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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 서진의 황족 제헌왕(齊獻王) 司馬攸 | 사마유 | |
사마소와 사마유. 왼쪽 인물이 사마유다. | |
시호 | 헌(獻) |
작위 | 장락정후(長樂亭侯) → 무양후(舞陽侯) → 안창후(安昌侯) → 제왕(齊王) |
최종직위 | 대사마(大司馬) 겸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靑州諸軍事) 겸 시중(侍中) |
성씨 | 사마(司馬) |
휘 | 유(攸) |
자 | 대유(大猷) |
아버지 | 친아버지:사마소(司馬昭) 양아버지:사마사(司馬師) |
생몰기간 | 248년 ~ 283년 |
재위 | 서진의 제왕(齊王) |
265년 12월 13일 ~ 2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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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의 황족으로 사마소의 차남이자 모친은 왕원희이며 무제 사마염의 친동생으로 자는 대유(大猷). 아명(小字)은 도부(桃符).[1] 사례 하내군 온현 사람. 훗날 큰아버지 사마사의 양아들이 되었다.삼국지연의에서는 사마소가 후계자를 저울질할 때 잠깐 언급될 뿐이지만 중국 황실의 안타까운 형제간 암투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사마염 즉위 전
어려서부터 총명해 할아버지 사마의가 집안의 큰 그릇이라고 칭찬했으며[2] 아버지 사마소도 일찍부터 그를 몹시 아꼈다. 그러나 사마소의 형이자 큰아버지 사마사가 딸만 다섯 두고 아들을 얻지 못했기에 사마사의 양자로 입적되었다.[3] 사마사가 회남 진압 직후 사망하자 친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고 양모인 양휘유[4]를 효성으로 섬겼다.인품이 온화하고 겸허했으며 어진 이들을 아끼는 성품으로, 문무에 고루 능하여 그 재주와 덕망이 형 사마염을 앞설 정도였다. 관례를 치른 뒤에는 산기상시, 보병 교위를 거쳐 안창후에 봉해지고 위장군이 되었다.
264년에 사마소가 촉한을 멸한 공적으로 진왕에 봉해져 세자를 정하게 되자, 평소 사마유의 재주를 사랑한 데다가 자신이 형 사마사로부터 대권을 이어받은 데 따른 보은의 명분도 있었기에 처음에는 사마유를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5] 그러나 심복인 가충을 비롯해 여러 신료들이 장유유서의 도를 거론하며 반대했기에 결국 세자 자리는 사마염에게 넘어갔다. 이듬해 급환으로 쓰러진 사마소는 임종의 자리에서 사마유의 장래를 염려해 사마염에게 조비와 조식의 전례를 상기시키며 동생을 잘 지켜주도록 당부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잃은 사마유는 너무나 슬퍼한 나머지 음식조차 들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만 해서 어머니 왕원희조차 말리지 못했고 사마 혜희[6]가 왕족으로서의 직위를 상기시키며 충고하자 그제야 간신히 진정했다고 한다.
2.2. 서진 개국 후
사마염이 제위에 올라 서진을 개국하자 제왕에 봉해졌고, 당시에는 봉토로 가지 않고 낙양에 머물렀지만 영지의 관리들 녹봉을 충당하거나 백성들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표기장군을 겸해 삼공과 같은 대우를 받았음에도 겸손하고 삼가는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최상위 관청인 공부(公府)가 하급 관원들의 동태 파악에 소홀한 것을 개탄하며 공무의 긴축과 엄정한 신상필벌을 실시해 조야의 기강 확립에 힘썼다.뒤이어 진군대장군까지 오르고 태자태부를 겸임해 조카인 사마충의 교육을 맡아 그의 자질에 아랑곳없이 성심성의껏 치도(治道)를 가르쳤으며, 276년에 가충을 대신해 사공에 올랐고 시중을 겸직했다.
이보다 수 년 앞서 어머니인 문명황태후 왕원희가 사망했는데, 사마염 외에도 동복형제로 사마정국, 사마조, 사마광덕 등이 있었지만 모두 일찍 죽었기에 왕원희는 사마염에게 다시금 형제의 정을 상기시키며 사마유를 보호해 주라고 유언했다.
