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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2:03

석호(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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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후조 제3대 황제
석호 | 石虎
파일:현원릉의총.jpg
현원릉 전경.
출생 295년
서진 상당군 무양현
(現 산시성 창즈시 우샹현)
사망 349년 5월 26일 (향년 55세)
후조 위군 업성 업궁 금화전
(現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능묘 현원릉(顯原陵)
재위기간 제3대 천왕
334년 ~ 349년 1월
제3대 황제
349년 1월 ~ 349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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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1a6d2><colcolor=#ece5b6> 성씨 석(石)
호(虎)
부모 부황 태종
모후 장씨
배우자 부인 6명
자녀 13남 (양자 1남)
계룡(季龍)
작호 중산공(中山公) → 중산왕(中山王)
묘호 태조(太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건무(建武, 335년 ~ 348년)
태녕(太寧, 3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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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잔혹한 맹장2.3. 후조의 국권을 장악하다2.4. 거섭조천왕 시기
2.4.1. 끝없는 토목공사와 사치
2.5. 대조천왕 시기2.6. 칭제
2.6.1. 고력의 난2.6.2. 최후
2.7. 사후
3. 평가4. 오해: 식인황제?5. 자녀6. 기타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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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호십육국시대 후조(後趙)의 제3대 황제. 명황제 석륵의 6촌 형제. 아버지는 석구멱(石寇覓)[1]으로, 석구멱의 일곱 아들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석구멱이 일찍 죽자, 석륵의 아버지 석주갈주(石周曷硃)는 어린 석호를 데려와 친자식처럼 길렀기에, 혹자는 석호와 석륵을 형제로 적기도 한다.

2. 생애

2.1. 초기

석호가 6~7세가 되었을 무렵, 한 뛰어난 관상가가 길가에서 우연히 그를 보고는 말했다.
"이 아이는 모습이 특이하고, 뼈가 웅장하여 그 귀함을 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태안 연간(302~303)에 병주에 대기근이 들어 갈족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 석륵 또한 병주를 떠나면서 석호와 헤어졌고, 석호는 그대로 병주에서 석륵의 모친 왕씨(王氏)를 모시고 살았다.

영가 5년(311년) 11월, 서진의 병주자사 유곤이 석호와 석륵의 모친 왕씨를 찾아, 당시 갈파(葛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석륵에게 보내면서, 흉노한(漢)을 배반하고 진나라를 위해 싸워줄 것을 권유하였다. 석륵은 당시 어머니 왕씨와 당시 17세인 석호를 거두어 들이고, 유곤의 권유를 거절하였다.

석호는 천성이 잔인하고 무도하였으며, 수렵하거나 음탕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여 방탕하게 굴었다. 특히 좌우로 사격하는 것에 능하여, 석륵의 군중에서도 놀이 삼아 탄환을 쏴서 사람을 맞히는 바람에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석륵은 분개하여 어머니 왕씨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흉포하고 무도하여 군인들을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니, 차라리 제가 그를 제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그러자 왕씨가 석륵을 말리며 말했다.
"튼튼한 송아지가 수레를 끌면 수레의 멍에를 부술 때도 있고, 훌륭한 말은 반드시 채찍을 들어 다스린 후에야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갈 수 있는 법이다. 조금 참아주고, 곧바로 죽이지는 말도록 하거라."
이에 석륵은 왕씨의 말을 듣고 석호를 죽이지 않았다.

2.2. 잔혹한 맹장

가평 2년(312년) 7월, 석륵이 양국(襄國)에 자리를 잡았을 무렵, 한나라의 소무제 유총은 석호를 위군(魏郡) 태수로 삼아 업(鄴)의 삼대(三臺)를 진수케 하고, 번양후(繁陽侯)에 봉하여 식읍 3,000호를 주었다.

석륵이 18살이 되자, 점차 스스로를 다스리며 공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고, 몹시 엄하면서도 자신의 무사들을 아낄 줄 알게 되었다. 그는 키가 7척 5촌(약 190cm)이나 되었고, 매우 날쌔어 말 타기와 활쏘기를 능숙하게 하였으며, 그 용맹함은 당대 최고였다. 성을 함락시키거나 적의 요새를 점령할 때, 선악(善惡)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로 남녀를 학살해 그가 점령한 곳은 거의 살아남는 자가 없었다.

석륵이 여러 번 그를 가르치고 꾸짖었으나 그는 여전히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다만, 석호는 무리를 통솔하는 데에도 능숙하였고, 무척 엄격하여 감히 그에게 맞서는 자가 없었으며, 지휘하는 전투마다 적을 무찌르지 못한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석륵은 그의 잔혹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더욱 총애하고 신뢰하여 정벌을 전담케 하였으며, 석호가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니, 장수와 친척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이에 석륵은 그를 매우 칭찬하며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워낙 잔혹하고 폭력적이어서 하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았으며, 군중에서 용맹하고 전략에 능해 자신과 맞먹는 자가 있으면 사냥이나 놀이 등을 빙자해 그를 죽이니, 앞뒤로 그에게 죽임당하는 이가 매우 많았다.

조왕 원년(319년) 12월, 석륵이 후조를 건국하자, 석호는 표기장군•시중•개부로 승진하였고, 중산공(中山公)에 봉해져 식읍 10,000호를 받았다. 그는 석륵의 맹장으로 최일선에서 활약하면 소속, 서감, 조억 등의 군벌들을 토벌해 멸하였고, 동진과도 치열하게 싸워 석륵의 패업을 도왔다.

조왕 7년(325년) 5월, 전조의 군대가 낙양을 포위하자, 석륵은 중산공 석호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궁지에 몰린 석생을 구원하게 하였다. 석호는 성고관(成皋關)으로 들어가 낙양 서쪽에서 전조의 중산왕 유악(劉岳)과 치열하게 싸웠고, 유악은 전투 중 유시에 맞아 부상 입으면서 패하여 석량수(石樑戍)로 물러났다. 석호는 이를 추격하여 석량수 주변에 참호와 방책을 세워 포위망을 형성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이후 석호는 전조의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를 격파하여 죽이고, 유악을 구원하러 온 전조의 황제 유요를 습격하였다. 이때 전세는 유요에게 유리하게 흘러갔으나, 야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조군이 무너지면서 유요는 전조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퇴각하였다.

조왕 7년(325년) 6월, 석호가 석량수를 함락시키고, 유악과 그의 장수 80여 명, 저족, 강족 3,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양국(襄國)으로 보낸 뒤, 나머지 9,000여 명의 병사들은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조왕 8년(326년) 10월, 석륵이 업궁(鄴宮)을 재건하고자, 세자 석홍을 먼저 업으로 보내 진수케 하고, 우장사 정하(程遐)와 비밀리에 협의하여 10,000명의 금병(禁兵)과 거기장군이 통솔하는 54개의 군영에 모두 석홍의 휘하로 배속시켰다. 그리고 효기장군•문신좨주 왕양(王陽)에게 육이(六夷)를 통솔하게 하여 석홍을 보좌하게 하였다. 본래 업을 본거지로 삼을 생각이었던 석호는 정하가 이러한 계책을 낸 것을 원망하며, 삼대(三臺)를 수리하고 그곳으로 가족들을 옮겼다. 그리고 밤에 사람을 시켜 정하의 집에 침입케 하여 그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옷과 물건을 약탈하였다.

조왕 9년(327년) 12월, 석호가 탁발부의 대인 탁발흘나를 정벌하여 구주형(句注陘) 북쪽에서 전투를 벌였다. 탁발흘나는 패하고 대녕(大寧)으로 천도하여 후조군을 피해 달아났다.

태화 원년(328년) 7월, 석호가 40,000 군사를 이끌고 자관(軹闗) 서쪽으로 들어가 전조를 공격하자, 하동(河東)의 50여 개의 현(縣)이 이에 호응하여 포판(蒲阪)을 공격하였다. 이에 전조의 황제 유요는 친히 포판을 구원하기 위해 정예병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진격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8월, 석호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퇴각하였으나, 유요는 이를 추격하여 고후(高候)에서 석호를 대파하였다. 석호는 도망에 성공하였으나, 장수 석첨이 전조군에게 붙잡혀 참수당하고, 후조군의 시체가 200여 리에 걸쳐 누웠으며, 약탈당한 병장기의 수는 억을 헤아렸다. 석호는 대패하여 조가(朝歌)로 달아났고, 유요가 승세를 몰아 낙양의 금용성을 포위하니, 수도 양국은 크게 진동하였다.(고후 전투)

태화 원년(328년) 11월, 석륵이 각지의 장수들에게 명하여 각자 군대를 이끌고 형양(滎陽)에 모이게 하고, 석호는 회현(懷縣)의 석문(石門)을 점거케 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2월, 석륵이 군대를 모아 낙양성으로 진격하여 유요의 100,000 대군과 전투를 벌였다. 석호 또한 낙양성 북쪽에서 보병 30,000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내려와 전조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하여 그 중군을 쳤다. 석감과 석총 또한 각각 정예 기병 8,000기를 이끌고 성 서쪽에서 북쪽으로 돌며 전조군의 선봉를 공격하였다. 서양문(西陽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고, 석륵도 갑옷을 입고 창합문(閶闔門)에서 나와 협공하였다. 이윽고 후조군은 전조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조의 황제 유요를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다.(낙양성 공방전)

태화 2년(329년) 2월, 전조의 태자 유희가 아버지 유요가 후조군에게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형인 남양왕 유윤의 말에 따라 장안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갔다. 이에 전조의 장수 장영(蔣英)과 신서(辛恕)는 수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점령하였고, 석륵이 석호를 보내 전조의 잔당을 토벌케 하자 곧바로 사자를 보내 후조에 항복하였다.

태화 2년(329년) 8월, 전조의 남양왕 유윤이 수만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해 탈환하려 하였다. 그러자 농동(隴東)의 여러 군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모두 거병하여 그에게 호응하였다. 유윤의 군대는 중교(仲橋)에 주둔했고, 당시 장안을 진수하던 석생은 성을 굳게 지키며 방어하였다. 이때 석호는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출격하여 석생을 구원하러 갔다.

태화 2년(329년) 9월, 석호가 의거(義渠)에서 전조군을 대파하고 5,000여 명을 죽였다.(의거 전투) 그리고 유윤은 상규로 도망갔고, 석호는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천 리에 걸쳐 전조군의 시체가 쌓였다. 상규는 이내 석호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고, 유요의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및 전조의 왕공귀족 3,000여 명이 사로잡혀 모두 처형되었다. 석호는 관동의 유민과 진, 옹 일대의 대호족 9,000여 명을 잡아 양국으로 이주시켰으며, 상규의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유씨 일가를 멸족시켰다. 또, 석호는 낙양에 이르렀을 때, 다섯 군(郡)의 흉노 도각족 5,000여 명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그리고 주부 조봉(趙封)을 시켜 전국새(傳國璽), 금새(金璽), 태자옥새(太子玉璽)를 석륵에게 보냈다.(전조 멸망)

이어서 석호는 하서(河西)에서 강족을 공격하여 수만 명을 포로로 잡고, 진농(秦隴)을 평정하여 하서에 영석군(永石郡)을 설치하였다. 이때 저족의 수령 포홍과 강족의 족장 요익중이 후조에 항복하였다. 이에 석호는 표문을 올려 포홍을 육이제군사(六夷諸軍事), 요익중을 육이좌도독(六夷左都督)으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고, 저족과 강족 150,000여 명을 사주와 기주로 이주시켰다.

태화 3년(330년) 2월, 석호 등이 석륵에게 옥새의 인수를 바쳐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하였으나, 석륵은 처음에는 이를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대조천왕(大趙天王)•행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였다. 이때 석호는 태위로 승진되었고, 상서령을 겸하였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진봉되었다. 석호의 아들들의 관작도 승격되어, 장남 석수는 기주자사로 삼고 제왕(齊王)에 봉하였고, 차남 석선(石宣)은 좌장군으로 임명하였으며, 그 동생 석정(石挺)은 시중으로 삼고 양왕(梁王)에 봉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석륵이 마침내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석호는 자신의 공로가 당대에서 가장 높다고 여겼고, 석륵이 즉위한 후 대선우의 자리는 당연히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석륵은 그 자리를 그의 아들 석굉(石宏)에게 주었기에 석호는 이를 깊이 원망하며, 장남 석수에게 말했다.
"주상께서 양국을 도읍으로 삼은 이래로 나는 몸소 화살과 돌을 맞아가며 줄곧 공훈을 세웠다. 그렇게 싸운지 어언 20년, 남으로는 유악(劉岳)을 생포하였고, 북으로는 삭두(索頭)를 달아나게 하였으며, 동으로는 제(齊)와 노(魯)의 땅을 평정하였고, 서로는 진(秦), 옹(雍)의 땅을 정벌하였으니, 도합 13개의 주를 섬멸한 셈이다. 대조(大趙)의 업을 이룬 자가 바로 나란 말이다. 대선우는 실로 내가 받아야 마땅한 자리인데, 젓내 나는 첩의 자식한테 빼앗기고 말았으니, 매일 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수치스러워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도 오지 않는구나. 훗날 주상께서 승하하신다면 우리 종족은 멸절되고 말 것이다."

건평 2년(331년) 7월, 명제 석륵이 석호를 대사마로 삼았다.

건평 3년(332년) 5월, 석륵은 태자 석홍에게 상서(尚書)가 올리는 문서를 살피게 하고, 중상시 엄진(嚴震)에게 가부 결정을 맡기는 대신, 정벌이나 큰 사건에 대해서만 자신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엄진의 권력이 왕과 비슷하게 강해지니, 석호의 집에는 참새가 드나들 정도로 빈객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안그래도 석륵이 업(鄴)을 탐내며 자신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석호는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2.3. 후조의 국권을 장악하다

건평 4년(333년) 7월, 비향현(肥鄉縣)에서는 운석이 떨어지자, 비향현령 한강(韓強)은 조사하던 중 장성현(長城縣) 서쪽 산 골짜기에서 사방으로 4촌, 두께 2촌의 검은 인장을 발견해 석호에게 바쳤다.

어느 날, 명제 석륵은 병이 위독해져, 중산왕 석호와 태자 석홍, 중상시 엄진 등을 불러 병상에 시중들게 하였다. 석호는 석륵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석홍과 엄진은 물론, 내외 신하와 친척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석륵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석호는 다시 조서를 고쳐 업에 있던 진왕(秦王) 석굉과 팽성왕 석감을 양국으로 소환해 석륵의 병시중을 들게 하고, 광아(廣阿)에서 발생한 황충 피해 조사를 핑계로 석수에게 기병 3,000기를 주어 광아에서 자신의 지시를 기다리게 하였다. 얼마 뒤, 병세가 약간 나아진 석륵은 업에 있어야 할 석굉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말했다.
"누가 명령하여 진왕을 불러들였는가? 명령을 내린 자를 응당 참수하겠다!"
이에 석호는 매우 두려워하며 석륵 앞에서는
"진왕(秦王)이 사모하여 잠시 온 것이니 지금 바로 보내겠습니다."
라 하였으나, 석굉을 돌려보내지 않고 그대로 양국에 머물게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석륵은 붕어하자, 석호는 석륵의 시신을 산기슭에 몰래 파묻어 아무도 무덤을 찾을 수 없도록 하고, 후조의 대신들은 허묘(虛葬)인 고평릉(高平陵)에서 장사를 지냈다.

석륵이 결국 석호를 처리하지 못한 채 붕어하니, 석호는 먼저 태자 석홍의 신변을 확보하여 평대에 앉히고, 정적인 정하와 서광을 체포하였다. 그 후, 광아에 주둔해 있던 석호의 아들 석수가 군대를 거느리고 입궁하니, 문무 백관이 모두 흩어졌다. 석홍은 두려워하며 자신이 무능하여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며 석호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석호가 거부하며 말했다.
"임금이 붕어하면 세자가 즉위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신이 어찌 감히 이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석홍이 눈물을 흘리면서 굳게 황제 자리를 사양하자, 석호가 분노하여 꾸짖었다.
"설령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하에는 마땅히 대의(大義)가 있는 법인데, 어찌 사양하십니까!"
그러고는 석홍을 강제로 황제로 세우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문무 백관은 모두 한 등급씩 승진하였으나, 정하와 서광은 석호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봉거도위 석총과 초군(譙郡) 태수 팽표(彭彪) 등은 불안감을 느껴 제각기 동진에 사자를 보내 투항 의사를 전달하니, 동진의 영군사마 공탄(孔坦)은 조정에 상소하면서 이들의 서신을 첨부하여 후조 정벌을 주청하였다. 이에 동진 조정에서는 독호 교구(喬球)를 보내 그들을 구원케 하였지만, 동진군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석호가 먼저 석총 등을 공격해 모두 주살하였다.

건평 4년(333년) 8월, 석홍은 석호를 승상, 대선우로 삼고, 구석(九錫)을 내렸으며, 위왕(魏王)으로 봉하여 위군(魏郡) 등 13개 군을 나라로 삼아 총괄하게 하였다. 석호는 사양하는 척하다가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고, 석호의 자식들 또한 모두 왕작에 봉해졌다. 석호는 문무 구신(舊臣)들을 좌우 승상부(丞相府)로 보냈고, 자신의 측근들은 대성(臺省)이나 금군(禁軍)과 같은 요직에 배치하여 궁궐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태자궁(太子宮)을 숭훈궁(崇訓宮)이라 고쳐, 명제 석륵의 부인인 태후 유씨(劉氏)와 그녀 이하의 인물들을 모두 그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또, 석호는 석홍의 궁녀들 중 아름다운 이들과 좋은 말, 보물, 옷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승상부로 가져갔다.

건평 4년(333년) 9월, 숭훈궁에 유폐된 태후 유씨가 팽성왕 석감과 함께 석호를 몰아내고, 남안왕 석회(石恢)를 주군으로 옹립할 음모를 꾸몄다. 하지만 일이 발각되어 석감은 석호에 의해 화형당했고, 석회는 소환받아 양국으로 옮겨졌다. 석호는 유씨를 황태후 폐위시키고 곧 그녀를 주살하였으며, 석홍의 생모 정씨(程氏)를 황태후로 삼았다.(석감의 난)

건평 4년(333년) 10월, 하동왕 석생이 관중(關中)의 병력을 모아 거병하고, 낙양의 석랑(石朗)과 힘을 합쳐 석호를 토벌하려 하였다. 석호는 석수를 양국에 남겨 지키게 하고, 스스로 보•기 70,000여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먼저 낙양의 금용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석랑을 사로잡은 석호는 그의 다리를 벤 뒤에 참수하였고, 양왕 석정을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유외와 함께 장안으로 진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석생은 선비족 섭괴와 손을 잡고 장수 곽권을 보내 20,000 군대로 포판(蒲阪)에 주둔하게 하였다. 곽권은 이내 동관(潼關)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석정군을 요격해 전멸시키니, 석정과 유외는 대패하여 모두 전사하였고, 석호는 군대를 민지(澠池)로 후퇴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호는 선비족을 꼬드겨 석생을 배반하게 하였다. 선비족들이 포판을 공격하자, 석생은 겁에 질려 혼자 장안으로 도망쳤고, 곽권은 남은 병력을 수습해 위예(渭汭)로 퇴각하였다. 이윽고 석생은 장안성까지 버린 채 계두산(雞頭山)에 들어가 숨어버렸고, 석생의 장수 장영(張英)만이 장안을 지키다 석호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장안이 함락되고 오래지 않아 석생은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당해 그 수급이 석호에게 진상되었고, 곽권은 잔당을 인솔해 상규(上邽)로 도망쳐 동진에 투항하였다.(석생의 난)

석생과 석랑의 반란을 진압한 석호는 여러 장수들을 견(汧), 농(隴)에 나누어 주둔시키고, 장수 마추(麻秋)를 보내 석생의 반란을 틈타서 거병한 저족 수령 포홍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에 포홍은 20,000여 호를 거느리고 다시 후조에 투항하였고, 석호는 그를 호저교위•광위장군으로 삼았다. 이윽고 석호와 함께 장안에 입성한 포홍은 그에게 관중(關中)의 호걸들과 저족, 강족을 이주시켜 동쪽 방면을 채울 것을 유세하였다. 이에 석호는 포홍의 권유에 따라 진주와 옹주의 저족, 강족 100,000여 호를 관동(關東)으로 이주시킨 후, 포홍을 용양장군•유민도독(流人都督)으로 삼아 방두(枋頭)에 머물게 하였다. 이후 석호는 다시 수도 양국으로 돌아와 대사면령을 실시하고, 옛날 위무제 조조가 했던 것처럼 석홍을 겁박해 양국에 위대(魏臺)를 세우게 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3월, 동진에서 곽권의 투항을 받아주고 조서 내려 그를 진서장군, 옹주(雍州) 자사로 삼아 후원하니, 본래 석생을 따르던 옹주의 여러 군(郡)들도 들고 같이 일어나 곽권에게 호응하였다. 이에 석호는 장수 곽오(郭敖), 아들인 장무왕 석빈에게 보•기 40,000명을 주어 곽권을 토벌케 하였다.

