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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5:59:55

관구검

위서(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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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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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구(毌丘)
(儉)
중공(仲恭)
아버지 관구흥(毌丘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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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사례(司隸)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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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2.2. 공손연의 난2.3. 고구려와의 전쟁2.4. 대오 전선2.5. 관구검의 난2.6. 사후
3. 삼국지연의4. 이름 논란: 무구검?5. 기타6. 미디어 믹스

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사례 하동군 문희현 사람으로[2] 는 중공(仲恭)이며 관구흥의 아들, 관구수의 형. 관씨가 아닌 관구씨다. 혹은 원래 무구 씨인데 기록의 오류로 관구 씨가 됐다는 설도 있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를 침공해 동천왕과 싸워 2번 패배하고 한번에 역전하여 수도국내성을 함락시키고, 옥저에 쳐들어가서 큰 피해를 입힌 인물로 알려져 있다.

2. 정사 삼국지

2.1. 초기 생애

평원후문학 관구흥의 아들로 부친 사후에는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조비가 태자였을 때부터 친했기에 후대를 받았고 수경주에 따르면 조비 때 홍농태수를 지냈다고 한다. 조예가 태자이던 시절엔 조예의 태자문학을 담당하여 예우와 신임을 받았으며 황제가 된 조예가 사치와 향락을 부리자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후 형주, 유주, 예주 등 각지의 지방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공손연과의 전쟁 이전에 오환족의 선우인 구루돈 등과 교섭하여 국교를 맺는 성과를 거둔다.[3]

2.2. 공손연의 난

관구검은 요동 일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공손연에 대한 토벌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형주자사에서 유주자사로 전임되었는데, 237년에 요동 지역의 지형적 어려움, 3대에 걸쳐 40년을 넘게 지배하면서 기반이 공고하다는점을 들어 조정에서는 원정에 대한 반대여론이 크게 일었지만 조예의 지시에 따라 오환족선비족을 거느리고 공손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공손연의 저항으로 요하를 넘지 못한 채 요수에서 발이 묶이게 되었고, 장마철이 되어 요하가 범람하자 요동에서 우북평으로 철수하였다.

신하들의 반대를 찍어누르고 우격다짐으로 시작한 원정을 실패하였음에도 조예와의 각별한 관계, 자연재해로 인한 점이 참작되어 별다른 질책을 받지는 않았다.

관구검이 격퇴당한 뒤에 공손연이 연왕을 칭하고 독립하자, 238년에 위나라는 공손연 정벌을 위해 4만의 대군과 함께 사마의를 급파하였다. 사마의는 요동으로 진군하면서 우북평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던 관구검의 군대를 휘하에 편입하고, 성공적으로 공손연을 정벌하여 선비족과 고구려와 함께 동연을 무너뜨렸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안읍후로 승진하였다.

2.3. 고구려와의 전쟁

242년, 고구려동천왕이 위나라의 서안평을 선제공격하자 쌍방간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관구검은 가을 8월에 1만[4]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다.[5] 동천왕은 보병 2만 명을 동원해 비류수 전투에서 맞붙었다. 관구검은 3천 명이 전사하는 등 대패했다. 이후 양맥곡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관구검은 또다시 3천 명을 잃었다.

연승을 한 동천왕은 "이제 관구검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며 기병을 직접 지휘해 관구검을 공격했다. 동천왕은 결사항전하는 위군의 방진에 막혀 패퇴한 뒤 동옥저로 달아났다.[6] 위군의 대반격으로 고구려군은 2만 병력 중 1만 8천을 잃고 궤멸된다.

단, 중국의 《위서》나 진수의 《정사 삼국지》 등에서는 막판 역전승이 아닌 계속된 승전으로 기록[7]했으며 밀우의 결사적인 항전과 유유의 암살로 인한 혼란도 나와있지 않다. 《삼국사기》 밀우•유유 열전에서는 죽은 장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그냥 '위나라 장수(魏將)'라고만 쓰여있으며, 정사 삼국지에서는 왕기(王頎)가 현도군태수로 고구려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행적이 보이는 것을 봐서는 왕기 본인이 아니라 왕기군의 선봉장이 암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관구검은 겨울 10월에 현도태수 왕기에게 동천왕의 추격을 맡겼고, 그 자신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성까지 진격하여 함락시키고는 성에 불을 질러 '견디지 못하는 성'이라는 뜻을 가진 불내성이라는 글자를 새겼다.[8] 그뿐 아니라 승리를 기념해 동북쪽 숙신의 남쪽 경계에 고구려 정복을 기록한 관구검기공비를 세우고 돌아간다. 이 관구검기공비 비석은 땅속에 묻혀있다가 1906년 도로공사 중에 일부 파편이 다시 발굴됐다.기사 이렇게 고구려의 동천왕은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가 신하 밀우가 이끄는 결사대의 항전과 유유의 목숨을 건 사항계로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단, 우리나라와 중국의 기록이 다르므로, 실제로 어떠했다고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다.

