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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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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초대 황제
무제 | 武帝
파일:사마염.jpg
사마염 어진 (역대제왕도권)
출생 236년
조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즉위 266년 2월 4일[1]
조위 사례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사망 290년 5월 16일 (향년 54세)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황궁 함장전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준양릉(峻陽陵)
재위기간 조위의 진왕세자
264년 11월 25일 ~ 265년 9월 11일
조위의 진왕
265년 9월 11일 ~ 266년 2월 8일
서진 초대 황제
266년 2월 8일 ~ 290년 5월 16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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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797e8><colcolor=#ece5b6> 본관 하내 사마씨
휘 염(炎)
부모 부황 태조 문황제
모후 문명황후
형제자매 9남 2녀 중 장남
배우자 정실 무원황후, 무도황후, 효회태후[3]
후궁 좌분, 호방, 제갈완 등
자녀 26남 12녀
자 안세(安世)
작호 북평정후(北平亭侯)
→ 신창향후(新昌鄕侯)
→ 진왕세자(晉王世子)
→ 진왕(晉王) → 황제(皇帝)
묘호 세조(世祖)
시호 무황제(武皇帝)
연호 태시(泰始, 265년 ~ 274년)
함녕(咸寧, 275년 ~ 280년)
태강(太康, 280년 ~ 289년)
태희(太熙, 290년 ~ 290년)
}}}}}}}}} ||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진나라 건국2.3. 삼국 통일2.4. 통일 이후의 치세2.5. 말년과 붕어
3. 평가4. 일화
4.1. 태자 책봉 문제4.2. 환령4.3. 번건4.4. 기타4.5. 신빙성이 의심되는 일화
5. 가족 관계6. 창작물7. 기타8. 둘러보기

1. 개요

파일:진무제.png
사마염
서진의 개국군주이며 초대 황제. 휘는 염(炎). 자는 안세(安世). 위의 대신 사마의의 손자이며 사마소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왕원희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

《삼국지》의 끝을 장식한 인물 중 하나로, 삼국을 통일하여 오랜 전란을 끝냈으며, 이후 약 10여 년간 태강지치(太康之治)로 불리는 태평성세를 이룩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으며, 특히 후계 문제를 크게 그르쳐 왕조 몰락의 씨앗을 남기기도 했다.

2. 생애

2.1. 초기

위나라 가평 연간에 북평정후에 봉해졌다가 급사중과 봉군도위를 역임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해 장군이 되었다가 산기상시가 더해졌다. 또 여러 차례 승진해 중호군이 되어 가절을 받았다가 동무양에서 조환이 즉위하기 전 영접한 공으로 중무군으로 승진하면서 신창향후로 진봉되었다.

2.2. 진나라 건국

아버지 사마소가 진왕 작위를 받은 이후에 세자가 되어 무군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사마소가 사망한 뒤, 265년 사마염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에게 제위를 선양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진(晉)으로 바꾸어 서진을 건국한다. 그리고 자신의 할아버지인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큰아버지인 사마사를 세종 경황제로, 아버지인 사마소를 태조 문황제로 각각 추존하였다.

이에 대해 사마소 사망 후 자연스레 3년상 이야기가 거론되었는데, 한문제 이후 군주의 상례는 이일역월(以日易月)[4]이 일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염은 "짐이 이래 봬도 (백성들을) 예(禮)로 교화해 온 집안 사람인데 3년상은 해야 한다." 고 주장하며 일반적인 3년상을 가정했다. 도중 선양 문제 등으로 상복을 벗었다가, 이듬해 여름 숭양릉 방문건으로 상복 문제가 불거지자 사마염은 자신만 입겠다고 하고 상복을 다시 입는다.[5]

이에 대해선 약 800년 뒤인 북송 대의 사마광이 "한 문제가 폐한 것을 진 무제가 다시 살렸는데 이건 꽤 잘했음."이라고 크게 극찬했을 정도로 예를 중시하는 유학자들 관점에서 만인지상인 황제의 입장에서 앞장서서 예와 전통을 지켜온 것은 나름 엄청난 업적으로 칭송되었다.[6]

선양 후 사마염은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함으로써 왕년에 220년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로 즉위하면서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한 것을 그대로 따라 하게 되었다.[7]

태시 4년(268년), 태시율령(泰始律令)이라고 일컫어지는 율령을 반포하였다. 이로써 율과 령이 구분되는 첫 시작을 알렸다.