연희 원년(334년) 4월, 곽오와 석빈이 서쪽으로 나아가 곽권을 공격하기 위해 화음(華陰)에 진을 쳤을 때, 상규의 호족이 곽권의 목을 베고 후조에 투항하였다.(곽권의 난) 본래 진주(秦州)와 옹주 등지는 석생이 다스리던 지역이었기에, 석호는 다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생각으로 진주의 30,000여 호를 청주(靑州)와 병주(幷州)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러자 장안(長安) 사람 진량부(陳良夫)가 강족의 부락 중 하나인 흑강(黒羌)에게로 달아나, 북강왕(北羌王) 박구대(薄句大)와 결탁하여 북지(北地), 빙익(馮翊) 등의 군을 침노하였다. 이에 곽오와 석빈은 낙안왕 석도(石韜)와 힘을 합쳐 진량부를 격파했고, 북강왕 박구대는 마란산(馬蘭山)으로 도망쳤다. 석빈 등은 박구대의 뒤를 쫓아 북진하였으나,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강족에게 패하여 병력의 7 ~ 8할을 잃고 말았다. 석빈 등이 퇴각하여 삼성(三城)으로 들어가자, 석호는 사자를 보내 곽오를 주살함으로써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이 시기에 진왕 석굉이 석호를 원망하는 말을 하여, 석호가 그를 유폐시켰다.

연희 원년(334년) 10월, 석홍이 스스로 옥새를 들고 위궁(魏宮)을 찾아가, 석호에게 양위할 뜻을 밝혔다. 이에 석호가 말했다.
"제왕의 대업은 천하의 논의가 있어야 마땅한데, 어찌 이를 스스로 논의하려 하십니까?"
결국 석홍은 눈물을 흘리며 궁으로 돌아갔다. 이를 본 태후 정씨가 말했다.
"선제(석륵)의 혈통이 이제 완전히 끊어지겠구나."
이때 상서가 위대(魏臺)로 상소를 올려 석호에게 당요와 우순의 선양의 고사를 따를 것을 청하자, 석호가 말했다.
"석홍은 어리석고 암담하며, 상중에도 예의가 없으니, 천하를 다스릴 자질이 아니다. 임금이 되려면 만국(萬國)을 다스려야 하니 마땅히 폐위시켜야지, 선양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2.4. 거섭조천왕 시기

연희 원년(334년) 11월, 석호가 상서우복야 곽은(郭殷)을 보내 지절을 들고 입궁하게 하여, 황제 석홍을 폐위시키고 해양왕(海陽王)으로 삼았다. 석호의 측근들은 모두 위대에 나아가 석호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청했으나, 석호가 말했다.
"왕실에 어려움이 많음에도 해양(海陽, 석홍)은 스스로 제위를 버렸다. 이로써 사해(四海)의 중책을 짐이 맡게 되었으니, 부득이하게 여러 사람들이 강권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짐이 듣기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자는 '황(皇)'이라 하고, 인간과 신령을 화합시키는 자는 '제(帝)'라 한다고 하였다. '황제'라는 칭호는 짐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으로 칭하여 하늘과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겠노라."
그리고는 석홍과 태후 정씨, 진왕 석굉, 남양왕 석회는 모두 숭훈궁에 유폐시켰다가, 얼마 뒤에 모두 암살하였다.(연희정변)

연희 원년(334년) 12월, 서주(徐州)의 종사 주종(朱縱)이 서주자사 곽상(郭祥)을 죽이고 팽성(彭城)을 들어 동진에 귀순하자, 석호는 장수 왕랑(王朗)을 보내 이를 토벌하였고, 주종은 회남(淮南)으로 달아났다.

건무 원년(335년) 정월, 경내에 대사면을 내리고, 연호를 '건무(建武)'로 개원하였다. 기안(夔安)을 시중•태위•수상서령(守尚書令), 곽은을 사공, 한희(韓晞)를 상서좌복야, 위개(魏槩), 풍막(馮莫), 장숭(張崇), 조현(曹顯)을 상서로 임명하였다. 또, 신종을 시중으로, 낭개(郎闓)를 광록대부로, 왕파(王波)를 중서령으로 삼았고, 그 밖의 문무관료들은 각각 차등을 두어 봉작하였으며, 장남 석수를 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석호는 '륵(勒)'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을 금하게 하여, 말의 재갈을 뜻하는 '마륵(馬勒)'의 경우 '비라(轡羅)'로 바꿔서 쓰게 하였고, 고수를 뜻하는 '나륵(羅勒)'의 경우 '향채(香菜)'로 바꿔서 쓰게 하였다.

당시 석호는 '천자(天子)가 동북쪽에서 올 것'이라는 도참서의 내용을 믿고, 법가(法駕)를 갖추고 신도(信都)에서 행차를 시작해 다시 양국으로 돌아와 그 예언에 응하려 하였다. 그리고 영도(癭陶)의 유향(栁鄉)을 분할하여 정가현(停駕縣)을 세웠으며, 사주(司州)의 하남(河南), 하동(河東), 홍농(弘農), 형양(滎陽)과 연주의 진류(陳留), 동연(東燕)을 떼어내 낙주(洛州)를 따로 설치하였다. 이때 진류군을 개창군(建昌郡)으로 개명하여 낙주에 속하게 하였다.

석호는 방탕하여 정무를 등한시하고, 상서(尚書)의 일은 전부 태자 석수로 하여금 살피게 하였다. 다만, 지방관 선발, 교묘(郊廟)의 제사, 정벌, 형벌의 단죄만은 석호가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석호는 토목공사를 좋아하였는데, 한번은 업성의 동작대가 무너지자, 석호는 전장소부(典匠少府) 임왕(任汪)에게 책임을 물어 죽이고, 이전보다 두 배 규모로 동작대를 재건할 것을 명하였다.

건무 원년(335년) 4월, 석호가 남쪽을 순행하여, 기병 10여 명을 척후병으로 삼아 역양(歷陽) 인근을 정찰하게 하였다. 이때 동진의 역양태수 원탐은 매우 두려워하며 이를 동진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기병의 숫자를 설명하지 않아 동진의 수도 건강(建康)이 크게 진동하였다. 동진의 성제 사마연은 사도 왕도를 대사마로 삼아 모든 군사를 총지휘하게 하여 후조군을 막게 하였고, 안팎으로 계엄령을 내려 광막문(廣莫門)에서 친히 군사를 검열하였다. 그리고 여러 장군들에게 명령을 나누어 내려, 장군 유사(劉仕)를 역양으로 보내고, 평서장군 조윤(趙胤)은 자호(慈湖)에 주둔하게 하였으며, 용양장군 노영(路永)은 우저(牛渚)에 주둔하게 하고, 건무장군 왕윤지는 무호(蕪湖)에 주둔하게 하였다. 당시 광릉(廣陵)을 진수하던 사공 치감 또한 광릉상 진광(陳光)에게 군사를 주어 수도를 보위하게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석호의 기병이 적었다는 추가 보고가 올라와, 동진군은 동양(東陽)으로 철수하였으며, 계엄령은 해제되었다.

이때 석호는 정로장군 석우(石遇)를 보내, 기병 7,000명을 이끌고 면수(沔水)를 건너 중려(中廬)를 침략하게 했고, 석우는 동진의 평북장군 환선이 지키는 양양(襄陽)을 포위하였다. 이에 동진의 보국장군 모보, 남중랑장 왕국(王國), 정서장군 사마 왕건기(王愆期) 등이 형주(荊州)의 군사들을 이끌고, 장산(章山)에 주둔하여 양양을 지원하였다. 석우는 세 방향에서 땅굴을 파서 양양성을 공격했으나, 환선은 용감한 병사들을 모아 역으로 기습을 감행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많은 갑옷과 말을 얻었다. 공방을 주고받은지 20여 일 지났을 때, 석우의 군대는 굶주림과 역병으로 인해 공성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석호는 조서를 내려 형벌을 면제받고자 하는 자들은 재산을 대신 내게 하고, 돈이 없는 자는 곡물로 대신 내게 하여, 모두 당시의 시세에 따라 거두어 비축하였다. 이로써 조세 수입이 많아져 운송이 번거롭자, 석호는 수도 양국의 창고에 해마다 곡식 100만 석을 저장하게 하고, 나머지는 강 인근에 비축하도록 하였다. 이에 동진의 장수 순우안(淳于安)이 낭야(琅邪)의 비현(費縣)을 공격하여 비축해둔 곡식을 빼앗은 뒤, 수천 명을 포로로 사로잡고 돌아갔다.

건무 원년(335년) 8월, 기주(冀州)의 여덟 군(郡)에서 우박이 내려 가을에 수확될 예정이던 곡식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곡물 가격이 폭등하여 은 1근(斤)이 쌀 2두(斗)의 값에 해당하게 되었다. 석호는 조서를 내려 깊이 자책하고,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각지에서 창고에 저장된 보리를 꺼내 가을 파종에 공급하도록 하였으며, 특히 피해가 심한 곳은 1년간 세금을 면제하였다. 또한, 이 무렵에 동작대가 완공되자, 공사에 참여한 장인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건무 원년(335년) 9월, 석호가 업(鄴)으로 천도하였다. 이때 상서(尚書)가 태상(太常)에게 종묘(宗廟)에 고하는 예를 행할 것을 청하자, 석호가 답하여 말했다.
"옛날에는 큰일을 행하기 전에 종묘에 고하였으나, 사직(社稷)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상서는 이를 자세히 논의하여 보고하라."
공경들이 상의를 마치고, 태위로 하여금 사직에 고하도록 청하자, 석호는 이를 따랐다.

건무 원년(335년) 10월, 장무왕 석빈은 진주와 옹주에서 정예 기병 20,000기를 긁어모아, 작년에 마란산으로 도망친 북강왕 박구대를 토벌해 마침내 강족을 평정하였다. 한편, 석호가 업으로 향하면서 장락(長樂)을 지나 위국(衛國)에 이르렀을 때, 개간되지 않은 밭과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뽕나무 농사를 보고 그 지역의 지방관을 강등시켰다.

건무 원년(335년) 11월, 그 해에는 9월부터 11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으나, 석호가 업궁에 들어가자 큰 비가 내려 온 나라가 촉촉해졌다. 이에 석호는 크게 기뻐하며, 중죄 이하의 죄인들을 사면하고, 처음으로 산기상시(散騎常侍) 이상의 관직자들에게는 초헌(軺軒)을 탈 수 있게 하였다. 또, 왕공(王公)들은 교외 제사를 지낼 때 네 마리 말이 끄는 부차(副車)를 타거나, 용기(龍旂)에 팔류(八旒)를 단 수레를 탈 수 있게 하였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조회할 때는 초헌을 타게 하였다.(업 천도)

건무 2년(336년) 정월, 석호가 아문장 장미를 시켜 낙양의 종고(鍾虡), 구룡(九龍), 옹중(翁仲), 동타(銅駝), 비렴(飛廉)을 업(鄴)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윽고 장미가 우여곡절 끝에 낙양의 기물들을 무사히 가지고 도착하자, 석호는 크게 기뻐하며 2년 동안의 형벌을 사면하고, 백성들에게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백관의 관직을 한 계급씩 올려주었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년마다 업적을 평가하고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구별하는 것은 정사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것으로, 선왕(先王)들의 훌륭한 제도이다. 위나라가 처음으로 구품(九品) 제도를 세워 3년마다 정리하는 것을 규정하였으니, 비록 완전히 아름답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이는 관리들의 청렴을 유지하게 하고, 인륜(人倫)에 있어서 맑은 거울이 되었다. 그 이후로도 제왕들은 이를 준수하며 변경하지 않았으나, 선제(先帝)께서 천하에 임하시어 황제의 명을 두 번 다시 내렸는데, 그 선발 과정에 있어서는 청정함이 없었다. 지금부터는 선발과 평가는 반드시 청렴하게 이루어져, 혼탁함을 분별하게 하여 구류(九流)가 모두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이부상서가 관리를 선발할 때에는 진나라의 구반(九班) 선발 제도를 따르고, 이를 영구적인 규범으로 삼도록 하라. 그리하여 상서성(尚書省)에서 선발이 끝나면 중서성(中書省), 문하성(門下省)도 경유하게 하여, 삼성(三省)이 이를 널리 알게된 후에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라. 이 조서의 평가와 선발 방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어사가 탄핵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이후 석호는 업도(鄴都)에서 크게 궁궐을 지을 생각을 품고, 업성 서쪽의 문창(文昌) 옛 궁전 자리에 동궁과 서궁의 건축을 명하였다. 그리고 옛 수도 양국에는 태무전(太武殿)을 짓게 하였다.

건무 2년(336년) 11월, 삭두(索頭)의 욱국(郁鞠) 등이 30,000명을 이끌고 후조로 와서 항복하였다. 석호는 욱국 등 13명을 친통조왕(親通趙王)으로 삼고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으며, 그들이 이끌고 온 무리는 기주(冀州)와 청주(青州) 등 6개 주에 흩어져 배치되었다.

2.4.1. 끝없는 토목공사와 사치

당시 석호의 대규모 토목공사로 여러 노역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군사 활동도 끊이지 않았다. 더불어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어 곡물 가격이 치솟았고,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으며, 들판에는 살아있는 풀조차 없었다. 금 1근이 쌀 2두의 값에 해당하고, 은 1량(兩)이 고기 1근의 값에 해당하였다.백성 중 10명 중 6~7명이 굶주림으로 죽었으며, 백성들은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갈 방도가 없었다. 혹자는 땅을 파서 들쥐를 잡아 먹거나, 겨울잠을 자는 제비를 잡아 먹기도 하였다. 이에 석호는 명령을 내려 지방 관원들에게 장정(壯丁)을 이끌고 산과 강에서 도토리를 채집하고 물고기를 잡아 노약자들을 구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조차 중간에서 권세가 있는 자들이 수탈하여 백성들이 실제로 그 혜택을 받지 못하였다. 또한 부유한 집들을 조사하여 기근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게 하고, 공경(公卿) 이하의 관료들도 곡식을 내어 구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간사한 관리들이 이를 틈타 계속해서 탈취하니, 비록 구제할 노력은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전에 맹진(孟津)과 하동(河東)에서 업성(鄴城)까지 5리 거리에 제북군(濟北郡) 곡성현(糓城縣)이 있었는데, 그곳의 곡성산(糓城山)은 황석공(黃石公)이 묻힌 곳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이 산에 올라갔을 때 무너진 흙 속에서 문자가 새겨진 돌들을 발견하고 이를 업성으로 가져와 석호에게 바쳤다. 석호는 곡성산으로 가서 이 돌들을 채취하여 궁궐을 짓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하고,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곡성현령을 파면시켰다. 이로써 곡성산의 문석(文石)을 채취하여 업궁의 기틀로 삼았는데, 그 기틀의 넓이가 500무(武)에 달했고, 위병들이 그곳에서 숙위하며 지켰다. 또한 기둥과 기와를 모두 청동으로 주조하고 금칠을 입혀 장식하였다. 그리고 일전에 장안과 낙양에서 가져온 동상들을 궁전 앞에 비치하여 궁전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다. 두 마리의 구리로 만든 낙타 동상은 말의 모습과 비슷하였으며, 길이는 1장이고 높이도 1장, 발은 소와 같고, 꼬리는 2척 길이였다. 낙타의 등은 말 안장처럼 생겼으며, 양문(陽門) 밖 길 양쪽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또한 구리로 만든 종 네 개는 거대한 종 모양으로, 높이가 2장 8척이며 큰 쪽의 너비는 1장 2척, 작은 쪽의 너비는 7척이었다. 그 종들은 교룡(蛟龍)과 각종 새와 짐승의 형상을 종 둘레에 새겨 장식했다.

업성 북서쪽에 위치한 삼대(三臺)에도 궁전을 건축하여, 마찬가지로 곡성산의 돌들로 그 기틀을 만들었으며, 웅장하게 솟아 그 높이는 산과 같았다. 석호는 삼대에 세운 궁전을 '구화궁(九華宮)'이라 이름하였다. 또, 업성 북쪽에는 '소요루(逍遙樓)', 동북쪽에는 '피운루(披雲樓)'를 세웠고, 성문 위에는 '대모루(玳瑁樓)'를 세웠다. 대모루는 순금과 은으로 장식되고, 오색 구슬로 만든 발과 백옥으로 만든 고리로 꾸며졌다. 내부에는 옥석으로 만든 침대가 있고, 바닥은 바다거북인 대모(玳瑁)의 등껍질 문양으로 깔려 있었기 때문에 '대모루'라 불렸다.

건무 2년(336년) 12월, 또, 업성의 동궁과 서궁이 모두 완공되었으며, 이 업궁(鄴宮)의 남쪽으로 궁전으로 통하는 세 개의 문을 세웠다. 서문(西門)인 봉양문(鳳陽門)은 높이가 25장(丈)이며, 그 위에는 여러 층의 누각이 있었고, 태양과 마주하는 쪽에는 두 개의 금으로 된 봉황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봉황의 높이는 1장 6척이었다. 동쪽 성벽 위에는 동명관(東明觀)을 세웠으며, 그 위에 금으로 만든 박산(博山)을 설치하고, 이르기를 '장천(鏘天)'이라 하였다. 북쪽 성벽 위에는 제오루(齊午樓)가 있는데, 여러 정자들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하여 홀로 높이 솟아 있었다.

업성의 동서 길이는 7리, 남북 길이는 5리였으며, 벽돌로 외관을 장식했다. 100보마다 한 개의 누각을 두었고, 궁전, 문, 누각, 성의 모서리와 성벽 위에는 모두 관(觀)과 정자들이 층층이 겹치고, 처마는 구름을 스치듯 높이 솟아 있었다. 모든 문, 창문, 집들은 주홍색 기둥과 하얀 옥으로 장식되었으며, 60~70리 떨어진 곳에서도 이 문이 마치 신선의 거처처럼 웅장하게 보였다. 업성의 동문에 있는 돌다리에는 두 개의 돌기둥이 있었는데, 그 제작이 매우 정교하였다. 기둥 옆에는 구름 모양의 횃불을 두었고, 그 위에는 용이 감겨 있는 형상이 매우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었다.

업성의 누각 아래에는 사방 400보 크기의 경마장과 사격장을 만들었으며, 그 주변은 모두 문양이 새겨진 돌과 붉은 사암으로 장식하고, 화려하게 채색하였다. 경마장 옆에는 금과 옥, 동전과 조개로 만든 보물을 모아놓고, 서커스와 같은 다양한 공연을 벌였으며, 사방에는 비단 천막을 쳤다. 기둥은 모두 용과 봉황, 100가지 짐승의 형상을 조각하고, 여러 옥으로 기둥을 장식하여 밤에는 종종 빛이 났다. 석호는 여러 강족과 저족을 누각 위에 모았는데, 때로는 가뭄이 들면 여러 보물과 향을 갈아 가루로 만들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가루를 누각 위에서 바람에 날려 보냈기에, 이 누각을 가리켜 '방진대(芳塵臺)'라 불렀다. 또한, 누각 위에는 배 속에 수백 섬의 술을 담을 수 있는 구리로 만든 용이 있었으며, 호인(胡人)들이 누각 위에서 술을 뿌렸는데, 바람에 날리면 마치 이슬이 내리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를 '점우대(粘雨臺)'라 불렀다. 누각 위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면, 그 소리는 업성(鄴城) 전체를 뒤흔들었다.

양국의 태무전(太武殿)도 완공되었는데, 태무전의 들보와 기둥에는 자색 비단 끈을 걸었고, 그 끈 끝에는 옥벽을 매달았다. 태무전의 기틀은 높이가 2장 8척이었으며, 문양이 새겨진 돌들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지하에 비밀 방을 만들고, 그 안에 500명의 위병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동서 길이는 75보, 남북 길이는 65보이며, 모두 칠을 한 기와와 금으로 만든 솥, 은으로 만든 기둥, 진주 발과 옥으로 장식하여 장인들의 기교가 극에 달했다. 또한 태무전 앞에 높이 40장에 달하는 누각을 세우고, 진주로 을 만들어 드리웠는데, 바람이 불 때면 다섯 가지 색상의 옥 장식이 맑고 우아한 소리를 냈다. 한여름에는 석호가 높은 누각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고, 금석(金石)과 실로 만든 악기들이 밤낮으로 연주되었다.

