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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8-07 12:55:19

무제(서진)

사마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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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초대 황제
무제 | 武帝
파일:사마염.jpg
사마염 어진 (역대제왕도권)
출생 236년
조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즉위 266년 2월 4일[1]
조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290년 5월 16일 (향년 54세)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황궁 함장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준양릉(峻陽陵)
재위기간 조위의 진왕세자
264년 11월 25일 ~ 265년 9월 11일
조위의 진왕
265년 9월 11일 ~ 266년 2월 8일
서진 초대 황제
266년 2월 8일 ~ 290년 5월 16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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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염(炎)
부모 부황 태조 문황제
모후 문명황후
형제자매 9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무원황후, 무도황후, 효회태후[3]
후궁 좌분, 호방, 제갈완
자녀 26남 12녀
안세(安世)
작호 북평정후(北平亭侯)
→ 신창향후(新昌鄕侯)
→ 진왕세자(晉王世子)
→ 진왕(晉王) → 황제(皇帝)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태시(泰始, 265년 ~ 274년)
함녕(咸寧, 275년 ~ 280년)
태강(太康, 280년 ~ 289년)
태희(太熙, 290년 ~ 290년)
}}}}}}}}}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진나라 건국2.3. 삼국 통일2.4. 통일 이후의 치세2.5. 각종 일화
2.5.1. 태자 책봉 문제2.5.2. 환령2.5.3. 번건2.5.4. 기타2.5.5. 신빙성이 의심되는 일화
2.6. 말년과 붕어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기타 창작물7. 둘러보기

1. 개요

파일:진무제.png
사마염
서진개국군주이며 초대 황제. 휘는 염(炎). 자는 안세(安世).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왕원희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 중 하나로, 삼국을 통일하여 오랜 전란을 끝냈으며, 이후 약 10여 년간 태강지치(太康之治)로 불리는 태평성세를 이룩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으며, 특히 후계 문제를 크게 그르쳐 왕조 몰락의 씨앗을 남기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위나라 가평 연간에 북평정후에 봉해졌다가 급사중과 봉군도위를 역임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가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여러 차례 승진해 중호군이 되어 가절을 받았다가 동무양에서 조환이 즉위하기 전 영접한 공으로 중무군으로 승진하면서 신창향후로 진봉되었다.

2.2. 진나라 건국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 작위를 받은 이후에 세자가 되어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사마소가 사망한 뒤, 265년 사마염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에게 제위를 선양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으로 바꾸어 서진을 건국한다.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큰아버지인 사마사를 세종 경황제로, 아버지인 사마소를 태조 문황제로 각각 추존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소 사망 후 자연스레 3년상 이야기가 거론되었는데, 한문제 이후 군주의 상례는 이일역월(以日易月)[4]이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짐이 이래 봬도 (백성들을) 예()로 교화해 온 집안 사람인데 3년상은 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일반적인 3년상을 가정했다. 도중 선양 문제 등으로 상복을 벗었다가, 이듬해 여름 숭양릉 방문건으로 상복 문제가 불거지자 사마염은 자신만 입겠다고 하고 상복을 다시 입는다.[5]

이에 대해선 약 800년 뒤인 북송 대의 사마광이 "한 문제가 폐한 것을 진 무제가 다시 살렸는데 이건 꽤 잘했음."이라고 크게 극찬했을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유학자들 관점에서 만인지상인 황제의 입장에서 앞장서서 예와 전통을 지켜온 것은 나름 엄청난 업적으로 칭송되었다.[6]

선양 후 사마염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함으로서 왕년에 220년 조비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것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되었다.[7]

태시 4년(268년), 태시율령(泰始律令)이라고 일컫어지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율과 령이 구분되는 첫 시작을 알렸다.

2년 뒤 독발수기능의 난이 일어났는데, 호열견홍이 서량 통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건의 간언을 씹어서 1차적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나 둘 다 전사한 뒤 그 책임으로 억울하게 경질되었던 사마준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독발수기능을 약화시켰고,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여 그 후에도 신하들의 온갖 모함을 무시하며 끝까지 마륭을 지지한 끝에 독발수기능의 난을 손오 정벌 이전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2.3. 삼국 통일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오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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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년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진압되자, 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시대를 마무리짓고 후한의 뒤를 이어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선왕들이 닦아놓은 기반과 내외로 홍역을 앓고 있던 오나라의 상황을 이용해 거저먹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의 일이 맞든 아니든 이를 비판할 이유는 하등 없다. 애초에 왕조 시기에 이어 여러 대를 거쳐가며 진행된 장기적인 계획은 그 당시 대의 왕들의 공통적인 위업으로 평가받는 일은 흔했고[8] 애초에 날먹이든 아니든 통일 자체가 위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를 날먹이니 뭐니로 평가절하하자면 애초에 몰락 5초전인 후한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키고 조위를 세운 조비 또한 그 위업을 한참 평가절하해야 한다. 심지어 역사중에선 전진부견과 같이 판이 깔려놓은 상황에서 줘도 못 먹는 수준으로 망쳐먹은 사례도 있으니만큼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룬 것은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조조부터 사마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꾸준히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아왔으며, 사마염대에서 그게 마무리되었을 뿐이다.[9]

종합하자면, 사마염의 천하통일에는 분명 조부 사마의, 백부 사마사, 부친 사마소가 닦아놓은 기반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만한 기반을 가지고도 천하통일조차 못하는 사례는 역사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기반을 결국 천하통일이라는 결과로 이루어낸 것은 사마염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2.4. 통일 이후의 치세

상술한 대로 즉위 초반부터 중후반까지의 사마염은 부정못할 정도로 성군이자 명군이었다. 스스로 예를 따르며 위로는 관료들이 아래로는 백성들이 본받을 수 있게 앞장섰고, 또한 태의령 정거가 바친 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 옷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한 면모 또한 드러냈다. 위정자로서 유능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그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이후인 10년간을 두고 태강지치라 칭할 정도였으니 이 시기까지의 위업은 가히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한 이후로는 긴장감을 잃었는지,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통일 이후 사마염은 잔치를 자주 열고 사치를 부렸다는 서술이 존재하며 특히 지적장애인인 아들을 내치지 못해 서진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원흉이 되었다. 당장 그가 죽고 바로 다음 황제인 혜제 시기에 팔왕의 난이 터져 종친끼리의 골육상쟁이 곧잘 벌어졌고, 끝내 사마치의 승리로 팔왕의 난이 마무리되자마자 영가의 난을 감당하지 못해 관중중원이민족에게 뺏기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으로 존속한 오호십육국시대라는 암흑기를 맞이해야 했다.