2년 뒤 독발수기능의 난이 일어났는데, 호열과 견홍이 서량 통치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진건의 간언을 씹어서 1차적인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으나 둘 다 전사한 뒤 그 책임으로 억울하게 경질되었던 사마준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독발수기능을 약화시켰고, 당시 무명에 불과했던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을 받아들여 그 후에도 신하들의 온갖 모함을 무시하며 끝까지 마륭을 지지한 끝에 독발수기능의 난을 손오 정벌 이전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2.3. 삼국 통일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오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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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년에 독발수기능의 난이 진압되자, 오까지 멸망시키면서 삼국시대를 마무리짓고 후한의 뒤를 이어 통일제국을 세운 황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선왕들이 닦아놓은 기반과 내외로 홍역을 앓고 있던 오나라의 상황을 이용해 거저먹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실제로 그 정도의 일이 맞든 아니든 이를 비판할 이유는 하등 없다. 애초에 왕조 시기에 이어 여러 대를 거쳐가며 진행된 장기적인 계획은 그 당시 대의 왕들의 공통적인 위업으로 평가받는 일은 흔했고[8] 애초에 날먹이든 아니든 통일 자체가 위업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를 날먹이니 뭐니로 평가절하하자면 애초에 몰락 5초전인 후한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키고 조위를 세운 조비 또한 그 위업을 한참 평가절하해야 한다. 심지어 역사중에선 전진의 부견과 같이 판이 깔려놓은 상황에서 줘도 못 먹는 수준으로 망쳐먹은 사례도 있으니만큼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룬 것은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실제로 조조부터 사마염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꾸준히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아왔으며, 사마염대에서 그게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조조 대에 위의 기반을 세우고 노른자 땅들을 앞세워 부국강병의 기강을 닦았고 조비는 본격적으로 위나라를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이후 여러대에 거쳐 촉 멸망을 비롯하여 삼국 통일에 이를 수 있는 여러 일들을 진행해왔으며 이 중 그 누구도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력차만 보고 남정을 꼬라박지 않았다. 심지어 오나라에서 손준과 손침 형제가 휘두른 전횡의 후유증으로 점차 쇠퇴하고 있었던 데다, 위나라 때 이미 촉한을 정벌한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종합하자면, 사마염의 천하통일에는 분명 조부 사마의, 백부 사마사, 부친 사마소가 닦아놓은 기반이 상당히 큰 역할을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만한 기반을 가지고도 천하통일조차 못하는 사례는 역사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그 기반을 결국 천하통일이라는 결과로 이루어낸 것은 사마염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2.4. 통일 이후의 치세

상술한 대로 즉위 초반부터 중후반까지의 사마염은 부정못할 정도로 성군이자 명군이었다. 스스로 예를 따르며 위로는 관료들이 아래로는 백성들이 본받을 수 있게 앞장섰고, 또한 태의령 정거가 바친 꿩의 머리 가죽을 이어 만든 호화스러운 모자 또는 가죽 옷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고, 다시는 이런 걸 바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을 정도로 청렴한 면모 또한 드러냈다. 위정자로서 유능했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수준이다. 실제로 그가 천하통일을 이룩한 이후인 10년간을 두고 태강지치라 칭할 정도였으니 이 시기까지의 위업은 가히 엄청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룩한 이후로는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라도 작용한 것인지 스마염의 행동은 눈에 띄게 풀어지고 방탕해진다.《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통일 이후 사마염은 잔치를 자주 열고 사치를 부렸다는 서술이 존재하며 특히 지적장애인인 아들을 내치지 못해 서진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원흉이 되었다. 당장 그가 죽고 바로 다음 황제인 혜제 시기에 팔왕의 난이 터져 종친끼리의 골육상쟁이 곧잘 벌어졌고, 끝내 사마치의 승리로 팔왕의 난이 마무리되자마자 영가의 난을 감당하지 못해 관중과 중원을 이민족에게 뺏기고 한족은 남쪽에서 동진으로 존속한 오호십육국시대라는 암흑기를 맞이해야 했다.

통일 이후 점전, 과전제를 발표하며 토지제도를 정비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해당 내용 참조.

