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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7:27:33

왕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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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진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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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무제조 황태후
숭화태후 | 崇化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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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숭양릉도면.png
숭양릉으로 추정되는 고분군 도면. M1호가 숭양릉이다.
출생 217년
후한 서주 동해군 담현
(現 장쑤성 린이시 탄청현)
사망 268년 4월 20일 (향년 51세)
서진 사례 하남군 낙양 숭화궁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숭양릉(崇陽陵)
재위기간 서진 황태후
266년 2월 8일 ~ 268년 4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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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본관 동해 왕씨
원희(元姬)
부모 부친 난릉경후 왕숙
(蘭陵景侯 王肅, 195 ~ 256)
모친 평양정군 양씨
(平陽靖君 羊氏, ? ~ ?)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녀
동복형제 왕개, 왕건, 왕순
배우자 태조 문황제
자녀 5남 1녀
궁호 숭화궁(崇化宮)
존호 숭화태후(崇化太后)
시호 문명황후(文明皇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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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서진의 여성이자 성은 왕씨(王氏), 는 원희(元姬)[1]로 시호는 문명황후(文明皇后). 서주 동해군 담현 사람.

사마소의 아내, 사마염, 사마유, 사마조, 사마정국, 사마광덕, 경조공주의 어머니. 왕랑의 손녀, 왕숙의 딸, 어머니는 양씨(羊氏), 남동생왕순, 왕건, 왕개.

2. 정사 삼국지

2.1. 생애

파일:왕원희 독서.jpg[2]
할아버지아버지 모두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관료이자 학자인 만큼 그녀도 8세에 시경논어를 암송할 정도로 상당한 재녀였다. 때문에 할아버지인 왕랑은 왕원희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굉장히 애석해 했다.[3] 항상 부모님을 공경하고 어머니가 편찮았을 때는 정성껏 간호했다. 또 집안일을 할 때에는 시키기도 전에 마무리를 지었으며 항상 이치에 맞았다. 그녀가 12세 때 할아버지 왕랑의 장례식에서 애도를 깊게 표현해서 아버지 왕숙이 훌륭히 여겼다.

성장한 뒤 사마소에게 시집가서 5남 1녀를 낳았다. 시부모를 섬김에 아내의 도리를 다했으며 아버지 왕숙의 장례 후에는 매우 애통해서 말만 하면 눈물을 흘렸다. 겸허하게 아랫사람을 대하니 비빈들[4]이 질서가 있었다.

평소 종회를 경계하며 사마소에게 '종회는 이득을 보면 정의를 잊고 사달을 일으키길 좋아합니다. 그래서 총애가 과하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사람이니 절대 중용하지 마십시오.'라고 권했으며, 그 말대로 훗날 종회는 촉 땅을 점령한 뒤 반란을 일으키려다 죽었다.

남편 사마소의 사후 아들 사마유가 너무나도 슬퍼해 먹지도 않고 쇠약해지자 왕원희가 충고했지만 들어먹질 않았다.[5] 아들 사마염서진을 건국하자 황태후가 되어서 숭화궁에 살았지만 몸소 실을 짜고 진수성찬을 먹지 않으면서 검소하고 예의바르게 살았다. 병이 위독해졌을 때 병상에 사마염을 불러 다시금 형제의 정을 상기시키며 사마유를 보호해 주라고 유언했다.[6] 268년 3월 21일에 52세로 사망하고 사마소가 묻힌 숭양릉에 합장되었다.

2.2. 사후

그녀가 죽고 합장하려고 할 때 사마염이 손수 모후의 덕행을 나열해가며 사관으로 하여금 애사를 짓게 하였는데 그 애사는 다음과 같다.
[ 펼치기 · 접기 ]
> 크나큰 명덕을 가진 선후여 우리 진나라를 진흥시켰네.
찬란한 말씀과 아름다운 물음은 선황을 보익했네
그 덕을 힘써 행하고 이치에 순응하니 광대한 제업을 열었네.
외롭고 어리석은 사람에게 복택을 보내어 선조의 유업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네
본래 장구토록 교육받고 영원토록 장수하길 바랬건만
지금 홀연히 세상을 떠났으니 나를 버린 것이 어찌도 이리 빠른 것인가?
슬픔은 말로 형용할수 없을 정도이니 누가 하늘이 이렇게 세상일을 안배할거라고 생각했겠는가!
아~ 슬프구나!

