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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28 19:47:19

두예

將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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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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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좌전벽(左傳癖)
두보(杜父)
杜預
두예
파일:external/e.hiphotos.baidu.com/a50f4bfbfbedab64b7ad38b9f736afc378311eef.jpg
시호 (成)
작호 풍락정후(豊樂亭侯)→당양현후(當陽縣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杜)
이름 (預)
원개(元凱)
부친 두서(杜恕)
생몰 222년 ~ 285년
고향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두릉현(杜陵縣)
사망지 형주(荊州) 남양군(南陽郡)) 등현(鄧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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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조환), <colcolor=#000> 상서랑(尙書郞)
참상부군사 →
진서장군부(鎭西將軍府) 장사(長史)
서진,(사마염), 하남윤(河南尹)
안서군사(安西軍司)
진주자사(秦州刺史)겸 동강교위, 경거장군, 가절(假節)
면직[1]
탁지상서(度支尙書)
면직[2]
탁지상서(度支尙書)[3]
행 평동장군(行 平東將軍)겸 정남군사(征南軍司)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
사례교위(司隷校尉)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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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오나라 정벌 전까지2.2. 오나라 정벌2.3. 오나라 정벌 후
3. 일화4. 두예 좌전학에 대한 찬반5. 미디어 믹스

[clearfix]

1. 개요

중국 서진의 학자이자 명재상이며 오나라를 멸망시킨 사령관으로, 파죽지세라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토목, 병법 등에도 막힘이 없었다. 거의 만능 같지만, 무관(군인)으로는 일신의 무예만은 확실히 부족했던 소위 지장(智將)형이었다. 는 원개(元凱).

세설신어(世說新語) 방정(方正)에서 왕은의 《진서》에 인용한 기록에는 두예의 자는 원개이고, 경조 두릉 사람이다. 한나라 어사대부 두연년의 11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의사위로 출세를 함은 물론, 그 덕에 죽을 위기도 수차례 넘겼다. 아들로는 두석, 두제(杜躋), 두탐(杜耽) 등을 뒀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양호, 왕준과 더불어 마지막 회인 120회에서만 등장하는지라 비중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못하지만 손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어 대단원을 장식한 인물로서 등장한다. 이런 비중 정도인 연의와 달리 실제 정사에서는 매우 대단한 인물이다. 황하에 대교를 놨고, 통일 후 형주 중부와 남부를 잇는 운하를 뚫었다. 너무 유능하다 보니 63세로 타계할 때까지 사마염이 잠시도 쉬게 두지 않았다.

훗날 손자인 두예의 딸 두릉양동진성제 사마연에게 시집가면서 외척의 가문이 되는가하면, 소연이 세운 양나라에서는 두예의 후손인 경조 두씨(京兆杜氏) 일족이 명문가로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다. 다만 이들은 양나라의 대표적인 전란으로 꼽히는 후경의 난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2. 생애

2.1. 오나라 정벌 전까지

명문 출신이었지만 아버지 두서사마의와 대립하다 좌천되었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하다가 사마소의 여동생 고육공주(高陸公主)와 결혼하여 비로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상서랑에 임명되었고 조부 두기의 작위인 풍락정후를 계승했으며, 상서랑을 지내고 4년 후에는 참상부군사가 되었다.

263년에는 진서장사로 임명되어 위관 휘하에서 정촉군에 들어가 촉한으로 진공하기도 했으며, 부하들이 종회의 반란으로 해를 입는 와중에 지혜를 통해 화를 면하고 식읍이 1150호가 더해졌으며 위관등애 모살을 비판하였다. 이때 위관의 등애 살해에 대해 앞장서 비판한 것 또한 그의 이미지 상승에 꽤 영향을 줬다고 보이는데....