2.5. 말년과 붕어

289년에 이르자 병세가 크게 위중해져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 무제가 병에 걸려 오늘내일하는 동안 외척 양준은 호시탐탐 진나라의 대권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다. 그는 무제가 숙부 사마량을 여남왕에 봉해 황실의 원로로 삼는 것이 양씨 외척의 권력에 걸림돌이 되리라고 우려했다.

290년이 되자 무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임종을 앞두게 되었고, 수시로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때는 서진의 창업공신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난 뒤라 조정이 혼란에 빠졌고, 이 기회를 노려서 양준은 황제의 측근들을 전부 자기 사람들로 갈아치웠다. 그러나 차도가 호전되어 무제가 정신을 차리고 이를 알게 되자 노발대발하여 양준을 엄히 질책하였다. 그리고 사실상 유서나 다름없는 조서를 내리게 했는데, 사마량을 여남왕으로 보내지 말고 섭정하게 한 뒤 양준은 이를 도우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양준은 측근 화이(華廙)를 시켜 조서를 엿보고 내용을 확인한 뒤 조서를 내놓지 않은 채 버텼다. 그리고 딸 양지가 대신 조서를 내려 사마량은 여남왕으로 떠나며, 섭정은 양준 혼자 하도록 했다. 황제에게 형식상 조서를 보여주니 사마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무제는 사실상의 유언으로
"여남왕은 아직 오지 않았는가?"

라는 말을 남긴 뒤 곧 혼수상태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낙양의 함장전(含章殿)에서 붕어했다. 사후 준양릉에 안장되었으며, 묘호를 세조, 시호를 무황제라고 하였다.

무제가 붕어하고 혜제가 등극하자 양준은 그렇게 바라던 대로 진나라의 전권을 잡다시피 하였지만, 가남풍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허망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가남풍도 사마휼을 죽인다는 정치적 삽질을 저지르는 바람에 팔왕의 난의 단초를 제공하였고, 서진은 무제가 붕어한 지 30년도 안 되어서 무너지게 되었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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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화

4.1. 태자 책봉 문제

노신이었던 사도 위관이 술자리에서 옥좌를 어루만지며 "이 자리가 너무 과분합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황제 자리가 사마충에게 너무 과분하니 황태자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돌려 말한 것이었다. 무제는 그저 위관이 술에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했지만 그의 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사마충을 시험해 보자 문제를 만들어 사마충에게 문제를 풀게 했는데 그걸 가남풍이 가로채서 학자를 매수해 답변을 쓰게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인 가충에게 부탁해서 답안지를 받았으나 "이렇게 훌륭한 변려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이 나라에 몇 명 없으니 이걸 제출하면 황제께서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준 것을 눈치챌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뒷감당이 어렵습니다. 문장력이 평범한 사람을 골라서 답안을 쓰게 하고 태자께서 베끼도록 하십시오."라는 조언을 듣고 가남풍은 잘 쓴 것도 아니고 못 쓴 것도 아닌 중간 수준으로 사마충에게 받아쓰게 했다.[9] 사마염은 이 답변을 보곤 그를 태자 자리에서 내치지 않았다.

물론 사마염도 진짜로 사마충이 쓴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은 낮았겠지만, 그 시점에서 후계자를 바꾸면 이래저래 꼬이는 게 많아지고 사마충이 지도자로서는 조금 모자라도 인성은 괜찮아서 딱히 누구와 척치는 인물이 아니라 신하들의 도움을 받으면 어찌어찌 될 거라 여겼던 듯하다. 게다가 사마충의 외아들인 사마휼이 총명하기 때문에 사마휼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도 있다.[10]

4.2. 환령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나오면서 "나는 어떤 군주인가?" 라고 주변에 묻자 사례 교위로 있던 유의가 폐하는 후한의 환령과 같으시다고 따끔히 꾸짖었다. 이에 사마염은 매관매직으로 부를 축적한 황제들이 아니냐며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유의는 기죽지 않고 그들은 매관매직을 해서 국고라도 충당했지 폐하께서는 매관매직을 하여 폐하의 살림만 채우시니 환제와 영제보다도 못하시다며 대놓고 그를 비판했다.

이에 사마염은 대노하면서도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11]

4.3. 번건

망국인 촉한의 신하였던 번건에게 "왜 짐의 주변에는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없는가?" 라고 물었는데, 번건은 "폐하께서는 등애도 똑바로 못 보시면서 어찌 제갈량을 찾으십니까." 라고 비판했다.

