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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3 21:11:08

이적(전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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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李績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백양(伯陽).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출신.

2. 생애

젊을 적부터 풍채와 절개로 이름을 날렸고, 언변이 뛰어나 말에 이치가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 이산이 태수로 있는 범양군에 공조로 임관하였다.

건무 4년(338년) 3월, 후조의 천왕 석호선비족 단부단료를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여 군대를 범양에 주둔시켰다. 당시 유주에 흉년이 들어 범양군의 백성들조차 굶주리던 형편이었기에, 후조군에게 원활한 군량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석호는 대로하여 태수인 이산을 책망하였다. 처벌이 두려웠던 이산이 도망치니, 이적이 석호에게 나아가 말했다.
"저희 군(郡)은 북쪽 변경에서 적과 인접해있으며, 국경 지대의 백성들은 위태로움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여가(輿駕)가 친히 출정하여 장차 잔혹한 적을 제거할 것이라는 소식에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목숨 바쳐 힘을 다하려 하는데, 이는 나라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안녕을 추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설령 몸이 초야(草野)의 거름이 된더라도 도리어 달게 받아들일진대, 어찌 감히 사리사욕을 앞세워 군대의 보급을 소홀히 하겠습니까! 단지, 올해 흉년이 들어 집집마다 얼굴이 누렇게 뜬 채로 곤궁하고 피폐해졌고, 힘이 다하여 도울 방도가 없으니, 보급을 실패한 죄는 가히 정상참작할만 합니다."
천왕 석호는 이적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이토록 장한 절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이를 가상히 여겨 범양군의 죄를 용서함과 동시에 군량 보급 의무를 면제하였고, 아울러 이산도 사면시켜 주었다. 이후 왕오(王午)가 유주자사에 부임했을 때 주부에 임명되었다가 유주별가로 옮겨졌다.

영화 6년(350년) 3월, 연왕 모용준이 이끄는 전연군이 무종(無終)에 이르자, 유주자사 왕오는 계(薊)에 장수 왕타(王墮)와 병력 수천 명을 남겨 지키게 하고, 모용패에게 패해 도망치던 정동장군 등항(鄧恒)과 합류해 노구(魯口)로 달아났다. 이때 이적도 왕오를 따라서 노구로 들어갔는데, 모용준이 계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범양태수 이산의 항복까지 받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등항이 이적을 살해하려 들면서 왕오에게 말했다.
"이적의 고향은 북쪽에 있고, 그의 아비는 이미 연나라에 항복하였소. 지금은 비록 이곳에 있으나 결국 쓸 수는 없을 터이니 곧 우환이 될 것이오."
이에 왕오가 답했다.
"이적은 상란(喪亂) 속에서도 집안을 개의치 않고 의(義)를 세우고 있소이다. 그 정절의 위중함은 비록 과거의 열사(烈士)들보다 지나치지는 않으나, 이를 시기하고 싫어하여 해친다면 연(燕)•조(趙)의 선비들이 우리를 가리켜 도적의 무리라 이를까 두렵구려. 대중의 마음을 의식하지 않았다가는 무리가 한번에 흩어질 것이고, 그리하면 다시 모을 수 없어 우리는 앉은 채로 적에게 궤멸당하고 말 것이오."
그러자 등항은 이내 행동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오는 이적이 행여나 등항이나 그 휘하의 장수들에게 해를 당할까 두려워, 이적에게 노잣돈을 주고 이산을 떠나게 하였다.

이적이 범양에 도착하자 경소제 모용준이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경은 알지 못하여 천명(天命)을 버렸는가? 짐이 경의 이름을 부른지가 오래거늘 오늘에서야 비로소 왔구나."
이적이 답했다.
"신이 듣기로 예양지백의 원수를 갚아 역사적으로 칭송받았다 하였습니다. 이미 벼슬이 있는 몸인데, 누굴 섬기든 어찌 임금이 아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당(唐)우(虞)의 교화를 널리 펼치려 하시니, 신의 귀순은 늦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경소제 모용준이 말했다.
"이 또한 군주를 섬기는 하나의 절개일 뿐이로다."
이후 이적은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어 전연 조정에 출사하고, 누차 승진하여 사도 좌장사에 제수받았다.

광수 3년(359년) 2월, 경소제 모용준이 업궁(鄴宮) 내부의 연못인 포지(蒲池)에서 군신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이윽고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詩)와 부(賦)를 읊고 경전과 역사에 대해 담론하였는데, 경소제 모용준이 주나라 영왕의 태자가 요절한 이야기를 듣고 사망한 자신의 장남인 태자 모용엽(慕容曄)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자리에서 이적이 경소제 모용준에게 태자 모용위가 사냥과 음악을 좋아하는 단점이 있다 지적하니, 모용위는 이를 달갑지 않게 받아들였다.

건희 원년(360년) 11월, 태원왕 모용각이 헌무제 모용위에게 경소제 모용준이 남기고 간 유언의 내용에 따라 이적을 상서우복야로 삼고 그를 중용할 것을 간하였다. 그러나 헌무제 모용위는 과거 이적이 했던 발언으로 앙심을 품고 있어 몇 번이고 모용각의 청을 불허하며
"만기(萬機)의 일은 숙부에게 위임하나, 백양(伯陽) 한 사람에 관한 일은 청컨대 나 모용위가 독단적으로 처리하게 해주시오."
라 말하고는 장무(章武)태수로 삼아 조정에서 내보냈다. 이적은 근심하다가 이내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