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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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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호족 숙청2.3. 화북 평정2.4. 죽음과 사후
3. 평가4. 가족 관계

1. 개요

王猛
325~375

위진남북조시대 중에서도 오호십육국시대에 활약했던 전진의 정치가.

자(字)는 경략(景略)이었으며 청주 북해(北海)국 극현(劇縣)[1] 출신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 최고의 정치가이자 책사로 손꼽히는 인물로, 전진의 제3대 황제였던 명군 부견의 오른팔이자 심복과 같은 인물이었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재상이자 명장이었다.

부견이 생전에 화북을 통일하고 천하통일에 근접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펼쳤던 인물로, 단순히 정무에만 능할 뿐 아니라 전진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전연을 공략할 당시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대승을 거두는 등 군사령관으로서도 출중한 재능을 발휘했다. 《진서》에서는 부견과 왕맹의 관계를 촉한유비제갈량에 비견할 정도였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집안의 선대는 전국시대의 제나라 전씨 왕가 출신이라고 한다. 출신지인 극현도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 근처이다. 하지만 그 사이 집안이 영락했는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삼태기를 엮어서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외모와 자태가 빼어났고, 박학다식했으며 병서를 좋아했다. 또한 기개가 높고 도량이 있어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쓰지 않는 대범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맹은 화음산에 들어가 스승을 모시며 천하의 정세를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날, 354년에 동진의 명장이자 권세가였던 환온이 찾아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환온이 그의 뛰어난 통찰력에 놀라서 즉시 스카웃하려 했으나 왕맹이 스승과 의논한 끝에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후에 저족의 부씨 가문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전진의 황족 부견이 왕맹의 평판을 듣고는 신하인 여파루를 통해 그를 등용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왕맹은 부견에게 있어 일생의 동반자로 거듭나게 된다. 《진서》 <부견 재기>에 딸린 <왕맹전>에서는 부견이 왕맹을 대함이 마치 촉한의 열조 소열제 유비제갈량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2.2. 호족 숙청

357년, 마침내 부견이 폭군 부생을 제거하고(수광정변) 대진천왕(大秦天王)[2]의 자리에 오르자 왕맹을 중서시랑으로 삼았다. 부견으로부터 실권을 부여받은 왕맹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 중 하나는 바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왕맹은 전진의 발전을 위해서는 황제와 국법조차 우습게 보는 호족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견도 황권 강화를 위해 호족 숙청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특히 전진의 지배층이었던 저족 호족들 또한 한인 출신으로 별다른 경력도 없는 왕맹이 벼락출세한 것을 시기했기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예컨데, 전진의 공신이었던 번세는 자신의 공을 믿고 왕맹을 함부로 시기하며 황제인 부견 앞에서도 그를 헐뜯었다. 그러자 부견과 왕맹은 더는 묵과할 수 없어 그를 제거하기로 했고, 번세는 왕맹과 짜고 친 부견의 속임수에 말려들어 참수당했다.[3] 전진의 초대 황제인 고조 경명제 부건의 매부였던 강덕 또한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고 다니다가 왕맹에게 걸려서 처형당한 후 그 목과 시체가 저자거리에 내걸렸다.

이후 왕맹은 강직한 성격의 맹장이었던 등강[4]과 함께 저족의 힘있는 세력가들을 20명이나 숙청하여 황제의 권력을 강화했다. 이때 조정의 모든 공경대신들이 부견과 왕맹을 두려워하여 늘 몸가짐을 조심했고,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주워가지 않을 정도로 나라의 기강이 반듯하게 잡혔다. 이를 본 부견은
"이제서야 천하에 법이 있고, 천자가 존귀한 줄 알겠구나!"
라며 탄식했다고 전한다.

2.3. 화북 평정

367년, 전진의 세력권하에 있었던 강족의 세력가 염기가 반란을 일으키곤 전량의 세력가였던 이엄에게 의탁하자 왕맹이 군사를 거느리고 약양으로 쳐들어가 이를 토벌했다. 또한 이엄이 전량의 왕인 장천석에게 공격을 받고 도움을 청하자 이에 응하여 장천석을 굴복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엄이 왕맹을 두려워하여 그를 만나려하지 않자 꾀를 써서 그를 사로잡아 부견에게 보냈다.