천하통일 달성 후 내치에 신료들의 관심이 모아지면서 사마충의 모자람이 눈에 띄게 부각되자 어느덧 사마충보다는 사마유가 제위를 잇기를 바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지만 사마염 이후의 권력 장악을 노리던 순욱이나 풍담 등은 평소 사마염에게 아첨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의견과 다른 이들을 헐뜯어 좌천시키거나 내쫓기를 일삼았고, 사마유는 이들의 행태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에 사마유가 후계자로 지명될 것을 염려한 순욱과 풍담은 282년에 '민심이 태자보다는 제왕에게 쏠리고 있어 장차 태자의 지위가 위태로울까 염려되니 우선 가장 가까운 황족부터 봉지로 부임시켜 기강을 바로세워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사마염에게 건의했으며, 이 말에 넘어간 사마염은 사마유를 대사마 겸 도독청주제군사로 임명해 산동으로 부임하라 명했다.[7]
사마유 본인과 부풍왕 사마준, 왕혼 등 많은 신료들이 이 결정을 반대해 재고하기를 상주했으나 오히려 사마염의 분노만 부채질해 부마인 왕제 등을 비롯하여 간언한 여러 인물들이 좌천되었다.
결국 사마유는 형에 대한 상심과 한편으로 책모를 꾸민 순욱, 풍담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병을 얻었고 마지막으로 임지로 가는 대신 어머니 문명황태후의 능을 지키게 해달라[8]고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세가 악화되는 와중에도 전의들은 사마염의 눈치를 살펴 사마유가 병들지 않았다고 보고했기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산동으로 떠나야 했으며, 그 와중에도 무리하게 평소처럼 거동을 갖추고 부임해 이것이 오히려 사마염의 의심을 부추겼다.
사마유는 봉국에 부임한지 불과 이틀만에 죽었으며, 그제서야 사마염은 후회하며 통곡했지만 풍담은 "천하가 제왕의 헛된 명성에 홀려 사직이 위태로울 뻔했는데 이처럼 제왕이 죽은 것은 나라를 위해 다행이고 폐하가 근심하실 일이 아닙니다."라고 말해 통곡을 그치게 했다. 사마유의 3남 사마경이 전의들의 무고로 아버지의 병세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고 고하자 사마염은 그 책임을 물어 관련된 전의들을 대신 죽였다.
시호를 헌(獻)이라 해 《진서》에는 제헌왕전이라는 이름으로 열전이 실렸다.
3. 평가
위에 나타난 대로 원담과 원상, 유기와 유종, 조비와 조식, 손화와 손패 등으로 이어진 형제간 암투와 골육상잔은 사마씨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잘 보여준 안타까운 삶이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이 사건이 더 큰 골육상잔인 팔왕의 난에 도화선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실제로 팔왕 중에 1명은 사마유의 아들 사마경으로 아버지의 억울함이 한이 되어서 타락한 경우이다.진작부터 유연의 됨됨이를 간파해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했을 정도의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가 사마염이나 사마충 대신 제위를 이었더라면 오호십육국시대의 도래를 비롯해 역사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을까라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겨주기도 한다. 팔왕의난 이후, 동진에서도 화자가 되었는데, 진무제가 제왕 사마유를 밖으로 내보낸 것과 혜제 사마충을 세운 것은 어느 쪽이 더 심한 실책이었는지를 논했다. 당시 대부분 사람은 혜제를 세운 것이 더 중대한 실책이었다고 했다.
사마유가 유능했음에도 사마염이 끝까지 지능 나쁘고 무능한 아들을 고집했던 이유는 사마충이 적장자라는 이유도 있었으나 어렸던 손자 사마휼이 총명했기에 사마염은 그를 귀여워하였고 사마충이 황제가 되면 손자가 아들을 보필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안일한 선택으로[9] 사마휼은 적모인 가남풍에게 살해되고 가남풍도 반발한 제후들에게 축출당하면서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터지면서 서진은 멸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하고 만 것이다.
