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37 0%, #233067 20%, #233067 80%, #000037); color: #ece5b6;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모용부 慕容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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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07731><colcolor=#ece5b6> 토욕혼 초대 군주 모용토욕혼 | 慕容吐谷渾 | |||
출생 | 246년 | ||
진 창려군 극성현 (現 랴오닝성 진저우시 이현) | |||
사망 | 317년 (향년 71세) | ||
진 옹주 농서군 부한현 (現 간쑤성 린샤 후이족 자치주 린샤시)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 초대 군주 | ||
283년 ~ 317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307731><colcolor=#ece5b6> 성씨 | 모용(慕容) | |
휘 | 혼(渾) | ||
자 | 토욕혼(吐谷渾) | ||
부친 | 모용섭귀 | ||
형제자매 | 5남 중 장남 | ||
자녀 | 60남 | ||
작호 | 없음 | ||
묘호 | 불명 | ||
시호 | 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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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욕혼의 제1대 군주로, 모용부 제4대 대인이자 전연의 고조 무선황제 모용외의 이복형이다.이름은 한자를 통한 음차 표기인데, 토욕혼은 톤유쿠크를 나타낸 것이라는 설이 있다. 훗날 손자인 모용엽연이 그의 이름인 "토욕혼"을 성씨와 국호로 삼기 시작하였다.
2. 생애
모용부의 3대 대인인 부친 모용섭귀는 나이는 어리지만 적처 소생인 모용외를 후계자로 삼고, 서출인 모용토욕혼에게는 따로 1,700호를 나누어주어 그에게 예속되게 하였다. 모용섭귀 사후 아버지를 대신해 모용부의 대인에 오른 모용외는 서형인 모용토욕혼과 함께 각자의 부락을 거느리고 목축을 하며 말을 길렀다. 어느 날, 두 부락의 말이 서로 싸워 상처를 입자, 모용외는 화가 나서 사신을 보내 모용토욕혼에게 항의하며 말했다."선친께서는 형제들이 각기 다른 부락에서 말을 기르게 하셨는데, 어찌하여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고 가까이 두어 말이 서로 싸워 상처를 입게 하였는가?"
그러자 모용토욕혼도 화가 나서 이르길,"말은 여섯 가축 중 하나로,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봄이 되면 기운이 올라 싸움을 벌인다. 고로 싸움은 말의 문제이지, 사람이 화를 낼 이유는 없다. 만약 멀리 떨어져 지내고 싶다면 그것은 쉬운 일이나, 계속 되면 나중에는 만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 나는 그대에게서 만 리 밖으로 떠나겠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모용토욕혼은 부락을 이끌고 서쪽으로 떠나갔다. 모용외는 그제서야 자신의 언사를 후회하며, 장사(長史) 을나루풍(乙那婁馮)을 보내어 모용토욕혼에게 사과하게 하였다. 이때 모용토욕혼은 을나루풍에게"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덕을 쌓아 요동(遼東)에서 명성을 얻었다. 선친께서는 점을 칠 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두 아들은 모두 강성하여, 그 복이 후세에까지 이어질 것이다.' 나는 서자이니, 이치상 우리가 함께 크게 번영할 수는 없다. 지금 말 때문에 헤어진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말을 몰아 동쪽으로 가라. 만약 말이 동쪽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그대를 따라 동쪽으로 돌아가겠다."
라고 말했다. 이에 을나루풍이 종자 2,000여 명을 보내어 말을 동쪽으로 몰게 하였는데, 수백 걸음을 나아가자 말들은 슬피 울며 다시 서쪽으로 달아났다. 이러한 일이 수십 번 반복되자, 을나루풍이 말했다."이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다."
결국 모용토욕혼은 돌아가지 않고, 서쪽으로 나아가 음산(陰山) 일대에 정착하였다. 선비족은 형을 "아간(阿干)"이라 불렀는데, 모용외는 떠난 형을 그리워하며 "아간가(阿干歌)"를 지어, 매년 연말에 깊이 그리워할 때면 그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한편, 모용외의 부락과 멀리 떨어지게 된 모용토욕혼은 자신의 부족에게 늘 말하길,
"나와 내 형제는 모두 나라를 다스릴 운명을 가지고 있다. 모용외의 후손들은 겨우 백여 년 동안만 나라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내 증손자는 이후에도 아마 크게 번창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후 영가의 난으로 서진 정권이 붕괴되자, 모용토욕혼은 농서군(隴西郡)으로 건너가서 부한(枹罕)에 머물렀다. 훗날 그의 자손들은 서령(西零)에서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감송(甘松)에서 도수(洮水)까지, 남쪽으로는 백란(白蘭)까지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 영역은 수천 리에 달하였다. 모용토욕혼에게는 60명의 아들이 있었고, 장남 모용토연(慕容吐延)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