이해(367)에 이르러 부견의 친족들인 부쌍(雙)과 부유(柳), 그리고 부유(庾)와 부무(武)가 각기 상규와 포판, 섬성과 안정을 근거지로 삼아 5공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왕맹이 등강, 양안, 장자 등의 장수들과 함께 이를 진압했다.(368)

369년, 동진의 권신 환온이 북벌을 감행하여 전연을 공격해오자, 전연의 마지막 황제인 모용위가 부견에게 구원을 청하며 그 댓가로 영토 할양을 약속했다.[5] 그러나 모용위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왕맹이 군사를 거느리고 낙주자사 모용축을 낙양에서 포위했으며, 모용위가 이를 구원하기 위해 파견한 모용장 또한 격파했다.

370년, 부견은 왕맹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양안, 장자, 등강 등의 장수들을 포함한 100,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전연을 정벌하도록 했다. 왕맹이 연전연승하자, 전연의 황제인 모용위가 심복인 태재 모용평[6]으로 하여금 400,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이를 막도록 했다. 그러자 왕맹은 군사들 앞에서 연설을 하여 사기를 한껏 고취시킨 후, 샛길을 통해 전연군의 보급물자를 태워버렸으며, 등강과 장자, 서성 등의 맹장들을 앞세워 적진을 와해시켰다. 결국 모용평은 크게 패했고, 직후에 부견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전연의 수도인 업성을 점령했다. 전연의 황제 모용위는 전진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전연을 무너뜨린 전진은 관중과 관동을 모두 재패하게 되면서 화북의 패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372년, 왕맹은 이 공로로 지위가 승상에 이르렀다.[7]

2.4. 죽음과 사후

이후 왕맹은 375년 7월에 5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주군인 부견에게 아직 전진의 내실이 튼튼하지 못하므로, 함부로 동진을 치지말 것이며 내부의 적인 선비족과 강족을 경계할 것을 신신당부했다.[8] 왕맹이 죽자 부견은 크게 슬퍼하며 태자인 부굉에게
"하늘이 내가 천하통일을 이루기를 원치 않는 모양이다! 어찌 내게서 경략을 이리도 빨리 데려간단 말인가?"
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왕맹이 살아있을 때는 황제 노릇하기 참 쉽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 내가 어찌 이런 이들과 일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왕맹이 죽은 뒤에는 부견이 그전과는 달리 상당히 신경 써서 과로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신하들이 다들 왕맹에게 미치지 못함을 새삼 통감하며 했던 말이었다.

왕맹이 남긴 걱정 섞인 유언은 결국 현실이 되었다. 383년 11월, 천하통일 야망을 불태우던 부견은 먼저 내실을 다져야 한다는 왕맹의 유언을 무시하고 동진을 정벌하기 위해 무려 96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으나 비수대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이에 왕맹이 걱정했던 것처럼 부견의 휘하에 있었던 선비족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 등 야심가들이 전진을 배신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일으켜 제각기 후연후진 등의 나라를 세웠다. 부견은 반란의 불길에 휩싸인 수도 장안에서 도망치다가 오장산에서 요장에게 사로잡힌 후 신평의 사찰에서 교살되고 말았다.

3. 평가

왕맹은 사후에 뛰어난 명재상으로 평가받아 왔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한 만큼 이름을 날린 인물도 많았는데, 재상으로서는 촉한제갈량, 후조장빈 등과 함께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축에 속한다. 더욱이 왕맹은 단순히 능수능란한 정치가였을 뿐 아니라 몸소 수차례 전장에 나아가 전공을 세운 명장이기도 했다. 행동거지 또한 모범적이어서 검소하며 사치를 경계했고, 군주인 부견에게는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왕맹의 성향은 철저한 현실주의 그 자체로, 법가적인 면모와 유가적인 면모가 공존하고 있었다. 황제의 권력에 도전할만한 호족들을 가차없이 처단하며, 국법을 철두철미하게 적용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 모습은 분명 법가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학문을 권장하며 국가의 교육제도를 정비하여 귀족의 자제들에게 유학을 보급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부견은 이런 왕맹을 유비가 제갈공명을 대하듯 우대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신임했다.