등애가 종회의 난 당시 억울하게 일족이 주륙당한 일을 들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누명을 벗겨주는 일조차 안 된다면 제갈량 같은 신하가 있다 한들 제대로 쓰일 수 없다'는 뜻이었기에 사마염이 등애의 신원을 해주어 자손들이 억울함을 풀 수 있었다.[12]

4.4. 기타

오나라 국경을 지키던 대사마 석포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의심해 전 군에 동원령을 내려서 석포를 잡아들이려 했다. 그러기 전 마지막으로 석포를 소환했는데, 이때 석포가 뜻밖에 순순히 오자 석포의 관직을 사도로 올려버렸다는 미담도 있다.

사마염이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후보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했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했는데, 이에 사마염은 "재물욕은 채울 수 있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 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고 한다.

4.5. 신빙성이 의심되는 일화

중국사 최악의 사치 낭비로 회자되는 석숭과 왕개의 산호수 일화는 후세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이 기록이 좀 애매한 게, 일단 정사에 실려있는 글이긴 하지만 이 사건은 원강 초, 그러니까 사마충 시대에 산호수 사건이 있었다고 적혀있다. 더군다나 석숭 열전에 따르면 석숭이 형주에서 탐관오리 짓으로 치부하여 부자가 된 시기는 사마염의 시대가 아니라 원강 초 사마충의 시대다. 즉, 어리석은 백치 황제가 즉위하면서 벌어진 통치력 등의 부재로 지방관들의 기강이 약화되어 이를 통해 부를 쌓은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는 일화로는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게 서진을 건국하고 통일 제국을 이룩한 초대 황제 사마염의 권위 약화를 증명하는 일화라기엔 기록 자체의 신빙성이 굉장히 떨어진다는 것. 차라리 이 일화 자체가 원래 사마충 시대에 일어난 일이라서 바보인 사마충이 석숭의 행위를 용납했거나, 아예 일화 자체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애당초 황제의 하사물을 부숴버리는 일은 전근대 사회에서 어떤 핑계로도 저렇게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보니 일화 자체가 신빙성을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당장 저 일화가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다면 황제가 넘어가 주려고 해도 석숭의 정적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진서에는 각종 기담이나 증권가 찌라시 수준의 카더라들도 많이 인용하다 보니 저런 류의 신빙성없을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하나로 사마염이 1만의 궁녀를 들이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 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그 후궁과 동침하다 한 후궁이 자기 방 앞에 양이 좋아하는 소금물을 뿌리거나 잎사귀를 꽂아놔서 자기 방만 찾아가게 만들었다고 적은 일화가 있는데, 대놓고 선정적인 데다 몇몇 후궁들이 그랬을 수도 있다 정도의 가십거리를 사마염을 비하하려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염의 진짜 총애를 받아 그가 주로 가까이 했다는 후궁 몇몇만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기도 하고 말이다.[13] 사실 1만의 궁녀를 들었다는 기록 자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1만의 궁녀가 모두 사마염의 후궁인 것도 아니다. 주례에 따르면 천자의 후궁은 아무리 많아 봐야 백여 명 정도고 평생 유학 군주를 자처한 진무제가 저런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도 없다. 애당초 저 인원의 절반인 5천 명은 오나라 손호의 궁인들을 다시 기용했고, 정권 초기에 다량의 궁녀를 뽑은 것은 사실인데 호방의 사례에서도 나오듯이 무슨 1만 궁녀 운운하는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사마염 역시 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 답게 자식이 많아 후궁도 꽤 많았고 여색을 즐겼지만[14], 초대 황제가 많은 후궁을 두고 자식을 보는 것은 단순히 여색을 밝혀서만이 아니라 정권 초기 왕실의 친위세력인 종친을 늘린다는 점에서 시대를 불문하고 많이들 했던 일인데 유독 사마염에게서만 여색을 밝히는 이미지가 덧씌워 진 것은 후대의 악의적인 기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15] 또한 사마염의 자식들은 나중에 팔왕의 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실왕으로 성장한 인물들인데, 황자와 황녀들을 보필하고 나중에 이들이 활용할 조직을 마련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궁녀와 여관조직, 궁내조직이 급격하게 확장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적국인 오나라의 궁녀들이 나라가 망한 뒤 길거리에 내쫓길 위기에 처하자\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새 황실에 들여서 추가적인 민간 처녀들의 징발을 하지 않으면서 여관조직을 확충했다.