통일 이후 점전, 과전제를 발표하며 토지제도를 정비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내용 참조.

2.5. 각종 일화

2.5.1. 태자 책봉 문제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니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무제는 그저 위관이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사마충을 시험해 보자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풀게 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해 답변을 쓰게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가충에게 부탁해서 답안지를 받았으나 "이렇게 훌륭한 변려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몇 명 없으니 이걸 제출하면 황제께서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준 것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문장력이 평범한 사람을 골라서 답안을 쓰게 하고 태자께서 베끼도록 하십시오."라는 조언을 듣고 가남풍은 잘 쓴 것도 아니고 못 쓴 것도 아닌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10] 사마염은 이 답변을 보곤 그를 태자 자리에서 내치지 않았다.

물론 사마염도 진짜로 사마충이 쓴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은 낮았겠지만, 그 시점에서 후계자를 바꾸면 이래저래 꼬이는 게 많아지고 사마충이 지도자로서는 조금 모자라도 인성은 괜찮아서 딱히 누구와 척치는 인물이 아니라 신하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될 거라 여겼던 듯하다. 게다가 사마충의 외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기 때문에 사마휼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도 있다.[11]

2.5.2. 환령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 라고 주변에 묻자 사례 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과 같으시다고 따끔히 꾸짖었다. 이에 사마염은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냐며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유의는 기죽지 않고 그들은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시다며 대놓고 그를 비판했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하면서도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12]

2.5.3. 번건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왜 짐의 주변에는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라고 물었는데, 번건은 "폐하께서는 등애도 똑바로 못 보시면서 어찌 제갈량을 찾으십니까." 라고 비판했다.

등애가 종회의 난 당시 억울하게 일족이 주륙당한 일을 들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일조차 안 된다면 제갈량 같은 신하가 있다 한들 제대로 쓰일 수 없다'는 뜻이었기에 사마염이 등애의 신원을 해주어 자손들이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13]

2.5.4. 기타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 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사마염이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후보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했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했는데, 이에 사마염은 "재물욕은 채울 수 있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 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고 한다.

2.5.5. 신빙성이 의심되는 일화

중국사 최악의 사치 낭비로 회자되는 석숭왕개의 산호수 일화는 후세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 기록이 좀 애매한 게, 일단 정사에 실려있는 글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원강 초, 그러니까 사마충 시대에 산호수 사건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더군다나 석숭 열전에 따르면 석숭이 형주에서 탐관오리 짓으로 치부하여 부자가 된 시기는 사마염의 시대가 아니라 원강 초 사마충의 시대다. 즉, 어리석은 백치 황제가 즉위하면서 벌어진 통치력 등의 부재로 지방관들의 기강이 약화되어 이를 통해 부를 쌓은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는 일화로는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게 서진을 건국하고 통일 제국을 이룩한 초대 황제 사마염의 권위 약화를 증명하는 일화라기엔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굉장히 떨어진다는 것. 차라리 이 일화 자체가 원래 사마충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서 바보인 사마충이 석숭의 행위를 용납했거나, 아예 일화 자체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애당초 황제의 하사물을 부숴버리는 일은 전근대 사회에서 어떤 핑계로도 저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보니 일화 자체가 신빙성을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당장 저 일화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면 황제가 넘어가 주려고 해도 석숭의 정적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서에는 각종 기담이나 증권가 찌라시 수준의 카더라들도 많이 인용하다 보니 저런 류의 신빙성없을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하나로 사마염이 1만의 궁녀를 들이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 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그 후궁과 동침하다 한 후궁이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적은 일화가 있는데, 대놓고 선정적인 데다 몇몇 후궁들이 그랬을 수도 있다 정도의 가십거리를 사마염을 비하하려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염의 진짜 총애를 받아 그가 주로 가까이 했다는 후궁 몇몇만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기도 하고 말이다.[14] 사실 1만의 궁녀를 들었다는 기록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1만의 궁녀가 모두 사마염의 후궁인 것도 아니다. 주례에 따르면 천자의 후궁은 아무리 많아 봐야 백여 명 정도고 평생 유학 군주를 자처한 진무제가 저런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도 없다. 애당초 저 인원의 절반인 5천 명은 오나라 손호의 궁인들을 다시 기용했고, 정권 초기에 다량의 궁녀를 뽑은 것은 사실인데 호방의 사례에서도 나오듯이 무슨 1만 궁녀 운운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사마염 역시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답게 자식이 많아 후궁도 꽤 많았고 여색을 즐겼지만[15], 초대 황제가 많은 후궁을 두고 자식을 보는 것은 단순히 여색을 밝혀서만이 아니라 정권 초기 왕실의 친위세력인 종친을 늘린다는 점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많이들 했던 일인데 유독 사마염에게서만 여색을 밝히는 이미지가 덧씌워 진 것은 후대의 악의적인 기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16] 또한 사마염의 자식들은 나중에 팔왕의 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실왕으로 성장한 인물들인데, 황자와 황녀들을 보필하고 나중에 이들이 활용할 조직을 마련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궁녀와 여관조직, 궁내조직이 급격하게 확장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적국인 오나라의 궁녀들이 나라가 망한 뒤 길거리에 내쫓길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새 황실에 들여서 추가적인 민간 처녀들의 징발을 하지 않으면서 여관조직을 확충했다.

2.6. 말년과 붕어

말년에 연회를 자주 열고 사치를 부렸던 탓인지, 무제는 병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었다. 289년에 이르자 병세가 크게 위중해져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

무제가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동안 외척 양준은 호시탐탐 진나라의 대권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 그는 무제가 숙부 사마량을 여남왕에 봉해 황실의 원로로 삼는 것이 양씨 외척의 권력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우려했다. 그리하여 양준의 사마씨 축출이 대대적으로 시작되었고, 사마량을 포함한 많은 사마씨 황족들이 지방으로 쫓겨나다시피 하였다.