왕맹의 현실주의적인 면모는 그가 평생을 섬겼던 부견의 이상주의적 면모와는 대조적이었다. 황제인 부견은 자신에게 항복해왔던 이민족들과 친족들이 자신을 배반하더라도, 이를 진압한 후에는 대범하게도 사면해서 유형에 그치거나 혹은 다시 중용하여 변방의 방어를 튼튼히 하는 포용책을 펼쳤는데, 왕맹은 정반대로 황제의 권력에 위협이 될만한 것들은 허용치 않고 즉시 처단해버렸다. 그가 죽어가면서 부견에게 동진을 정벌하는 것보다 부견의 휘하에 들어온 선비족과 강족 등의 이민족들을 제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왕맹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전진 내부의 권력적 위험요소들을 깡끄리 정리한 왕맹의 법가적 통치술과 이민족들에 대한 포용책으로 민심을 얻고 급격한 속도로 세력을 확장했던 부견의 포용적 통치술은 실제로 전진이 내실과 외강을 모두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견과 왕맹의 성향이 매우 딴판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해주는 이상적인 군신관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왕맹이 죽은 후에는 이런 균형이 망가지면서 전진은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비수대전에서 참패한 후, 그동안 부견이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이민족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켜 한 때 화북을 통일했던 전진은 그대로 산산조각나 버리고 말았다.

4. 가족 관계

장남 왕영은 부견의 서장자이자 제4대 황제였던 애평제 부비를 옛 연나라 영토에서 보좌하다가 서연의 모용영과 쟁패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 훗날 후연의 영토 상당 부분을 거두어들인 북위의 태조 도무제 탁발규가 왕영의 아들 왕헌을, 그 유명한 왕맹의 손자라는 이유로 특채하는 일이 있었다. 왕맹의 명성은 선비 탁발부가 세운 북위에도 꽤 알려져 있었던 모양으로, 왕헌은 북위에서 진남장군, 북해공, 청주자사로까지 꽤 잘나갔다.

차남 왕피는 왕맹 사후 낮은 지위에 불만을 품고, 주호 및 고조 경명제 부건의 황자 동해공 부양과 결탁해서 반란을 모의하다가 부견에게 적발되었으나, 부견은 왜 왕맹이 죽기 전에 왕피에 대한 청탁을 하지 않았는지 알겠다며 간단한 디스만 한 후 삭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간단한 조치만 했다. 왕피는 이후 전진이 혼란해지자 탈출하여 후진의 요장에게 몸을 맡겼다.

3남 왕휴는 하동태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이자 왕맹의 손자인 왕진악은 할아버지를 천거하고 중용해준 세조 선소제 부견을 은인으로 삼고 있었다. 이에 요장이 부견을 교살하고 후진을 세운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은채 동진으로 망명했는데, 동진의 권신인 유유의 수하에서 강족 요씨의 후진을 멸망시킬 좋은 기회가 생기자 누구보다도 후진을 멸망시키는데 가장 앞장섰다.


[1] 지금의 산둥성 웨이팡시 창러현 일대이다.[2] 천왕(天王)은 본래 고대 주나라의 왕들이 사용하던 칭호였는데, 5호 16국시대에 등장한 이민족 출신의 황제들도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3] 번세가 들어올 때, 부견이 일부러 번세가 사위감으로 점찍어놓았던 사람을 자신의 사위로 삼는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왕맹에게 던졌다. 이에 번세가 항의하자, 왕맹이 "세상천지에 천자가 둘이냐? 어찌 천자와 다투냐?"라는 식으로 비꼬았다. 이에 번세가 욕을 퍼부으며 부견이 보는 앞에서 왕맹을 폭행하려하자 화가 난 부견이 근위병들에게 명령하여 체포했고, 왕맹은 번세를 바로 끌어내어 참수해버렸다.[4] 부견 휘하에서 활동한 장수들 중에서는 장자와 더불어 최고의 맹장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혼자서 황소를 거꾸러뜨리고 10,000명의 병졸을 상대할 수 있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5] 참고로 이때 전연의 황족이었던 모용수가 환온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도리어 간신 모용평의 견제를 받자 전진으로 달아났다. 왕맹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부견이 천하의 영웅호걸을 내칠 수는 없다며 모용수를 받아주었다.[6] 모용평모용외의 아들로, 황제 모용위에게는 작은 할아버지뻘의 인물이었다. 능력은 뛰어나지 않은 주제에 탐욕스럽고, 질투가 심해서 전연의 명장이었던 모용수를 전진으로 망명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7] 부견은 이후로도 371년에 저족의 구지를, 376년에는 한족의 전량과 선비 탁발부의 대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화북을 통일했다.[8] 왕맹이 "남쪽 진나라는 비록 옛날의 오월보다 협소하지만, 정통을 잇고 있으니 사이좋게 지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선비족(모용수 일파)과 강족 등을 경계해야 합니다. 훗날 그들은 큰 우환이 될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부견은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