이 부분이 묘한 게, 청대 초순 이래 두예란 인물은 아버지 원수의 사위가 되고 그들의 패악질을 곡학아세로 옹호한 정의감과는 거리가 먼 어용학자, 출세주의자 이미지가 적지 않게 있기 때문. 실제로 대인관계에 조심스럽다 못해 뇌물도 서슴지 않는, 딱히 절의나 강직한 면모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등애와 종회의 공백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정촉의 1등 공신이 되어 이후 실세까지 오를 위관의[5] 잘못을 비판한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지만, 처신 잘못해 망한 아비 덕분에 앞길이 막혔다가 정략성 다분한 결혼으로 간신히 정계에 발을 딛은, 녹록치 않은 세상의 쓴맛을 보고 눈치밥을 어느 정도 먹었을 이 출세주의자 입장에선 해볼 만한 시도로 비춰졌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어쨌든 등애를 죽인 위관의 행동에는 쉴드를 쳐 줄 구석이 없었고, 실제 당시 여론도 썩 좋지 않았으니, 두예 스스로 자신의 빽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 결과, 이 정도면 사마소 눈밖에 나지 않으면서 여론에 편승해 평가를 높일 기회로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속 좁은 사마소라지만, 등애가 신경 거스르긴 했어도 딱히 반 사마씨 파벌을 이룬 것도 아닌데 (애초 파벌을 이룰 만큼의 인망도 없었고) 그거 좀 편들어서 정권에 이렇다 할 누가 되지도 않고, 누이까지 시집 보낼 만큼 믿어준 자신을 하루아침에 내치진 않겠단 저울질이 있었을 듯 하다. 또한 그런 이유가 아니고서야 억울하게 죽은 황제의 죽음에는 입 싹 씻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은 장수의 죽음에 갑자기 정의감 폭발해 분개했을 리가 없다는 말도 있다.[6]

다만 두예의 위관 비판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자면, 우선 두예의 인간성에 대한 저런 견해 자체가 두예의 좌전학에 비판적이었던 청나라 고증학자들의 일방적인 견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점과, 그리고 과연 등애를 변호하는 것이 자기 평판을 높이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 하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이야기 해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후술의 청대 이후의 평가를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반론을 제기하자면, 그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명문가 출신에, 뭔가 인상적이면서도 호감가는 외모, 그리고 목소리 톤이나 크기가 괜찮고 말도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언변' 의 3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소위 말하는 명사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가문 좋고, 잘생기고, 말도 좀 듣는 사람 듣기 좋은 목소리로 하는 놈이 인성도 좋은 놈이란 평가를 듣고 명사들 사이에서 이름도 나며 추천도 받아서 관직에도 오르고 했던 것.[7]

그런데 등애는 애시당초 당시 명사들이 보기에는 근본없는 가문 출신이라 능력이 어떻든 간에 명사들 사이에 별로 좋은 취급을 못 받을 사람이었는데, 외모가 그다지 좋지도 않았던 것 같고 결정적으로 말을 더듬어서 여기저기서 비웃음을 엄청 사던 인물이었다. 실력이 있다 보니 중용이 되기는 했지만, 애시당초 그 시대에서 고매한 평가를 받기는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 거기다가 엄청나게 독선적이고 자뻑도 심하다 보니 인격적으로도 결함이 있어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등애의 죽음 때문에 여론이 안 좋았다느니 위관의 행위가 쉴드를 쳐 줄 구석이 없다거나 하는 서술이 있지만, 당시 평으로는 위관의 행위는 반역을 미연에 막았다는 평가까지 들으면서 쉴드를 쳐 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었고, 등애를 죽이고자 했을 때 아예 앞장서서 죽이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을 보면 여론이 마냥 위관을 욕하는 쪽도 아니었고, 오히려 위관을 옹호하는 쪽이 대세였던 것으로 보이는 서술들도 있다. 여론이 그렇게까지 좋지 않았다면 위관이 저 행위 때문에 두예 말고도 다른 네임드들에게 여기저기서 욕 먹고 안 좋은 소리 들은 일들이 있어야 했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 심지어 등애가 죽은 다음 농우의 민심 이반을 두려워하여 사마소가 보낸 특사 당빈은 그 동네를 시찰하고 와서는 사마소 앞에서 그 동네에서 등애가 저지른 인성질과 행패를 맹비난했다. 등애 문서로.

