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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족이 만든 금제관식[1] |
慕容部
1. 개요
동호계 선비족의 집단 중 하나로 요하 유역에 거주했다.2. 역사
조위때 건국되어 위나라에 복속했으며, 서진때 중국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배해 그후 제3대 대인인 모용섭귀가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모용외는 숙부인 모용내에게 대인직을 찬탈당했다가 다시 회복하는 등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졌다.285년부터 서진의 변경을 침입하기 시작했으나 서진군이 이를 막아내 패배했다. 그 대신 동쪽의 예맥계 부여를 공격해 도성을 함락시켰다. 이웃나라 고구려가 수도가 털리는 일이 많았던 반면 부여는 건국 이래 그때까지 수도가 털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여가 고구려보다 일찍 건국되었다.
모용부는 이렇게 요동과 만주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모용부의 부여 침공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한민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충돌이었다. 이미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때 선비와 충돌한 적이 있었으나 그때의 선비는 그저 '선비'라고만 알려졌을 뿐이었고, 선비족 모용부라는 식으로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모용선비의 부여 침략부터 시작해서 조선 중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 년이 넘는 한민족과 북방 민족간의 질긴 악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선비계 부족인 우문부와 단부가 강성해져 모용부가 그들의 공격을 받을 정도라 그들에게 선물을 주며 섬겼으며, 매번 서진의 요서 지역을 침공했다.
302년에 우문부의 공격을 막아냈고, 서진에서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 등이 일어나 크게 혼란해져 많은 한족 유민들이 발생하자 이들을 흡수하여 세력이 강성해짐에 따라 모용외는 선우를 자칭할 정도가 되었다. 강대해진 모용부는 단부를 약탈하고, 고구려와 갈족의 후조, 그리고 사마씨 진왕조의 북방 잔존 세력인 동진의 평주자사 최비 등에 맞서 싸웠다.
성장하는 모용선비를 저지하기 위해 평주자사 최비는 고구려의 제15대 미천왕과 우문부 및 단부를 설득하여 319년 연합군을 결성해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모용외는 극성에서 문을 닫고 지킨 채로 사자를 파견해 소고기와 술을 우문씨에게만 주었는데 이에 고구려와 단부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하고 있다고 의심해 군사를 퇴각시켰다. 결국 우문부만 남아 단독으로 모용부를 공격했지만 대패했고, 우문부를 이끌던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한편 모용외가 모용부의 세력을 대대적으로 일으켰지만 모용부의 권력경쟁에서 밀린 모용토욕혼은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멀리 서역으로 이주해 청해 지역에서 토욕혼을 건국했다.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모용황이 연왕으로 즉위하여 전연이 건국되었다.
전연 이후로는 토욕혼을 제외하고, 모용부가 세운 국가들이 쇠락할 때마다 후연, 서연, 남연 등이 차례로 세워졌다. 서연은 긴 내분 끝에 394년 후연의 세조 성무제 모용수에게 흡수되었으며, 후연은 407년에 고구려계 모용운(고운)의 북연에게 멸망되었다. 남연은 410년에 동진의 한족 군벌이자 권신인 유유에게 멸망당했고, 청해의 토욕혼은 7세기 후반에 토번(티베트)에게 멸망되었다.
'풍요롭다' 혹은 '많다'라는 뜻을 가진 몽골어 '바얀'이 선비족 모용부의 '모용'의 원음으로 추정되기도 했지만 바얀이 아니고, 몽골어 무룬(murun)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일단 현재의 시라무룬 강 유역에 이 지역명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모용부가 남긴 유산이라 하겠다.
3. 모용부 소속 인물
모용부가 세운 국가의 인물들은 제외- 막호발
- 모용내
- 모용목연
- 모용섭귀
- 모용외
- 손정
- 양탐
- 을나루풍(乙郍婁馮) - 모용부의 인물. 모용외의 장사로 '을나루'가 성이었다. 모용토욕혼이 모용외와 다투어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옮기자 사신으로 파견되어 모용토욕혼에게 사과했다.
- 모용소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