또, 석호는 '양마대(梁馬臺)', '소마대(笑馬臺)', '희마대(戲馬臺)', '열마대(閱馬臺)'라는 이름의 대를 성 안에 흐르는 장수(漳水) 남쪽에 세웠다. 그 기초는 높이가 5장에 달했고, 여러 관망대가 배치되었다. 석호는 자주 이 대에서 기병을 훈련하고 선발했으며, 검은 창을 든 기병 5,000명이 매월 초하루와 그믐에 이곳에서 군마를 점검하였다. 석호는 항상 무술을 강론한 후, 대에 올라서 이를 내려다보았다가, 장수 남쪽에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려 기병들이 별처럼 배열하였다. 이때 석호가 대에서 활을 쏘면 5,000 기병이 한꺼번에 장수 남쪽에서 달려와 대 아래에 도착하였고, 잘만 수행하면 대장부터 하급 병사까지 모두 상을 받았다. 석호가 또 한 번 활을 쏘면 5,000 기병이 다시 장수 북쪽으로 달려갔는데, 그 기병들이 흩어졌다가 모여드는 모습이 마치 수만 명이 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기병이 검은 창을 사용하여 '흑삭(黑矟)'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또, 깃털로 장식하고 화려하게 칠한 사암으로 만든 무대가 있었는데, 이는 '투계대(鬥雞臺)'라 불렸으며, 닭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그 북쪽에는 '임장궁(臨漳宮)', 동쪽에는 '영락궁(永樂宮)', 서쪽에는 '여원궁(黎園宮)', 동남쪽에는 '적교궁(赤橋宮)', 서북쪽에는 '자맥궁(紫陌宮)'이 있었다. 또한 '어룡관(御龍觀)', '선무관(宣武觀)', '능소관(凌霄觀)', '여의관(如意觀)'이라는 네 개의 관망대가 있었으며, 모두 석호가 사냥하거나 연회를 즐기는 장소였다. '성수당(聖壽堂)'에는 옥으로 된 장식 800개가 있었고, 벽은 계수나무로 만들고 정향 가루로 발랐으며, 호두기름으로 기와를 칠하였다. 금으로 만든 종이 만여 개 매달려 있었으며, 바람이 불면 그 소리가 10여 리까지 울려 퍼졌다.

또, 석호는 동작대를 2장 더 높여, 이어진 지붕이 있는 건물을 세웠고, 이를 '명자굴(命子窟)'이라 불렀다. 그 위에 5층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15장에 달했고, 지면으로부터 20장이 떨어져 있었다. 동작대 꼭대기에는 날개를 펼친 구리로 만든 참새가 있었다. 남쪽에는 금작대(金雀臺)가 높이 8장에 이르렀고, 그 위에는 109개의 방이 있는 집이 있었다. 북쪽에는 '빙정대(氷井臺)'가 있었는데, 높이는 역시 8장이었고, 그 위에는 140개의 방이 있었으며, 빙실이 여러 개 있어 각각 깊이가 15장에 달하는 우물들이 있었다.

석호는 겨울이 되면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한여름에 삼복(三伏) 더위가 시작되면 그 얼음을 대신들에게 나눠주었다. 또한 석묵(石墨)을 저장했는데, 이는 글을 쓰는 데 쓰이거나 불에 태워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물질로, '석탄(石炭)'이라고도 불렸다. 석호는 '영풍대(靈風臺)'와 아홉 개의 궁전을 현양전(顯陽殿) 뒤에 지었고, 그곳에는 관리와 주(州) 및 군(郡)에서 선발된 여인들이 채워졌다. 또한 정회전(正會殿) 남쪽에 있는 임헌전(臨軒殿) 위에 흰 옥으로 만든 침대를 놓고 유수(流蘇) 장식을 설치했는데, 이는 제례 의식을 모방한 것이었다.

석호는 여러 가지 복장과 의례를 개정하였다. 그는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옥새를 차며, 검은 옷과 붉은 치마를 입었는데, 해, 달, 불, 용, 봉황과 같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고대 제왕의 복장을 본따 만들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단사포(丹紗袍)를 업었으며, 사냥할 때는 금으로 수놓은 합환고(合歡袴)를 입었다. 또한, 호랑이 머리 장식이 있던 주머니를 용 머리 장식이 있는 주머니로 바꾸어 착용하였고, 직탕관(直盪冠)을 용등관(龍騰冠)으로 바꾸어 홍색 두건을 썼다. 그리고 군복과 장식까지도 새로이 정비하여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석호가 지은 금화전 전당 앞에 백룡(白龍) 모양의 장식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동쪽 행랑에는 금룡(金龍) 동상을 만들어 서쪽을 향하게 했고, 용의 입에는 장식을 배치하였다. 또한, 10석 정도의 옥을 담을 수 있는 옥으로 된 쟁반을 금박산(金博山)에 배치하였다.

석호의 황후의 욕실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곳은 나무로 된 벽으로 둘어싸여 있었다. 그 구조물은 누각과 마루가 숨어 있듯 화려하게 조각되고 채색되어, 조각과 새김이 매우 정교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목욕실 내부에는 연못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돌침대가 마련되어 있었고, 따로 마련된 욕대(浴臺)도 배치되어 있었다. 사계절용 목욕실이 모두 마련되어 있으며, 욕조의 제방은 옥과 같은 유석(瑜石)과 오보(珷玞)로 만들어졌고, 때로는 호박(琥珀)과 보석처럼 아름다운 돌로 만든 병과 구기를 사용하였다. 여름에는 외부 도랑에서 물을 끌어와 연못에 채웠으며, 연못 바닥에는 수십 가지의 향료를 담은 주머니를 넣어 향을 우려냈다. 이 향 주머니는 얇은 비단이나 칡으로 만들었다. 한겨울에는 1,000개의 청동으로 된 굽은 용을 만들고, 각각 수십 근의 땔감을 태워 이를 달군 후 물에 던져 넣어 연못의 물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였다. 이리하면 연못은 곧 온천이 되었고, 이 온천의 온수를 욕실로 끌어들였는데, 이때 이 연못을 가리켜 '소룡온지(燋龍溫池)'라 불렀다. 또한, 화려한 비단으로 만든 가림막을 사용하여 목욕 공간을 가리고, 석호의 궁녀나 총애 받는 애첩들이 목욕을 마치면 그곳에서 옷을 벗고 잔치를 열어 날밤을 지새웠는데, 이를 '청희(清嬉)'라 불렀다. 목욕이 끝난 후, 물은 궁 밖으로 흘러나갔고, 물이 흘러서 고이는 곳은 '온향거(溫香渠)'라 불렀다. 그 물을 채집하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어 한 잔이라도 얻어가면 모두 기뻐했고, 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 모두가 환희에 찼다고 한다.

욕실 안에는 두 그루의 장생수(長生樹)를 심었는데, 그 나뭇가지가 서로 교차하여 마치 수레 덮개처럼 둥글게 자랐다. 이 나무는 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으며, 잎의 크기는 손바닥만 하다. 8월이나 9월이 되면 꽃이 피는데, 꽃의 색은 하얗고 열매는 붉으며 크기는 도토리만 하다. 다만, 이 열매는 먹을 수 없었다. 세간에서는 이를 이를 서왕모(西王母)의 장생수라고 불렀다. 두 나무 사이에는 옥으로 된 큰 쟁반을 두어, 열매를 10석 정도 담을 수 있게 하였으며, 겨울철에는 촉(蜀) 땅의 비단을 이용해 만든 술이 달린 휘장을 나무에 걸었다. '복장(復帳)'이라 불리는 휘장은 밝은 빛이 나는 비단으로, 겉은 촉 땅의 비단, 속은 흰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휘장의 네 모서리에는 순금과 은으로 정교하게 조각한 향로(香爐)를 설치하여 백화향(百和香)을 피웠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연꽃을 휘장의 꼭대기에 얹어 장식하였다. 휘장의 사방에는 '십이장(十二章)'이라 불리는 문양들이 서로 어울려 빛나며 찬란하게 장식되었다. 또한, '침장(沈帳)' 또는 '유소장(流蘇帳)'이라 불리는 또 다른 휘장을 만들어, 그 휘장의 꼭대기에도 금으로 만든 연꽃을 얹어 장식하였고, 그 안에 금박으로 짠 주머니를 매달았고, 여기에 3승(升)의 침향(沈香)으로 가득 채웠다. 휘장의 사면으로 이러한 향 주머니를 12개씩 걸어 두었고, 그 색상도 각기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었다.

또, 순금으로 만든 용머리를 설치하여 다섯 가지 색의 침향(沈香)과 유소(流蘇)를 물게 하였다. 때로는 황색 비단(黃綈)이나 박산(博山)이 새겨진 비단, 혹은 자색 비단을 물리기 하였고, 때로는 크고 작은 명광금(明光錦), 박산금(博山錦), 교룡금(交龍錦) 등 다양한 비단을 사용해 사계절에 따라 적절하게 배치하였다. 춘추(春秋)에는 비단 장막을 설치하고, 오색 실로 만든 휘장을 사용했으며, 여름에는 단사(單紗), 나사(羅紗), 혹은 호문(縠紋)으로 이 장막을 만들었다. 직물의 장식은 공방에서 제작되었는데, 삼서(三署)에 소속된 장인들이 수백 명에 달하였다. 그들이 만든 비단에는 대등고(大登高), 소등고(小登高), 대명광(大明光), 소명광(小明光), 대박산(大博山), 소박산(小博山), 대교룡(大交龍), 소교룡(小交龍), 포도문금(葡萄文錦), 반문금(班文錦), 봉황금(鳳凰錦), 주작금(朱雀錦), 도핵문금(桃核文錦) 등의 문양이 있었다. 황제의 거처에서 사용된 융단은 표두문규(豹頭文罽), 녹자규(鹿子罽), 화규(花罽) 등 다양한 문양으로 제작되었으며, 청색, 백색, 황색, 녹색, 자색 비단이나 촉 땅의 비단으로 꾸며졌다. 이처럼 정교한 작품들은 수백 가지가 넘었고, 그 이름을 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었다.

또한, 석호는 운모(雲母)로 만든 '오명금박모난선(五明金薄莫難扇)'이라는 부채를 제작하였다. 이 부채는 얇게 두드린 순금이 매미의 날개처럼 얇았고, 양면에는 채색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신선과 기이한 동물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다섯 개의 밝은 구멍이 중앙에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의 크기는 3~5치에 달했고, 운모로 그 구멍을 메워 만든 것이었다. 이 부채는 장식이 섬세하여 얼핏 보면, 손에 들고 있는 것조차 알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했기 때문에 '모난(莫難)'이라 불렸다. 석호는 외출할 때 이 부채를 자주 휴대하였고, 승여(乘輿) 옆에 두었다. 때로는 상아나 복숭아 가지로 만든 부채도 사용하였는데, 그 색상은 녹색, 목란색, 남색, 울금색 등으로 다양했다.

또, 금은으로 된 구슬로 장식한 병풍을 만들어, 흰 비단에 문인(文人), 의사, 신선, 그리고 새와 짐승의 모습을 그려 장식하였다. 각 장면에는 32글자로 된 찬사(贊詞)가 적혀 있었고, 위쪽에 배치하면 8척, 아래쪽에 배치하면 4척 또는 6척으로, 높낮이는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석호는 운모로 만들어진 마차를 타고, 금은으로 된 멍에를 끌게 하였으며, 황후가 외출할 때는 숭로(嵩輅)나 옥로(玊輅), 혹은 붉은 칠을 한 와련(臥輦) 탔다. 이 마차는 운모로 비단을 대신하여 제작되었으며, 중외(中外) 네 기둥은 모두 밝고 투명하였다.

석호가 쓰던 연회용 그릇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으며, 금과 은으로 장식된 연회용 잔은 총 120개가 있었다. 그 잔 사이의 장식은 매우 미세하게 만들어져, 가까이에서 봐야 머리카락처럼 얇은 선들이 보였는데, 잔이 움직일 때마다 원형으로 회전하며 장관을 이루었다. 석호가 앉는 자리에는 특별히 3장 길이의 독특하게 생긴 네모난 모양의 침대가 있었으며, 그 외의 침대들은 모두 6척 높이로 만들었다. 후궁의 소첩들이 사용하는 방에는 작은 옥침대가 있었고, 또한 누워서도 새와 짐승을 사냥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회전식 침대도 있었다. 그 침대는 둘레가 3장으로,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하였고, 향이 나는 다섯 가지 재료로 만든 방석도 비단으로 짜여 있었다. 또한, 다섯 가지 색실로 편직한 자리에 부들 껍질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오채석(五彩席)'을 사용했으며, 이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석호가 앉는 자리로 사용되었다. 황궁 내에는 '삼인대(三人臺)'가 있었고, 그 안에는 지름이 2~3척에 달하는 순금으로 만든 반룡(蟠龍) 문양이 새겨진 거울이 있었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거울 20,000여 장이 있었으며, 그중 일부는 굴절 거울이었다.

또한, 호분(胡粉)[2]과 산초를 섞어 벽을 칠했는데, 이렇게 탄생한 방을 "초방(椒房)"이라 불렀다. 후궁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진귀한 보물들을 즐기는 석호의 첩들이 10,000여 명이 넘었으며, 내부에는 18등급으로 나뉜 여성 관리를 두었다. 이들은 궁중 여성들에게 점성술을 가르치고, 기마술과 궁술도 익히게 하였다. 또한 영대(靈臺)에 여태사(女太史)를 두어 하늘을 바라보며 재해와 길흉을 관찰하게 하여, 조정의 태사가 기록한 것이 실제와 일치하는지를 별도로 조사하게 하였다. 모든 군국에서는 점성술과 도참을 사적으로 학습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기는 자는 참수형에 처하였다.

정회전(正會殿)에는 여인으로 구성된 고취대(鼓吹隊) 30부(部)를 두었는데, 각 부대는 1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지상에서 1장 정도 높이의 평각(平閣) 위에서 연주하였다. 또, 여상서(女尚書)를 두어, 그 관속들은 모두 자색 바지를 입고 옥으로 된 장식을 찬 채 각종 의례와 기술을 다루었다. 그들의 기교와 기술은 남성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정회전 앞에서는 각종 음악과 공연이 펼쳐졌으며, 높게 매달린 줄에 용, 물고기, 봉황 등 다양한 모습의 장식들이 달렸다. 그 장식들은 줄에 연결되어 새처럼 위로 날아오르거나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돌았다. 또한, 서커스도 펼쳐져 광대가 나무로 만든 장치에 입과 이빨로 줄을 물고 매달리거나, 말과 마차를 위에서 여러 묘기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마차 위에 있는 장치는 2척 길이였으며, 장치 끝에는 나무가 두 개씩 있었는데, 기예를 부리는 아이들이 나무 끝에 앉아 높은 위치에서 허공을 날거나 거꾸로 매달리는 등의 공연을 하였다. 그리고 기예를 부리는 아이들은 원숭이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말이 뛸 때 그 옆구리, 머리, 꼬리 등에 매달렸으며, 말은 이들을 달고 그대로 달렸다. 이를 "원기(猨騎)"라고 불렀다. 또, 정회전의 뜰과 단문(端門) 바깥 창합문(閶闔門) 앞에는 120개의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모두 철로 만들어졌으며 높이가 1장 6척이었다.

궁중의 기생 수천 명은 모두 검은 머리띠를 쓰고 신변(神弁)[3]을 착용하였다. 석호의 좌우에는 10,000명의 직위(直衛)가 배치되었고, 이들은 모두 오색으로 빛나는 얇은 갑옷을 입어 눈부신 광채를 발하였다. 석호와 황후가 함께 외출할 때는 여인 1,000명으로 이루어진 기마대가 호위했는데, 이들은 겨울에 모두 자색의 윤건(綸巾)을 쓰고, 세밀하게 짠 비단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허리에는 금과 은으로 새겨진 띠를 차고, 손에는 지황(雌黃)으로 만든 활을 들었으며, 발에는 오색으로 짠 비단 신발을 신었다. 이들은 때때로 기마대와 유희를 즐기면서 '희마대(戲馬臺)'에서 놀았다. 석호와 황후가 대 위에 있을 때, 조서를 전달할 때는 오색 종이에 적힌 조서를 봉황 조각상의 입에 물리게 하였다. 봉황이 조서를 입에 물고 있으면, 시종이 붉은 끈을 수백 장 아래로 풀어내리며, 봉황이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모습으로 문까지 조서를 전달하였다. 이 봉황은 나무로 만들었고, 온몸에 오색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발은 금으로 제작되었다.

매년 3월 3일이 되면 석호와 황후는 공주, 비주(妃主), 명문가의 부녀들과 함께 물가에 모여 화려한 장막과 수레를 꾸며 놓고, 마상 활쏘기와 연회를 하루종일 즐겼다. 또한 좌교령(左校令) 성공단(成公段)에게 명하여, 숭강(崇杠) 기둥 끝에 횃대를 만들게 하였다. 그 높이는 10여 장이며, 상단에 횃대를 설치하고 하단에는 사람이 있어 끈을 당겨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 석호가 이를 시험해 보고 만족해하였다.

이 해에 대나라의 왕 탁발예괴가 대인(大人)들에게 쫓겨나, 업으로 도망쳐 후조로 망명하였다. 석호는 탁발예괴를 영접하고, 그를 위해 저택과 기생, 노비,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들을 하사하였다.

건무 3년(337년) 2월 24일[4], 태보 기안 등 문무 관료 509명이 석호에게 나아가 황제의 존호를 올릴 것을 권하였다. 기안 등이 일전에 성공단이 만든 횃대로 다가섰을 때, 갑자기 기름이 아래로 쏟아져 20여 명이 사망하였다. 석호는 이를 꺼림칙하게 여겨, 창합문에서 성공단을 요참형에 처하였다.

2.5. 대조천왕 시기

건무 3년(337년) 2월 25일[5], 석호가 은나라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스스로 대조천왕(大趙天王)이라 칭하였다. 당초 석호는 곤룡포와 면류관을 쓰고 남교(南郊)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던 중, 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자, 크게 두려워하여 황제라 칭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천왕으로 격하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남교에서 대조천왕으로 즉위한 석호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려 사형 이하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조부 석배사를 '무황제(武皇帝)', 부친 석구멱을 '태종 효황제(太宗孝皇帝)'로 추존하였고, 황후 정앵도(鄭櫻桃)를 천왕황후(天王皇后), 태자 석수를 천왕황태자(天王皇太子)로 세웠다. 아울러 여러 아들들 중 왕으로 봉해진 자는 모두 군공(郡公)으로 강등되었고, 종실 중 왕으로 봉해진 자는 현후(縣侯)로 강등되었다. 백관의 봉작과 직위도 각기 차등을 두어 제정하였다.

이 시기에 태원(太原)에서 이주한 흑강(黑羌)족 500여 호가 반기를 들고 달아났다.

무향(武鄉)의 장성(長城) 사람 한강(韓強)이 검은 옥새를 발견했는데, 이는 가로 4치 7분의 거북 모양 인장이었고, 금으로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강은 이를 업(鄴)으로 가져가 바쳤고, 석호는 그를 기도위(騎都尉)로 임명하고 그 일가의 죄를 면제해 주었다. 또, 화산(華山)에서 약초를 채집하던 약초꾼이 우연히 검은 색의 옥판(玉版)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문구는 이러하였다.
"신유년(申酉年)에는 줄이 끊기지 않을 것이며, 임자년(壬子年)에는 진인(真人)이 나타날 것이다."
석호는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 태보 기안 등이 석호에게 상소를 올려 말했다.
신들이 신중히 살펴본 바, 대조(大趙)는 수덕(水德)을 상징하며, 검은 거북은 물의 정령이고, 옥(玉)은 고대의 보물이옵니다. 천지의 이치는 칠정(七政)에 비유되고, 이 기준은 사극(四極)을 따릅니다. 하늘의 명령은 오래도록 어길 수 없는 것이니, 즉시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길일을 택하고 예를 갖추어 황제의 존호를 올려야 합니다."
그러자 석호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짐을 지나치게 칭송하고 억지로 추대하려는 것을 보니 매우 부끄럽도다. 이는 짐의 본래 뜻이 아니니, 이 논의를 즉시 중지하라. 이제 농사철도 막 시작되었으니, 수도 안팎에서 경축을 표할 수는 없다."
중서령 왕파도 상소를 올려 검은 옥새를 칭송하였는데, 사실 이 검은 옥새는 석호가 전에 미리 제작해 두었던 옥새로, 한강이 우연히 발견하여 다시 바친 것이었다.