290년이 되자 무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임종을 앞두게 되었고, 수시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때는 서진의 창업공신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라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이 기회를 노려서 양준은 황제의 측근들을 전부 자기 사람들로 갈아치웠다. 그러나 차도가 호전되어 무제가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알게 되자 노발대발하여 양준을 엄히 질책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유서나 다름없는 조서를 내리게 했는데, 사마량을 여남왕으로 보내지 말고 섭정하게 한 뒤 양준은 이를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양준은 측근 화이(華廙)를 시켜 조서를 엿보고 내용을 확인한 뒤 조서를 내놓지 않은 채 버텼다. 그리고 사마량은 여남왕으로 떠나며, 섭정은 양준 혼자 하라는 내용으로 조서를 바꿔치기했다.

결국 무제는 사실상의 유언으로
"여남왕은 아직 오지 않았는가?"

라는 말을 남긴 뒤 곧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낙양의 함장전(含章殿)에서 붕어했다. 사후 준양릉에 안장되었으며, 묘호를 세조, 시호를 무황제라고 하였다.

무제가 붕어하고 혜제가 등극하자 양준은 그렇게 바라던 대로 진나라의 전권을 잡다시피 하였지만, 가남풍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가남풍도 사마휼을 죽인다는 정치적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팔왕의 난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서진은 무제가 붕어한 지 30년도 안 되어서 무너지게 되었다.

3. 평가

진 무제는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 (중략) 오나라가 평정된 후 천하를 편안히 다스렸다. 마침내 정치가 게을러지고 놀이와 잔치에 빠지며, 황후의 무리를 총애하고 친족들로 권세나 정권을 잡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옛 신하들은 전적으로 믿고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 법도가 문란하고 폐해져 인정이나 뇌물로 사사롭게 만나는 것이 유행했다. 말년에 이르러 지혜롭던 무제도 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진서 무제본기
진 무제는 혜제혼약(昏弱)함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교체시키지 않았고, 가후의 악함에 대해서는 몰라서 폐위시키지 못했으며, 양준이 제 마음대로 정권을 뒤흔들었어도 물리치지 아니하였으니, 스스로 난을 끼친 것이라고 하겠다.
홍대용
홍대용의 평가는 제대로 핵심을 찔렀는데 당시 서진의 상황으로 볼 때 이런저런 문제가 아예 없진 않았지만 범군 수준이라도 되는 황제가 후대에 왕위에 올랐거나, 그게 아니면 적어도 양준이 제대로 권신 노릇이라도 할만한 깡과 능력을 가지고 반대파들을 적당히 찍어누르고 구슬러 가면서 (혜제를 바지사장으로 만들지언정) 정국을 통제할 만한 정치력이라도 가졌다면[17][18], 아니면 사마염의 유언에 맞도록 위관과 사마량에게 힘을 좀 실어줬다면 팔왕의 난이 영가의 난으로 이어질 정도로 서진이 막장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양준과 가남풍을 막지 못한 사마염의 처신은 서진 왕조의 취약점이었던 것이다.

사마염은 서진을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답게 황제로서의 리더십과 행정력, 위엄은 있었지만 사마염의 가장 큰 단점은 성격이 물렀다는 점이다. 사마충이 어리석고 통일 제국의 2대 황제가 되기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년 시점까지도 장자를 태자에서 폐하고 교체하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19] 물론 재능이 떨어지는 아들을 단지 그 이유로 태자에서 폐하면, 본인이 가진 그 종법 상 정통성 때문에 그 최후가 필시 좋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주저한 것이겠지만[20] 그 주저로 인한 결과가 너무나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사마염을 평가할 때 군주로서는 능력은 좋았음에도 인간적으로 무른 성격이었다는 점, 후계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아들 하나 잘못 낳고 그를 후계자로 정한 것 때문에 후대인들이 내리는 평가에서 장점이 그다지 주목받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사마충 시대엔 장화배외, 하다못해 가남풍의 사촌오빠 가모 등 능력과 충성심이 충분히 있는 인물들이 있어서 가남풍이 집권하던 10년 동안 나라가 그런대로 평온하게 굴러갔다. 사마휼이 죽지 않고 사마충으로부터 왕위를 무사히 물려받았다면, 혹은 사마윤이 황태제가 됐다면 종실들이 자기가 혜제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개싸움을 벌이는 일까진 없었을 것이다. 사마예 같은 유능한 황족이 명나라 영락제 정도의 능력과 세력만 있었어도 팔왕의 난은 조기 제압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사마염 입장에선 안 좋은 상황이 후대에 줄줄이 터지는 바람에 망한 감도 없잖아 있다는 것이다.

며느리 후보였던 위관의 딸이 성정이 어질고 후덕했다고는 하나 가남풍만한 정치력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가남풍이 양준을 처리하고 10년간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었는데 위관의 딸이 그만한 정치력이 없다면 결국 나라를 망치는 게 가남풍에서 양준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물론 위관의 딸이 황후가 될 경우 위관에게도 좀 더 권력이 주어지겠지만 그가 양준과 전면 승부를 벌일지 사마량처럼 회피할지는 모를 일이긴 하다. 하지만 위관 정도면 보신주의자 기질이 있기는 해도 나라를 안정적으로 굴려가면서 혜제를 적당히 보필할 수준은 되는 인물이었으니 가충이나 양준과는 비교할 수 없었고, 사마량도 사마의의 아들로 황실에서 촌수가 꽤 높은 축에 들어갔던 데다 다른 원로인 사마륜이나 사마융 수준의 찌질이나 병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황족들을 어느 정도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21]

사마염이 말년에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황후와 양준이 조서를 조작해서 사마량을 쫓아냈다가 죽기 직전까지 사마량을 찾았지만 좀 더 건강했을 때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중요한 것은 사마염의 이런 결정이 분명히 아쉬운 면이 꽤나 있지만, 이해를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후계 문제를 제외하고 보면 서진을 건국한 개국군주이며 초대 황제인 사마염은 이전 세대인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나 이후의 서진 황제들과 팔왕들, 동진의 황제들보다 나은 점들이 상당히 많다. 사마씨 진나라에 대한 악평이 많은《진서》에서조차 그를 두고 "기우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며, 일처리를 함에서는 반드시 어질고 관대했다. 건의를 잘 받아들였으며 사람들에게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일처리에 밝고 잘 도모하며, 큰 일을 과단성있게 처리했다. 그리하여 여러 나라를 안정시키고, 사방을 평정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첫째, 그는 관대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넓었다.《진서》<무제본기>에서 그에 대해 설명할 때 처음으로 언급하는 서술이 바로 "관대하고 은혜로우며 인자하고 후덕하여 성격이 진중하고 도량이 있었다."라는 서술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의견도 잘 들었다. 조위, 촉한, 손오의 대신, 주요 신료, 장수들도 대부분 그가 문제없이 기용했다. 마륭과의 일화를 보면 전형적인 명군의 미담이라고 칭송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덕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하여 정국의 동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마소가 조모혜강을 죽여서 민심의 비판을 받고 촉을 멸한 걸로 간신히 무마한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22] 물론 이렇게 사람이 너무 관대한 나머지 양준이나 석숭같은 악평을 듣는 신하들도 끌어안고 간 탓에 문제가 된 면도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둘째, 그는 선대나 후대와 달리 피를 보거나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통일 과정에서도 다가온 멸망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오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한 것 외엔 과도하게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위 원제 진류왕 조환, 촉 후주 안락공 유선, 오 말제 귀명후 손호 같은 위촉오 종실들과 한 왕조의 종실 후인은 모두 그의 치하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사마염 이후 3백 년간의 위진남북조시대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23]

