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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5 21:31:31

양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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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楊軻
생몰연도 미상

후조의 은사. 자는 불명. 진주(秦州) 천수군(天水郡) 출신.

2. 생애

양가는 어렸을 때부터 《주역》을 좋아하여, 장성하고 나서도 결혼하지 않고, 학업에 몰두하면서 제자를 수백명이나 양성하였다. 그는 항상 거친 음식과 물로 끼니를 떼웠고, 옷은 갈색 온포(縕袍)만 입으며 누추하게 생활하였는데, 속세에 관심을 두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지냈다. 손님을 대할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교류하는 사람 또한 적었다. 비록 양가의 제자들은 많았으나, 그들은 양가의 집을 찾아가 직접 가르침을 받는 방식으로 수업을 들은 것이 아니라서, 사제지간이라 해도 특별히 교류가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전조를 건국한 유요가 칭제하고 양가를 태상으로 삼자, 양가는 굳게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유요 역시 양가를 존경했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으니, 양가는 그대로 농산(隴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유요가 후조의 석륵에게 사로잡히면서 진주(秦州)의 사람들이 일제히 동쪽으로 피난갔으나, 양가는 장안에 그대로 머물렀다. 이후 후조의 황제로 즉위한 석호는 검붉은 비단 한 묶음과 안거(安車)를 보내 양가를 초빙하였다. 양가는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가 석호의 핍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후조의 수도인 업(鄴)으로 갔다. 수도에 도착한 양가는 석호를 알현하고도 절을 하지 않았고, 무슨 말을 걸어도 답하지 않았다. 후조의 대신들은 양가가 무례하고 오만하다 지적했지만, 석호는 양가에게 영창(永昌)의 집 한 채를 하사하고, 그를 상서로 삼았다.

양가가 영창에 거주할 때, 석호는 매일 그에게 먹을 것을 하사하였다. 양가는 그것을 받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석호에게 감사를 표했는데, 그 문장이 심히 아름다워 읽는 자로 하여금 진심어린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석호는 양가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회유하기 위해 야밤에 미녀를 그의 집으로 보내 유혹하거나, 건장한 갈족 병사들을 보내 하사품을 빼앗아와 위협하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양가는 황제의 배려를 받고도 검소하게 생활하여 항상 흙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잤으며, 그 아래에 따로 이불을 깔지 않았다. 또, 신체가 매우 외소하였는데, 한번은 기이한 선비를 좋아하는 영천군의 순포(荀鋪)라는 자가 양가의 명성을 듣고 담론을 나누기 위해 찾아왔다가 그의 초라한 외모를 보고 면전에서 크게 웃었다. 하지만 양가는 순포의 무례한 행동에도 놀라거나 노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양가가 상소하여 귀향을 청하자, 석호는 그의 청을 허하고 포륜(蒲輪)을 단 안거를 보내 진주(秦州)로 편히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향에 무사히 돌아온 양가는 이전처럼 학업을 계속 이어갔다. 얼마 뒤, 석호가 붕어하고 장강 이북이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되자, 양가는 소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서쪽 양주(涼州)로 피난 가던 도중 반군에게 사로잡혀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