5. 가족 관계

아내 자녀 봉작 이름 탄생 사망
무원황후(武元皇后) 양염(楊艷) 장남 비릉도왕(毗陵悼王) 사마궤(司馬軌)[16] ? ?
차남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 259 306
3남 진헌왕(秦獻王) 사마간(司馬柬) 262 291
7녀 평양공주(平陽公主) ? ? ?
8녀 신풍공주(新豊公主) ? ? ?
9녀 양평공주(陽平公主) ? ? ?
무도황후(武悼皇后) 양지(楊芷)[17] 16남 발해상왕(渤海殤王) 사마회(司馬恢) 283 284
효회태후(孝懷太后)
왕원희(王媛姬)[18]
17남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 284 313
귀인(貴人) 좌분(左棻)[19] 자식 없음.
귀빈(貴嬪) 호방(胡芳)[20] 11녀 무안공주(武安公主) ? ? ?
부인(夫人) 제갈완(諸葛婉)[21] 자식 없음.
미인(美人) 심씨(審氏) 4남 성양회왕(城陽懐王) 사마경(司馬景) ? 270
8남 초은왕(楚隠王) 사마위(司馬瑋) 271 291
12남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277 304
재인(才人) 서씨(徐氏) 5남 성양상왕(城陽殤王) 사마헌(司馬憲) 270 271
재인(才人) 궤씨(匱氏) 6남 동해충왕(東海沖王) 사마지(司馬祗) 271 273
재인(才人) 조씨(趙氏) 7남 시평애왕(始平哀王) 사마유(司馬裕) 271 277
미인(美人) 조씨(趙氏) 18남 대애왕(代哀王) 사마연(司馬演) ? ?
부인(夫人) 이씨(李氏) 9남 회남충장왕
(淮南忠莊王)
사마윤(司馬允) 272 300
15남 오효왕(呉孝王) 사마안(司馬晏) 281 311
보림(保林) 엄씨(嚴氏) 10남 신도회왕(新都懐王) 사마해(司馬該) 272 283
미인(美人) 진씨(陳氏) 11남 청하강왕(淸河康王) 사마하(司馬遐) 273 300
제희(諸姫) 13남 여음애왕(汝陰哀王) 사마모(여음왕)(司馬謨) 276 286
재인(才人) 정씨(程氏) 14남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 306
생모 미상 장녀 상산공주(常山公主)[22] ? ? ?
생모 미상 차녀 장광공주(長廣公主)[23] ? ? ?
생모 미상 3녀 형양공주(滎陽公主)[24] ? ? ?
생모 미상 4녀 형양장공주
(滎陽長公主)[25]
? ? ?
생모 미상 5녀 번창공주(繁昌公主)[26] ? ? ?
생모 미상 6녀 양성공주(襄城公主)[27] ? ? ?
생모 미상 10녀 만안공주(萬安公主) ? ? ?
생모 미상 12녀 영천공주(潁川公主)[28] ? ? ?
생모 미상 ? 영수공주 사마수려 ? ?

6.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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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파일:준양릉.jpg
준양릉 전경
부여국은 현도 북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하고, 북쪽으로는 약수가 있으며, 땅의 둘레가 2,000리인데, 호(戶)는 80,000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있으며, 땅은 5곡에 마땅하다.
(중략)
무제(武帝) 때에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太康) 6년(285) 때에 모용외(慕容廆)에게 습파(襲破)당한 바가 되어, 그 왕 의려(依慮)가 자살하였고, (의려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나 지켰다. 황제가 조를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로 충효를 지켜 왔는데, 못된 오랑캐들에게 멸망당한 바가 되었으니 심히 가엾게 생각한다. 만일 그 남은 무리 중에 족히 나라를 회복할 자라면, 마땅히 이를 위해 방계를 세우고, (나라를) 존립(存立)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유사(有司)가 아뢰기를,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부여를 구하지 않아 빠르게 대처함을 잃었다 하였다. (이에) 조를 내려 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중략)
이듬해(286), 부여의 후왕(後王) 의라(依羅)가 감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금 남은 사람[見人]들을 거느리고 돌아와 옛 나라를 회복할 것을 구하며, 이에 (지원을) 청원하였다. 하감은 상열(上列)하고, 독우(督郵) 가심(賈沈)을 보내 군사로서 (부여 사람을) 호송하도록 하였다. 모용외[廆] 또한 길에서 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하감과 더불어 싸웠다가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의 무리가 물러나자 의라는 다시 나라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에 늘 모영외가 그 종인(種人)들을 노략질하고는, 중국에 팔았다. 황제가 이를 가엾게 여기니, 또 조를 내려 관청의 재물로써 (팔려온 부여 사람들을) 속환하게 하였고, 사주(司州)·기주(冀州)의 2주에 명을 내려 부여의 인구의 거래를 금하였다.
《진서》〈동이전〉부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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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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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조부군 이전[추존][50]
정서장군 - 예장부군 - 영천부군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황제는 추존황제를 포함해서 자황색(柘黃色)으로 굵게 쓰고 팔왕은 빨갛게 쓴다. 그리고 8왕의 난에 관련된 종실은 갈색으로 쓴다.
※ 출계(出系)는 취소선을 치고 계자(系子)는 밑줄을 친다.
각주 [ 펼치기 · 접기 ]