셋째, 그는 정치를 함에 있어서 성실했으며, 지방을 다독이는 정책을 잘 했다. 오나라를 평정한 후, 그는 원래 오나라의 관리를 등용하여 그 지방을 다스렸다. 또 통일 후 중국 내부에서 가혹한 정치는 없애고, 정령을 간소화했다. 북방으로 이주한 오나라 사람들에게는 각각 요역부세를 10년(장리)과 20년(백성백공)간 면제하는 등 민심을 얻으려는 시도도 많이 했다.[24] 노는 걸 즐겼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손에 놓지도 않아 그의 25년 치세를 다룬 진서 무제본기는 정석적으로 각종 문제들을 처리하고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한 일화들과 정책들로 가득하다.

덕분에 진나라 초기 진 무제 사마염이 통치하던 기간 동안, 나라는 발전하고 위나라 시기 전시 체제의 각박함에서 많이 벗어나 백성들은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다. 사마염 치세의 중국은 서북방의 이민족 침공과 오나라와의 대결 외엔 비교적 태평했고, 백성들도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사마진에 비판적인《진서》나 기타 사서에서조차도 이 시기를 두고 "백성들을 평화롭고 세속은 고요했으며, 각 가정에 공급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만족시켰다.(民和俗靜,家給人足)" 라고 평가하며, 대외 정책에서도 후술할 부여를 비롯한 전통적인 이민족 동맹을 우대하고 보호하였으며 부여 외에도 요동-한반도에 거주하던 여러 민족에 대한 동방 정책을 유화적인 기조로 나아가 많은 신경을 썼다고 생각할 수 있다.[25]

총체적으로 보면, 진 무제 사마염은 후대의 악평들과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나름 괜찮은 인물이었으나 후계 구도를 제대로 안배하지 않은 탓에 결국 왕조는 실패를 했고, 인간적인 정에 이끌려 세자 교체에 대한 망설임과 주저함이 후대에 왕조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마염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후세로부터 미온적이거나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사마염을 나름대로 고평가를 했던 진서에서조차 결국 끝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서술했으니 여러모로 명암이 극명한 군주였던 셈이다. 실제로 이세민사마광도 사마염의 관대한 인품에 대해서는 고평가했으나 후계를 제대로 하지 않아 나라를 망쳐버렸다며 실책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사마염은 통일 과정을 주도해 실적을 쌓았다. 오를 병탄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한 건 어디까지나 사마염이었다. 보기에 따라선 중국 역대 통일 왕조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들 중 가장 천하를 쉽게 통일하고 거저먹은 케이스로 보이겠지만, 후세 남북조 시대가 진행된 경과를 보면 강동 지역 병탄이 그렇게까지 마냥 쉬운 일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장 전진의 선소제 부견, 북위의 태무제 탁발도 등 군주로서의 기본적인 역량을 갖췄고 각각 왕맹, 최호라는 제갈량 뺨 여러 번 후려치고도 남을 수준의 SS급 책사들을 둬서 화북 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서도 남정을 거하게 말아먹은 탓에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한 북조의 황제들도 있었다.

또한 그렇게 놀고먹는 동안에도 사마염은 병탄한 강동 지역의 행정 및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 꽤나 신경을 썼고, 이때 행한 행정 및 경제적인 배려들이 쌓이고 쌓여 후세들이 북조에게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사마염이 이 부분까지 내팽개쳐두고 신경 쓰지 않았다면 남조는 그렇게까지 오래 버틸 수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단적으로 낭야왕 사마예가 강동에 내려갔을 때 초기의 인사들 중에는 오나라 때 명문가들의 자손들이 많았다. 감녕의 증손자 감탁, 주방의 손자이자 주처의 아들인 주기, 고옹의 손자인 고영 등이다. 사마염이 어느 정도 강동 지역의 민심을 잡아 놓지 않았다면 저 어지러운 시대에 오나라 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당장 주기가 아버지의 죽음이 어떠했는지 알면서도 끝까지 사마씨를 따르며 진민에게 호응하지 않고 엿먹인 걸 생각해 보자. 그렇기는 한데 장창, 두도, 진민의 반란 쓰리콤보가 터졌던 거 보면 그쪽이라고 민심이 좋았던 건 아니었다.

사마염이 했다는 강동지역에 대한 배려라는 건 한마디로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그 지역의 호족이나 유력자들을 꽤나 적극적으로 등용하면서 지역에 대한 통제는 강하게 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혜제 때 일어난 장창의 난에서 진압병력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 제대로 준비 못 하고 나선 신야군왕 사마흠이 전사한다든가 혹은 회제 때의 진민의 난 진압에 시간이 꽤 걸리는 등의 문제들이 훗날 생기기는 했었다.

다만 강남의 호족이란 세력들은 오나라 때부터 자기들의 기득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보호를 해 줄 수 있는 세력에 대해서는 후하게 평가하다 보니 사마염의 저런 정책을 꽤 좋게 본 모양이다. 진민이 난을 일으켰을 때 간을 보던 감탁과 고영이 그 동네에서 진민이 적극적으로 왕 노릇 하려던 걸 보자 그대로 배신한 것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상이었다. 저런 난의 와중에도 강남 지역의 호족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놈들보단 그래도 사마씨가 우리를 안정적으로 지켜 줄 수 있는 세력이다"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이 분위기는 훗날 동진으로 그대로 이어져서 비수대전이라는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서진의 정통성 없음을 들어서 서진은 당시 명문 사대부들의 연합 정권 성격을 띤 왕조이고 사마씨는 그들의 대표 정도의 취급이었다거나, 그렇기에 당시의 명문가들이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의 추론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 진 조정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무제의 재위기는 병으로 골골대며 풀어진 말년을 제외하면,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서진을 건국한 개국군주이자 초대 황제였기에 권위는 절대로 낮지 않았으며 오히려 권위가 막강했다.

