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19 10:38:30

사마상지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초충왕(譙忠王)
司馬尙之 | 사마상지
시호 충(忠)
작위 초왕(譙王)
사마(司馬)
이름 상지(尙之)
백도(伯道)
부친 사마념(司馬恬)
생몰 ? ~ 402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동진의 황족으로 자는 백도(伯道)이다.

2. 생애

사마상지의 5대조는 사마의의 동생인 사마진, 고조부는 사마손, 증조부는 사마승, 조부는 사마무기, 부친은 사마념이었다. 사마상지는 처음 비서랑(秘書郞)으로 임명되었고 산기시랑(散騎侍郞)으로 옮겼다. 아버지 사마념이 388년 청연2주 자사로 부임하여 경구(京口)에 진수할 때 진위장군(振威將軍), 광릉상(廣陵相)으로 재임했다가 390년 사마념이 죽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마염의 장례를 마친 뒤에는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의 자의참군(諮議參軍)이 되었다.

당시 사마도자는 명재상 사안이 실각한 이후 동진의 실권을 장악하며 왕국보를 총애했다. 397년, 재상 사마도자와 왕국보에 대해 반발한 왕공이 왕국보의 토벌을 명분으로 처음 거병하자, 사마도자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결국 왕국보를 처형했다. 뒤에 산기상시(散騎常侍) 유진지(劉鎭之), 팽성군(彭城郡) 내사 유연자(劉涓子), 서주(徐州) 별가 서방(徐放)이 왕국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사마도자는 이들에게 사형을 내리려고 했지만 사마상지는 사마도자에게 이들을 석방하라고 권유했고 사마도자는 사마상지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왕국보 일파가 처형된 이후인 398년, 사마도자는 사마상지 형제를 심복으로 삼고 신임하게 된다. 왕공의 권세를 두려워한 사마도자에게 사마상지는 측근들을 심어서 왕공을 견제하도록 권유했고, 사마도자는 사마상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마 왕유(王愉)를 강주(江州)로 전출시켜 예주(豫州) 자사 유해가 맡은 예주 4군을 떼어 왕유에게 주었다. 이러한 조치에 분노한 유해는 아들 유홍(庾鴻)을 왕공에게 보내 함께 사마상지 형제를 토벌하자고 권했다.

결국 왕공이 사마상지 형제의 토벌을 명분으로 내걸어 다시 거병하고 여기에 환현, 은중감, 양전기가 호응했다. 사마상지는 자호(慈湖)에서 유해의 장수 단방(段方)을 물리쳤고 유해를 우저(牛渚)에서 격파하여 유해는 이때의 패전으로 인해 환현에게 달아났다. 사마도자는 사마상지를 건위장군(建威將軍), 예주 자사, 가절(假節)로 삼아 유해를 대신하여 역양에 진수시켰다. 그러나 환현이 백석(白石)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횡강(橫江)을 공격하자 사마상지는 환현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다. 왕공이 유뢰지의 배신으로 죽은 뒤 사마상지는 전장군이 되었으며, 형제들이 모두 사마도자의 신임을 받으며 권세를 좌우했다. 그리고 사마도자의 아들인 사마원현이 사마도자를 대신해 정권을 잡았을 때도 사마상지 형제는 사마원현의 신임을 받았다.

401년, 손은이 군대를 정비하여 건강으로 침공하자, 사마상지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정예 병력을 이끌고 건강에 도착해 적노당에 주둔했다. 손은은 이미 사마상지가 건강에 주둔해 있고 유뢰지가 이미 회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주(新洲)에 이르러 감히 진군하지 못하고 배를 띄워 욱주(郁洲)로 달아났다.

402년, 사마원현이 환현을 토벌하고자 유뢰지를 선봉으로 삼고 사마상지를 후방에 배치했다. 한편 환현은 고숙(姑熟)에 도착한 뒤 풍해(馮該) 등을 파견하여 역양(曆陽)을 공격하고 동포(洞浦)를 차단한 뒤 사마상지의 군함들을 불태웠다. 사마상지는 9천의 군사를 거느려 동포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주둔시킨 뒤 무도군(武都郡) 태수 양추(楊秋)를 파견하여 횡강(橫江)에 주둔시켰다. 그러나 양추가 환현에게 항복해버리면서 사마상지의 군대는 무너졌고 사마상지는 결국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여 일 뒤 한연(韓連)과 정원(丁元) 등이 환현에게 사마상지의 행적을 알리자, 사마상지는 결국 환현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사후 사마상지는 안제가 복위하면서 위장군(衛將軍)으로 추증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사마휴지의 장남인 사마문사(司馬文思)를 사마상지의 후사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