백성들이 처음 생겨날 때 은혜를 베풀어 평안을 내렸네
하늘이 밝고도 어진 덕으로 선황을 돌보셨네
하늘이 선황의 배필을 고르셔서 확립하시니 내 선황은 이로 말미암아 영명을 날리게 되었네
나라를 흥건시키고 아름다운 이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네
가련한 우리들은 장구한 비호가 없어 하늘의 재앙이 내려졌네
해가 진 것이 마치 명이(明夷)의 괘상 같은데 황후께서는 중년에 돌아가셨네
외로움과 고통에 처하여서 근심하다 병을 얻으니 항상 아프기가 창자가 끊어질 것 같네
고상한 덕행 사모함을 회상하니 진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네
동해와 태산이 신령을 내려 세대가 상서로운 복택의 은덕을 받게 되었네
우리에게 장구한 국운을 주시어 현덕한 후비를 내려주셨네
능히 순수하고 올바른데다 화평하게 천명을 받으니 모습과 행동이 장엄하고 조심스럽네
바탕이 진실하고 정직하여 굳게 곧음을 지키고 변하지 않았으니 친히 몸으로 효우의 도리를 실천했네
시경과 서경을 좋아했고 법제와 전적에 밝게 통했네
끝까지 삼종의 덕을 위배하지 않았고 마땅한 곳에 처하여서 집안을 다스리는 도리를 행했네
선후를 추모하니 부지런하고 겸양한 미덕을 숭상하게 되네
애초에 결혼하지 않았을 때는 모든 힘을 다해 부모를 모시더니
큰 나라에 시집온 후로는 노력을 다해 제왕을 보좌했네
조용하고 두터워 풍속을 이루고 제왕의 일이 이로부터 말미암아 이루어졌네
안으로는 비빈들을 정연하고 질서있게 했으며 밖으로는 당시 사람들의 소망에 합치되게 하였네
신의있게 행동하고 합당하게 일처리 하였으니 덕행이 통하여 널리 퍼졌네
근면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신고하게 허물을 고치고 자신의 사욕을 이겨 겸양을 얻었네
검소함을 숭상하고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을 반대했으니 겸손하고 순박했기 때문이네
비록 숭고한 지위를 향유했으나 도리어 즐거움을 다하지 않았네
어찌 저를 버리고 가실수가 있으며 이후에 저로 하여금 누구에게 의지하여 살게 하시렵니까?
나의 불행을 슬퍼하고 탄식하니 커다란 징벌이 연달아 도래했네
선황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불과 3년이 지났는데
나는 모친을 모시면서 다시는 이런 재앙이 없기를 빌었거늘
누가 이런 흉한 재앙이 연달아 강림할 것을 헤아렸는가? 나는 하늘에게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아~ 슬프구나!

영거가 새벽에 출행하려 하는데 궁중에서는 이미 거리제를 안배 했네
상거가 움직일 때 과거의 일은 다시 붙잡아 돌이킬 방법이 없네
가련한 어머니여 신령이 영원히 잠기게 되었네
앞으로 나아가 관목을 붙잡으며 사방의 송장을 위한 깃발 돌아보니
마음속이 황공스럽고 비통하여 누구에게 하소연하며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충정을 말함으로써 애도문을 헌상하여 이것으로 내 심중의 비통함을 펼치니
당신께서 만약 들으실수 있다면 이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고아를 돌아보십시오.
아~ 슬프구나!

그 후에도 추모는 끊이지 않고 자신의 외증조모이자 왕랑의 부인이었던 양씨 등에게 식읍을 내렸다.

아들 사마염, 동생 왕개와는 정반대로 당시 서진 고위층으로서는 드물게 검소한 인물이었다. 사마염은 재위 초 외국으로부터 선물받은 치두구라는 일종의 밍크 코트[7]를 "이런 거 입고 다니면 왕이 사치를 하는 거다" 라며 화롯불애 태워버렸는데, 정작 엄마가 죽으니까 치두구를 태운 짓이 어이없는 짓이라며 후회하면서 치두구를 여섯 벌이나 두고 입고 다녔다. 사실 사마염도 엄마가 살아있었던 즉위 초반에는 청렴한 모습을 보여주려 애썼다는 것을 보면 즉위 초반에는 태후로서 모범을 보이는 '엄마 눈치'를 상당히 봤었던 모양.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후궁을 1만 명이나 두고 사치와 호색질을 했다고 하니... [8]