고구려 초기 역사는 현대까지 남은 사서가 많지 않아서 《삼국사기》와 중국 기록에 의존해야 하는데, 관구검의 고구려 침공 때문에 《정사 삼국지》에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한 줄이라도 더 늘어나게 되었다. 덕분에 중국사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은근히 인지도가 있다. 특히 삼국시대의 인물 중 한국사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공으로 관구검은 좌장군이 되고 이후 진남장군이 되었다.

2.4. 대오 전선

252년, 제갈각과의 동흥 전투에서 좌군을 맡았지만 우측의 제갈탄이 무너지자 즉시 퇴각하였다. 이에 패전한 제갈탄을 대신하여 진동장군에 임명되어 오나라 방면 방어를 맡게되었다.진동장군이 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모종의 이유로 제갈탄에게 찍혀 좌천당할 상황에 쳐해있던 장특의 능력을 알아보고 신임하여 아문장으로서 합비신성을 담당하게 하였다.

253년, 제갈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한 합비 전투에서 장특이 90일간 성을 지키면서 손오의 20만 대군이 지치자 비로소 군을 이끌어 대파 하였고 이후 제갈각은 몰락하였다.

2.5. 관구검의 난

255년, 자신과 교분이 있던 하후현, 이풍 등이 사마사에게 주살되고 역시 사마씨에 원한이 있던 양주자사 문흠[9]을 후대하여 두 사람의 우의가 돈독해졌고 문흠 또한 감격하여 (관구검을) 떠받들고 성심으로 대하며 두마음을 품지 않았다. 이후 사마사의 전횡이 심해지자 분노해 황제 조모에게 사마씨의 죄상을 적어 올리고 태후 명원황후의 조서를 칭탁해 대장군 사마사의 죄상을 적어 여러 군국(郡國)에 돌리고 문흠함께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흠은 아들 문앙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사마사의 대군에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여 마침 수춘으로 북상하던 오나라에 투항하고 남돈은 왕기에게 점령당하며 수춘성은 제갈탄에게 빼앗겨 투항자가 속출하자 홀로 항성에 남게된 관구검은 사마사에 대항해 싸우다가 패해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던 도중에 안풍진 도위부의 백성인 장속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속은 그 공으로 후(侯)에 봉해졌으며 관구검의 목은 낙양으로 보내져 효수되었다.

2.6. 사후

관구검의 손자이자 관구전의 아들 관구중, 동생 관구수는 목숨을 건져 오나라로 도주했다.

장남인 관구전은 치사시어사로 낙양에 있었는데 도망치려다가 잡혀 주살당했다.

관구전의 부인인 순씨는 친척인 순의, 순우 등의 탄원으로 사면되었다. 임신 중인 관구전의 딸 관구지도 주살 대상이 되었으나, 어머니 순씨가 하증에게 탄원해 사면되었고 이후 출가한 여자는 연좌제가 붙을 땐 친정집이 아닌 시가(媤家)의 구성원으로 계산되어 처리되는 식으로 법령이 개정되었다.

차남인 관구종오나라에 사자로 가서 목숨을 건졌는데 훗날 서진이 삼국을 통일해 오가 망하자 사면됐다. 관구종은 아들 관구오와 함께 서진에서 벼슬을 살았다.

관구검의 난에 제갈탄수춘을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우나 2년 뒤 제갈탄 역시 똑같은 땅에서 똑같은 반란을 일으킨다. 사실 관구검의 난 이전에 왕릉수춘에서 반란을 꾀했던 적이 있다. 10년도 안되는 기간에 수춘에서 3번이나 반란이 일어난 것. 다만 3번의 반란 모두 적진은 같은 세력(사마씨)의 다른 구성원이었으나 반란 주동자는 달랐다.[10]

3. 삼국지연의

행적의 큰틀은 정사와 같지만 디테일적인 부분에서는 꽤 피해를 봤다. 연의의 요동 정벌은 사마의가 다른 네임드 무장들을 대거 대동한 것으로 묘사되었고 이들이 공적도 꽤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관구검이 한 것이라고는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상소를 올린 것이 사실상 끝이다. 최후의 묘사도 도망치던 도중 신현의 현령 송백에게 의지했다가 술에 취해 자던 중 목이 잘려 죽어서 정사보다도 더 추하게 처리되었다. 주요 전공인 고구려 원정이 잘린 것은 덤. 그나마 관구검의 거병을 조위에 대한 충성심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하여 충신으로 추켜세워주기는 했다. 이외에는 관구전이 수도에서 관구검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 관구검의 휘하에 있던 것으로 나온다

4. 이름 논란: 무구검?