4. 가족 관계
아내는 가충의 장녀이자 가남풍의 이복언니 가씨로 이름은 가포(賈褒) 또는 가전(賈筌)이다.- 동래왕 사마유(司馬蕤) - 자는 경고(景回)
- 제왕 사마유지(司馬柔之)
- 사마건지
- 사마숭(사마건지의 현손)
- 화용왕 사마준(司馬遵)
- 북해왕 사마식(司馬寔) - 자는 경심(景深)
- 제왕 사마경(司馬冏)
- 회음왕 사마초(司馬超)
- 광양왕 사마빙(司馬冰)
- 제양왕 사마영(司馬英)
- 연왕 사마기(司馬幾)
- 광덕왕 사마찬(司馬贊) - 자는 경기(景期), 요절
그의 아들 사마경은 제왕의 작위를 이어받았지만 아버지로부터 덕망과 인품은 물려받지 못했다.[10] 팔왕의 난 당시 조왕 사마륜과 연합해 가남풍을 제거했으며 사마륜이 황제를 칭하자 그를 없애고 실권을 잡았다. 사촌형 사마간은 이를 알고 경고했으나,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다가 장사왕, 성도왕, 하간왕 등 앞서 연합했던 황족들에게 살해되고 멸족되었다.
5. 미디어 믹스
5.1.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삼국지 4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형 사마염보다 좋은 능력치일 경우가 많다. 단순히 능력치만 보면 고만고만한 편이지만 활약 시기를 따져보면 충분히 만능 인재로 활약할 수 있다. 여담으로 사마씨 일족 중에서 삼국지 10까지는 무력이 3위 정도였지만 삼국지 11부터는 무력이 1위를 기록하는 갱신을 세웠다.
삼국지 10~13까지 사실무장 중 가장 최연소로 이어져 오다가 삼국지 14에서 수윤(249년)이 재등장함에 따라[11] 더 이상 최연소 사실무장이 아니게 되었다.
삼국지 4에서는 매력이 80대 초반에 나머지 능력치은 어중간하고, 사마유가 등장할 쯤되면 게임이 다 끝날 쯤이다.
삼국지 6에서는 매력이 91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7/무력 56/지력 83/정치력 77이며 사기 병법인 교사를 가지고 있어서 계략 방어용으로 쓸 만하고, 그 이외에도 기사, 제사, 정란,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어서 공성전이면 언제든 쓸 수 있다. 사마염과 비교했을 때 스탯 자체는 비슷하지만, 숨겨진 스탯에서 전병법 특기+높은 의리 등으로 확실히 푸시를 받는 느낌. 하지만 수명이 0이라서 영웅집결이 아니면 쓰기가 곤란하다. 그나마 9는 260년대 시나리오까지 있는 덕분에 일반 시나리오에서 쓸 일이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68/무력 60/지력 80/ 정치력 72/매력 83인데 원본 기준으론 시나리오 시작부터 등장하는 경우가 없고, PK라 할지라도 최후반 시나리오인 253년 고전분투 시나리오에 가야 등장한다는 것이지만 6살에 등장한다. 형인 사마염보다 능력치 총합은 약간 떨어지게 나왔지만 특기는 6개로(기술, 고무, 유인, 반박, 논파, 명사) 형보다 한 개 더 많다. 여담으로 사실 장수 중 가장 어린 248년생이다. 그 다음으론 246년생으로 설정된 제갈상과 조환이다.
삼국지 11에서의 보유 특기는 인품 고증에 따라 인정. 이번작에선 통솔력 71 / 무력 68 / 지력 75 / 정치력 77 / 매력 87의 능력치로 형을 확실히 앞섰다.
삼국지 12에서도 등장하며 능력치는 통솔력 71 / 무력 68 / 지력 75 / 정치력 77로 이번에도 형보다 모든 면에서 좋다. 특기마저도 내정은 상재, 명성, 병심, 연병. 전투는 신속, 냉정으로, 전법은 전법봉인이다. 사족이지만 분명 친모는 왕원희인데 코에이가 조사 안 하고 어머니의 자식 데이터에서 사마유가 없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상업 3, 농업 2, 훈련 5, 인덕 5. 전수특기는 인덕이며 사마씨 중에서 유일한 인덕 소유자다. 전법은 동요도발. 음성은 책사.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69, 무력 65, 지력 75, 정치 77, 매력 87로 전작과 달리 통솔력이 2, 무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명성, 진흥, 교화, 소욕, 인정, PK에서는 진흥 개성이 삭제된 대신 자비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진흥 Lv 4, 진형은 안행, 학익, 충차, 전법은 연노, 업화, 고무, 친애무장은 사마사, 사마소, 사마의, 왕원희, 혐오무장은 순욱이다. 전작과 달리 어투가 일러스트에 맞게 정중남으로 들린다.