당시 태자 석수는 이미 백관을 총괄하고 있었지만, 포악하고 무도하여 석호의 총애를 받고 있는 하간공 석선(石宣)과 낙안공 석도(石韜)를 원수처럼 미워하였다. 또, 석호는 더욱 방탕하게 내궁에서 노닐며 권위와 형벌을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는데, 석수는 어떤 일을 석호에게 보고할 만하다고 여겨 상주하였으나, 석호는 "이런 작은 일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보고하는가?"라며 분노하였다. 반대로 어떤 일이 석호에게 보고되지 않으면,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며 다시 분노하였다. 석수는 자주 책망을 받으며 매를 맞았고, 이 일이 두세 차례나 반복되자 석호를 크게 원망하였다.

건무 3년(337년) 7월, 석수가 몰래 반역을 꾀하며 병을 핑계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석호는 석수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가서 보려고 하였으나, 먼저 자신이 신임하는 여상서(女尚書)를 보내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마침 여상서는 석수가 어머니 정앵도가 보낸 중인과의 대화 내용부터 살해하는 장면까지 전부 목격했고, 이를 보고받은 석호는 노하여 곧장 중서자 이안(李顏) 등을 붙잡아 힐문하였다. 이안 등이 석호 앞에서 자세한 경위를 죄다 털어놓자, 석호는 이안을 포함한 30여 명을 죽이고 태자 석수를 동궁에 유폐시켰다. 그날 밤, 석수와 그의 부인 장씨(張氏), 그리고 자녀 26명을 모두 하나의 관짝에 넣어 매장하였다. 그리고 석수를 따르던 신하 500여 명도 모두 체포해 처형되었고, 석수의 생모 정앵도는 동해태비(東海太妃)로 강등되었다. 이후 하간공 석선을 천왕황태자, 그 생모인 소의 두씨(杜氏)를 천왕황후로 세웠다.(석수의 난)

이 시기에 안정(安定) 사람 후자광(侯子光)이 "불태자(佛太子)"라 자칭하고, 대진국(大秦國)에서 온 자신이 마땅히 소진국(小秦國)의 왕위에 올라야 한다 설파하였다. 그는 이내 두남산(杜南山)에서 수천 명을 모아 거병하여 "대황제(大皇帝)"를 자칭하고, 연호를 '용흥(龍興)'으로 개원하자, 진군대장군 석광(石廣)이 그를 토벌해 참수하였다.(후자광의 난)

건무 3년(337년) 10월, 당시 단부의 수령 단료가 후조와 전연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는데, 전연의 모용황이 양렬장군 송회(宋回)를 보내 칭번하고, 그 동생인 모용한(慕容汗)을 인질로 보내면서 함께 단부 정벌을 청하였다. 석호는 크게 기뻐하며 답례품을 후하게 더하였고, 인질은 사양하고 돌려보낸 뒤, 내년에 단부를 토벌할 것을 기약하였다.

건무 3년(337년) 11월 7일[6], 태백성(太白星)이 영실(營室)에서 세성(歲星)을 범하였다. 이 해, 석호는 장군 이목(李穆)에게 기병 5,000명을 주어 이전에 망명해왔던 탁발예괴를 대녕(大寧)으로 송환하게 하였다. 이에 대나라의 옛 부락들이 많이 탁발예괴에게 귀부하였고, 그를 쫓아냈던 국인(國人)들은 다시 그를 대왕(代王)으로 받들었다.

건무 4년(338년) 정월, 석호가 선비족 단부를 정벌하기 위해 요서(遼西)로 향할 준비를 하면서 용맹한 자 30,000명을 모집하여 모두 용등중랑(龍騰中郎)으로 임명하였다. 마침 단요가 사촌 동생 단굴운(段屈雲)을 보내어 유주(幽州)를 습격하자, 유주자사 이맹(李孟)은 패하여 역경(易京)으로 도망쳤다. 이에 석호는 장수 도표를 횡해장군(橫海將軍)으로, 왕화(王華)를 도요장군(渡遼將軍)으로 삼아, 수군 100,000명을 통솔하여 표유진(漂渝津)으로 출진하게 하였다. 또한 지웅(支雄)을 용양장군, 요익중을 관군장군으로 삼아, 보•기 100,000명을 선봉으로 하여 단요를 정벌하게 하였다.

건무 4년(338년) 3월, 석호는 금대(金臺)에 주둔하고, 선봉인 지웅은 계(薊)로 진격하였다. 이때 단요가 임명한 어양(漁陽) 태수 마포(馬鮑)와 대상(代相) 장목(張牧), 상곡상(上谷相) 후감(侯龕) 등이 40여 개의 성을 들어 모두 항복하며, 군대를 이끌고 와 석호에게 복종하였고, 북평상(北平相) 양유는 100여 가구의 백성들을 이끌고 연산(燕山)에 진을 쳐서 스스로 방어하였다.

얼마 뒤, 지웅이 안차(安次)를 공격하여 단부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 대인(大人) 나루기(那樓竒)를 처형하였다. 이에 단료는 두려워하여 처자식과 친척, 호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밀운산(密雲山)으로 도망쳤고, 단요의 좌장사 유군, 우장사 노심(盧諶), 사마 최열(崔恱) 등이 단부의 도읍인 영지(令支)의 관아와 창고를 봉쇄하고, 석호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석호는 장수 곽태(郭泰)와 마추 등에게 경기병 20,000명을 주어 단요를 추격하게 하였고, 곽태 등은 밀운산에서 단료와 전투를 벌여 단료의 어머니와 처를 포함해서 3,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단요는 패주하여 홀로 말을 타고 평강(平崗)으로 달아나서 숨어 지내다가, 결국 아들 단걸특진(段乞特真)을 보내 석호에게 표문을 올리고 명마(名馬)를 헌납하였다. 석호는 이를 받아들이고, 단부의 백성 20,000여 명을 거두어 옹(雍), 사(司), 연(兗), 예(豫) 4주로 이주시켰다.(단부 멸망)

당초 북선우(北單于) 을회(乙回)는 선비족 적나(敵那)에게 쫓겨났었는데, 석호가 장수 이목을 보내 적나를 격파하고 을회를 북선우로 복위시켰다. 이리하여 요서를 평정한 석호는 단료가 쓰던 궁으로 들어가 논공행상하여 장수들의 공로에 따라 차등 있게 포상하였다. 이때 연산에서 항거하던 양유가 단부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석호의 군문 앞까지 나와 항복하자, 석호는 그를 북평태수로 삼았다.

건무 4년(338년) 5월, 석호는 모용황이 군대를 동원하여 단부를 공격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단부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이익을 챙기려 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모용황이 후조군이 오기 전에 먼저 단부를 공격해 영지를 약탈하였고, 뒤늦게 도착한 석호는 그 찌꺼기만 취한 셈이었다. 이에 석호가 전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니, 승려 불도징(佛圖澄)이 간하였다.
"연나라는 복과 덕이 있는 나라이므로, 아직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을 가하기는 이릅니다."
그러자 석호가 답했다.
"이대로 공격하면 어떤 성을 정복하지 못하겠는가? 이 많은 군대로 전투를 치르면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을 터인데, 어찌 작은 성 하나 정복 못 하겠는가?"
태사령 조람(趙攬)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며 간하였다.
"지금 연나라의 땅은 세성(歲星)이 수호하고 있어, 군대를 보내도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재앙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석호는 이를 듣고 노하여 채찍으로 조람을 때린 뒤, 그를 비여(肥如)로 좌천시켰다. 그 후, 사신을 보내 사방의 백성들과 이민족들을 회유하니, 전연의 성주(成周) 내사 최도(崔燾), 거취(居就) 현령 유홍(游泓), 무원(武原) 내사 상패(常霸), 동이교위 봉추(封抽), 호군 송황(宋晃) 등도 총 36개의 성에서 석호에게 호응하였다. 또, 기양(冀陽)에 정착했던 유민 무리가 기양태수 송촉(宋燭)을 살해한 뒤에 석호에게 투항하였다.

5월 9일[7], 석호가 마침내 전연의 도읍인 극성(棘城)에 이르러 포위하고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여 13일에 퇴각하였다. 이때 모용황은 아들 모용각에게 호기(胡騎) 3,000명을 주어, 퇴각하는 후조군을 새벽에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각이 출전할 때, 성의 여러 문에서는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마치 사방이 구름처럼 병사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이에 석호가 이끄는 군대를 포함해서 후조의 병사들은 크게 놀라 모두 갑옷을 버린 채 도망쳤고, 오직 유격장군 석민의 군대만이 온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극성 전투)

극성에서 패한 석호는 다시 조람을 불러 태사령으로 복직시켰다. 이후 석호는 영지에서 돌아와 역경(易京)을 지나갔는데, 그 성이 견고함을 싫어하여 이를 파괴하였다. 이어서 석륵의 묘를 찾아가 참배하고, 양국으로 들어가 건덕전(建德殿)에서 조정의 문무백관을 소집하여 그들의 공로에 따라 상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업(鄴)에 돌아와, 잔치를 베풀고 포로를 대대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유군을 중서령, 노심을 중서시랑으로 삼았다. 또, 포홍을 사지절•도독6이제군사(都督六夷諸軍事)•관군장군•서평군공(西平郡公)에 각기 삼았는데, 석민이 석호에게 간언하며 말했다.
"포홍은 용맹하고 뛰어나며 그의 아들들도 재능이 비범하니 그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석호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오히려 포홍을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다.

어느정도 정비를 마친 석호는 전연의 창려(昌黎)를 공격할 심산으로, 도요장군 조복(曹伏)을 파견해 청주(青州)의 군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서 답돈성(蹋頓城)을 수비하게 했으나 물이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이에 석호는 명령을 고쳐, 답돈 대신 해도(海島)에 주둔하게 하고, 곡식 300만 석을 운반하여 그들을 지원하였다. 또, 300척의 배로 30만 석의 곡식을 고구려로 보내고, 전농중랑장 왕전(王典)에게 10,000 병력을 주어 해변에서 농사를 짓게 하였다. 그리고 청주에서 배 1,000척을 건조케 하여, 전연을 침략해 해안가의 여러 현들을 약탈할 계획을 세웠다.

이 시기에 태자 석선이 보•기 20,000명을 거느리고 삭방(朔方)의 선비족 곡마두(斛摩頭)를 쳐서 격파하고, 적의 수급 40,000여 개를 획득하였다.

건무 4년(338년) 6월, 주(冀州)의 여덟 군에서 큰 메뚜기 떼가 발생하자, 사예교위가 이를 이유로 각 군의 수령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석호가 사예교위의 청을 거부하며 말했다.
"이것은 정사의 조화가 깨진 것이며, 짐의 덕이 부족한 탓이거늘, 어찌 그 책임을 수령들에게 돌리려는가? 짐이 어찌 우(禹)와 탕(湯)이 스스로 죄를 자책한 도리를 어기겠는가? 사예(司隸)가 올바른 말을 하지 않고, 짐을 보좌하는 데 부족했으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죄에 빠뜨리려 하니, 이는 짐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는 사예교위에게 백의(白衣)를 입혔고,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석호가 아들 석도에게 금정(金鉦), 황월(黃鉞), 난로(鑾輅), 구류(九旒)를 하사하였다.

석호는 양성공 석섭귀(石涉歸), 상용공 석일귀(石日歸)에게 장안(長安)을 수비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진서장군 석광이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며 몰래 반역을 꾀하고 있다 고변하였고, 석호는 크게 노하여 석광을 추적해 체포하고 업에서 처형하였다.

건무 4년(338년) 12월, 단료가 밀운산에서 사신을 보내 석호에게 거짓으로 항복을 청하였다. 석호는 이를 믿고 정동장군 마추에게 30,000 군대를 이끌고 100리 밖까지 나아가서 단료를 영접하라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항복을 받는 것도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조심해야 한다. 장군은 신중히 처리하라."
라며 당부하고, 단료의 신하였던 상서좌승 양유를 마추의 사마로 배속시켜 종군케 하였다.

한편, 단료는 전연의 모용황에게도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며 말했다.
"오랑캐는 탐욕스럽고 무식하여 내가 항복을 청하면 그들은 결코 의심하지 않을 것이오. 만약 그대가 요충지에 군대를 매복시켜서 이들을 기습한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오."
이에 모용황은 아들 모용각에게 정예 기병 7,000명을 주어 밀운산에 매복하게 하였고, 모용각은 삼장구(三藏口)에서 마추의 군대를 습격해 대패시켰다. 이 전투에서 마추의 병력 7~8할이 전사하였고, 마추는 걸어서 가까스로 탈출했으나 양유는 전연군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다. 석호는 마추의 패배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고 분노하여, 식사를 하다가 씹던 음식을 뱉었으며, 마추의 관직을 박탈하였다.(삼장구 전투)

당시 후조의 백성들은 모두 불도징을 따르며 불교를 믿었고, 곳곳에 절이 세워졌으며, 머리를 깎아 출가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로 인해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경우가 잦아지자, 석호는 중서령을 불러 물었다.
"부처는 세상이 존경하는 존재이며, 국가에서 받드는 것이거늘, 벼슬과 지위가 없는 평민들이 부처를 섬기는 것이 옳은가? 또한, 승려는 모두 고결하고 정직해야 하며, 수행에 정진해야 마땅하다. 한데, 지금 승려가 너무 많아 그중에는 교활하게 세금을 피하기 위해 출가했거나 승려에 부적합한 자들이 많으니, 이를 제대로 조사하여 진위를 가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에 중서저작랑 왕도(王度) 등이 상소하여 아뢰었다.
"왕자(王者)는 교외에서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고, 100가지의 신령들을 섬기며, 제사는 의례에 따라 일정하게 행해져야 합니다. 부처는 서역 이방의 신(神)으로, 그 공덕이 우리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천자와 중화(中華) 제후들이 섬겨야 할 신이 아닙니다. 과거 명제가 꿈에서 감응하여 처음으로 그 도(道)가 중국에 전해졌으나, 서역 사람들이 도읍에서 절을 세우는 것을 허락했을 뿐, 한인(漢人)들이 출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역시 이러한 한나라의 제도를 이어받아 이 규범을 따랐습니다.

지금 대조(大趙) 왕조는 천명을 받아 옛 규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화(華)와 융(戎)의 제도는 다르고, 인(人)과 신(神)의 구분은 명확합니다. 이방신에게는 나라 안의 제사와는 다른 의례로 제사해야 하니, 화하(華夏)에서는 이를 섞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국가에서는 한인(漢人)들이 절에 가서 향을 피우고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이야 말로 예법을 따르는 길입니다. 모든 고관대작에서부터 아랫사람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이를 금지하고, 만약 이를 어긴 자는 사사로운 제사를 지내는 것과 동일한 죄로 처벌해야 합니다. 또한 조나라 사람으로서 승려가 된 자들은 다시 일반 백성으로 환속하도록 해야 합니다."
중서령 왕파 또한 왕도와 같은 의견을 올렸다. 그러자 석호가 조서를 내려 왕도의 의견을 논박하며 말했다.
"왕도가 상소한 바에 따르면, 불교는 외국의 신이며, 천자와 중화 제후들이 섬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하나, 짐은 북방 변경에서 태어나 천명을 받들어 중원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제사와 관련된 것은 본래 우리 북방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융적(戎狄)의 신으로서 우리가 그 신앙을 겸하여 받드는 것이며, 제도는 위에서 정해져 영원히 이어져야 한다. 이치에 맞고 결점이 없다면 굳이 이전 시대의 규율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조(趙)의 백성들이 사사로운 제사에 몰두하며 불교를 믿고자 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 모두를 도사(道士)로 삼도록 허락하라."
이로 인해 계율을 소홀히 여기는 승려들이 이를 계기로 더욱 날뛰기 시작하였다.

이 해, 대왕 탁발예괴가 병사하기 전에 후조에 인질로 가 있는 동생 탁발십익건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 이때 탁발예괴와 탁발십익건의 동생 탁발고가 스스로 업(鄴)으로 가서 탁발십익건을 다시 대나라로 보내주는 대신, 자신이 대신 인질로 남겠다고 석호에게 제안하였다. 석호는 이 제안을 의롭다 여기고 탁발십익건과 탁발고 모두를 함께 귀환하게 하였다.

건무 5년(339년) 정월, 석호가 조서를 내려 여러 군국(郡國)에 5경박사(五經博士)를 세우도록 하였다. 그리고 당초 석륵이 두었던 소학박사와 대학박사를 다시 설치하고, 국자박사를 도와 교화에 힘쓰도록 하였다.

석호는 이부(吏部)에서 사람을 선발할 때 덕있는 자들을 배척하게 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어린 아이들을 좋은 관직에 앉히게 하였다. 이때 낭중 위현(魏夐)[8]이 면직되어 평민이 되었다.

건무 5년(339년) 4월 27일[9], 동진의 정서장군 유량(庾亮)이 참군 조송(趙松)을 파견해 파군(巴郡)의 강양(江陽)을 공격하고, 성한의 장수 이굉(李閎), 황환(黃桓) 등을 사로잡았다. 유량은 이 승세를 몰아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석성(石城)에 100,000 대군을 옮기고, 면수(沔水)를 따라서 여러 진영을 펼쳤다. 성제 사마연이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해 이를 의논하게 하니, 태위 치감이 정벌에 쓰일 물자가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 크게 일어날 수 없다며 반대하였고, 태상 채모 또한 후조 정벌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유량의 북벌은 불발되었고, 유량은 자신의 아우 유역(庾懌)을 보국장군•양주자사(梁州刺史)•가절로 삼아 위흥(魏興)을 지키게 하였다. 유량은 아울러 곽좌(霍佐)를 보내 동진 장병들의 처자식들을 영접해오게 하였으나, 곽좌는 오히려 배반하여 300여 호를 몰아 석호에게 투항하였다.

이 시기에 전연의 전군사 모용평(慕容評), 광위장군 모용군(慕容軍), 절충장군 모여근, 탕구장군 모여니(慕輿泥)가 후조의 요서군을 공격해 1,000여 호를 약취하자, 석호는 석성(石成)을 진원장군으로 삼고, 적노장군 호연황(呼延晃), 건위장군 장지(張支) 등을 통솔해 이를 막게 하였다. 그러나 석성은 전연군에게 패하였고, 호연황, 장지는 참수당했다.

건무 5년(339년) 7월, 태자 석선을 대선우로 삼고, 천자(天子)의 붉은 깃발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건무 5년(339년) 8월, 석호는 동진의 유량이 주성(邾城)에 정예병 10,000여 명을 배치한 것을 꺼려, 기안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보병 50,000명, 기병 20,000기와 석감, 석민, 이농, 장하도(張賀度), 이토(李菟) 5명의 장수를 통솔하여 북형주 일대를 침범하고 주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주성을 수비하던 동진의 예주자사 모보는 유량에게 급보를 보내며 구원을 청했지만, 유량은 주성이 견고할 것이라 여겨 구원병을 곧바로 보내지 않았다.

건무 5년(339년) 9월, 석민이 면음(沔陰)에서 동진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 채회(蔡懷)를 전사시켰다. 기안과 이농은 면남(沔南)을 함락시켰고, 장수 주보(朱保)도 백석(白石)에서 동진군 크게 격파해 동진의 장수 정표(鄭豹), 담현(談玄), 학장(郝莊), 수상(随相), 채태(蔡熊)를 죽였으며, 장하도는 주성을 점령하고 모보와 동진군 6,000여 명을 척살하였다. 주성이 떨어지자 기안은 장수들을 통솔해 호정(胡亭)을 점거한 뒤, 동진의 강하군(江夏郡)을 침구하기 시작하니 동진의 역양태수 정진(鄭進)과 장수 황충(黄沖)이 투항하였다. 기안은 계속 나아가 석성(石城)을 포위 공격하여 격파하였고, 이에 맞서던 동진의 경릉(竟陵)태수 이양(李陽)과 동진군 5,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이후 방향을 틀어 한동(漢東)을 약탈해 백성 7,000여 호를 포로로 잡고 후조로 귀환하였다. 석호는 기안이 붙잡아 온 포로들을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로 흩뿌렸다.

당시 석호의 친족들이 백성의 재산을 침해하고 방자하게 굴었으며, 뇌물 받기를 공공연하게 행하였다. 석호가 이를 근심하여 전중어사 이거(李巨)를 어사중승으로 삼아 특별한 신임을 더하니, 백관이 모두 두려워하며 떨었고 주군(州郡)이 숙연해졌다. 이에 석호가 말했다.
"짐은 일찍이 '훌륭한 신하는 마치 맹수와 같아, 큰 길을 당당히 걸으면 사나운 짐승들이 피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말이 정말 맞도다! 바로 이거(李巨)가 그러한 신하였다."
그리고는 큰 상을 내렸으나, 이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진원장군 왕탁(王擢)이 상표하여 말했다.
"옹주(雍州)와 진주(秦州)에서 동쪽으로 이주해 온 명망있는 가문들이 지금은 군역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은 품위 있는 가문이므로 군역을 면제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자 석호가 이를 받아들여, 그 후 황보(皇甫), 호(胡), 양(梁), 위(韋), 두(杜), 우(牛), 신(辛) 등의 열일곱 성씨의 가문들도 군역을 면제받았다. 이들은 모두 명문 가문으로, 그들의 능력에 따라 임관되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는 허락되었다. 이외의 사람들은 이 규정을 적용받지 않았다.