관구검이 아니라 무구검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일단은 무구검 항목으로도 리다이렉트 가능.

이는 이름의 毌(꿰뚫을 관)과 毋(말 무)가 거의 비슷하다보니 혼선이 생긴 경우로 볼 수 있는데 링크의 기사에서는 무구씨조상비(毋丘氏造像碑)를 언급하면서 무구검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구오가 한자를 잘못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으며 위키백과에서는 위나라 관구 지역에서 성이 창씨했기 때문에 관구검이 맞다는 주장을 기록하고 있고, 이 외에 毋의 음은 성 혹은 지명에서는 관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자치통감 등 다른 역사서에서 '무구검'으로 표기하기도 한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일단 권중달 교수역에는 관구검으로 표기했다. 그리고 관구가 더 익숙하다보니 삼국지 관련 작품들에서도 관구검이 더 많이 쓰인다.

너무나 비슷한 글자이다 보니 폰트에 따라 글자가 서로 반대로 나오기도 한다. 윅셔너리 링크나 창 제목에 있는 글자와 본문에 있는 글자가 엇갈려 있다. 고대에도 혼동으로 인한 오기가 빈번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관: https://en.wiktionary.org/wiki/毌
무: https://en.wiktionary.org/wiki/毋

관구씨와 그 연원에 대한 중국어 위키백과에는 해당 글자의 발음을 'Guàn'이라고 특별히 명시해 놓았으며, 영어 위키백과 항목도 'Guanqiu Jian'으로 되어 있다.

중국어 위키백과의 관구씨 항목: https://zh.wikipedia.org/wiki/%E6%AF%8C%E4%B8%98%E5%A7%93

5. 기타

우연히도 그가 벌인 대부분의 전투에서는 1차전에서는 졌다가 2차전에서 철저히 되갚아주는 양상을 보였다. 공손연과의 전투에서는 1차전에서는 패전 했지만 2차 전투에서는 공손연을 몰락시켰으며, 동천왕과의 전투에서는 양맥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이후 비류수 전투에서 고구려를 멸망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제갈각과는 동흥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지만 이후의 합비 전투에서는 제갈각을 몰락시켰다.

6. 미디어 믹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관구검/기타 창작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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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아버지 관구흥의 작위를 계승한 것이다.[2] 관구씨의 출생지는 후한의 효자 관구장(毌丘長)이 교동군(膠東郡) 안구현(安丘縣)이라 나오고 삼국시대에는 하동군 문희현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관구흥까지는 불확실하다.[3] 물론 외형상으로는 구루돈이 위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는 각국의 필요에 의해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의전이었다.[4] 10만이라는 설도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5] 침공 연도는 《삼국사기》에서는 246년으로, 《관구검기공비》에는 24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담으로 이때 부여가 위군에 군량을 제공했다.[6] 삼국지 위서에는 북옥저, 삼국사기에는 남옥저로 서술되어있다. 대략적으로 옥저 근방으로 이해하면 된다.[7]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관구검은 여러 군사들을 지휘하여 보기 1만 명을 이끌고 현도(玄菟)를 출발하여 여러 길을 따라 고구려를 토벌하였다. 고구려의 왕은 보기 2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비류수(沸流水) 상으로 가서 양구(梁口)에서 대전을 벌였다. 고구려군을 연달아 쳐부수고 관구검은 마침내 말과 수레를 묶어 환도성에 올라 고구려의 수도를 도륙내고 수천 명의 목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중략) 고구려 왕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나 숨자 관구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정시 6년(245년)에 다시 고구려 정벌을 하였다. 고구려 왕이 매구(買溝)로 달아나자 관구검이 현도태수 왕기(王頎)에게 추격하도록 하였다. 옥저 땅 1천 리를 지나서 숙신씨(肅愼氏)의 남쪽 경계에 이르러 각석기공(刻石紀功)하였으며 환도산에 ‘불내성(不耐城)’이라 새겼다. 한마디로 개털렸다 8천 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논공을 하여 상을 받은 자가 백여 명이었다.” 우리나라 기록에서는 고구려군이 막판에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나오나 중국 기록에서는 대체로 계속된 승전으로 괴멸시킨 것으로 나온다.[8] 라는 것이 중국 사서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불내국이나 불내현이라는 지명이 옥저동예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이 “불내성”이라는 단어는 정말 견디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이 불내 지역으로 피신한 것을 조롱하는 의미일 가능성이 더 높다.[9] 문흠은 조상의 동향인으로, 용맹과감하고 거칠고 사나워 수차례 전공을 세웠고 적과의 전투에서의 노획품을 부풀려 보고하길 좋아해 이로써 조정의 포상을 구했으나 대부분 허락되지 않자 원한(怨恨)이 날로 심해졌다고 한다.[10] 왕릉사마의, 관구검은 사마사, 제갈탄사마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