당장 중신들과 네임드 장수들이 독발수기능 하나 못 잡고 빌빌댈 때 다소 무리가 따르는 행동을 해서라도 마륭을 전적으로 지원해서 난을 해결한 일이나, 오멸망전 때 가충과 같이 조정에서 힘 있는 중신들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밀어붙여서 천하를 통일한 일을 생각해 보자. 중신들의 반대를 뒤엎으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는 것 자체가 황제의 권위가 꽤나 강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인데 결과까지 제대로 냈다면? 그런 일을 해 낸 사마염이 가진 황제의 권위는 절대로 약할 수가 없었다. 유선손호를 놔둔 건 그렇다 치고 바로 전대 왕조이자 서진의 베이스가 되는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도 별다른 견제 없이 편히 살게 놔 두었다는 것이야말로 사마염의 황권이 전 왕조를 그다지 견제하거나 위협을 느낄 필요도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는 것이다.

서진이 암군의 등장황족들의 내란, 그리고 이민족의 침입으로 단명했고, 강남으로 도망가서 세운 동진의 황권이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빌빌대다[26] 끝난 탓에 후세에 사마염에 대한 평가가 박해질 수밖에 없고 후대에 써진 진서에서도 사마염을 두고 검증되지 않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렇지만 사마염이 능력이 없는데 천하를 거져 먹었다거나 신하들을 찍어누를 만큼 권위가 강하지 못해서 신하들이 한 디스들을 듣고도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사실과 완전히 다른 부분들이 있는 헛소리이자 찌라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무제의 막강한 권위와는 별개로 황가의 정통성은 아버지 사마소의 행보들로 인해 조금 불안정했다. 보통 이렇게 강한 권위와 조금 불안정한 정통성이 혼재되어 있을 땐 군주가 신하들을 숙청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러나 사마염은 숙청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친족들의 힘을 키워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방식은 황제의 권위가 멀쩡히 돌아가고 제어가 가능하다면 다소 위험할지언정 그럭저럭 잘 통했다. 문제는 상술했듯이 본인의 후계자를 지적인 문제가 있는 사마충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선택이 시너지를 일으켜 2대 황제 사마충 시절부터 권위는 권위대로 떨어져 가고, 정통성은 정통성대로 부족하고, 세력 있는 사마씨들이 많아져 내전의 기반을 만든 최악의 상황으로 이끌었다.

4. 가족 관계

아내 자녀 봉작 이름 탄생 사망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艷) 장남 비릉도왕(毗陵悼王) 사마궤(司馬軌)[27] ? ?
차남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59 306
3남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262 291
7녀 평양공주(平陽公主) ? ? ?
8녀 신풍공주(新豊公主) ? ? ?
9녀 양평공주(陽平公主) ? ? ?
무도황후(武悼皇后) 양지(楊芷)[28] 16남 발해상왕(渤海殤王) 사마회(司馬恢) 283 284
효회태후(孝懷太后)
왕원희(王媛姬)[29]
17남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 284 313
귀인(貴人) 좌분(左棻)[30] 자식 없음.
귀빈(貴嬪) 호방(胡芳)[31] 11녀 무안공주(武安公主) ? ? ?
부인(夫人) 제갈완(諸葛婉)[32] 자식 없음.
미인(美人) 심씨(審氏) 4남 성양회왕(城陽懐王) 사마경(司馬景) ? 270
8남 초은왕(楚隠王) 사마위(司馬瑋) 271 291
12남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277 304
재인(才人) 서씨(徐氏) 5남 성양상왕(城陽殤王) 사마헌(司馬憲) 270 271
재인(才人) 궤씨(匱氏) 6남 동해충왕(東海沖王) 사마지(司馬祗) 271 273
재인(才人) 조씨(趙氏) 7남 시평애왕(始平哀王) 사마유(司馬裕) 271 277
미인(美人) 조씨(趙氏) 18남 대애왕(代哀王) 사마연(司馬演) ? ?
부인(夫人) 이씨(李氏) 9남 회남충장왕
(淮南忠莊王)
사마윤(司馬允) 272 300
15남 오효왕(呉孝王) 사마안(司馬晏) 281 311
보림(保林) 엄씨(嚴氏) 10남 신도회왕(新都懐王) 사마해(司馬該) 272 283
미인(美人) 진씨(陳氏) 11남 청하강왕(淸河康王) 사마하(司馬遐) 273 300
제희(諸姫) 13남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여음왕)(司馬謨) 276 286
재인(才人) 정씨(程氏) 14남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 306
생모 미상 장녀 상산공주(常山公主)[33] ? ? ?
생모 미상 차녀 장광공주(長廣公主)[34] ? ? ?
생모 미상 3녀 형양공주(滎陽公主)[35] ? ? ?
생모 미상 4녀 형양장공주
(滎陽長公主)[36]
? ? ?
생모 미상 5녀 번창공주(繁昌公主)[37] ? ? ?
생모 미상 6녀 양성공주(襄城公主)[38] ? ? ?
생모 미상 10녀 만안공주(萬安公主) ? ? ?
생모 미상 12녀 영천공주(潁川公主)[39] ? ? ?
생모 미상 ? 영수공주 사마수려 ? ?