[추존] [2] 황제로서의 뚜렷한 존호를 헌상받지 못했으나 다른 추존 황제와 동격배향(同格配享).[3] 친부는 의양성왕[4] 친부는 안평헌왕[5] 숙부(실제로는 종숙) 창무정후에게 출계(出系)[추존] [추존] [8] 친부는 진문제[9] 종숙(실제로는 숙부) 요동도혜왕에게 출계[10] 종숙(실제로는 숙부) 광한상왕에게 출계[11] 재종조부(실제로는 종조부) 연왕 기에게 출계[추존] [13] 적장자나 두 살에 요절하여 혜제가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항목이 존재하고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14] 친부는 회남충장왕[15] 여기까지 서진[16] 친부는 오효왕[17]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18] 숙부 성양애왕에게 출계[19] 친부는 사마유(동래왕)[20] 백부 진헌왕에게 출계[21] 적장자였던 비릉도왕처럼 한 살에 요절했으나 추봉(追封)되었기에 기재한다.[22] 직접 난을 일으킨 적은 없는 여남문성왕 대신 팔왕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23] 백부 진세종에게 출계.[24] 친부는 진무제[25] 친부는 제헌왕[26] 백부 성도왕에게 출계[27] 친부는 제헌왕[28] 숙부 연왕 경에게 출계[29] 난을 일으킨 적은 없기에 팔왕에서 빼고 대신 효회황제를 넣는 시각도 있다.[30] 여기부터 동진[31] 친부는 진문제[32] 친부는 사마경[33] 숙부 신야장왕에게 출계[34] 친부는 사마창[35] 윤통(閏統)[36] 숙부 사마익에게 출계[37] 숙부 사마형에게 출계[38] 백부 사마랑에게 출계[39] 숙부 하비헌왕에게 출계[40] 숙부 안평왕에게 출계[41] 친부는 남궁현왕[42] 재종숙 고밀왕에게 출계[43] 친부는 팽성강왕[44] 진안이 장사만 황제의 예로 올리고 시호는 왕으로 하였다.[45] 종조부 사마민에게 출계했다지만 이러면 소목에 어긋나 항렬이 꼬임[46] 습양정후였다가 폐출됨[47] 종실에서 팔왕의 난에 아니 가담하고 난이 끝나가는 직전까지 살았다.[48] 친부는 단수현후. 다만 종조부에게 출계하면 항렬이 꼬여서 친부가 법적으로 종형이 되는데 이 문제는 어찌 된 건지 알수없음.[추존] [50] 아니 추존되었으나 칠묘에 동격배향(同格配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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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문왕 사마염
추봉
선왕 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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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에 표준으로 쓰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으로는 266년이기 때문에 이것을 265년으로 간주해야 할지 266년으로 간주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 음력 265년 12월 13일 ~ 290년 4월 20일[3] 사후 추존[4] 하루에 한 달의 가치가 있다고 쳐서 3년상을 3일상으로 마무리짓는 것.[5] 여기서 3년상을 주장해 밀어붙인 인물이 양호였으며, 반대한 사람은 부현이었다.[6] 당장 군주는 아니었지만 원소가 이래저래 6년상을 깡으로 치르면서 서얼이라는 타고난 불명예를 벗겨내고 일약 거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려하면 중국에서 효와 예가 가지는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7] 다만 제위를 뺏을 뿐, 조씨 일족에게 연좌제를 묻진 않았는지, 조창의 아들 조해에게는 어머니 왕원희가 머무는 숭화궁의 관리자로 내세웠고, 조식의 아들 조지 또한 산기상시로 임명해 곁에서 자기를 섬기게 했다. 