그리고 사후에는 남편의 업보로 인해서 자신이 묻힌 숭양릉에 난리가 났었다. 319년, 전조유요가 숭양릉을 도굴한다는 소식을 듣자 깜짝 놀란 동진 원제 사마예는 그 무덤을 도굴하지 마라는 간곡한 청원을 하였다. 유요는 이에 대해 계획을 미루기로 했고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키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9]

3. 삼국지연의

위나라의 멸망과 진나라 건국을 다룬 삼국지연의 119회에서 '사마소의 아내는 왕숙의 딸인데, 아들을 둘(사마염, 사마유) 낳았다'라고 지나가듯 언급이 있다.[10]

연의에서는 왕숙의 딸이라고만 나오며, 왕랑의 손녀라고는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왕랑은 정사와 달리 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꾸짖음을 듣고 추하게 죽었다. 나관중은 제갈량을 좋아했고 제갈량에 저항하는 대부분의 문무관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11] 그러나 차마 통일 군주 사마염의 이미지를 망칠 수 없어서 왕랑의 핏줄이라는 언급을 숨기려한 것으로 보인다. 왕랑의 연의에서의 최후는 아무래도 왕원희가 사마 씨의 며느리였다는 것에 대한 괘씸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4. 기타 창작물

4.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파일:external/vignette2.wikia.nocookie.net/Wangyuanji-100manninrotk.jpg 파일:Wang_Yuanji_4_(1MROTK).png
100만인의 삼국지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956.jpg
삼국지 12, 13
파일:왕원희.jpg
삼국지 14

삼국지 12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100만인의 삼국지에서는 대부분이 전작의 일러스트를 재탕한 와중에 보연사, 가남풍과 더불어 드물게 새로 그려진 일러스트을 받았다.

삼국지 12에서는 무쌍 시리즈와 달리 머리는 갈색이지만 컨셉 컬러나 복장은 비슷하다. 냉철해보이는 진삼과는 달리 귀엽고 상냥한 이미지. 자세히 보면 오른쪽 손가락을 턱에 올린 채 가슴을 가리고 있다. 능력치는 통솔력 53/무력 35/지력 73/정치력 75, 전법은 전공격강화.

그나마 전공격강화를 보유한 무장 중에서 지력이 두 번째로 높다. 또 유일하게 군사 특기가 없이 귀모가 있는 특이한 여무장이다. 자고로 군사 특기 없이 귀모만 가지고 있는 무장으로는 오다 노부나가, 악비, 한신과 같은 먼치킨 장수들[12]이다. 혐오무장란에는 1명이 있는데 역사 내용 그대로 종회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53/무력 37/지력 73/정치 75. 병과 적성은 C/A/B. 재녀라는 점을 반영했는지 중신특성이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아깝게도 없다. PK로 한다면 상업중시나 화기생재, 아니면 그녀의 성품을 반영해 공정무사를 추가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특기는 상업 2, 교섭 3, 언변 1(사마소 인연 효과). 전수특기는 교섭이다.

그녀의 행동 및 성격 상 인덕을 주고 전수특기도 인덕으로 줄 법도 하나 사마 가문의 일가, 특히 황제를 죽인 사마소라서 그에게 인연효과로 인덕을 주기에는 난감했을 것이라 판단했을 듯하다. 능력치는 전작에서 변동이 없다. 병과는 여성 무장임에도 기병 적성이 A라서 전투에 꽤나 많이 참가한다. 제갈량, 강유의 북벌 시나리오에서는 장합, 서황, 문앙의 기마조련 특성을 이용해 S 적성을 얻을 수도 있다. 전법은 5포인트를 소모하여 사기, 방어, 기동을 일정 상승 시켜주는 속방지휘다. 물론 최상급 전법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작에서 여성 무장들의 전법이 제사지휘의 대교나 질주지휘의 마운록을 제외하면 썩 별로인 것을 감안하면 군계일학이다. 게다가 제갈량, 강유 북벌 시나리오 시점으로 옮기면 능력치로 따질 때 황월영, 신헌영, 장춘화 다음이다.[13] 이런 걸 보면 시아버지의 속전고수를 약간 물려받았다. 전작에서는 귀모가 있는데 여기에는 없다. 성격은 어째서인지 소심이니 편집을 사용한다면 냉정으로 바꿔주는 것도 좋다. 231년에 아버지가 있다면 아버지 소속 세력, 소속 도시로 바로 임관하며 왕숙이 없다면 서주의 낭야에서 재야로 등장한다. 물론 사마소가 있다면 사마소 세력, 사마소 도시로 임관하는 것이 우선이다.