5. 기타

파일:준양릉.jpg
준양릉 전경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000리인데, 호()는 80,000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중략)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동이전〉부여조

6.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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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39권 「왕침등전(王沈等傳)」40권 「가충등전(賈充等傳)」41권 「위서등전(魏舒等傳)」
왕침(王沈) ,왕준(浚), · 순의 · 순욱 ,순번 순조 순혁, · 풍담가충 · 양준 ,양요 양제,위서 · 이희 · 유식 · 고광
<rowcolor=#ece5b6>42권 「왕혼등전(王渾等傳)」43권 「산도등전(山濤等傳)」
왕혼 ,왕제, · 왕준(濬) · 당빈산도 ,산간 산하, · 왕융 ,왕연 왕징 곽서, · 악광
<rowcolor=#ece5b6>44권 「정무등전(鄭袤等傳)」4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정무 ,정묵, · 이윤 · 노흠 ,노지(盧志) 노심, · 화표 ,화이 화항 화교, · 석감 · 온선유의 ,유돈, · 화교 · 무해 · 임개 · 최홍 · 곽혁 · 후사광 · 하반
<rowcolor=#ece5b6>46권 「유송등전(劉頌等傳)」47권 「부현전(傅玄傳)」48권 「상웅등전(向雄等傳)」
유송 · 이중부현 · 부함 · 부지상웅 · 단작 · 염찬
<rowcolor=#ece5b6>49권 「완적등전(阮籍等傳)」
완적 · 혜강 · 상수 · 유영 · 사곤 · 호무보지 · 필탁 · 왕니 · 양만 · 광일
<rowcolor=#ece5b6>50권 「조지등전(曹志等傳)」
조지(曹志) · 유준 · 곽상 · 유순 · 진수(秦秀)
<rowcolor=#ece5b6>51권 「황보밀등전(皇甫謐等傳)」52권 「극선등전(郤詵等傳)」53권 「민회태자전(愍懷太子傳)」
황보밀 · 지우 · 속석 · 왕접극선 · 완충 · 화담민회태자
<rowcolor=#ece5b6>54권 「육기등전(陸機等傳)」55권 「하후담등전(夏侯湛等傳)」56권 「강통등전(江統等傳)」
육기 · 육운하후담 · 반악 · 장재강통 · 손초
<rowcolor=#ece5b6>57권 「나헌등전(羅憲等傳)」58권 「주처등전(周處等傳)」
나헌 ,나상, · 등수 · 마륭 · 호분 · 오언 · 장광 · 조유주처 · 주방 ,주무 주초 주효,
59권 「여남왕량등전(汝南王亮等傳)」
사마량 · 사마위(瑋) · 사마륜 · 사마경(冏)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顒) · 사마월
60권 「해계등전(解系等傳)」
해계 · 손기 · 맹관 · 견수 · 무파 · 황보중 · 장보 · 이함 · 장방 · 염정 · 색정 ,색침, · 가필
<rowcolor=#ece5b6>61권 「주준등전(周浚等傳)」62권 「유곤등전(劉琨等傳)」63권 「소속등전(邵續等傳)」
주준 ,주복, · 성공간 · 구희 · 화질 · 유교유곤(劉琨) · 조적소속 · 이구 · 단필제 · 위준 ,위해, · 곽묵
64권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사마궤 · 사마간(柬) · 사마경(景) · 사마지 · 사마유(裕) · 사마윤 · 사마연(演) · 사마해 · 사마하 · 사마모(謨) · 사마안 · 사마회 · 사마부(裒) · 사마충(沖) · 사마희 · 사마환 · 사마도생 · 사마욱(郁) · 사마도자
65권 「왕도전(王導傳)」
왕도
<rowcolor=#ece5b6>66권 " 「유홍등전(劉弘等傳)」67권 「온교등전(溫嶠等傳)」68권 「고영등전(顧榮等傳)」
유홍 · 도간온교 · 치감고영 · 기첨 · 하순 · 설겸
<rowcolor=#ece5b6>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유외 ,유파, · 조협 · 대약사 · 주의응첨 · 감탁 · 변곤 · 유초 · 종아손혜 · 웅원 · 왕감 · 진군 · 고숭
<rowcolor=#ece5b6>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73권 「유량전(庾亮傳)」74권 「환이전(桓彝傳)」
곽박 · 갈홍유량 · 유역 · 유빙 · 유익환이(彝) ,환운 환활 환비 환충,
<rowcolor=#ece5b6>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왕담(湛) · 순숭 · 범왕 · 유담 · 장빙 · 한백왕서 · 왕이 · 우담 · 고중 · 장개육엽 · 하충 · 저삽 · 채모 · 제갈회 · 은호
<rowcolor=#ece5b6>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공유 · 정담 · 도회사상 · 사안 ,사염 · 사혼 · 사현 · 사만 · 사랑 · 사석 · 사막,왕희지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왕손 · 채표 · 양감 · 유윤 · 환선 ,환이(伊), · 주사 · 모보 · 유하 · 등악 · 주서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진수(陳壽) · 왕장문 · 우부 · 사마표 · 왕은 · 우예(預) · 손성 · 간보 · 등찬 · 사침 · 습착치 · 서광
<rowcolor=#ece5b6>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고화 · 원괴 · 강유 · 차윤 · 은의 · 왕아왕공 · 유해 · 유뇌지 · 은중감 · 양전기유의 · 제갈장민 · 하무기 · 단빙지 · 위영지
<rowcolor=#ece5b6>86권 「장궤전(張軌傳)」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장궤양무소왕 · 양후주
88권 「효우전(孝友傳)」
이밀 · 성언 · 하방 · 왕부 · 허자 · 유곤(庾袞) · 손구 · 안함 · 유은 · 왕연 · 왕담(談) · 상우 · 하기 · 오규
89권 「충의전(忠義傳)」
혜소 · 왕표 · 유심 · 국윤 · 초숭 · 가혼 · 왕육 · 위충 · 신면 · 유민원 · 주해 · 환웅 · 한계 · 주기 · 이웅 · 악도융 · 우괴 · 심경 · 길읍 · 왕량 · 송구 · 차제 · 정목 · 신공정 · 나기생 · 장의
90권 「양리전(良吏傳)」
노지(魯芝) · 호위 · 두진 · 두윤 · 왕굉 · 조터 · 반경 · 범귀 · 정소 · 교지명 · 등유 · 오은지
91권 「유림전(儒林傳)」
범평 · 문립 · 진소 · 우희 · 유조 · 범육 · 서묘 · 최유 · 범륭 · 두이 · 동경도 · 속함 · 서막 · 공연 · 범선 · 위소 · 범홍지 · 왕환
92권 「문원전(文苑傳)」
응정 · 성공수 · 좌사 · 조지(趙至) · 추담 · 조거 · 저도 · 왕침(王沉) · 장한 · 유천 · 조비 · 이충 · 원굉 · 복도 · 나함 · 고개지 · 곽징지
93권 「외척전(外戚傳)」
양수 · 왕순 · 양문종 · 양현지 · 우예(豫) · 유침 · 두예(乂) · 저부 · 하준 · 왕몽 · 왕하 · 왕온 · 저상
94권 「은일전(隠逸傳)」
손등 · 동경 · 하통 · 주충 · 범찬 · 노승 · 동양 · 곽원 · 곽기 · 오조 · 노포 · 범등 · 임욱 · 곽문 · 공장 · 맹루 · 한적 · 초수 · 적탕 · 곽번 · 신밀 · 유린지
삭습 · 양가 · 공손봉 · 공손영 · 장충 · 석원 · 송섬 · 곽하 · 곽우 · 기가 · 구형 · 사부 · 대규 · 공현지 · 도담 · 도연명
95권 「예술전(藝術傳)」
진훈 · 대양 · 한우 · 순우지 · 보웅 · 두불건 · 엄경 · 외소 · 복후 · 포정 · 오맹 · 행령 · 불도징 · 마유 · 선도개 · 황홍 · 색담 · 맹흠 · 왕가 · 승섭 · 곽논 · 나습 · 욕곽 · 태산
96권 「열녀전(列女傳)」
신헌영 · 엄헌 · 종염 · 왕혜풍 · 이락수 · 순관 · 사도온 · 용린 · 유아 · 염부인 · 소혜 · 모황후 · 단원비 · 양황후 · 윤태후
97권 「사이전(四夷傳)」
부여 · 숙신 · 마한 · 진한 · · 토욕혼 · 언기국 · 구자국 · 대완국 · 강거국 · 대진국 · 임읍국 · 부남국 · 흉노
<rowcolor=#ece5b6>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왕돈 · 환온환현 · 변범지 · 은중문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왕미 · 장창 · 진민 · 왕여 · 두증 · 두도 · 왕기 · 조약 · 소준 · 손은 · 노순 · 초종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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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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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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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추존][2]사마랑창무정후하간평왕[3]의양왕
