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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6:01:21

죽림칠현

1. 개요2. 실상
2.1. 호평2.2. 비판
3. 고려 시대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4. 강변칠우의 이명5. 같이보기6. 둘러보기

1. 개요

(seven sages of the bamboo grove, 竹林の七賢(ちくりんのしちけん)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당시 위나라진나라의 정권교체기 시대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숲에 모여서 거문고와 술을 즐기면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7명의 선비로,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영(劉伶),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상수(向秀) 를 묶은 말이다.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한다.

죽림이 관련된 이유는 이들이 청담을 논하는 장소가 죽림인데, 탁한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어 죽림은 당시에 청담을 논의하기 위해 좋은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친상에 가면서 거문고를 가져가 연주한 것, 상 중에 고기와 술을 먹는 것, 옷을 벗어던지는 것, 불효의 죄로 고소당한 친구를 변호하는 것 등 당시 유교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많이 했다.

2. 실상

2.1. 호평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후한시대의 청의(淸議)라는 사상에 따라 불의한 정권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식도 있어서 조정에서의 출사권유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의 사상은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시작한 유학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한 3현(三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道德經), 장자(莊子), 주역(周易)의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과 합쳐져서 청담사상을 완성한 공로가 있다. 적어도 이 때까지의 청담사상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유가 이외의 다른 사상에 대한 생각의 확대를 도모했으며 물욕과 권력욕을 억제해서 시대의 한계점은 있으나 나름대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지를 권력자들이 모를 리가 없었고, 결국 탄압받게 되면서 청담사상은 저항의식을 상실하고, 현학도 2류 학자들의 얼치기 따라하기로 인해 망가지면서 청담사상은 사실상 권력가의 취미 겸 헛소리 경연대회라고 볼 수 있는 공담(空談)으로 급격하게 변질했다. 덕분에 청담사상은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해악을 끼치게 되며, 공담을 즐기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한량놀음을 죽림칠현을 본받는 것이다!라고 면피질까지 하면서 후세의 평가까지 덩달아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2.2. 비판

이건 죽림칠현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상하이대 고대정치사상사 교수인 자오찌엔민이 쓴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죽림칠현은 정치적 계산과 출세 목적이 섞인 결사체다. 이 주장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당장 구성원들의 말년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혜강이 사마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다음에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크건 작건 관직 경력이 있으며, 혜강마저도 그 전에는 벼슬을 지낸 적이 있다. 좋게 본 것이 관직에 올라서 술마시고 제대로 일 안 했더라는 것이 고작이고, 심한 경우에는 열심히 일해서 고위관직에 오르다 못해 줄타기까지 한 인물도 나왔다. 이것을 고려하면 후대 인물들이 죽림칠현의 고매한 뜻을 왜곡해서 정작 이들의 평가마저 나빠졌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잃게 된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의식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혜강이나 산도가 출사했다는 것을 듣고 절교서를 보낸 완적 정도이고, 나머지는 단순히 같이 묶여서 같은 평가를 받은 인물들일 뿐이다. 더구나 혜강은 조위의 부마라서 사마씨 집안과 관련해서 출사를 한다는 것이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3]이나 혜강이 세상을 떠날 때도 완적이 크게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혜강을 살해한 사마소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평가가 더더욱 박해진다.

속세와 연을 끊는다더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호화로이 살던 이들이다. 좀 더 악평을 하자면 위말진초에 한적한 도성 교외에서 청담 읊으면서 술 잘 마신 걸로 유명해진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지도. 다만 혜강은 끝내 사마씨 정권이 싫어 나름대로 절의를 지키다가 죽었으니 그만은 좀 높게 칠수도 있겠다. 그가 죽었을때 많은 태학생들이 그의 사형을 말리려 했던것만 해도 명성이 헛된것이 아니었고 말이다.

3. 고려 시대의 모임인 죽림고회(竹林高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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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고려에서 이들을 본뜬 모임으로 죽림고회가 있으며, 처음에는 죽림고회로 쓰다가 나중에 죽림칠현으로 고쳤다.

4. 강변칠우의 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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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들의 서자들 7인이 만든 단체 강변칠우의 이명이다.

5. 같이보기

6. 둘러보기

죽림칠현(竹林七賢)
산도 왕융 유영 완적 완함 혜강 상수



[1]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퇴위 후에 임명된 직위 산양공이 바로 이 산양이다.[2] 산도의 아버지의 고종사촌(고모의 딸)이 사마의의 부인이 되는 장춘화이다.[3] 여기에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여하려다가 산도의 만류로 그만둔 사례도 있다. 혜강은 세상이나 관직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사마씨 정권이 싫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