5.2. 삼국전투기
오란고교 호스트부의 히타치인 히카루[12]로 패러디되었다. 사마염과 똑같이 생겼지만, 성격은 정반대로 생각이 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조위의 선례에서 교훈을 얻은 사마염이 조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사마씨 일족들을 왕으로 삼는 정책에 심히 우려를 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전투외편 8-4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아버지 사마소가 사마염 대신 찍어놨던 인재라고 서술되어 있다.전투외편 8편에서 처음 등장. 진의 황제가 된 사마염이 위의 조씨가 왜 망한 것 같냐고 묻자 조씨는 자기 편이 너무 없었다고 답했으며, 이에 사마염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한 뒤 자기는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 종친 사마씨들을 전부 왕에 봉하고 봉토도 주고 각자가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만들 거라고 말했다. 사마유는 그랬다간 중앙집권이 약화될 거라며 우려를 표했지만 사마염은 당장 자기 자리를 가장 위협하는 건 사마유지만 그런 사마유에게도 봉토와 선임권을 줄 거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마유 본인은 자기는 봉토라던가 필요 없다며 사양했지만 사마염은 그대로 강행했다.
[1] 위나라로 치자면 조비를 형으로 둔 조식, 조충과 같은 쪽으로, 사마소가 태자를 사마유에서 사마염으로 바꾼 것은 조조가 조식에서 조비로 바꾸었던 것과 거의 똑같은 형식이고, 사마소에게 크게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조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2] 사마의가 죽을 때 사마유는 고작 4살이였는데 이렇게 어린 나이에도 그 할아버지에게 극찬을 받았던 것이다. 떡잎부터 달랐던 셈.[3] 사마사 생전에 사마유가 양자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사마사가 죽은 후에 사마사의 가계로 입적 되었는지 불확실. 사마사가 사망했을때 사마유는 고작 7세 정도이니 사마사 생전에는 그의 양자로 입적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아보인다.[4] 훗날 경헌황후로 추존되었다.[5] 일각에서는 사마소가 신료들을 떠보는 속셈으로 사마유를 세자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다. 만약 사마유가 사마사 생전에 양자로 입적됐으면 그 당시에 후계자 없는 형을 위해서 아들을 바쳤으나 사마사가 급사하니 족보가 꼬여서 떠봤다는 것이다. 혹은 사마사 사후에 사마유를 사마사의 가계로 입적했으면 큰 아들 사마염보다 더 높은 서열을 작은 아들인 사마유에게 프로젝트처럼 후계자리를 의도적으로 마련했고 마음이 사마유에게 더 갔다는 견해도 있다.[6] 죽림칠현인 혜강의 형이다.[7] 의외로 가충이 사마유에 관한 문제에서 순욱이나 풍담같은 영혼의 콤비들과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았는데, 사마충 이전에 사마유가 가충의 사위였다. 가남풍의 이복언니가 사마유의 부인이었으니 가충 입장에선 누가 후계가 되던 큰 문제가 아니었으리라. 누가 황제가 되던 국구(國舅) 확정이었던 셈으로 가충이 사마씨와 연결고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 해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충은 저 해에 사망했으며 사마유보다도 일찍 죽었다. 딸이 황후가 되는 것도 못 보고 죽은셈이다.[8] 관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돌려 전한 것이다.[9] 선택에 실책을 한 것은 맞지만 사마염 입장에서는 할 말이 있는게, 아들을 못 낳은 가남풍이 설마 자기와 완벽한 공조를 할 수 있는 위치인 의붓아들 사마휼을 죽이는 바보짓을 한다는 것을 예측하기가 쉽지많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사태의 판을 깔아놓은건 사마염 본인인 것은 맞으니 책임은 피할 수 없다.[10] 원래 덕망이나 능력있는 사람으로 인망이 있었는데, 권력을 잡으면서 엄청나게 사람이 변했다고 한다. 어느 시대라고 크게 다르겠냐마는, 이 시대 유독 이렇게 극과 극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았다.[11] 9에서 한 번 나왔다가 짤렸었다.[12] 형 사마염은 히타치인 카오루의 패러디인데, 패러디와는 정반대로 카오루가 동생이고, 히카루가 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