장무왕
의양성왕[4]하간평왕[5]
동평왕
고조 선황제[추존]세종 경황제[추존]제헌왕[8]동래왕[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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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익남궁현왕안평왕 우[40]
하비헌왕하비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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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왕안평왕 돈안평왕 우[41]
패순왕패왕 도패왕 자
동무대후팽성목왕팽성원왕팽성강왕팽성왕[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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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왕진원왕 보[44]
범양왕 수범양왕 효
사마순제남왕중산왕
사마진초강왕초정왕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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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현후안평정후[45]
안성정후임성왕 릉임성왕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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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무왕서하왕 은서하왕 희
안평정후 안평정후[47][48]
경조부군 이전[추존][50]
정서장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11] 재종조부(실제로는 종조부) 연왕 기에게 출계[추존] [13]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4] 친부는 회남충장왕[15] 여기까지 서진[16] 친부는 오효왕[17]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8]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9] 친부는 사마유(동래왕)[20]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1]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2]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3]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4] 친부는 진무제[25] 친부는 제헌왕[26]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7] 친부는 제헌왕[28]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9]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30] 여기부터 동진[31] 친부는 진문제[32] 친부는 사마경[33] 숙부 신야장왕에게 출계[34] 친부는 사마창[35] 윤통(閏統)[36]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7]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8]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9]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40]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41] 친부는 남궁현왕[42] 재종숙 고밀왕에게 출계[43] 친부는 팽성강왕[44]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45]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6] 습양정후였다가 폐출됨[47]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8]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알수없음.[추존] [50]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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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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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에 표준으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으로는 266년이기 때문에 이것을 265년으로 간주해야 할지 266년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 음력 265년 12월 13일 ~ 290년 4월 20일[3] 사후 추존[4] 하루에 한 달의 가치가 있다고 쳐서 3년상을 3일상으로 마무리짓는 것.[5] 여기서 3년상을 주장해 밀어붙인 인물이 양호였으며, 반대한 사람은 부현이었다.[6] 당장 군주는 아니었지만 원소가 이래저래 6년상을 깡으로 치르면서 서얼이라는 타고난 불명예를 벗겨내고 일약 거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려하면 중국에서 효와 예가 가지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7] 다만 제위를 뺏을 뿐, 조씨 일족에게 연좌제를 묻진 않았는지, 조창의 아들 조해에게는 어머니 왕원희가 머무는 숭화궁의 관리자로 내세웠고, 조식의 아들 조지 또한 산기상시로 임명해 곁에서 자기를 섬기게 했다. 물론 이는 이들이 조비의 직계가 아니라 제후왕이라는 명목으로 밀려난 서얼이라는 점에서 사마염 본인의 감성적인 이유와 조위를 재흥시키기엔 영향력이 부족한 인물들이라는 실리적인 이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8] 대표적으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두고 이를 시작한 세조부터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성종까지의 공통된 위업이라 평가된 것.[9] 조조 대에 위의 기반을 세우고 노른자 땅들을 앞세워 부국강병의 기강을 닦았고 조비는 본격적으로 위나라를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이후 여러대에 거쳐 촉 멸망을 비롯하여 삼국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여러 일들을 진행해왔으며 이 중 그 누구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력차만 보고 남정을 꼬라박지 않았다. 심지어 오나라에서 손준손침 형제가 휘두른 전횡의 후유증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었던 데다, 위나라 때 이미 촉한을 정벌한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10] 너무 잘 쓰면 대필한 티가 확 나니 적당히 커트라인만 넘길 수준으로 쓴 것이다.[11] 이 때문에 반쯤 우스갯소리로 사마염이 눈 딱 감고 사마충을 (사마휼의 계승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어떠한 방법으로건 제거하고 사마휼을 황태손으로 올렸으면 서진의 멸망은 없었을 거라는 말도 있다. 