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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09:42

손은(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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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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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생애

1. 소개

孫恩
? ~ 402년

동진의 인물이며 자는 영수(靈秀)로 서주 낭야국 사람. 서진의 간신 손수의 후손이자 손태(孫泰, ?~398)의 조카로 대대로 오두미도를 신봉하고 있었다.

2. 생애

파일:중국 손은 행적 지도.jpg

삼촌인 손태가 기병하려고 모의했다가, 사마도자에게 죽음을 당하자 100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해도로 도망을 갔다.

399년에 사마원현이 농민들을 군에 강제 징발해 민심이 이반하자 주산도에서 무리를 이끌고 상우(上虞) 현령을 죽였으며, 회계(會稽)를 공격해 11월 2일에 함락시켜 회계군의 내사인 왕응지(王凝之)[1][2]가 도주하자 붙잡아와서 그의 여러 아들들과 함께 죽였다. 이에 사침, 육괴, 구왕, 허윤지, 주주, 장영 등과 함께 8개 군의 백성들이 동시에 군사를 일으켜 장리를 살해하고 손은에게 호응해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에 이르렀다.

오흥태수 사막, 영가태수 사마일, 가흥공 고윤, 남강공 사명혜, 황문랑 사충, 장곤, 중서랑 공도 등을 죽였으며, 정동장군을 자칭해 인사들을 압박해 관속으로 삼고 그의 무리를 장생인(長生人)이라 불렀다. 백성들 중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은 갓난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여 10명에서 7, 8명에 이르렀다. 여러 현령을 젓으로 담가서 그 아내와 자식에게 먹게 하고 먹지 않는 자는 번번이 사지를 찢어죽이며 이런 말을 했다.
먼저 신선이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교주를 알현한 후 너와 다시 만날 것이다.

회계왕 사마도자, 세자 사마원현을 죄를 상주해 그들을 주살할 것을 요청했으며, 안제의 명을 받아 유뢰지가 손은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해서 12월 26일에 유뢰지가 절강을 건넌 것을 들은 손은은 남녀 20여만 명을 내몰아 동으로 달아나면서 많은 보물과 자녀 대부분을 길에 버려 관군이 다투어 이를 빼앗아 손은은 이로 인해 주산도로 달아날 수 있었다. 여러 곳의 그의 무리들도 동진의 공격으로 격파되었고 400년에 사염이 회계에서 군사를 진수하게 되었지만 군사 방비를 하지 않았는데, 손은은 협구에서 노략질하고 여요로 들어가서 상우를 함락하고 나아가 형포(邢浦)에 이르렀다.

사염이 유선지(劉宣之)를 파견하자 손은은 격파되어 달아났고 얼마 후에 형포에서 노략질을 했다가 관군이 불리하자 손은이 승세를 타서 지름길로 진격했고 5월 30일에 회계에 이르렀으며, 손은은 맞서 싸우는 사염과 싸워 격파했고 이로 인해 장하도독 장맹이 사염을 죽이고 손은에게 가담했다. 손은은 방향을 돌려 임해에서 노략질을 하고 겨울 11월에 여요에서 고아지(高雅之)와 싸워 격파했는데, 유뢰지가 공격하자 달아나 주산도로 돌아갔다.

401년 2월에 협구(浹口)를 나와서 구장(句章)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으며, 유뢰지가 공격하자 다시 달아나서 주산도로 들어갔다. 3월에 북쪽에 있는 해염(海鹽)으로 향했다가 유유가 추격해 저지되었으며, 그가 해염에 있는 옛 치소에서 성을 쌓자 다음날에 손은이 와서 성을 공격했지만, 오히려 격파당하고 장수인 요성을 잃었다.

당시 유유는 지키던 성 안에 병사가 적었던 형편이라 제대로 대적하지 못했으며, 궁여지책으로 밤에 병사들을 숨겨놓고 날이 밝자 병든 사람 몇 명에게 성에 오르게 했다. 손은의 군사들이 유유가 있는 곳을 물었다가 밤중에 달아났다는 대답을 듣고 성 안에 들어갔다가 격파되었다. 손은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호독(扈瀆)으로 도망가자 유유가 성을 버리고 추격했다.

이후 손은은 호독을 함락하고 오국내사 원산송(袁山松)[3]을 포함한 4천 명을 죽이고 6월 1일에 바다를 띄워 단도에 도착했는데, 건강에선 손은의 병력이 10만 명이 넘고 누선도 1천척이 넘는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 손은은 무리를 인솔하여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산산에 오르자 주민이 모두 짐을 지고 서있었는데, 유유가 병사를 인솔해 분발하며 공격해오자 패하여 격파당하고 벼랑에서 몸을 내던져 물로 떨어진 사람이 아주 많았으며, 손은은 겨우 배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손은은 자기를 따르는 무리를 믿고 얼마 후에 군사를 정돈해 지름길로 건강으로 향했으며, 사마원현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지만 손은이 유리했다. 손은의 누선은 높고 커서 바람을 거슬러가며 빠르게 올라갈 수가 없었으나 며칠 만에 백석에 도착했고 여러 군대를 분산해 방비하지 않을 때를 틈타 기습하려고 했는데, 마침 사마상지가 건강에 와 있었고 유뢰지도 이미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신주(新州)에 이르러서 물러나 배를 띄워 북쪽의 욱주(郁州)로 달아났다.

고아지가 욱주에서 공격하자 오히려 이를 격파해서 사로잡았으나, 11월에 유유의 추격을 받아 호독, 해염 등에서 격파되어 포로로 붙잡히거나 참수된 사람이 만 명을 헤아리는 피해를 입었으며, 손은은 협구에서 멀리 숨어서 바다로 달아났다.

이후 임해(臨海)를 노략질했다가 임해태수 신병(辛昺)의 공격으로 격파되어 세력의 대부분을 잃었다. 관군에게 잡힐 것을 두려워했던 손은은 바다로 가서 물 속에 뛰어들어 자살했으며, 그를 따르던 무리와 기녀들, 첩 중에서 따라 죽은 사람이 100명을 헤아렸고, 그들을 수선(水仙)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손은의 시체는 신병이 건져올려 목을 베어 조정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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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34~399, 자는 숙평(叔平). 이 사람의 아버지가 왕희지이다.[2] 오두미도를 신봉하던 왕응지는 애초에 방비할 필요가 없다며 방어에 손을 놨었다.[3] 혹은 원숭(袁崧)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