건무 5년(339년) 10월, 석호는 무군장군 이농을 사지절•감요서북평제군사(監遼西北平諸軍事)•정동장군•영주목(營州牧)으로 삼아 영지(令支)를 지키게 하였다. 이후 이농은 군사 30,000명을 거느리고 정북대장군 장거(張舉)와 함께 전연의 범성(凡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범성을 수비하던 어난장군 열관이 필사적으로 농성하여 열흘이 넘도록 버티자, 이농과 장거는 군대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석호는 요서군이 연나라의 영토와 가까워 자주 공격을 받는 것을 보고, 그곳의 백성들을 기주(冀州) 남쪽으로 이주시켰다.

건무 5년(339년) 12월 7일[10], 태보 도표가 세상을 떠났다.

건무 6년(340년) 2월, 석성이 다시 요서군에서 전연의 모용황과 전투를 벌였지만 크게 패하고 철수하였다.

건무 6년(340년) 6월, 큰 가뭄이 들었고 하늘에 흰 무지개가 나타났다. 정월부터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자, 석호는 태자 석선을 보내 임장(臨漳)과 부구(滏口)에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자, 석호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즉위한 지 6년이 되었으나, 하늘의 운행을 조화롭게 하고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하여 흉조가 나타났다. 모든 대신들은 자신의 의견을 올리도록 하고, 서산(西山)의 출입을 금지한 조치를 해제하며, 갈대, 물고기, 소금에 대해 세금 이외에는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하라. 공후(公侯)와 관리들이 산과 못을 점유하여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또한, 석호는 이어서 조서를 내려,
"예전에 풍국(豐國)과 면지(澠池) 두 지역에 죄인을 이주시킨 것은 일시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으나, 그 후 상례가 되어 불만을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죄를 지은 자는 상소를 통해 처리해야 하며, 함부로 유배 보내지 말라. 수도의 감옥에 갇힌 자 중, 직접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자는 모두 석방하라."
또, 석호는 불도징에게 직접 비를 기원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도징이 기우제를 행한 장소에서 흰 용이 내려왔고, 그날 수천 리에 걸쳐 비가 내려와 그해 가을에 풍작을 이루었다.

건무 6년(340년) 7월, 석호가 성한의 황제 이수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병력을 모아 남쪽 동진으로 쳐들어가 강남을 반으로 나누어 차지하자고 제안하였다.

건무 6년(340년) 9월, 상서령 기안이 사망하였다.

석호는 모용황을 정벌하기 위해 사주(司州), 기주(冀州), 청주(青州), 서주(徐州), 유주(幽州), 병주(并州), 옹주(雍州) 7개 주에서 백성들을 징발하여 군역에 복무시켰다. 다섯 가구당 세 명, 네 가구당 두 명의 군사를 징집하여 업성(鄴城)의 기존 군대를 합쳐 총 병력 500,000명을 찍고, 10,000척의 배를 준비하여 강을 따라 바다로 통하게 하였다. 군량으로는 콩 1,100만 석을 준비하여 낙안성(樂安城)으로 운반하게 하였고, 요서(遼西), 북평(北平), 어양(漁陽)에서 10,000여 가구를 징발하여 연주(兗州), 예주(豫州), 옹주(雍州), 낙양(洛陽) 4개의 주로 이주시켰다. 또, 유주(幽州)에서 동쪽으로 백랑(白狼)까지 대대적으로 둔전을 실시하였다. 여기에 더해서 부족한 말을 백성들의 말을 모두 징발함으로써 충당하였고, 사사로이 말을 숨기는 자는 참수하였다. 그 결과, 백성들로부터 말 40,000필 이상을 징수하여 국고에 넣었다.

석호는 찬탈 이후, 각종 인력과 자원을 징발할 때마다 영복(令僕)을 통해 인사를 처리하였다. 적절한 인력을 얻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관직을 추천한 이에게 돌아가고, 상서 및 낭관은 처벌을 면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부상서 유진(劉真)은 인사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 조정에 글을 올려 이를 지적하였다. 이에 석호는 분노하여 왕자에게 책임을 따져 물었고, 유진에게는 광록대부와 금장 자수(紫綬)를 더해 주었다.

석호가 완양(宛陽)에 이르러 요무장(曜武場)에서 대대적으로 군사 검열을 시행하였다.

건무 6년(340년) 10월, 모용황이 유주(幽州)와 기주(冀州)를 기습하자, 후조의 유주자사 석광(石光)은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성문을 굳게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이에 모용황은 열옹새(蠮螉塞)를 통해 진격하여 요새를 지키던 장수들을 모두 처형하고, 계성(薊城)까지 이르렀다가 무수진(武遂津)을 돌파하여 고양(高陽)에 들어가, 가는 곳마다 저장된 물자를 불태우고, 30,000여 호를 약탈한 후 물러갔다. 석광은 나약함을 이유로 중앙으로 소환되어 문책을 받았다.

석호가 명망있는 은사 신밀에게 책상, 의복, 곡식 500석을 하사하였고, 평원(平原)에 대저택을 지어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 달에, 읍루국(挹婁國)에서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석호가 그 사신을 불러 이곳까지 온 이유를 물으니, 사신이 답했다.
"소와 말들이 서남쪽을 향해 누운 지 3년이 되었기에 그곳에 큰 나라가 있음을 알고, 여러 차례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초 성한의 장수 이굉이 동진에서 탈출하여 후조로 귀순했을 때, 성한의 황제 이수가 석호에게 서신을 보내 이굉을 돌려줄 것을 청하며, 석호를 '조왕 석군호(趙王石君虎)'라 지칭하였다. 석호는 이 표현을 불쾌하게 여겨, 그 편지를 조정의 대신들에게 넘기며 논의하게 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다. 이때 중서감 왕파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하였다.
"지금 이굉(李閎)에게 죽음을 각오하고 서약하게 하시어, 만약 그가 촉한(蜀漢)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의 종족을 규합하여 천왕께 교화되는 것을 약속받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이굉을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양주(梁州)와 익주(益州)를 단번에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령 반대로 실패한다고 해도 단지 도망친 한 사람을 잃는 것에 불과하니, 조나라에는 어떠한 손해도 없습니다. 이수는 이미 스스로를 태양과 달과 같이 지칭하고, 한 지역에서 할거하면서 찬탈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그에게 제왕의 명령을 내리면, 그가 반드시 답례할 것이며, 이는 그를 통제하는 데 유리할 것입니다. 이런 융(戎)의 후손은 꾸짖는 것보다 차라리 바로 서신을 보내 답장하는 것이 낫습니다. 또한, 읍루국(挹婁國)에서 바친 활과 화살을 이수에게 보내, 그들이 우리의 강력함을 알게 하십시오."
석호는 이 의견에 따랐고, 이굉을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함께 보내 답례하였다. 그러나 이굉이 답례품을 들고 성한에 이르자, 이수가 조서를 내려 "갈족(羯族)의 사신이 조정에 와서 그들의 물품을 바쳤다." 말했다. 이를 들은 석호는 크게 분노하여, 왕파를 좌천시켜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직무를 맡게 하였다.

이 시기에 석호는 진공(秦公) 석도를 태위로 삼고, 태자 석선과 번갈아 가며 상서(尚書)의 계문을 살펴 형벌과 포상을 독단적으로 결정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사도 신종이 석호에게 간하였다.
"칭찬과 포상, 형벌의 위엄은 모두 황제의 중요한 직무로, 그 권한은 매우 무겁습니다. 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고 규범을 세워 통치의 표준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태자는 나라의 후계자이나, 매일 궁정에서 밥을 먹으며 정무에 참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폐태자 석수가 정무에 간섭하여 멸망한 사례는 가까운 교훈이니, 이를 교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권력을 나누면 화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주나라는 자퇴(子頹)의 반란, 정나라는 숙단(叔段)의 난이 있었는데, 이는 모두 태도를 잘못 취하여 나라를 어지럽히고 친족을 해친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부디 이 점을 깊이 살펴 주십시오."
그러나 석호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전량의 양왕(涼王) 장준이 별가 마선(馬詵)을 보내 조공을 바쳤는데, 무척 불경한 마선의 언사에 분노한 천왕 석호가 장차 그를 참하려 하였다. 이때 석박이 굳게 간했다.
"지금 우리나라가 먼저 제거해야할 적은 강남에 있는 진(晉)의 잔당이지, 저 하우(河右)의 무리는 신경쓸 것도 없습니다. 당장 마선을 죽인다면 장준을 정벌할 수밖에 없는데, 한 갈래의 군사를 둘로 가른다면 건강(建康)의 수명을 늘려주는 일밖에 안 됩니다. 무엇보다 장준의 무리를 상대로 승리한다 하여도 얻는 것이 적고, 힘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사방의 오랑캐의 웃음거리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 저들을 후히 대접해 돌려보내십시오. 만약 저들이 마음을 고쳐먹고 신하들과 함께 사죄한다면 우리가 저들에게서 무엇을 더 구하겠습니까? 저들이 망설이다가 사죄할 시기를 놓쳤을 때 토벌해 꾸짖어도 늦지 않습니다."
석호는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건무 7년(341년) 10월, 흉노유무환이 후조 조정에 조공을 바쳤다. 석호는 유무환을 평북장군•좌현왕으로 임명하고, 횡해장군 왕화를 파견하여 수군을 이끌고 해로를 통해 전연의 안평(安平)을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켰다. 또한 북중랑장(北中郎將)을 보내어 노노(盧奴)에 작은 성을 쌓고, 그 북쪽에 정자를 짓고 궁궐을 건축하게 하였다.

건무 8년(342년) 4월, 석호는 군대를 더욱 늘리려 했으나, 국내에 말이 부족하자 백성들이 말 사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백성들의 말 40,000여 필을 몰수하여 관아에 들였다. 이때 말을 숨긴 자는 요참형에 처해졌다.

건무 8년(342년) 7월, 석호가 또다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시작하였고, 양국에서 업까지 약 200리 이어지는 각도(閣道)를 건설하였으며, 약 40리마다 궁궐이 하나씩 세워졌다. 각 궁궐에는 한 명의 첩과 수십 명의 시녀, 황문(黃門)이 머물며 경호를 맡았는데, 석호는 가는 길에 수레에서 내려 그곳에 머물렀다. 석호가 지은 크고 작은 궁궐들은 길을 따라 심어진 느릅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여름에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사람들이 쉬고는 하였다.

건무 8년(342년) 12월, 석호는 업(鄴)에 40여 개의 누각과 행궁을 지었으며, 장안과 낙양에도 두 궁궐을 새로 건설하였는데, 이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400,000여 명에 달하였다. 업성(鄴城) 동쪽 7리 지점에 적교궁(赤橋宮)을 세우고, 하남(河南) 4주(州)에서는 남쪽의 동진 정벌을 위한 준비를 하였으며, 삭주(朔州), 진주(秦州), 옹주(雍州)에서는 서쪽의 전량 정벌을 위한 자원을 엄격하게 준비하도록 명령하였다. 또, 청주(青州), 기주(冀州), 유주(幽州)에서는 동쪽의 전연 정벌을 계획하였으며, 각 주에서는 병사를 세 번에서 다섯 번씩 징발하였다. 모든 주에서는 갑옷 500,000벌씩 제작하였고, 여기에 170,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재로 인해 물에 빠져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은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였다.

공사와 전쟁 준비 과정에서 공후(公侯)와 지방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며 백성을 침해하고 괴롭혔다. 백성들은 대부분 농사를 할 수가 없어졌고, 생계가 막막해져 10가구 중 3가구만이 농사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패구(貝丘) 사람인 이홍(李弘)이 백성들의 불만을 이용해, 자신이 하늘의 명령에 응하겠다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많은 무리를 결집해 직접 관리를 임명하는 등의 행위를 하였으나, 이내 발각되어 처형되었고, 연좌된 집안이 수천 호에 달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석호는 무리하게 사냥을 즐겨,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곤 하였으며, 여러 건설 현장을 직접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니며 감시하였다. 이에 시중 위소가 석호에게 간언을 올리며 말했다.
"신이 듣기에 천금(千金)의 자식은 집 아래에 앉지 않으며, 만승(萬乘)의 주인은 위태로운 곳을 밟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비록 태생적으로 신무(神武)를 지니시어 사해를 웅거하시고, 하늘과 땅이 함께 돕고 있어 아무런 염려가 없으시겠으나, 백룡(白龍)도 물고기 옷을 입었다가 재난을 맞은 적이 있었으며, 북해(北海)의 바다신 해약(海若)조차도 감추어 다니다가 갈파(葛陂)에서 고초를 겪은 일이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궁궐에 머무시고, 길을 다스리며, 이 두 신(神)의 교훈을 먼저 헤아리셔야 합니다. 천하의 중대한 위치에 계시는 분이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미친 자의 변고를 만나면, 제아무리 용맹한 용처럼 날뛰는 용기를 지녔더라도 미처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 비록 아무리 지혜로운 신하가 계책을 내놓더라도 미처 대비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예로부터 성왕(聖王)은 궁실을 지을 때는 농사의 틈을 살펴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지 않았는데, 이는 농민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는 김을 매는 시기와 추수의 달에 큰 공사를 일으키시니, 도로에 쓰러진 시신이 가득하고 원망의 소리가 길을 메우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성스러운 인자함으로는 인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 현명한 군주인 한나라명제는 종리의(鍾離意)가 한마디 말하자, 덕양전(德陽殿)의 공사를 중단한 적이 있었습니다. 신(臣)은 과거의 선비들에 비하면 부끄러움을 느끼나, 그들의 말은 가히 들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폐하의 도(道)는 이전의 왕들을 능가하시니, 부디 애통히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석호는 그의 말을 좋게 여기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으나, 여전히 건축을 계속하며 더욱 공사를 늘렸고, 직접 감시하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한편, 진공 석도는 석호의 총애를 받았으나, 태자 석선은 그를 싫어하였다. 당시 상서우복야 장리(張離)가 오병상서(五兵尚書)를 겸직하며 병권을 총괄하고 있었는데, 장리는 아첨하고자 태자에게 말했다.
"지금 여러 공후(公侯)들의 관속과 병력이 규정을 초과하고 있으니, 점차 이를 줄여 태자의 위엄을 강화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태자는 그 말에 기뻐하며 장리에게 명령하여 여러 공후들의 관속을 줄이고, 진공(秦公), 연공(燕公), 의양공(義陽公), 낙평공(樂平公) 등 네 공후에게는 관속 197명과 장하병(帳下兵) 200명만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외의 병력 50,000명은 전부 동궁(東宮)에 배치하여 자신이 가져갔다. 이로 인해 여러 공후들은 모두 불만을 품었고, 갈등과 원한이 점차 깊어졌다.

석호는 정북장군 장거를 파견해 안문(鴈門)에서 거병한 친통조왕 욱국을 토벌하도록 보냈고, 장거는 이를 이기고 돌아왔다. 또한 조정에서는 백성에게 징발 대상자 다섯 명당 수레 한 대와 소 두 마리, 쌀 15석, 비단 10필씩 할당하여 군에 제공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약 이를 준비하지 못한 자는 참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석호가 강남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면서 무리하게 백성들을 수탈하자, 백성들은 궁핍하여 대부분 자식을 팔아 군에 충당하게 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여 길가의 나무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자들이 이어졌다. 길가에는 시신이 줄지어 있었고, 백성들의 고통은 끝날 줄 몰랐다. 이때 마침 청주(青州)에서 상주하기를, 제남(濟南) 평릉성(平陵城) 서북쪽에 있던 호랑이 석상이 하루아침에 성 동남쪽으로 옮겨갔고, 그 옆에 늑대와 여우의 발자국 수천 개가 따라갔으며, 발자국이 길을 이루었다고 하였다. 석호는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돌 호랑이는 곧 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이동한 것은 하늘이 짐에게 남쪽을 평정하라는 뜻이다. 하늘의 뜻을 어찌 어길 수 있으랴!"
이에 여러 주(州)의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내년까지 모두 집결하도록 하고, 자신이 직접 6군(六軍)을 이끌어 하늘의 명을 받들겠다고 하였다. 신하들은 모두 축하하며 연달아 황제의 덕을 찬양하는 상소를 올렸고, 그 수는 107명에 달하였다.

이 시기에 이상한 괴이한 징조가 매우 많았다. 상당군(上黨郡) 맹문산(孟門山) 정상에 신인(神人)의 형상이 나타나 산 위에 앉아 있다가 3일 만에 사라졌다. 석호는 이를 달래고자 태뢰(太牢)로 제사를 올리도록 명령하였다. 또, 무향(武鄉)에서 한 마리의 수컷 호랑이가 보내졌으나, 느닷없이 암컷 호랑이로 변하더니 곧 늑대 새끼를 낳았다. 이 늑대 새끼가 즉시 자신을 낳은 호랑이의 뇌를 물어뜯어 죽였고, 3일 후 늑대 새끼 또한 죽었다. 태산(泰山)에서는 돌이 8일간 빛을 내다가 사라졌고, 동해(東海)에서는 큰 돌이 스스로 일어서고 그 옆에 피가 흘렀다. 업성(鄴城) 서쪽 산의 바위 틈에서도 피가 흘러 나와 길이 10여 보(步), 너비 2척에 이르렀다. 이때 태무전이 처음 완성되었는데, 그곳에 그려져 있던 옛 성현과 충신, 효자, 열사, 열녀 등의 모습이 모두 호인(胡人)으로 변하였고, 10여 일이 지나자 그들의 머리가 모두 어깨 속으로 들어가고, 단지 모자와 옷깃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석호는 이를 매우 꺼리며 비밀로 하고 말하지 않았다. 불도징은 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건무 9년(343년) 5월, 석호는 군사를 이끌고 모용황을 정벌하였으나 패하였다.

건무 9년(343년) 7월, 동진의 형주자사 유익(庾翼)은 오랑캐를 멸망시키고 촉 땅을 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동쪽으로는 모용황, 서쪽으로 장준과 연합하여 기한을 정해 대규모로 군사를 일으켜 후조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조정에서는 이를 어렵다고 여기는 의견이 많았으나, 유빙(庾氷)과 환온 등이 이를 지지하였다. 이에 강제 사마악은 중원을 공략할 방책을 논의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때 유익은 모든 군사를 모아 북벌할 계획을 세우고, 표문을 올려 환선을 여러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자신은 선봉이 되어 단수(丹水)로 진격할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환온도 선봉이 되었고, 그의 수군은 임회(臨淮)에 이르러 모두 유익의 지휘를 받았다.

한편, 후조의 여남(汝南) 태수 대개(戴開)는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진에 투항하였다. 이에 강제 사마악이 말했다.
"모용황이 석호의 군대를 무찌르고, 그들은 80,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니, 이로써 그들의 멸망이 시작된 것이나, 중원의 상황은 더욱 신중히 살펴야 한다. 또한 대개가 이미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으니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그리고 석호에게 조서를 보내 그를 질책하며 말했다.
"석륵은 기회를 틈타 옛 수도를 정복하고 극악무도한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의 가짜 왕조는 여러 해에 걸쳐 백성들을 괴롭혔고, 진나라 왕실은 몰락의 슬픔을 겪고 있다. 이제 누가 소강(少康)의 부흥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선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후 강제 사마악은 중원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유익에게 북벌 준비에 박차를 가하도록 하고, 마치 불길이 가을의 마른 풀이나 낙엽을 태우듯 적을 쓸어버리도록 독려하였다.

건무 9년(343년) 8월, 태백성(太白星)이 세성(歲星)을 범하였고, 세성은 진수(軫宿)에 위치하였다. 이때 석호는 영원장군 유녕(劉寧)을 보내 전량의 무도(武都)와 적도(狄道)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 태자 석선은 선비족의 곡곡제(斛糓提)를 토벌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30,000명의 적을 참수하였다.

중알자령 신편(申扁)은 석호의 총애를 받았으며, 태자 석선과도 가까운 사이였다. 신편은 총명하고 변설에 능하며, 명확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궁중의 은밀한 일들을 전담하였다. 당시 석호는 상주문이나 기록을 직접 보지 않았고, 태자 석선은 술에 취하고 궁중에서 방탕하게 지냈으며, 진공 석도 역시 사냥과 살생에만 몰두하였기에, 인사 임명과 각종 결정은 모두 신편이 처리하였으며, 그의 권세는 내외에 걸쳐 막강하였다. 자사(刺史)와 이천석(二千石)의 고위 관료들 중 다수가 그의 집안 사람에서 발탁되었고, 구경(九卿) 이하의 관료들은 먼발치에서 그에게 절하며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시중 정계(鄭系), 왕겸(王謙), 산기상시 노심, 최약(崔約) 등 10여 명 정도만이 그와 대등한 예를 유지하였다.