물론 이는 이들이 조비의 직계가 아니라 제후왕이라는 명목으로 밀려난 서얼이라는 점에서 사마염 본인의 감성적인 이유와 조위를 재흥시키기엔 영향력이 부족한 인물들이라는 실리적인 이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8] 대표적으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두고 이를 시작한 세조부터 최종적으로 완성시킨 성종까지의 공통된 위업이라 평가된 것.[9] 너무 잘 쓰면 대필한 티가 확 나니 적당히 커트라인만 넘길 수준으로 쓴 것이다.[10] 이 때문에 반쯤 우스갯소리로 사마염이 눈 딱 감고 사마충을 (사마휼의 계승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어떠한 방법으로건 제거하고 사마휼을 황태손으로 올렸으면 서진의 멸망은 없었을 거라는 말도 있다. 물론 며느리인 가남풍이 대안도 없으면서 사마충의 외아들을 죽일 정도로 막가파일 것은 꿈에도 몰랐을 테고 사마염의 성격상 불가능했겠지만, 후대 입장에서 보기에는 안일했던 건 맞다.[11] 환령은 직언을 한 신하들의 목을 날리거나 유배를 보냈고, 사마염은 자신을 비판한 신하들에게도 벌을 거의 주지 않다시피 했으니 충언이 사마염에게 더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12] 아버지 사마소가 내린 처분을 고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 황제 성격에 따라서는 굉장히 위험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어찌 보면 사마염이라서 이렇게 넘어간 것에 가깝다.[13] 사마염이 정말 진심으로 총애한 후궁은 재기 넘치는 성격으로 평소에 사마염에게 조언을 많이해 준 호방이며, 궁녀들이 뭘 하건 말건 거의 호방의 거처에만 머무른 경우가 많았다고 진서에서조차 적고 있다. 그 외에 문재가 뛰어나 사마염이 문서 작성을 맡기곤 했던 좌분이 좀 예우를 받은 수준.[14] 무원왕후가 3부인 9빈을 충원할 때 미색이 떨어지는 여자들만 뽑자 화가 나서 다 무효화시키고 본인이 그냥 직접 뽑았단 일화도 있기에 여색을 안 즐겼다고 할 수는 없다.[15] 당장 사마염을 욕하는 기술을 한 진서를 쓰라고 한 당태종 이세민만 해도 자기가 죽인 형제들의 아내들을 비롯해 닥치는 대로 여색을 취해 수많은 자식을 본 진정한 귀축색마였다.[16] 2세에 요절해서 차남인 사마충이 사실상 적장남이었다.[17] 양준의 딸로 양염의 당질녀이며 사마충의 계모.[18] 원래는 사마염의 첩 중에서 재인에 불과했으나, 나중에 아들 사마치가 제위에 오르자 효회태후로 추증되었다. 사마소의 아내 왕원희(王元姬)와는 다른 인물이다.[19] 좌분 또는 좌빈. 좌희의 딸이자 좌사의 누이.[20] 호분의 딸[21] 제갈충의 딸[22] 두 눈이 먼 장님. 남편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를 사마염에게 대접하기로 유명한 왕제(王濟).[23] 남편은 진덕(甄德).[24] 남편은 노심(盧諶).[25] 언니 형양공주와 작위가 같은 걸 보면 동복 자매일 수도 있다. 참고로 '공주'는 황제의 딸에게, '장공주'는 황제의 누이에게, '대장공주'는 황제의 고모에게 붙여지는 칭호. 남편은 화항(華恒).[26] 남편은 위선(衛宣). 하지만 이혼했다.[27] 남편은 동진 초기의 권력자이자 반역자인 왕돈(王敦).[28] 남편은 왕수(王粹)[29]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은 강남에 묻혔다.[30] 다만 이것은, 마한이 삼한 내부에서 주도권을 잡는 걸 막겠다는 서한 이래 중원 정권의 견제 정책 연장이기도 했다. 근초고왕의 백제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내부 주도권을 잡은 것은 이런 견제를 잠깐 뿌리친 것이었으나 곧이어 진한 사로국 또한 얼마 안 가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여 중원 정권의 오랜 견제와 의도는 다른 쪽으로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