결혼하기가 까다롭지만 축융보다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사실 시나리오에서 왕원희는 231년에 등장하는데 반해 사마소는 225년에 등장하는 것을 이용해야 한다. 231년까지 6년동안 어떻게든 사마소를 죽인다면 남편이 없는 상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결혼하기만 하면 끝. 물론 사마의, 장춘화, 사마사와 원수가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영웅집결이나 영웅십삼걸에서는 처음부터 사마소와 부부 관계라서 플레이어 말고 논플레이어블 세력의 누군가나 플레이어의 아군 장수가 사마소를 죽여주길 빌어야만 한다. 직접 사마소를 죽여버리면 왕원희와 원수지간이 되나 다른 캐릭터가 죽이면 플레이어와 원수 지정이 안 되는 시스템을 이용한 것이다. 정 귀찮으면 이벤트로 자기 나름대로 결혼하거나 신무장이라면 신무장 작성시 배우자를 왕원희로 미리 지정해 부인으로 만들자. PK에서는 배우자 지정 시 원래 배우자는 삭제되고 신무장이 유일한 배우자가 되도록 바뀌었기 때문에 이쪽이 오히려 깔끔하다. 물론 사마염, 사마유는 여전히 왕원희와 사마소의 아들이라 결혼은 신무장이랑 했는데 아이는 사마소와도 신무장과도 낳는 뭣같은 상황이 되니 이벤트로 죽이던가 하자. PK에서는 사마가문 테마곡을 본인도 받게 되어 장춘화, 손상향과 함께 여성 무장 중에서 테마곡이 있는 몇 안되는 케이스가 되었다.

삼국지 14에서는 일러스트가 공개되자마자 게임성에 대한 비판과 우려와 별개로 극찬을 받았다. 자세히 보면 오른손으로 머리를 만지고 있다. 그리고 머리의 꽃장식도 전작들과 거의 동일. 능력치는 통솔 24, 무력 18, 지력 80, 정치 72, 매력 86으로 지력이 7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29, 무력이 19, 정치력이 3 하락했다. 최후기 시나리오라 무장들 능력치가 짜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엄청 높은 능력을 보여준다. 개성은 침착, 재원, 주의는 예교, 정책은 학익강화 Lv 4, 진형은 학익, 투석, 전법은 고무, 치료, 투석, 친애무장은 사마소, 혐오무장은 종회다.

손권 사후 시나리오에서는 매력 수치에서 아예 양호, 사마유 다음이다. 매력이 높고 재원이 있어서 인재 등용을 담당하는 스카우터 혹은 남편의 심모원려를 연장시키는 차원으로 부장으로 쓰는게 무난할 듯하다. 자고로 영웅집결에서는 할아버지 소속으로 있는데 서로 친애무장인지라 사마소를 왕랑 소속으로 빼내올 수 있다. 다만, 역등용당하면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상당히 골치 아파진다. 이유는 왕원희의 비중이 어느 세력에 있는지에 따라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사마소가 데려온 후 사마의 소속으로 있을 때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 중심으로 장안 기반 서량(량주), 옹주를 지배하지만 왕랑 소속으로서 사마소를 데려오면 왕원희, 사마소 중심으로 손견 세력을 제외하면 강동권을 지배하기도 한다.

4.2. 영걸전 시리즈

파일:조조전 온라인 왕원희.png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등장. 성우여민정.

CBT 때 전략편에서 시간을 뛰어 넘어 등장했다. 물론 계보 장수들 중에 후대 장수들이 더럭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단순히 등용을 위한 것이지만 왕원희는 장막의 부하로 초반부에 직접 조조를 도와주는 책사로서 스토리에 나온다.

조조가 제남을 안정시키고 거사를 하기 전에 장막이 보낸 사신으로 등장해 조조를 도와주는 역할로 나오는데, 조조가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 백성들을 착취하는 무리들을 임치항에서 토벌하고 하후연을 영입한 조조가 장수를 더 원하자 하후돈이 찾아온 것을 알려준다. 태산의 산채에 산적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태산을 탐색하게 하고 조조가 청주를 평정하자 장막에게 돌아간다.