석호가 주군(州郡) 관리들에게서 말 1,400여 필을 징발하여 요무관(曜武闗)의 장수들에게 배정하였고, 말 주인들에게는 1년간 군역을 면제해 주었다.

건무 9년(343년) 9월, 우문부의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가 단료의 동생 단란(段蘭)을 사로잡아 석호에게 보내며 투항하였고, 아울러 준마 10,000필을 바쳤다. 석호는 단란에게 그의 부족인 선비족 5,000명을 이끌고 영지(令支)에 주둔하도록 명령하였다.

건무 9년(343년) 12월, 석호가 평서장군 손복도를 지절•도독정토제군사(都督征討諸軍事)로 삼아, 보•기 30,000명을 이끌고 전량의 장준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손복도는 황하를 건너 장준의 장수 사애(謝艾)와 하서(河西)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석호는 비록 혼미하고 포악하며 무도한 행위를 저질렀으나, 한편으로는 경학(經學)을 존중하여 국자박사를 낙양으로 보내어 석경(石經)을 필사하고, 비서국(秘書國)에서 경전들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국자좨주 섭웅(聶熊)에게 《곡량춘추(穀梁春秋)》를 주석하게 하여 학궁(學宮)에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

대사마•유주목•연공 석빈은 술에 빠져 방탕하고 사냥에 몰두하였으며, 늘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냥터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이를 틈타 석빈의 부하들은 포악한 행동을 일삼았다. 이에 정북장군 장하도가 이 사실을 엄중히 경계하고 석호에게 보고하니, 석호는 상서 장리를 사지절로 삼고 유주로 보내 석빈을 소환하였고, 석빈은 300대의 매질을 당한 후 관직을 박탈당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건무 10년(344년) 정월, 석호는 태무전 앞에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을 초대하였다. 그때 수백 마리의 흰 기러기가 말길 남쪽에 모여 날아다녔고, 석호는 이를 활로 쏘라고 명령했으나 아무도 맞히지 못했다. 이때 여러 주(州)에서 모인 병력이 100만이 넘었는데, 태사령 조람이 석호에게 은밀히 말했다.
"흰 기러기가 궁정에 모이는 것은 궁궐이 비게 될 징조입니다. 남쪽으로 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석호는 이를 믿고, 선무관(宣武觀)에 올라 대대적인 군사 열병식을 치르고는 모든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후 다시 연공 석빈을 복직시켜 사지절•대사마•시중•녹상서사로 삼았다.

석호는 자신의 좌우에 융소(戎昭)와 요무장군(曜武將軍)을 배치하여 그 지위를 좌우위(左右衛) 위에 두었다. 또한 동궁에는 좌우통장군(左右統將軍)을 설치하여 그 지위를 4솔(四率) 위에 두었으며, 상중광록대부(上中光祿大夫)를 배치하여 그 지위를 좌우광록대부 위에 두었다. 그리고 진위장군(鎮衛將軍)을 배치하여 거기장군(車騎將軍) 위에 두었다.

건무 10년(344년) 2월, 석호가 사신을 보내 천수(天水)의 은사 양가를 초청하였다. 양가는 젊을 때부터 역경(易經)을 좋아했으며, 수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유요가 그를 태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실패한 바 있었다. 석호는 검은 비단과 붉은 비단을 선물로 준비하고, 안거(安車)를 보내 그를 초청했으나 양가가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석호가 직접 그를 찾아갔으나, 양가는 여전히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석호가 강요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났지만 석호에게 절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았다. 석호는 그를 영창(永昌)의 을제(乙第)에 머물게 하였다. 관리들이 양가의 교만을 문제 삼아 큰 불경죄로 처벌하자고 요청했으나, 석호는 이를 따르지 않고 양가의 뜻에 따르도록 하였다. 양가는 후에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청하였고, 석호는 그를 안거와 포륜(蒲輪)으로 배웅하며, 진주(秦州)로 돌려 보냈다.

건무 10년(344년) 4월, 전량의 장준이 장수 장관(張瓘)을 보내 삼교성(三交城)에서 왕탁을 공격하였다. 왕탁은 패배하여 달아났다.

태자 석선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나, 누구도 감히 이를 고하지 못하였다. 그때 영군장군 왕랑이 석호에게 아뢰었다.
"지금 한겨울에 눈이 내리는데도 황태자가 사람들을 시켜 궁궐의 재목을 베어, 장수(漳水)로 옮기게 하여, 수만 명의 백성들이 고통 속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나가셔서 이를 중지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호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나가서 공사를 중단시켰다. 석선은 왕랑이 이러한 조언을 한 것을 알고 분노하여 그를 죽이고 싶어 했으나 마땅한 기회를 찾지 못하였다. 마침 형혹성(熒惑星)이 방수(房宿)에 머무르자, 태사령 조람은 석선의 뜻을 받들어 석호에게 아뢰었다.
"묘성(昴星)은 조나라의 영역을 상징합니다. 형혹성이 그곳에 머무는 것은 그 주인이 악하다는 징조입니다. 방수는 하늘에서 천자를 의미하니, 그 재앙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귀한 신하 중 성이 '왕(王)'인 자로 이를 대신하여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자 석호가 물었다.
"누가 이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조람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답하기를,
"영군장군 왕랑보다 귀한 자가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랑을 아끼고 있었던 석호가 의심스러워하면서 조람에게 다른 사람을 말해보라 말하니, 조람은 더 이상 답할 수 없자,
"다음으로 중서감 왕파만이 있습니다."
라 하였다. 이에 석호는 조서를 내려 왕파를 소환하였고, 이전에 그가 한 읍루국의 활 관련된 의견을 문제 삼아 그를 요참형에 처하고, 그의 세 아들까지 함께 처형하여 시신을 장수(漳水)에 던져 형혹성의 재앙을 풀고자 하였다. 훗날 석호는 왕파가 무죄였음을 가엾게 여기고, 그를 사후에 사공(司空)으로 추증하였으며, 그의 손자를 후작으로 봉하였다.

평북장군 윤농(尹農)이 전연의 범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돌아왔고, 이에 석호는 그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이 시기에 대가뭄이 일어나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았다.

건무 10년(344년) 6월, 다시 흰 무지개가 나타나, 태사(太社)에서 시작되어 봉양문(鳳陽門) 동남쪽 하늘로 뻗어가다가, 약 10여 시간이 지난 후 사라졌다. 이에 석호는 조서를 내려 말했다.
"옛 현명한 왕들이 천하를 다스릴 때, 정치는 균형과 평등을 최우선으로 삼고, 교화는 인혜(仁恵)를 근본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인간의 화합이 이루어지고, 신령한 존재들이 태평한 시대를 도왔다. 그러나 짐은 미천한 능력으로 만방을 다스리게 되었고, 밤낮으로 근심하며 고대의 훌륭한 왕들을 따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매번 조서를 내려 백성들의 부역을 덜어주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삼방(三方)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중년 이후로 재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천문이 혼란스러워지고, 계절의 변화가 맞지 않았다. 이는 백성들이 원망을 품고, 하늘이 이에 노하여 내린 경고이다. 비록 나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이나, 또한 여러 신하들이 나를 보필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옛날에 초나라에서는 재상이 정사를 수습하여 홍수의 재앙을 막았고, 정나라의 경(卿)은 도(道)를 힘써 천재지변을 해결하였다. 이는 모두 신하들의 훌륭한 덕행으로 재난을 막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군신들은 모두 도(道)를 잃고, 나라의 혼란을 막지 못하며, 침묵 속에 승패를 지켜보고 있으니, 어찌 내가 조정의 보좌 신하들에게 기대했던 바가 이것이겠는가? 그러므로 각자 상소하여 직언하되 숨김없이 말하도록 하라."
그 후, 석호는 봉양문을 닫고, 오직 정월 초하룻날에만 개방하도록 하였다. 또한, 영창진(靈昌津)에 두 개의 제단을 세우고, 하늘과 오교(五郊)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때 성한의 이수가 건녕(建寧), 상용(上庸), 한고(漢固), 파정(巴征), 자동(梓潼)의 다섯 군을 들어 후조에 칭번하였다.

건무 10년(344년) 11월, 석호는 처음으로 영창진(靈昌津)에서 황하에 다리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돌을 채취하여 중간에 넣었으나, 돌의 크기에 상관없이 하천에 넣으면 곧바로 떠내려갔고, 500만 명 이상의 인력이 투입되었음에도 다리는 1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못했다. 이에 석호는 직접 영창진으로 가서 공사 현장을 점검하면서 산기시랑 최수(崔收)에게 옥을 황하에 던지게 했으나, 다음 날 그 옥은 물결에 떠밀려 강가로 올라왔다. 그때 지진이 일어나 물이 솟구치고, 누대(樓臺), 전각(殿觀)이 모두 무너져 100여 명이 압사하였다. 석호는 크게 화가 나서 공장(工匠)들을 모조리 참수하고, 공사를 중단한 후 돌아갔다.

어느 날, 태자첨사 손진(孫珍)이 시중 최약에게 물었다.
"나는 눈병을 앓고 있는데, 무슨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겠소?"
최약은 손진과 평소 가까웠기에 농담으로 대답하였다.
"물에 담그면 나을 것이오."
이를 들은 손진이 물었다.
"어떻게 눈을 물에 담글 수 있단 말이오?"
최약이 답했다.
"그대의 눈이 아주 돌출되어 있으니 물에 담그기에 적당하오."
손진은 이 말을 원한으로 여겨 이를 태자 석선에게 고하였다. 석선은 여러 형제 중에서도 가장 갈족스러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특히 깊은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말을 듣고 크게 분노하였다. 그는 최약과 그의 아버지를 처형하였고, 이후 손진은 석선의 총애를 받으며 조정의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공경(公卿) 이하 신하들은 손진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 앞에서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건무 11년(345년) 정월, 석호의 아들인 의양공 석감이 관중(闗中)을 진수하고 있었으나, 과중한 부역과 세금으로 인해 관우(闗右) 지역의 민심을 잃었다. 석감의 친구인 이송(李松)이 그에게 문무백관 중 머리가 긴 자의 머리카락을 뽑아 관(冠)을 만들고, 나머지는 궁녀들에게 주라고 권하였다. 이때 석감의 장사(長史)가 이 사실을 석호에게 보고하자, 석호는 크게 분노하였다. 석호는 상서우복야 장리를 정서장군 좌장사•용양장군•옹주자사로 삼아 이를 조사하게 하였는데, 과연 장리가 조사한 결과 이 사실이 모두 진실임이 밝혀졌다. 석호는 석감을 소환하여 업(鄴)으로 돌아오게 하고, 이송을 체포하여 정위(廷尉)에 넘겼다. 그리고 낙평공 석포(石苞)로 하여금 석감을 대신하여 장안을 진수하게 하였다.

건무 11년(345년) 2월, 석호는 옹주, 낙주, 진주, 병주에서 160,000여 명[11]을 동원하여 장안의 미앙궁(未央宮)을 건축하게 하였다. 석호는 본래 사냥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체구가 커서 말을 탈 수 없게 되자, 사농중랑장 비패(費霸)를 보내 동평(東平)의 강산(罡山)에서 사냥용 수레 1,000대를 만들도록 하였다. 이 수레의 길이는 3장, 높이는 1장 8척이었으며, 수레 40대는 사냥용 동물들을 가두는 격수차(格獸車)로 만들었고, 그 위에 두 층으로 된 탑을 세웠다. 각 수레는 20명이 들어 올려야 했으며, 오늘날의 걸어서 타는 가마와 비슷하였다. 앉는 곳에는 회전 장치가 설치되어, 새나 짐승을 쏠 때 몸이 향하는 방향으로 자동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석호는 활을 잘 쏘았고, 쏘는 화살은 헛나가는 법이 없었다.

사냥이 예정된 날, 장교들은 석호와 함께 영창진(靈昌津)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형양(滎陽), 동쪽으로 양도(陽都)까지 수천 리에 걸친 사냥터를 준비하였다. 석호는 어사(御史)를 보내 사냥터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이 짐승을 건드리면 즉각 사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어사들은 이를 악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고 권력을 휘둘렀으며, 미녀나 좋은 소나 말을 가진 자들을 보고 요구했으나 얻지 못하면 그들을 짐승을 건드린 죄로 몰아 죽였다. 이로 인해 100여 호가 사형을 당했고, 해대(海岱)와 하제(河濟) 지역의 백성들은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석호는 또 예주, 형주, 연주 등의 여러 주에서 260,000여 명을 징발하여 낙양궁을 수리하게 하였고, 백성들로부터 소 20,000마리 이상을 징발하여 삭주(朔州)의 관리들에게 배분하였다. 그는 내관(內官)을 24등급으로 늘리고, 동궁(東宮)에도 12등급을 새로 만들었으며, 70여 국의 공후(公侯)들에게도 9등급의 여관(女官)을 배정하였다.

석호는 이전부터 백성들의 20세 이하, 13세 이상의 소녀 10,000명을 징발하여 세 등급으로 나누어 군현에 배정하였고, 미모가 출중한 자들을 자신의 궁으로 모았다. 또한 9,000명 이상의 미녀를 남편으로부터 빼앗아갔으며, 백성들 중 미모의 아내를 가진 자들은 권세에 의해 억압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았다. 태자와 여러 공후들도 사적으로 미녀들을 징발하도록 명령하였고, 이로 인해 추가로 10,000명에 가까운 미녀들이 업성(鄴城)에 집결되었다. 석호는 궁전에서 이들을 직접 선발하였으며, 그중 12명을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처음 징발된 이후 업성에 도착하기까지, 미녀들의 남편이 죽임을 당하거나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는 3,000명 이상이었다. 이로 인해 형초(荊楚), 양주(揚州), 서주(徐州)의 백성들은 대거 도망치거나 반란을 일으켰고,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50여 명이 투옥되어 처형되었다. 금자광록대부 녹명(逯明)은 석호에게 간언하였으나, 석호는 크게 분노하여 "용등(龍騰)"이라는 이름의 형벌로 그를 죽였다. 이후 조정의 신하들은 입을 닫고 생계를 위해 벼슬에 임하는 데만 몰두하였다.

건무 11년(345년) 8월, 동진의 예주자사 노영(路永)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석호에게 항복하였다. 석호는 그를 정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수춘(壽春)에 주둔하게 하였다.

건무 11년(345년) 12월, 관군장군 요익중을 지절•10군6이대도독(十郡六夷大都督)•관군대장군으로 삼았고, 정동장군 등항(鄧恆)에게 수만 군대를 주어 낙안(樂安)에 주둔시키고 그곳에서 공성 장비를 준비하게 하여 전연 정벌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 해에 동진의 양주(梁州) 자사 환선이 북벌하여 단수를 타고 장안으로 진격하였으나, 후조의 장수 이비(李羆)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건무 12년(346년) 5월, 상서 주궤(朱軌)와 중황문 엄생(嚴生)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길이 침수되고 교통이 막히자, 엄생은 주궤가 도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조정의 정사를 헐뜯었다며 그를 참소하였다. 이를 들은 석호는 분노하여 주궤를 투옥하였다. 이때 포홍이 석호에게 나아가 간하여 말했다.
"신이 듣기로, 성왕(聖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는 흙으로 만든 3척 높이의 계단에 초가집을 지었으며, 음식을 여러 가지 맛으로 꾸미지 않았고, 형벌은 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망군(亡君)은 바다 안의 온 나라를 다스리면서 기울어진 궁전과 옥으로 장식된 누대를 지었고, 상아 젓가락과 옥 잔을 사용했으며, 사람의 다리를 자르고 마음을 가르며 현자를 죽이고 임신부를 해쳤으니, 결국 그들의 멸망은 급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이미 양국(襄國)과 업궁(鄴宮)에 충분한 궁실이 있으니, 제국의 통치에 문제가 없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궁전을 계속해서 수리하시니,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냥과 놀이에 탐닉하고, 여자들에게 빠져 있는 것은 삼대(三代)의 멸망이 늘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사냥용 수레 1,000대를 만들고 수천 리에 걸친 사냥터를 만들어 새와 짐승을 기르며, 10여만 명의 아내와 여자를 빼앗아 후궁을 채우고 있으니, 과거의 성스러운 제왕들이 하던 일이 과연 이러했겠습니까?

상서(尚書) 주궤(朱軌)는 대신으로서 충언을 올리는 자입니다. 그가 단지 도로를 제대로 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찌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내리려 하십니까? 이것은 폐하의 덕정(德政)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음양의 이치가 어그러지고, 하늘이 재앙을 내려 비를 7일간 내린 후 간신히 개였기 때문입니다. 겨우 이틀 동안 비가 그쳤을 뿐이라, 비록 귀신과 같은 병사가 100만 명이 있어도 도로의 물을 빼낼 수 없었을 텐데,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형정(刑政)이 이와 같다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이며, 사해(四海)의 백성들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사냥터를 만드는 일을 중단하고, 궁궐의 여자들을 내보내며, 주궤를 용서하시어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십시오."
석호는 이 간언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포홍의 강직함을 두려워하여 그를 처벌하지는 않았다. 물론 간언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장안과 낙양의 궁전 수리 공사를 중단하지 않았다. 이후 석호는 사적인 대화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서로 사사로이 대화하다가 잡힌 자들을 처벌하게 하였다. 관리들이 자신의 상관을 고발하거나 종들이 주인을 고발할 수 있게 하여, 조정의 위엄과 형벌이 날로 남용되었다. 공경 이하 관리들은 회의 중에 서로 눈치를 살피며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조정에서 서로 만나 대화하는 일이 끊어졌다.

건무 12년(346년) 6월, 장군 왕탁이 무위(武衛)를 습격하여 전량의 호군 조권(曹權)과 호선(胡宣)을 사로잡고, 그 백성 7,000여 호를 옹주로 이주시켰다. 또한, 석호는 후조의 양주(涼州) 자사 마추와 정서장군 손복도를 파견해 전량의 금성(金城) 태수 장충(張沖)을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이에 전량의 군주 장중화는 중견장군 사애에게 보•기 5,000여 명을 주어 후조군에 맞서게 하였고, 손복도 등은 또 마추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 해에 석호(石虎)는 낮잠을 자던 중 영안궁(永安宮)에서 꿈을 꾸었다. 꿈에 양 떼들이 동북쪽에서 물고기를 지고 왔으며, 업성(鄴城) 동북쪽에 흙이 높이 쌓여 있었고, 그 위에 나무가 가득하였다. 깨어난 후 석호가 이 꿈에 대해 불도징에게 물으니, 불도징이 답하여 말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입니다. 아마도 선비족(鮮卑)이 중원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건무 13년(347년) 정월, 석호는 삼공(三公)과 구경(九卿)을 이끌고 직접 경작을 하며 상재원(桑梓苑)에서 밭을 갈았다. 상재원은 업성(鄴城) 남쪽에 위치한 땅으로, 그곳에 뽕나무와 가래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상재원이라 불렸다. 이곳에 임장궁(臨漳宮)이 있었으며, 석호는 매년 3월 3일과 누에치기를 시작하는 날에 황후와 부인들을 이끌고 이곳에서 뽕나무를 채취하였다. 이때 황후 두씨(杜氏)는 근교에서 선잠(先蠶)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이어서 양국에 행차하여 석륵의 묘소에 참배하였다.

건무 13년(347년) 4월, 석호는 또다시 양주자사 마추 등을 보내 장중화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중서감 석녕(石寧)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하고, 사주(司州)와 병주(并州)의 병사 20,000여 명을 이끌고 마추의 후속 부대로 뒤를 잇게 하였다. 전량의 장수 송진(宋秦) 등이 20,000호를 이끌고 후조에 투항하였으나, 하수(河水)와 황수(湟水) 사이의 저족(氐)과 강족(羌)의 100,000여 무리가 장중화와 연합하여 서로 도우니, 마추는 이를 두려워해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 틈을 타서 전량의 장수 장모(張瑁)가 샛길을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와 마추의 후방을 끊었고, 마추는 하는 수 없이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때 전량의 군사장군 사애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후퇴하는 마추의 뒤를 습격하였고, 마추의 부장 두훈(杜勳)과 어급(魚汲)이 전사하였으며, 3,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 마추는 혼자 말을 타고 대하(大夏)로 도망쳤다.

곧이어 마추와 석녕은 군을 재정비하고 곡류(曲栁)에 진을 쳤다. 이때 후조의 장수 유녕과 왕탁이 진군하여 전량의 시흥(始興)과 무가(武街)를 공격하니, 장중화는 일단 장군 우선(牛旋)과 양강(楊康) 등을 보내 석녕과 싸우게 하였다. 양군은 사부(沙阜)에서 교전하였으나, 석녕의 군대가 패배하여 금성으로 철수하였다.

