 주해는 끝까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결국 계속되는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숨이 끊어졌다. 이로써 주급은 왕돈의 난에 휘말리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