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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1 01:08:47

위서(삼국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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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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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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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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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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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舒
(209 ~ 290)

삼국시대 위나라, 서진의 인물. 자는 양원(陽元). 위화존의 아버지.

연주 임성군 번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어 외갓집 영씨에 양육되었으며, 영씨가 저택을 지을 때 점술가가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라 했다. 외조모는 마음 속으로 외손이 어리지만 지혜로워서 점술에 부응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위서는 외갓집을 위해 이 저택에 대한 점술을 실현하겠다고 말했다.

위서는 신장이 8척 2촌으로 용모가 뛰어나고 위대하면서 술을 섬으로 마셨으며, 성격이 꿈뜨고 미련하면서 수수해 고향 친척들이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숙부는 그에게 물방아를 관리하게 하면서 800호의 장만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지만 위서는 개의치 않았으며, 보통 사람의 절도를 지키지 않고 결백하고 엄정한 일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의 재능을 들어 그 인물을 키워주려고 노력하면서 남의 단점이 있으면 이를 나타내지 않았으며, 젊어서부터 활 솜씨에 뛰어나 가죽 옷을 입고 산 속으로 들어가 사냥할 때마다 많이 잡아왔다.

40여 세에 군의 상계연을 지내다가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대책(對策)으로 상서랑으로 옮겼으며, 조정에서는 낭관을 걸러 쓰고자 해서 재목이 아닌 자를 파면했고 위서는 자신이 곧 그런 사람이라면서 짐을 싸가지고 나갔다. 종육의 장사를 지내다가 종육이 참모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면 늘 옆에 앉아서 산가지를 놓고는 했는데, 나중에 한 번은 인원이 부족해 위서를 넣어 충원했다.

활을 쏘아 명중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행동거지까지 고상해 그 묘기를 거의 다 보여줬는데, 종육이 감탄하고 미안해하면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했다면서 활 솜씨가 뛰어나다고 감탄했다.

상국참군으로 옮겼다가 사마소가 매번 조회가 끝나면 배웅하면서 위서는 위풍당당하니 사람들의 영수라고 말했으며, 극양자에 봉해졌고 의양, 형양의 두 군의 태수를 지내고 두터운 명성이 있었다. 산기상시, 기주자사를 지냈고 기주에 근무한 지 3년이 되어 중앙으로 들어와 시중이 되었다가 진무제 때 특별히 비단 백 필을 하사받았으며, 상서로 천거되어 시중에서 옮겼고 세 번째 처가 죽자 표를 올려 휴가를 청해 본 군에 처를 장사지내기를 요청해 조서를 통해 장지 1경과 50만 전을 하사받았다.

태강 초에는 상서우복야가 되었고 위서와 함께 위관, 산도, 장화 등이 천하가 하나가 되자 고전에 근거해 동악에서 봉선을 치르기를 여러 차례 청했지만 무제는 사양했으며, 283년에 정월 14일에 상서좌복야가 되어 이부를 거느렸다. 육궁에 대한 의식에 대해 상소를 올려 우광록대부, 의동삼사가 더해졌으며, 산도가 죽자 겨울 11월에는 사도가 되었다.

위엄을 가지면서 덕망을 중하게 여겼고 녹봉과 물품을 9족에게 나누어 줘서 집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286년에 병이 들었다면서 물러나기를 요청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위서가 한 일은 반드시 먼저 시행한 다음에 말을 했으므로 재상의 자리를 그만둘 때에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며, 290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