석호는 탐욕스럽고 무례하였으며, 이미 열 개 주의 땅을 차지하고도 금은보화와 외국에서 바친 진귀한 물건들을 쌓아두었으나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꼈다. 결국 그는 전대의 제왕들과 선현들의 능묘를 발굴하여 그 보물을 빼앗기로 결심하였다.

한단성(邯鄲城) 서쪽 석자강(石子崗) 위에 있는 조간자의 무덤을 발굴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처음에는 석탄만 잔뜩 나왔고, 그 깊이가 1장 남짓이었다. 석탄을 전부 빼내자, 다음으로 두꺼운 목판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목판의 두께는 1척이었으며, 총 두께가 8척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지하수를 발견하였다. 그 물은 매우 맑고 차가웠으며, 석호는 소가죽 자루로 물을 퍼내기 위해 교차(絞車)를 설치하고 한 달 동안 물을 퍼냈으나, 물은 끝없이 솟아올라 발굴을 중단하였다.

또, 석호는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여 그곳의 동주(銅柱)를 가져다가 기구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때 출가 승려 오진(吳進)이 석호에게 간언하여 말했다.
"호족(胡族)의 운세는 쇠퇴할 것이며, 진나라(晉)의 운세가 다시 흥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 사람들을 고된 부역에 시달리게 하여 그들의 기운을 꺾어야 합니다."
이에 석호는 상서 장군(張郡)에게 명하여 근처 군현의 남녀 160,000명과 수레 100,000대를 동원하여 흙을 옮기게 하고, 업성 북쪽에 화림원(華林苑)과 긴 성벽을 쌓도록 하였다. 그 성벽의 길이는 수십 리에 달하였다. 또한, 오진의 제안을 받아들여 5월에 석호는 500리 이내의 남녀 600,000명을 징발하여 방림원(芳林園)을 다시 크게 수리하게 하였다.

건무 13년(347년) 7월, 석호는 다시 정서장군 손복도와 장군 유혼(劉渾)을 보내 보•기 20,000명을 이끌고, 마추와 함께 전량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장거리로 진격을 하여 황하를 건너 전량을 공격하였고, 장최(長最)에서 성을 쌓아 장기전을 준비하였다. 장중화는 크게 두려워하며, 다시 군사장군 사애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맞서게 하였다.

건무 13년(347년) 8월 3일[12], 사애가 진군하여 마추 등의 후조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마추는 숨어서 금성으로 달아났다.

이 시기에 폭우가 내리고 눈까지 내렸으며, 그 눈의 깊이는 3척에 이르렀다. 매우 추워져 길을 가던 사람들과 방림원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 중 수천 명이 동사하였다. 태사(太史)가 상주하기를, 공사를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작업을 강행했기 때문에 하늘이 이 변고를 내렸다고 하였다. 이에 석호는 상서령 송궤(宋軌)를 처형하여 하늘의 재앙을 막으려 하였다. 또, 방림원 안의 천금제(千金堤) 위에 두 마리의 동룡(銅龍)을 만들어 서로 마주 보며 물을 뿜어 천천지(天泉池)로 흘러들어가도록 하였고, 이 물은 궁의 연못과 연결되었다.

석호는 방림원에 진귀한 과일과 기이한 꽃들을 심었는데, 민간에서 유명한 과일이 있으면 석호는 이를 뽑아 심기 위해 사방에서 땅을 1장 깊이로 파고, 이를 가마차에 실어 옮겨 심었다. 그렇게 옮겨 심은 나무는 모두 잘 자랐다. 방림원에는 서왕모(西王母)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이 나무는 겨울과 여름에도 잎이 있으며, 9월에 꽃이 피고 12월에 익었으며, 세 개의 열매가 각각 1척의 크기였다. 또한, 양각조(羊角棗)라는 대추나무도 있었고, 이 나무도 세 개의 열매가 각각 1척에 달하였다. 구비도(勾鼻桃)라는 복숭아는 2근 반의 무게였으며, 봄에 익는 겨울 자두나무, 봄에 익는 석류나무도 있었는데, 석류의 씨앗은 그릇만큼 컸으며 맛이 시지 않았다.

조람, 신종, 석박 등이 상소를 올려, 천문이 어지럽고 백성들이 궁핍해져 있는 상황을 보고하면서, 직접 석호에게 면담하여 간언하였고, 그 말이 매우 강경하였다. 이에 석호는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만약 원림의 성벽이 아침에 완성되었다가 저녁에 무너져도 나는 아무런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상서 장군에게 촛불을 켜고 밤에도 계속 작업을 진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석호는 세 개의 관문과 네 개의 문을 세웠으며, 그중 세 개의 문은 장수(漳水)로 연결되었고, 모두 철문으로 만들었다. 이때 폭풍우가 몰아쳐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양주(揚州)에서 목이 다섯 개인 황곡추(黃鵠雛, 황새의 새끼)를 바쳤는데, 그 목의 길이는 1장이었으며, 그 울음소리는 10여 리에까지 들렸다. 석호는 이 새를 어느 연못에 띄웠는데, 곧 거북이로 변하였다. 그래서 그 연못을 현무지(玄武池)라고 불렀다. 또한, 각 군국에서 잇달아 푸른 기린 16마리, 하얀 사슴 7마리를 바쳤다. 석호는 사우(司虞) 장창주(張昌柱)에게 명하여 이를 조련하게 하여 자신의 수레를 끌게 하고, 대규모 조회를 열어 이 동물들을 궁궐 마당에 늘어놓았다.

석호는 또 북쪽 성벽을 뚫어 방림원으로 물을 끌어오게 하였으나, 공사 도중에 성벽이 무너져 100여 명이 압사하였다. 이때 석호는 업성(鄴城)에 있었는데, 한 마리의 요사스런 말이 꼬리에 불탄 자국을 남기며 중앙문으로 들어와서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갔다. 그 말은 동쪽으로 머리를 돌렸으며, 동궁(東宮)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동북쪽으로 달려가더니 곧 사라졌다. 이 소식을 들은 불도징은 탄식하며 말했다.
"곧 재앙이 닥칠 것이다."

건무 13년(347년) 9월, 지진이 일어나 땅이 일곱 장이나 갈라졌으며, 또한 업성(鄴城)에서는 비처럼 피가 내려 그 범위가 10여 리에 이르렀다.

이 달에, 석호는 태자 석선에게 명하여 산천에 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그 기회에 사냥을 나가도록 하였다. 석선은 천자의 깃발을 세우고, 거대한 수레에 올라 우포화개(羽葆華蓋)를 사용하였으며, 16군의 군대와 18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금명문(金明門)을 통해 출정하였다. 석호는 후궁에서 능소관(陵霄觀)에 올라 이를 바라보고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집 부자(父子)가 이렇게 번영하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지 않는 한 더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 그저 아들과 손자를 품에 안고 노는 것이 매일의 즐거움일 뿐이다."
석선은 밤새 사냥을 즐겼으며, 각지에 행궁을 세워 사방 100리 내에 동물들을 몰아들였다. 날이 저물면 동물들이 행궁에 모였고, 문무백관은 무릎을 꿇고 둘러서서 이를 지켰다. 횃불은 별처럼 이어져 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석선은 강력한 기병 100여 명에게 사냥터에서 동물을 쏘라고 명령하였고, 자신은 애첩인 현덕미인(顯德美人)과 함께 가마를 타고 이를 지켜보며 즐겼다. 어느 순간 동물이 도망치거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을 때, 이를 지키던 자 중 작위가 있는 자는 말이나 걸어서 쫓아가야 했으며, 작위가 없는 자는 100대의 매질을 당했다. 이러한 가혹한 명령과 엄격한 형벌로 인해 문무백관과 병사들은 두려워하였다. 그 결과 사냥이 끝날 때까지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병사들이 10,000명이 넘었다. 석선의 활, 말, 옷, 음식 등은 모두 '어(御)'라 칭해졌으며, 규칙을 어긴 자는 금령을 어긴 죄로 처벌받았다. 석선의 지나친 사치와 호화로운 사냥으로 인해 세 주(州)와 15개 군의 자원이 소진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편, 석호는 다시 진공 석도에게 명하여 병주(并州)에서 출발해 진주(秦州)와 옹주(雍州)로 사냥을 나가게 하였으며, 그 방식도 석선과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석선은 석도가 정무를 맡고 있음을 늘 불쾌하게 여기며, 자신을 대신할 인물로 생각하여 그에 대한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이번 석도의 출정에서 석선은 더욱 질투하게 되었는데, 당시 환관 조생(趙生)은 석선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석도에게는 미움을 받고 있었다. 조생은 은밀히 석선에게 접근하여 석도를 제거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석선은 석도를 없앨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건무 13년(347년) 10월, 마추가 다시 전량을 공격하여 전량의 장수 장모를 하협(河陜)에서 격파하였고, 3,000여 명의 적군의 목을 베었다. 그러자 부한(枹罕)에서 전량의 호군 이규(李逵)가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항복해 왔고, 하수(河水) 이남 지역의 저족과 강족은 모두 마추에게 복속되기 시작하였다.

건무 14년(348년) 4월, 진공 석도는 석호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석호는 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석선을 태자로 세웠기에, 석호는 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한번은 석선이 석호의 뜻을 거스르자, 석호는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석도를 태자로 세우지 않은 것이 후회되는구나!"
이로 인해 석도는 더욱 교만해졌다.

건무 14년(348년) 5월, 형혹성(熒惑星)이 누수(婁宿)로 들어가 전성(填星)을 침범하였다. 점성가들은 이를 두고 조나라에 재앙이 닥칠 징조이며, 병란이 크게 일어나고 나라에 상을 치를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건무 14년(348년) 6월, 석도는 태위부(太尉府)에 '선광전(宣光殿)'이라는 궐을 짓고, 그 대들보의 길이를 9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본 석선은 크게 분노하여, 그것을 만든 장인들을 죽이고 대들보를 잘라버렸다. 이에 석도는 더욱 화가 나서 대들보의 길이를 10장으로 늘렸다. 이를 들은 석선은 더욱 분노하여, 그가 총애하던 거록(巨鹿) 출신의 역사(力士) 양배(楊杯), 모피(牟皮), 모성(牟成), 그리고 환관 조생(趙生) 등에게 말했다.
"석도는 사악하고 패역한 자로 감히 나를 이처럼 무시하고 있다. 너희들 중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내가 서궁(西宮)에 들어가 석도의 영토와 고을을 모두 나누어 너희들에게 봉할 것이다. 석도가 죽으면 폐하께서 반드시 친히 장례에 참석하실 것이니, 그때 나는 대사(大事)를 일으켜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
이에 양배 등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건무 14년(348년) 7월, 석선은 석도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먼저 절에 가서 불도징과 함께 탑 위에 앉았다. 그때 탑 위에서 하나의 방울이 홀로 울렸는데, 불도징이 석선에게 물었다.
"이 방울 소리를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석선이 대답하지 않자, 불도징이 말했다.
"이 소리는 '호자락도(胡子洛度)'라고 합니다."
석선은 안색이 변하며 물었다.
"무슨 말이오?"
불도징은 황급히 답했다.
"저는 늙은 호인(胡人)으로 도를 닦고 있을 뿐, 산속에서 말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옷을 입고 편안한 자리에 누워 있지 않으니, 어찌 '호자락도'가 아니겠습니까?"
이후 석도 또한 절에 도착하자, 불도징은 석도를 오랫동안 유심히 바라보았다. 석도가 두려워하며 그에게 물었다.
"무엇을 보시고 그러십니까?"
불도징이 답했다.
"공(公)에게서 피 냄새가 나기에 바라본 것일 뿐입니다."
그 무렵 석호는 꿈에서 용이 서남쪽으로 날아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불도징을 불러 꿈에 대해 물으니, 불도징이 대답하였다.
"폐하의 옆구리에 도적이 있습니다. 10일 내로, 부도(浮屠)에서 서쪽, 이 전각의 동쪽에서 피가 흐르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동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그러자 황후 두씨 말했다.
"스님께서 노망이 드신 것 아닌가요? 무슨 도적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불도징은 말을 바꾸어 말했다.
"인간이 지닌 여섯 감정이 모두 도적입니다. 제가 노망이 들었다 하여도, 젊은 사람들이 침착하게 지낸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불도징은 더 이상 직접적인 예언을 하지 않고, 암시적인 말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건무 14년(348년) 8월, 제삿날에 동남쪽 하늘에 노랗고 검은 구름이 나타났는데, 크기는 여러 묘(畆)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였다. 그 구름은 점차 세 갈래로 나뉘었고, 마치 비단 조각처럼 동서로 하늘을 가로질렀다. 구름은 검은색에 청색을 띠었으며, 해질 무렵에는 일곱 개의 길로 나뉘었는데, 각각의 거리는 수십 장 정도였고, 그 사이에는 마치 물고기 비늘 같은 흰 구름이 있었다. 그 구름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사라졌다. 석도는 평소 천문을 해석할 줄 알았기에 이 현상을 보고 불길하게 여겨,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은 한낱 작은 변화가 아니다. 아마도 자객이 경사(京師)에서 일어날 것이다. 다만, 누가 변고를 일으킬지 알 수 없구나."
그날 밤, 석도는 관료들과 함께 동명관(東明觀)에서 연회를 열었다. 음악이 연주되고 술이 무르익었을 때, 석도는 갑자기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항상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일정치 않다. 쉽게 만날 수 없고, 이별은 어려우니 각자 한 잔씩 마시고 마음을 열어 나를 위해 술을 마셔라. 반드시 취하도록 하여라. 나중에 다시 만날 기약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 주변 사람들도 모두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석도는 그날 밤 연회를 마치고, 절에서 잠을 잤다. 그때 석선은 양배, 모피, 모성, 조생 등 10여 명을 보내, 밤에 사다리를 타고 석도가 머무는 절로 들어가, 석도를 정사(精舍)에서 습격하여 살해하였다. 그들은 석도를 죽일 때 쓴 칼과 화살을 현장에 두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석선은 석도가 죽었다고 석호에게 보고하였다. 석호는 석도의 죽음에 놀라 크게 슬퍼하다가 기절하였고,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깨어났다. 석호는 석도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사공 이농이 간언하며 말했다.
"진공(秦公)을 해친 자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가 궁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한 사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니, 폐하께서는 경솔하게 나가셔서는 안 됩니다."
석호는 불도징이 이전에 경고했던 것을 떠올리고 외출을 중단하였다. 대신 병력을 엄중히 지키게 하고 태무전에서 곡을 올렸다.

한편, 석선은 흰 수레를 타고 1,000명의 호위병를 거느리며 석도의 장례식에 참석하였으나, 울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떠들기 바빴다. 심지어 그는 장례식장에서 관을 열어 석도의 시신을 확인한 후 큰소리로 웃으며 떠났다. 이때 석호는 대장군 기실참군 정정(鄭靖)과 윤무(尹武) 등에게 죄를 물으려 했고, 석선이 석도를 죽였을 가능성을 의심하였다. 석호는 석선이 자신을 의심할까 두려워, 그를 자극하지 않고 유인하기 위해 그의 모친 두씨가 너무 슬퍼하여 위독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석선은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궁에 들어가 석호를 알현하였고, 석호는 중궁(中宮)에 그를 머물게 하였다.

그때 건흥(建興) 사람 사과(史科)는 석선의 음모를 알고 석호에게 보고하였다. 사과는 석도가 죽던 밤 동궁에서 머물렀는데, 장상(長上) 양배의 집에서 들은 내용을 그대로 일러바쳤다. 석도가 암살된 날 밤, 양배는 그 다섯 명의 일당과 함께 밖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큰일은 이미 끝났으니, 우리 모두가 장수하기만 한다면 부귀를 누리는 것이야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그 말을 마치고 양배는 집 안으로 들어갔지만, 어둠 속에서 사과는 그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사과는 곧바로 도망쳐 몸을 숨겼으며, 양배와 두 명의 사람들이 그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니, 양배가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방금 우리의 대화를 들은 손님이 있다면, 반드시 그를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다. 지금 그가 도망쳤다면,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과는 담을 넘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이를 들은 석호는 급히 사람을 보내 양배, 모피, 조생 등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양배와 모피는 이미 도망쳤고, 조생만이 붙잡혀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 조생은 모든 사실을 자백하였다.

석호는 슬픔과 분노가 극에 달하여 석선을 석고(席庫)에 가두고, 그의 턱을 쇠고리로 꿰어 잠갔다. 또, 몇 섬의 나무로 만든 큰 통에 국과 밥을 섞어 돼지나 개처럼 먹게 하였다. 석호는 석도를 죽인 칼과 화살을 가져다가 그 피를 핥게 하였고, 석선의 울부짖는 소리는 궁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에 불도징이 간언하였다.
"석선과 석도는 모두 폐하의 자식입니다. 지금 석도를 죽였다고 석선을 죽이는 것은 재앙을 거듭하는 일입니다. 만약 폐하께서 분노를 참고 자비를 베푸신다면, 폐하의 복은 길게 이어져 앞으로 60여 년을 더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를 반드시 죽이신다면, 석선은 혜성처럼 업궁(鄴宮)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석호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업성 북쪽에 나무를 쌓고 그 위에 깃발을 세운 후, 깃발 꼭대기에 도르래를 설치하고 밧줄을 매달았다. 석선은 그곳으로 끌려갔고, 석도의 총애를 받았던 환관들인 학치(郝稚)와 유패(劉霸)는 석선의 머리카락을 뽑고 혀를 뽑아내며 그를 끌고 나무 더미 위로 올라갔다. 학치는 밧줄을 석선의 턱에 꿰어 도르래로 당겼고, 유패는 석선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멀게 하며 배를 갈라 석도가 당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고문하였다. 그런 뒤, 사방에서 불을 질러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뒤덮었다.(석선의 난)

석호는 중대(中臺) 위에 올라, 그곳에서 소의(昭儀) 이하 수천 명의 여인들과 함께 석선이 화형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이 꺼지자, 석호는 석선의 남은 재를 모아 각 문과 시내의 교차로에 나누어 뿌렸고, 이어서 석선의 처자 29명을 죽였다. 이때 석선의 어린 아들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석호가 평소에 그를 매우 아꼈다. 석호는 이 손자를 품에 안고 울며 말했다.
"이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석호는 그를 살려주고 싶었으나, 대신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석호의 품에서 아이는 강제로 끌려 나왔고, 아이는 석호의 옷자락을 붙잡고 크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쳤으나 끝내 죽임당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사건 이후, 석호는 병을 앓기 시작하였다. 석호는 석선의 모친인 두씨를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 석선 휘하의 네 장군을 포함한 300명을 처형하였다. 석선을 모시던 환관 50명은 수레에 묶여 사지가 찢겼고, 그 시신들은 장수(漳水)에 버려졌다. 석호는 동궁을 물에 잠기게 하여 그곳을 돼지와 소를 기르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석선이 친히 기르던 동궁의 위병대인 "고력(高力)" 10,000여 명은 모두 양주(涼州)로 유배보냈다.

이전에 산기상시 조람은 석호에게 중궁(中宮)에 변란이 있을 것을 예언하며 대비할 것을 권고했으나, 석호는 석선이 석도를 죽였을 때 조람이 이를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고 의심하여 그를 처형하였다. 석호는 귀비(貴嬪) 유씨(栁氏)를 총애하였는데, 그녀는 상서 유지지(栁耆之)의 딸로 재능과 미모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씨의 두 오빠가 석선과 친밀했던 이유로 석호는 그들을 죽였다. 이후 석호는 유씨의 미모를 그리워하며, 유지지의 막내딸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방림원에 거처하게 하였다.

