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1-31 02:16:25

사곤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강좌팔달(江左八達)
사곤 필탁 광일 완방 양만 환이 완부 호무보지

謝鯤
(281 ~ 324)
1. 개요2. 생애3. 일화

1. 개요

서진동진 시대 인물로 자는 유여(幼輿). 예주 진군 양하현 출신으로 당대 명사였으며 '강좌팔달'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사형의 아들, 동진의 명재상 사안의 큰아버지. 아들로는 사상이 있으나 사상은 딸만 낳아 대가 끊겼다.

2. 생애

유명 유학자 집안인 진군 사씨 출신으로, 젊었을 적부터 활발한 성격 탓에 친구가 많고 식견이 뛰어났으나 유학자다운 위엄이 없었다. 오히려 사곤은 유학보단 《노자》, 《주역》을 더 자주 읽었고,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 부르는 것도 능해 왕연혜소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그는 사도 왕연의 측근으로 들어가 조정에서 왕돈, 완수(阮修), 유애(庾敳)와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302년, 장사왕 사마예가 제왕 사마경을 무찌르고 정권을 잡았다. 사마예는 '사곤이 사마예가 싫어 도망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사곤을 잡아서 장형에 처하려 했다. 이에 사곤은 도망가기는 커녕 스스로 나아가 순순히 옷을 벗었고, 형을 집행하는 중에도 불만스러운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형이 끝나 사면을 받았음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동해왕 사마월은 이런 그의 모습을 보고 범상치 않다 여겨 사곤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하지만 사곤이 예법에 얽메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자 사마월은 불경죄를 빌미로 그를 쫓아내었다.

사곤이 면직되었을 때 그의 친구인 명사 왕현(王玄), 완수는 그가 곤경을 겪었으니 힘들어 할까 걱정했다. 그러나 사곤은 매일 집에서 맑은 소리로 거문고를 연주하고 노래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얼마 뒤, 사마월은 그를 다시 찾아가 등용했고 참군으로 임명했다. 이후 혜제 사마충의 급사, 석륵의 득세로 서진이 혼란스러워지자 사곤은 사직을 청하고 가족과 함께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피난갔다. 당시 그의 친구 왕돈은 팔왕의 난을 피해 강동에서 낭야왕 사마예를 섬겼는데, 왕돈이 좌장군으로 승진하자 사곤을 자신의 장사로 삼았다.

315년, 왕돈과 두도의 난을 진압하여 그 공으로 함정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해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곤이 모친상을 모두 마쳤을 때 왕돈은 대장군이 되어 있었고, 다시 그의 밑인 대장군부 장사로 관직에 복귀하였다.

사마예는 동진이 건국 후 유외 등의 간신을 총애하고 왕돈을 멀리하니, 황제를 향한 왕돈의 불만을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사곤은 이러한 왕돈을 보며 언젠가 일이 터질 것임을 우려해,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아 일부로 정사를 멀리했다. 그때부터 유유자적하면서 자신의 친구들인 필탁, 완방, 환이 등과 술을 퍼마시고 고성방가하며 놀았다. 이때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과거 죽림칠현 마냥 속세를 구애받지 않는 명사들이라 평하고 '강좌팔달(江左八達)'이라 일컬었다. 왕돈은 이런 근무태만을 보고도 여전히 사곤의 명성을 존경해 문책하지 않았다.

322년, 왕돈이 반란을 선포하고 사곤을 찾아가 "유외 그 간사한 놈이 곧 사직을 해칠 것이니, 내가 그를 토벌해 군주를 바로 세우는 것이 어떻겠소?"라 물었다. 사곤은 유외는 '성곽에 사는 여우와 토지묘에 사는 쥐'[1]와 같은 존재로, 작은 틈에 숨어 제거하기 무척 어려우니, 군사로 이를 잡으려 하다간 되려 화를 입을 수 있다며 말렸다. 왕돈은 사곤이 대세를 읽지 못한다며 분노하여 예장태수로 보내려다 예장에 부임할 수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생겨 그만두었다. 왕돈군에 그대로 남게 된 사곤은 결국 동진의 수도 건강까지 왕돈과 종군할 수밖에 없었다.

석두성을 점거한 왕돈이 앞으로 다시는 군주를 보좌하는 일 따위 하지 않겠다 탄식하자, 사곤이 지금부터라도 군신 간의 원망을 차차 풀어가면 된다 위로하면서 명망높은 선비인 주의, 대연(戴淵)을 등용하라 간했다. 그러나 두 선비는 이미 왕돈에게 체포당해 죽임을 당했기에, 왕돈은 "두 사람은 나와 맞지 않아 체포하였소."라며 차갑게 답했다. 이를 들은 사곤은 본래 주의와 특히 친한 사이였으므로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유외가 패해 후조로 망명하자, 원제 사마예는 왕돈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정권을 넘겼다. 그럼에도 왕돈이 원제를 알현하려 하지 않으니 사곤이 또 간했다.
근래 승상의 행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아직 천하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승상께서 천자를 만나 뵙고 군신 간의 간극을 좁힌다면, 천하가 승상의 행동을 신뢰할 것입니다. 뭇사람들의 기대를 안고 민정에 순응하시어 주상을 위해 힘껏 겸양한다면, 승상은 천하의 잘못을 바로잡는 자와 비견되어 천고에 걸쳐 이름을 남길 수 있습니다.
왕돈은 자신이 입조하면 변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자 사곤이 말했다.
제가 최근 주상을 뵈었는데, 주상께선 승상이 입조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또, 궁궐은 엄숙한 장소이니 허튼 계략이 있으리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승상께서 입조하신다면 제가 동행해 곁을 지키겠습니다.
그러나 왕돈은 끝내 안심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무창으로 돌아가 서신으로 입조할 뿐이었다.

왕돈의 난으로 조정의 대신들이 죽자 많은 이들이 모두 역적 왕돈 곁에 있는 사곤의 안위를 걱정하였다. 하지만 사곤은 왕돈이 무창으로 돌아가는 내내 곁에서 직언을 바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왕돈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기분 또한 굉장히 상했다. 이윽고 무창에 도착한 왕돈은 사곤을 예정했던대로 예장태수로 부임시켰다. 사곤이 청렴하고 엄숙하게 예장을 다스리니,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324년 정월, 43세의 나이로 예장에서 병사하였다. 명제 사마소는 왕돈과 그 세력을 축출한 뒤 사곤을 태상으로 추존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다.

3. 일화

사곤의 이웃 중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인 고씨가 있었는데, 한번은 사곤이 그녀를 매춘부라 무시하면서 희롱했다. 화가 난 고씨가 집에 있던 북을 꺼내 던지자, 사곤은 정통으로 얻어맞고 앞니 2개가 날아갔다. 이 사건은 동진의 선비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모두 그를 비웃었으나, 사곤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그 여인에게 이빨에 대해 따지지도 않았다. 몇몇 술친구들이 그를 걱정하자 오히려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방해만 되는 이빨이 빠지니 후련하구나!"라며 호탕하게 웃었다고 한다. 이 고사는 훗날 '여성이 남성의 유혹을 물리침'을 뜻하는 중국의 사자성어 투사절치(投梭折齒)의 유래가 되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예 쓰지 않는 사자성어니 주의.


[1] 이 고사에서 유래한 사자성어가 바로 성호사서(城狐社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