물론 며느리인 가남풍이 대안도 없으면서 사마충의 외아들을 죽일 정도로 막가파일 것은 꿈에도 몰랐을 테고 사마염의 성격상 불가능했겠지만, 후대 입장에서 보기에는 안일했던 건 맞다.[12] 환령은 직언을 한 신하들의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고, 사마염은 자신을 비판한 신하들에게도 벌을 거의 주지 않다시피 했으니 충언이 사마염에게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13] 아버지 사마소가 내린 처분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 황제 성격에 따라서는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어찌 보면 사마염이라서 이렇게 넘어간 것에 가깝다.[14] 사마염이 정말 진심으로 총애한 후궁은 재기 넘치는 성격으로 평소에 사마염에게 조언을 많이해 준 호방이며, 궁녀들이 뭘 하건 말건 거의 호방의 거처에만 머무른 경우가 많았다고 진서에서조차 적고 있다. 그 외에 문재가 뛰어나 사마염이 문서 작성을 맡기곤 했던 좌분이 좀 예우를 받은 수준.[15] 무원왕후가 3부인 9빈을 충원할 때 미색이 떨어지는 여자들만 뽑자 화가 나서 다 무효화시키고 본인이 그냥 직접 뽑았단 일화도 있기에 여색을 안 즐겼다고 할 수는 없다.[16] 당장 사마염을 욕하는 기술을 한 진서를 쓰라고 한 당태종 이세민만 해도 자기가 죽인 형제들의 아내들을 비롯해 닥치는 대로 여색을 취해 수많은 자식을 본 진정한 귀축색마였다.[17] 후한의 양기나 동진의 환온과 같은 사례를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왕조 국가에서 '권신의 전횡'은 아주 나쁜 상황으로 여겨지지만, 그런 권신이라도 있다면 그가 최소한 나라에 망조가 들지 않을 정도의 상황을 유지할 만한 통제력은 발휘할 수 있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나라가 망해버리면 권신의 권력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처럼 권신의 영향력이 강해질 경우 찬탈의 염려가 생기긴 하지만 왕조 국가의 논리상 다른 성씨인 권신이 왕위까지 찬탈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예컨대 조조는 대놓고 황제의 친위세력을 숙청하고 임신한 후궁까지 죽일 정도로 막나갔지만 그건 거의 망할 뻔했던 한나라의 황실과 조정을 자기 힘으로 일단 회복시켰던 강력한 공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런 조조조차 당대에 찬탈은 못했다. 사마진의 경우 역시 사마염 자신의 찬탈 명분 부족으로 황제(황가)가 다른 귀족 가문들에 비해 결정적인 우위를 가지지 못했다는 심각한 약점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타 성씨의 찬탈이 쉽게 일어나지는 않으니 이후 팔왕의 난까지 이른 심각한 위기보다는 차라리 나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18] 양준은 욕심은 많지만 비겁하고 옹졸해서 용렬한 구석이 있는 데다 그렇다고 잔인하거나 악랄하게 굴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권력을 움켜쥐고 강력하게 휘두를 만한 그릇은 못 되었다. 그리고 양준의 동생들도 의외로 행동거지가 괜찮다는 평을 받는 인물들이었기에 권력 투쟁이 필요한 잔혹한 과단성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가남풍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19] 사마염의 말년엔 사마간이나 사마윤 같은 나이가 적당히 차고 무난한 이들도 있었으니 황태자를 바꾸고자 하면 충분히 바꿀 수 있었다. 다만 사마충이 바람직하지 못했어도 손자인 사마휼이 똑똑해서 기대를 걸었다는 점도 있다.[20] 동아시아사 어디를 둘러봐도 자질이 떨어지는 것을 이유로 군주가 택현하는 과정에서 폐태자가 된 이들은 자길 대체해서 후계자로 내세워진 이들의 정통성 정립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제거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비슷한 시기에 폐태자가 된 후 결국 살해당한 오나라 손화의 예도 있었다.[21] 사실 이 사람은 너무 무르고 우유부단해서 문제가 된 케이스이다.[22] 반면 사마염은 민심을 다독이는 차원에서 정통성에 흠집이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했듯 등애를 신원하고 왕경의 후손을 찾아 낭중에 임명하는 등, 선대의 과오를 정리하는 과감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23] 이후 동진부터 남조의 왕조들이 정권 교체가 될 때마다 숱한 피바람을 부른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기도 한다.[24] 물론 애초에 오나라 땅은 독립적인 성향이 강했고 반(反)진과 친(親)손씨 성향이 강해서 그의 치세 내내 그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곳이긴 했다.[25] 하지만 그럼에도 삼국통일 이전에도 사마염이 암군의 조짐을 보였다는 기록도 있다. 하증이라는 서진 관리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폐하와 연회를 할 때마다 나라를 다스리는 전략이나 정책논의가 아닌 평소의 즐겨하는 잡담만을 하니 이것은 후손을 위한 일이 아니다. 진제국은 폐하가 살아 계실 때는 안전하겠지만 폐하가 돌아가시면 위태로울 게 뻔하니 후손들이 걱정된다." 실제로 하증의 손자 중 1명은 팔왕의 난 당시 사마월 에게 살해당했고 다른 손자는 울면서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셨다고 통곡했다.[26] 그나마 동진의 황권이 좀 바로섰던 명제 치세에는 황제가 요절했으며, 비수대전의 대승으로 기회를 얻나 싶었던 효무제 치세에는 동생 사마도자의 만행과 이를 비호하는 태후 이능용의 트롤링 탓에 일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동진은 진혜제보다 못한 지적장애인인 안제가 옹립된 탓에 비수대전의 승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끝장이 났다.[27] 2세에 요절해서 차남인 사마충이 사실상 적장남이었다.[28] 양준의 딸로 양염의 당질녀이며 사마충의 계모.[29] 원래는 사마염의 첩 중에서 재인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아들 사마치가 제위에 오르자 효회태후로 추증되었다. 사마소의 아내 왕원희(王元姬)와는 다른 인물이다.[30] 좌분 또는 좌빈. 좌희의 딸이자 좌사의 누이.[31] 호분의 딸[32] 제갈충의 딸[33] 두 눈이 먼 장님. 남편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를 사마염에게 대접하기로 유명한 왕제(王濟).[34] 남편은 진덕(甄德).[35] 남편은 노심(盧諶).[36] 언니 형양공주와 작위가 같은 걸 보면 동복 자매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공주'는 황제의 딸에게, '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에게,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여지는 칭호. 남편은 화항(華恒).[37] 남편은 위선(衛宣). 하지만 이혼했다.[38] 남편은 동진 초기의 권력자이자 반역자인 왕돈(王敦).[39] 남편은 왕수(王粹)[40]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은 강남에 묻혔다.[41] 다만 이것은, 마한이 삼한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는 걸 막겠다는 서한 이래 중원 정권의 견제 정책 연장이기도 했다. 근초고왕의 백제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내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이런 견제를 잠깐 뿌리친 것이었으나 곧이어 진한 사로국 또한 얼마 안 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원 정권의 오랜 견제와 의도는 다른 쪽으로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