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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1-01 06:00:21

최비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

1. 개요

崔毖
생몰년도 미상

서진고구려의 인물.

2. 생애

최염의 증손자였으며 왕준의 처남으로[1] 기주 청하국 동무성현 사람이었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면서 왕준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311년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석(封釋)이 사망하자 왕준이 그 후임으로 최비를 임명했다. 이후 중원의 난리를 피해 동북으로 유입되는 한족 인재들을 끌어모으려 했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최비가 아닌 모용외에게 의탁했다.

최비의 후원자였던 왕준이 313년 후조의 석륵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세력도 와해되면서 최비는 요동에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317년에는 낭야왕 사마예동진의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했고, 그 덕분에 동이교위에서 평주자사(平州刺史)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립하기 위해 필요한 인재들이 모용외에게로 흘러가자 최비는 마침내 고구려선비족의 우문부 및 단부를 꾀어서 연합군을 만들어 모용부를 공격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이에 연합군은 모용선비의 중심지인 극성을 포위했지만, 모용외의 이간계로 실패하고 오히려 최비가 배후에 있다는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모용외는
"항복하는 것이 상책, 도망가는 것이 하책"
이라면서 요동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로 인해 고구려는 장수왕 때까지 모용부와의 질긴 악연이 시작되었다.[2] 최비는 319년(미천왕 19년) 12월에 수십 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단신으로 고구려망명했다. 다만 기록의 부재로 고구려에 망명한 뒤에는 무얼하고 살았는지 알 수 없다.

3. 기타

4. 대중매체

소설 고구려의 등장인물(최비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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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비 사마월 왕준 문호 손정
방정균 장통 구명 원영 고연굉
육경 안저 진욱 }}}}}}}}}}}}}}}


[1] 원문은 妻舅인데 오늘날 중국어의 용례로는 처남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다만 권중달 교수는 《자치통감》 번역 과정에서 이를 처삼촌이라고 풀이해 차이를 보인다.[2] 미천왕 때부터 고국양왕까지는 고구려가 전반전으로 밀리는 추세였으나 광개토대왕 때 모용외의 후손이 세운 후연을 몰아붙이고 황위를 차지한 북연풍홍까지 장수왕이 처단하면서 모용부가 세운 연나라와의 악연을 완전히 끝장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