건무 14년(348년) 9월, 석호는 태자를 새로 세우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태위 장거가 말했다.
"연공(燕公) 석빈과 팽성공(彭城公) 석준은 모두 문무를 겸비한 분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연로하시고,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으니, 이 두 분 중 한 명을 선택해 태자로 세우십시오."
이에 석호가 답했다.
"경의 말이 짐의 생각과 꼭 맞는다."
그러나 융소장군 장시(張豺)는 반대하며 말했다.
"연공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았으며,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습니다. 팽성공의 어머니도 이전에 태자 자리와 관련된 일로 폐위되었으니, 그를 다시 태자로 세우면 내심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를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처음에 석호가 상규(上邽)를 공격했을 때, 장시는 유요의 어린 딸인 안정공주(安定公主)를 사로잡았는데, 당시 그녀는 12세로 매우 아름다웠다. 장시는 그녀를 석호에게 바쳤고, 석호는 그녀를 총애하여 아들 석세를 낳았다. 석세는 제공(齊公)에 봉해졌다. 장시는 석호가 나이가 많고 병이 많아진 것을 이용해, 어린 석세를 태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며, 안정공주 유씨(劉氏)를 황후가 세워 정치를 보좌할 계획이었다. 장시가 석호에게 다시 말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두 번 태자를 세우셨으나, 그들의 어머니는 모두 천한 신분 출신이었기에 화란(禍亂)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신분이 높고 효성스러운 자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야 합니다."
이에 석호가 답했다.
"경은 잠시 말하지 말라. 짐은 태자가 누가 되어야 할지 알고 있다."
그리고 신하들을 잠시 물러가게 하였다. 이후 석호는 다시 신하들과 동당(東堂)에서 회의를 하며 말했다.
"짐은 재차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어찌하여 짐에게는 사악한 아들들만 태어나는가? 짐의 아들이 20세가 되면 공(公)들을 죽이려 하니, 이제 석세는 10세인데, 그가 20세가 되면 짐은 이미 늙을 것이다."
결국 석호는 장거와 이농과 의논한 끝에 석세를 태자로 세우기로 결정하고, 공경들에게 석세를 태자로 세울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 연명하게 하였다. 이때 대사농 조막(曹莫)이 서명을 거부하자, 석호는 장시를 보내 그 이유를 묻게 하였다. 조막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천하의 중대한 자리는 어린 자를 세워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석호가 말했다.
"조막은 충신이나, 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장거와 이농은 짐의 뜻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그리하여 석호는 석세를 황태자로 세우고, 소의 유씨를 황후로 올렸다. 또한 태상 조유(條攸)와 광록훈 두가(杜嘏)를 불러 말했다.
"경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을지니, 부디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짐의 뜻을 명확히 전달하라."
그리고 조유를 태부(太傅)로, 두가를 소부(少傅)로 임명하였다.

건무 14년(348년) 10월, 석호는 진군장군 부건을 파견해 경릉(竟陵)을 침략하게 하였다.

건무 14년(348년) 11월, 석호가 태무전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열었는데, 불도징이 전각 위에서 옷을 걷어 올리고 걸으며 시를 읊조렸다.
"전각이여, 전각이여, 가시나무가 숲을 이루면 사람의 옷을 찢으리라."
석호는 즉시 사람을 시켜 전각 아래를 파보게 하였고, 그곳에서 실제로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건무 14년(348년) 12월 어느날[13], 큰비가 내리자, 석호가 불도징에게 물었다.
"이 비가 짐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소?"
불도징이 답했다.
"이는 폐하에게 닥친 재앙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불도징은 세상을 떠났다.

그해, 석호는 길이 5척에 달하는 칼을 한 자루를 제작하게 하였고, 그 칼에 '황제 석씨(皇帝石氏)'라는 명문을 예서체로 새기게 하였다.

2.6. 칭제

2.6.1. 고력의 난

태녕 원년(349년) 정월, 석호의 병세가 회복되었다. 이에 그는 남교(南郊)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즉위하였다. 석호는 경내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태녕(太寧)'으로 개원하였다. 모든 관료들의 지위를 한 등급씩 올리고, 자신의 여러 아들들에게 왕의 작위를 주었다. 또한, 상서 장량(張良)을 상서우복야로 삼았다.

이전에 동궁에서 근무하던 석선의 정예부대 "고력(髙力)"의 10,000명은 유배형이 내려져 양주(涼州)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융성(雍城)에 도착했을 때, 석호가 내린 대사면령에 포함되지 않아 사면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옹주자사 장무(張茂)가 석호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송치하고 있었는데, 장무는 그들의 말을 빼앗고 도보로 행군하게 하였으며, 녹거(鹿車)를 이용하여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이때 고력의 대장 양독(梁犢)은 고력의 여러 부대장들과 함께 백성들의 원한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동쪽으로 돌아갈 것을 모의하였다. 이들은 은밀히 호인(胡人) 헐독록(頡獨鹿)을 통해, 유배된 병사들에게 이 계획을 전했으며, 병사들은 이에 크게 기뻐하며 소리쳤다.

양독은 자신을 동진의 정동대장군이라 자칭하며 거병하고, 군사를 이끌어 하변(下辨)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장무를 협박하여 그를 대도독•대사마로 강제로 세우고 가마에 태웠다. 안서장군 유녕이 안정(安定)에서 출정하여 반란군을 공격하였으나, 양독에게 패배하였다. 진(秦)과 옹(雍) 지역의 성채와 보루는 모두 함락되었고, 2천석 이상의 관리를 포함한 장사들이 처형되었다. 양독의 군대는 동쪽으로 진격하며 파죽지세로 승리하였고, 고력 등은 모두 힘이 세고 활 솜씨가 뛰어나, 한 명이 열 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갑옷과 무기는 없었으나, 민가에서 도끼와 긴 자루를 빼앗아 공격하며 귀신처럼 싸웠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적들이 달아나고, 수비병들은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양독 등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군세는 이미 열 배로 불어나 100,000명이나 되었다. 그때 장안에 주둔 중이던 낙평왕 석포는 전 병력을 동원해 이들을 막으려 했으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장안성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양독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관(潼關)을 넘고, 낙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석호는 사공 이농을 대도독으로 삼고, 위장군 장하도, 정서장군 장량, 정로장군 석민 등과 함께 보•기 100,000명을 거느리고 양독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들은 신안(新安)에서 양독의 군대와 싸웠으나, 이농 등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이후 낙양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으나, 후조의 관군은 또다시 패배하였고, 이농 등은 병력을 이끌고 성고(成皋)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펼쳤다. 양독은 동쪽으로 진격해 형양(滎陽)과 진류(陳留) 등 여러 군을 약탈하였다. 석호는 크게 두려워하며 연왕 석빈을 대도독•중외제군사로 삼아 이농 대신 전투를 지휘하게 하고, 정예 기병 10,000기와 관군대장군 요익중, 거기장군 포홍를 거느리고 양독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석호의 명을 받은 요익중은 경기병 8,000명을 이끌고 업(鄴)에 도착하여 석호를 만나려 했으나, 당시 석호는 병석에 누워 그를 만나지 않았다. 대신 석호가 그를 영군성(領軍省)으로 들여보내 자신의 음식을 하사하니, 요익중은 분노하며 말했다.
"나는 적을 치기 위해 왔으니, 직접 면담하여 방략을 지시해 주시기 바랄 뿐, 어찌 음식을 구하러 왔겠는가! 또, 나는 지금 주상이 살아계시는지 알 수 없다. 한 번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런 후에 요익중이 돌아가려 하니, 석호는 힘을 다해 그를 만나러 나섰다. 요익중은 석호의 면전에서 그를 꾸짖으며 말했다.
"어린애가 죽어서 병이 깊어졌는가? 자식이 어렸을 때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반역에 이르게 했고, 또 그런 아들을 죽였으면 결국엔 모두 네 탓 아닌가? 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으면 지금 세워 놓은 사람이 어린아이니 세상에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양독이란 놈은 궁색하여 고향에 돌아갈 생각만으로 저러는 것이니 이 늙은 강족 요익중이 너를 위하여 한 번에 처리하겠다."
요익중은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어서, 사람을 대할 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너(汝)"라고 불렀다. 석호는 이에 화내지 않고, 요익중에게 군사를 직접 지휘하도록 명하며, 그를 정서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갑옷과 말을 하사하였다. 그러자 요익중이 석호에게 말했다.
"네가 보기에 이 늙은 강족인 내가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러고는 갑옷을 입고 마당에서 말을 타고 남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며 석호에게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요익중은 석빈과 함께 형양에서 양독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양독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 또한 그의 잔당들도 모두 소탕하였다. 석호는 그 공로를 인정하여 그에게 검과 신발을 착용한 채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입조할 때 빠른 걸음으로 걷지 않아도 되게 하였고, 서평군공(西平郡公)으로 개봉하였다. 또한, 포홍을 시중•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도독진옹주제군사(都督秦雍州諸軍事)•옹주자사로 삼고, 그를 약양군공(略陽郡公)으로 봉하였다.(고력의 난)

2.6.2. 최후

태녕 원년(349년) 2월, 동진의 정북대장군 저부가 부장 왕감(王龕)을 보내어 후조의 영토를 침범하고, 패군(沛郡)을 함락시키고, 장군 지중(支重)을 사로잡았다. 이때 시평(始平) 사람 마앙(馬昻)이 낙지(洛氏)와 갈곡(葛谷)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군이라 자칭하였다. 낙평왕 석포는 이를 공격하여 진압하였고, 마앙과 그의 추종자 3,000여 호를 처형하였다.

이 시기에 형혹성이 적시성(積尸星)과 묘성을 침범하였으며, 북쪽으로는 하고성(河鼓星)을 범하였다. 또한, 낙양(洛陽)[14]에서 서북쪽 9리 떨어진 곳에 있는 소 석상이 청산(青山) 협곡 위에서 밤에 갑자기 울며 사람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30리 밖까지 들렸다. 석호는 이를 불길하게 여기고, 사람을 보내 석우의 양쪽 귀와 꼬리를 잘라 떨어뜨리고, 쇠못으로 그 네 발을 박아 고정시켰다.

태녕 원년(349년) 4월 9일[15], 석호는 병세가 심각해지자, 팽성왕 석준을 대장군으로 삼아 관우(闗右)를 지키게 하고, 연왕 석빈을 승상으로 임명하여 상서성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또한, 장시를 진위대장군•영군장군으로 삼아 이부상서(吏部尚書)로서 유조(遺詔)를 받아 정무를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황후 유씨는 석빈이 정무를 보좌하는 것이 태자에게 불리할 것을 두려워하여, 장시와 함께 석빈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거짓 조서를 내려 석빈에게 충효가 없다는 죄목으로 면직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태녕 원년(349년) 4월 19일[16], 팽성왕 석준은 업(鄴)에 이르러 서쪽으로 떠나기 전에 아버지 석호를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석빈과 석준을 경계하던 장시와 유 황후가 멋대로 알현을 거부한 뒤 조당(朝堂)에서 칙서를 내려 금군 30,000명을 그에게 배속시키고 얼른 부임지로 떠나게 하였다. 이에 석준은 석호를 만나지도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업을 떠났다. 석준이 떠난 날, 석호는 병환이 조금 나아져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었다.
"석준은 아직 오지 않았느냐?"
그러나 신하들은 유 황후에게 복종하고 있었으므로 이미 떠난지 오래라고 답하였다. 이에 석호가 한탄하였다.
"만나지 못하다니 한스럽도다."
이후 석호가 병상에서 일어나 서각(西閣)으로 나아갔을 때, 용등중랑 300여 명이 앞에 나와 절을 올렸다. 석호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러자 모두 입을 모아 답했다.
"성체가 불편하시니 연왕을 부르시어, 그를 숙위케 하며 금군을 감독하게 하심이 좋겠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연왕을 황태자로 삼아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석호는 석빈이 이미 면직된 것을 알지 못하고 꾸짖었다.
"연왕이 궁 안에 있지 않은가? 그를 부르라."
좌우에서 연왕이 술에 취해서 들어올 수 없다고 말하자, 석호는
"어서 가마를 가져와 그를 맞이하라. 인장을 넘겨주겠다."
라고 명하였으나, 이미 유 황후에게 붙은 측근들은 끝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후 석호는 다시 혼미해져 안으로 들어가 병상에 누웠다. 이 일이 있은 후, 유 황후와 장시는 장시의 동생 장웅(張雄)을 시켜 또다시 조서를 꾸며서 석빈을 살해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4월 22일, 유 황후가 조서를 고쳐 장시를 태보•중외제군사로 삼아 상서성의 일을 총괄하게 하고, 1,000명의 보병과 100기의 기병을 배속시켜 마치 한나라의 곽광처럼 정무를 보좌하게 하였다. 시중 서통(徐統)은 이를 보고 한탄하며 말했다.
"재앙이 일어나려 한다. 나는 여기에 관여하지 않겠다."
그리고는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태녕 원년(349년) 4월 23일[17], 석호가 금화전(金華殿)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55세. 훗날 석세를 죽이고 황위를 찬탈한 석준이 석호를 현원릉(顯原陵)에 장사지냈으며, 묘호를 '태조(太祖)', 시호를 '무황제(武皇帝)'라 하였다.

2.7. 사후

석호의 공포정치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체제를 지키던 후조는 구심점이던 석호가 세상을 떠나자 얼마 못 가 홀라당 망해버렸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이 연달아 계승했지만 서로 죽이다가, 석호의 양손이자, 한족 출신 장수 염량의 아들이었던 염민이 자신이 옹립했던 마지막 석씨 황제였던 석감을 찬탈하고 위나라를 세웠다. 이 염위는 곧 선비 모용부전연에게 멸망했다.

1년도 안 되어 석세-석준-석감-석지 이렇게 석호의 아들 4명이 줄줄이 황제를 했지만 모두 제 명을 살지 못했으며, 거기다가 석호의 자손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했고 남은 자손들은 염민이 모두 몰살시켰다. 이는 나라를 말아먹은 석호의 잘못이자 포악한 정치를 한 업보였다.

염민은 석감의 치세때 수도 업성에서 갈족 소탕전에 나서 석호의 남은 자손들과 갈족 200,000여 명을 학살했는데, 이때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아서 갈족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었다[18]. 그동안 석호의 공포정치 때문에 분노한 사람들은 갈족을 몰살시켰으나, 염민의 이민족 학살 정책은 반발을 일으키면서 결국 그는 불과 3년 만에 염위와 함께 종말을 맞고 말았다.

석호의 능인 현원릉(顯原陵)은 허베이성 싱타이시 백천촌[19]에 소재해 있으며, 석호에게 팔이 물어뜯기는 괴기한 꿈을 꾼 전연 경소제 모용준이 사람을 시켜 현원릉을 파헤치고 관을 쪼개서 확인했으나 기이하게도 현원릉에는 석호의 시신이 없었다.[20]

이후 자신이 석호에게 총애받던 후궁이라고 주장하는 이도(李莵)라는 여인이 나타나 모용준에게 석호가 실제로 묻힌 장소가 동원(東苑)이라 알렸고, 모용준이 그 장소에 행차해 세 군데 정도 파헤칠 즈음 정말 석호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이 발견되었다.

모용준은 석호의 시신을 발로 차고 욕하며 꾸짖은 뒤에 어사중위 양악(陽約)에게 석호의 잔혹한 죄를 나열하게 하고, 시신을 채찍으로 마구 때린 뒤 장수에 내다버렸다. 그러나 석호의 시신은 다리의 기둥에 걸려서 떠내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전연이 전진에 의해 멸망한 후, 전연의 명재상 왕맹이 시신의 위치를 밀고했던 이도를 죽이고 석호의 시신을 수습해 다시 장사지내 주었다.

3. 평가

고조 명황제 석륵이 천신만고 끝에 일으켜 화북을 통일시킨 후조 제국을 정당한 후계자인 석홍한테서 찬탈하고 정벌과 노역과 숙청으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데다가 후계구도는 서진의 사마염 이상으로 망쳐놓아서 끝내 단명왕조로 몰락하게 만든 원흉으로 꼽힌다.

다만 강족의 수장 요익중이나 저족의 수장 포홍(蒲洪)[21]의 <열전>을 보면 <석계룡 재기>에 나오는 막 나가는 폭군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요익중을 중용하면서 그가 간하는 이야기들을 나름 잘 들어주거나 포홍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 화근이 될거니 제거해야 한다는 염민의 참소를 무시하면서 더 중용하거나 하는 일화들을 보면 석호라는 인물을 좀 달리 볼 여지가 있을지도.... 요익중은 아예 석호가 찬탈했을 때 대놓고 쌍욕을 하면서 반대했지만 그 요익중을 더 중용했고, 나중에는 아예 야자를 까면서까지 석호에게 뭐라고 해도 석호가 찍소리를 못하고 다 들어줄 정도였다. 이게 요익중이나 포홍같은 강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만만한 애들에게만 공포정치를 했다고 볼 여지도 있겠는데, 둘 다 석호 사후에도 나름의 충성은 다 했다는 것이 의외로 흥미로운 점이다.... 염민이 찬탈한 후에 요익중은 대놓고 석씨의 편을 들어서 염민과 싸웠고[22], 훗날 죽으면서도 후손들에게 석씨에게 큰 은혜를 입었음을 이야기하는 걸 보면 충성심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포홍은 석호 사후 염민의 참소로 도독직을 떼이면서 후조를 배신하기는 했지만 석호 생전에는 역시 충성을 다 한 편이었다. 석호가 대부족을 이끌고 있는 저 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눈치를 보고 대접해준 면이 있기도 하겠지만 두 사람이 석호에게 한 일을 보면 그들의 마음을 제대로 얻기는 한 모양이라서 석호가 잘 한 점이 없지는 않은지라 마냥 박하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

4. 오해: 식인황제?

석호의 잔혹함에 대한 이야기 중 《고우영 십팔사략》에서 미녀궁녀가 있으면 아름답다며 목을 잘라 얼굴은 영구 보존하고, 몸은 잘 요리해서 먹어치웠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잘못하면 석호에게 먹히겠다고 두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이건 석호가 아니라 그의 장남 석수(石邃)의 행각으로, 오히려 이 녀석이 사이코패스 식인종이며, 뒷날 반역을 일으키려하다가 식솔 수백 명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런데 그 반역의 원인이 아버지한테 별 이유없이 두들겨 맞아서였다(...).

5. 자녀

6. 기타

당나라때 편찬된 《진서》(晉書)에서는 석호의 이름이 당나라 고조 이연의 부친이었던 이호(李虎)와 같았기 때문에 피휘를 위해 석호의 자로 표기했다. 따라서 《진서》에서의 석호의 전기는 <석계룡 재기>이다.[24]

7.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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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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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는 성씨가 없었지만 일족이 석씨가 된 후, 석씨로 정해졌으며 석호가 황제에 올라 태종 효황제(太宗 孝皇帝)로 추존했다.[2] 조개껍대기를 갈아서 만든 하얀 분말.[3] 예현관(禮賢冠)으로 알려진 관모와 비슷한 모자라고 한다.[4] 정유년 계묘월 경진일. 음력으로는 2월 24일이고, 양력으로 4월 10일이다.[5] 정유년 계묘월 신사일. 음력으로는 2월 25일이고, 양력으로 4월 11일이다.[6] 정유년 임자월 기축일. 음력으로는 11월 7일이고, 양력으로 12월 15일이다.[7] 무술년 무오월 무자일. 음력으로는 5월 9일이고, 양력으로 6월 12일이다.[8] 혹은 위상(魏象).[9] 기해년 기사월 신미일. 음력으로는 4월 27일이고, 양력으로 5월 21일이다.[10] 기해년 정축월 정축일. 음력으로는 339년 12월 7일이고, 양력으로 340년 1월 22일이다.[11] 혹은 400,000여 명[12] 정유년 기유월 무오일. 음력으로는 8월 3일이고, 양력으로 9월 23일이다.[13] 12월 신사일(辛巳日)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달에는 신사일이 없다.[14] 혹은 제양성(濟陽城)[15] 기유년 기사월 을묘일. 음력으로는 4월 9일이고, 양력으로 5월 12일이다.[16] 기유년 기사월 을축일. 음력으로는 4월 19일이고, 양력으로 5월 22일이다.[17] 기유년 기사월 기사일. 음력으로는 4월 23일이고, 양력으로 5월 26일이다.[18] 갈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갈족은 코카소이드계 종족이었다.[19] 이 마을에는 명제 석륵의 고평릉도 소재해 있다. 물론 실제 시신을 안장한 것이 아닌 가짜 능묘이다.[20] 명제 석륵도 평야에 가짜 고평릉을 만들고 진짜 시신은 산에 비장되었던 것을 따라 자신도 가짜 현원릉을 만들고 진짜 시신은 비장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21] 훗날 부(苻)씨로 성을 바꾸었다. 전진을 세운 고조 경명제 부건의 아버지였다.[22] 석지와 염민이 싸울 때 아들 요양을 보내며 염민을 꼭 잡아서 끌고오라고 했는데 염민이 패퇴하여 도망가버리자 아들에게 빠따질(...)을 했을 정도였다.[23] 후세의 일부 사서에는 정앵도를 미소년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진서(晋書) 등에 기재되어있는 우동(優童)이라는 말이 아름다운 남자라고 착각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앵도의 직업이 우동(優童)이었는데 이는 광대란 뜻이다.[24] 전조의 초대 황제 유연도 당고조 이연의 이름과 같아서《진서》에는 자를 대신 써서 '유원해'라고 표기되었다. 따라서 <유원해 재기>이다. 《진서》는 하내 사마씨의 서진동진을 정통으로 보고 두 진나라만 <본기>로, 나머지는 황제국이라도 제후국으로 보고 <재기>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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