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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2:38:41

저산자


사마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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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강제의 황후
강헌황후 | 康獻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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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목제~효무제조 황태후
숭덕태후 | 崇德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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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324년
동진 하남군 양적현
(現 허난성 위저우시 일대)
사망 384년 6월 1일 (향년 60세)
동진 단양군 건강현 황궁 현양전
(現 장쑤성 난징시)
능묘 숭평릉(崇平陵)
재위기간 동진 낭야왕비
334년 ~ 343년 2월 10일
동진 황후
343년 2월 10일 ~ 344년 11월 17일
동진 황태후
344년 11월 18일 ~ 384년 6월 1일
동진 황태후 | 섭정 1차
344년 11월 18일 ~ 357년 1월
동진 황태후 | 섭정 2차
362년 ~ 371년
동진 황태후 | 섭정 3차
372년 ~ 3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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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하남 저씨
산자(蒜子)
부모 부친 도향원목후 저부
(都鄕元穆侯 褚裒, 303 ~ 350)
모친 심양향군 사진석
(尋陽鄕君 謝眞石, ? ~ ?)
형제자매 1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강황제
자녀
1남 [ 펼치기 · 접기 ]
외아들 - 사마담(司馬聃, 343 ~ 361)
작호 낭야왕비(琅邪王妃)
→ 황후(皇后) → 황태후(皇太后)
궁호 숭덕궁(崇德宮)
존호 숭덕태후(崇德太后)
시호 강헌황후(康獻皇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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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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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에서 태부를 지낸 도향정후(都鄕亭侯) 저부의 딸. 고작 10살일 때, 12살인 낭야왕 사마악에게 시집을 가서 낭야왕비가 되었고, 훗날 사마악이 황제에 오르자 황후가 되었으며, 사마악이 죽고 외아들 사마담이 즉위하자 태후로 존숭되었다.

2. 생애

저산자는 외가 쪽이 동진의 명문가인 진군 사씨(謝氏) 집안으로 배경이 화려한데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낭야왕 사마악의 왕비로 뽑혔다. 342년에 진성제 사마연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이 너무 어려 사마악이 황위를 계승하자 황후가 되었다.

343년 9월, 사마악의 아들 사마담(司馬聃)을 낳았다.

344년 11월 18일, 사마악이 병사하고 어린 태자 사마담이 즉위하였다. 당시 2살밖에 되지 않은 사마담은 나이가 너무 어려 직접 정사를 돌보기 힘들었기에, 황태후가 된 저산자가 섭정해 국정을 도맡았고 중서감 하충이 그녀를 보좌했다. 사도 채모를 비롯한 조정의 여러 명신들도 그녀와 안팎으로 적극 협력하니, 나라가 평안하였다. 저태후는 자신의 친족들에게도 엄격히 대하면서 그들에게 사사로이 상을 내리지 않았다. 이에 외척들은 함부로 설칠 수 없었고, 저태후의 아버지를 포함한 그녀의 가족들은 집에서도 저태후를 황태후답게 예를 갖추어 절하면서 깎듯이 모셔야만 했다.

357년 정월, 진목제가 마침내 15살로 성년이 되었다. 저태후는 손수 조서를 내려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돌려주면서 섭정의 종료를 선포하고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다. 아쉬워하는 신하들이 있었으나 태후는 더이상 자신이 나설 필요 없음을 조서로 재차 밝혔다.

361년 5월, 진목제가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목제에겐 생전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태후는 조서를 내려 진성제의 장남 사마비(司馬丕)를 황제에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진애제 사마비는 정사에 일절 관심이 없었고, 황로학을 숭배해 방사를 끌어들였으며, 불로장생에 미쳐 금석약(金石藥)이라는 정체불명의 약에 항상 취해있었다. 이런 무능한 통치가 1년 동안 지속되자 못한 대신들이 숭덕궁으로 가 저태후에게 섭정해달라 간청하니, 저태후는 다시 입조하여 진애제 대신 국정을 보았다.

365년 2월, 약기운으로 폐인처럼 지내던 진애제가 사망하고 후사가 없어 그의 동생 사마혁이 뒤를 이었다. 사마혁이 즉위했음에도 저태후는 계속 섭정했는데, 권신 환온은 제위를 탐하여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싶어했다. 그는 사마혁에 관한 유언비어를 퍼뜨렸고, 371년에 건강에 도착해 그 내용을 태후에게도 서신으로 언급하며 폐위를 넌지시 권했다. 불당에서 향을 피우던 저태후는 환온의 서신을 받아 반쯤 읽다가 접고 "나 또한 이를 근심하였는데 가슴이 찢어질 듯 하구나!"며 탄식했다. 환온이 대신들을 모아 마침내 사마혁의 폐위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결국 저태후는 조서를 내려 사마혁을 동해왕으로 폐위시켰다. 이후 회계왕 사마욱이 황제에 올랐다. 더이상 섭정할 필요를 못 느낀 저태후는 숭덕궁으로 다시 돌아가 숭덕태후(崇德太后)로 추앙받았다.

372년, 대사마 환온의 압박에 항상 두려움에 떨며 살던 간문제 사마욱이 자신의 어린 아들 사마요(司馬曜)에게 제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저태후는 환온으로 하여금 주공 단의 선례에 의거해 어린 황제를 섭정하라 조서를 내렸으나, 조정 내에서 반환온파였던 왕표지가 결사반대하여 폐기했다. 환온은 원래 사마욱이 자신에게 선양할 것을 기대했으나 오히려 사마요가 즉위했고, 섭정까지 못하게 되어 이를 매우 분통해 했다. 얼마 후, 환온이 죽었으나 환씨 가문의 권세는 여전하였으므로 그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고자 사안이 저태후를 불러와 섭정을 부탁했다.

376년, 효무제 사마요가 15세로 성년이 되자 저태후는 또다시 숭덕궁으로 물러났다.

384년 6월 1일, 저태후는 숭덕궁 현양전에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효무제는 장례를 마치고 7월에 강제 사마악이 묻혀있는 숭평릉(崇平陵)에 저태후를 안장하였다. 그녀는 섭정만 3차례나 했으며, 살아있는 동안 황제가 무려 5번이나 바뀌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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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제기(帝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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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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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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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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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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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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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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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광 · 여찬 · 여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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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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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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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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