장수 특성은 HP 보조 15% - 선제 공격 - 공격 범위 확장(몰우전) - 무작위 하강 공격. 실질적으로는 선제와 몰우전 공격범위가 있어 반고부로 무반격 공격을 추가해주면 몰우전 범위 선제 무반격이 가능하다. 하지만 원래 무희라서 물리 방어력이 높지 않기 때문에 근접 공격 외의 노전차, 궁병을 상대로 취약한데 20코스트라서 코스트도 많이 먹고 딱히 선무반 외의 다른 유틸이 하나도 없다보니 거의 기용되지 않는다.

4.3. 진삼국무쌍 시리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왕원희(진삼국무쌍)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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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4. VC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VCG 위 퍼스트덱 문서
4.5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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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삼극희

1탄 PS3판과 2탄 파워업키트의 진 루트에서 주인공의 약혼녀로 등장한다. 핑크빛 머리의 미소녀다.

4.6. 대군사 사마의

파일:Growling.Tiger.And.Roaring.Dragon.2017.EP36.HD1080P.X264.AAC.Mandarin.CHS.MF.png

배우는 푸타오(蒲萄). 대군사 사마의 2부 36화에 잠깐 얼굴이 비춰졌는데 남편 사마소와 같이 차남 사마유를 사마사의 양자로 갈 것을 장춘화가 부탁했다. 중국 현지에서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출연에 중국 현지에서 이목과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사마소가 형수인 하후휘를 연모하는터라 등장하기 골룸했는지 사마의와 사마 가문이 주연으로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왕원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결혼시킨다는 말만 몇번 나오더니 결혼식 장면도 없이 어느새 시집온 상태로 등장한다.

5. 둘러보기

진서 후비전(后妃傳)
장춘화 하후휘 양휘유 왕원희 양염 양지 좌분 호방 제갈완 가남풍 사구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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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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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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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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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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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소의 아들 원희와는 아무 관련 없다.[2] 좌측의 어린 아이가 왕원희[3] '우리 가문을 흥성케 할 아이는 저 아이다. 다만 애석한 것은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지.'라고 했다. 이는 왕원희에 대한 칭찬이면서 동시에 남동생 왕개에 대한 간접 디스이기도 하다. '(여자라서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고 가문을 잇지도 못할) 왕원희는 이렇게 똑똑하고 잘났구만, (관직에 오르고 가문을 이을 아들인) 왕개는 제 누나보다 한참 못하다'는 뜻이 되니까. 실제로 왕개는 별로 잘나지 못하고 용렬한 사람이었다.[4] 사마소의 비빈들로 이염, 왕선, 서염, 오숙, 조정이 있다.[5] 출처: 진서 제왕유전.[6] 출처: 진서 제왕유전.[7] 꿩 백 마리의 머리가죽을 이어 만든 털가죽 옷이다. 치는 꿩 치자이고 두는 머리 두자. 헷갈리기 쉬운데, 암컷 백여우 아흔아홉 마리의 부드러운 겨드랑이 털(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이걸 암여우의 거시기 부분으로 해석했다)을 이어 만든 털가죽 옷은 치두구가 아니라 맹상군과 진나라 왕에 관계된 에피소드에 나오는 백호구라는 밍크 코트다.[8] 후궁이 1만 명이라는 게 중국 특유의 과장법일 수 있지만, 사마염이 양 네 마리가 끄는 수레에 타고 가다가 랜덤하게 수레가 멈추면 그 처소의 후궁과 그날 밤 잠자리를 했다고 하니 어쨌든 엄청나게 많기는 했던 모양이다. 나중에는 어느 꾀많은 후궁이 소금과 댓잎을 자기 처소 앞에 뿌려서 양이 매번 멈추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9] 물론 그 땅에 있는 서진의 유물들이 이민족들이 세운 자국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다가 후에 북벌을 단행한 환온유유가 서진의 황릉 및 유물들을 수습하였다.[10] 연의에서는 사마염과 사마유만 자녀로 언급된다.[11] 왕랑의 경우에는 노년에 제갈량과 글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자세한 것은 제갈량왕랑을 참조하면 된다.[12] 이외에 전국시대에서 화우계로 유명한 전단, 조나라 최후의 명장인 이목, 살무사 사이토 도산도 해당된다.[13] 이 넷 중 전투 한정으로 치면 사실상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