그리고 위관은 두예를 찾아가서 일의 전말을 설명해 줬고 두예는 수긍을 한 건지 그 뒤로는 별 말이 없었던 듯 하다. 애시당초 두예가 엄청난 정의파는 아니었겠지만 그렇다고 저런 걸로 자기 명성을 높이고자 계산기나 두드리는 인물이라고 보기도 무리인 것이다.[8] 좀 더 긍정적으로 두예의 이 행동에 대해서 평가해 줄 여지가 있다면, 당시 조정의 여론은 등애가 억울한 면이 있긴 해도 죽을 만 해서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민간의 여론은 그렇지 않은 면도 있었다는 점에서[9] 두예가 명사들이 아닌 일반인들의 여론을 반영해서 했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거기장군 가충(賈充) 등과 더불어 율령을 정했는데 완성되자 두예는 그것의 주해를 달고 마침내 상주를 올려 말하길,
법이라는 것은 대체로 밧줄과 먹줄처럼 결단을 내리는 예이지 궁리진성의 책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글은 간략하고 예는 직접적이며 결정은 명백하고 금지는 단순해야 합니다. 예가 직접적이면 쉽게 알 수 있고 금지가 단순하면 범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알 수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할 것이고 범하기 어려우면 형벌을 쓸 일이 없습니다. 형벌의 근본은 단순하고 직접적인데 있으니 반드시 명분을 살펴야 합니다. 명분을 살피는 것은 반드시 작은 도리를 세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옛날의 형서는 종과 솥, 금석에 새겼는데 일찍부터 이단을 막고 교활한 변명을 하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주를 단 것은 모두 법의를 망라하고 명분을 궁구한 것입니다. (또한) 이를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분과 조례에 근거하여 살펴 취사하게 해 밧줄과 먹줄의 곧음을 펼치고 세쇄한 원리를 버리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서를 내려 천하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태시 연간에 하남윤이 되었다. 일단 처음부터 생각이 트였는지 하남윤 시절에 진나라가 세워지자 인재 등용 제도를 정비하는 임무를 맡아, 조서를 받들어 출척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듣기로 상고의 정치는 자연을 따라 자신을 비우고 성실을 구하는데 믿고 따르는 도가 응하면 정신과 마음이 감통하여 천하의 이치를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순박함이 점차 흩어지고 아름다움과 악함을 드러내자 관직을 설립하고 작록을 반포하며 육전을 널리 펴서 상세히 고찰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명철한 신하의 보좌를 받고 충성스럽고 올곧은 관리를 세워 명성이 공로를 뛰어넘어 홀로 아름다울 수 없게 하고 공로가 명성에 뒤쳐져 홀로 숨지 않도록 하는데 있어서는 대체로 널리 의견을 구하고 채택하였습니다. 말세에 이르러서는 멀리 있는 곳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밀한 것들만 구했는데 여러 심복들을 의심하고 이목을 믿으며 (또한) 이목을 의심하고 공문에 쓰인 글자를 믿게 되었습니다. 공문의 글들이 더욱 번잡해지면 관리들은 더욱 속이게 되고 법령이 늘어나면 교묘하게 속이는 것이 더욱 많아집니다. 옛날 한나라의 자사들도 한 해를 마칠 때 (일년의) 일들을 상주하였는데 공과를 계산하는 제도가 없었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대략만 열거하였습니다. 위씨의 고과법은 곧 경방의 유의인데 그 글들이 가히 지극히 세밀하다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너무 세밀하여 본체를 어겼으니 이런 연고로 역대에 통행하지 못했습니다. 어찌 당요의 구전을 펼쳐 세밀한 것을 버리고 간략한 것을 취해 간략한 것으로 말미암아 쉽게 따를 수 있는것과 같겠습니까? 무릇 사물의 원리를 궁구하여 마음에 통하고 밝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버리고 법에 맡긴다면 도리를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과거의 우열은 현달한 관리들로 하여금 자신의 통솔하는 관리의 성적을 매기게 하는것보다 못합니다. 관직에 있은 지 1년 후에 매해마다 우수한 사람 1명을 상제로 삼고 열등한 사람 1명을 하제로 삼아 이로 인해 통계를 내서 공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6년을 하여서 주관하는 사람은 공부를 모두 모아 6년 동안 우수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넘어 임용하고 6년 동안 열등한 사람은 파면하도록 주청하고 우수한 게 열등한 것보다 많으면 서용하고 열등한 게 우수한 것보다 많으면 좌천시킵니다. 지금 고과의 품평이 맡고 있는 사무가 모두 다르기에 그 쉽고 어려움에 있어 고르지 못합니다. 만약 어려운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수를 얻고 쉬운 일을 하는데도 열등을 얻게 되면 주관하는 사람은 진실로 응당 경중을 헤아려 약간이라도 높낮이를 조절해야지 다시 이를 구부려 법에 완전히 알맞도록 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축조서》는 고과의 법도가 이루기 어렵다하여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추천하는 원리도 곧 또한 풍문에서 취한 것입니다. 6년만에 갑자기 추천이 들어오고 승진하고 좌천하는데 점진적이지 못하니 또한 옛날 3년에 한 번 (업적을) 고찰했던 본의가 아닙니다. 지금은 매년 한 번 고찰하여 우수를 누적시켜 승진하고 열등을 누적시켜 좌천시킵니다.

사군자의 마음으로 생각하건대 6년 동안 여섯 번 좌천하는 청렴하고 유능한 관리가 없고 여섯 번 승진하는 무능한 관리가 없을 것입니다. 감사가 장차 또한 수시로 탄핵할 것입니다. 만약 상하가 공공연히 서로의 잘못을 포용해준다면 이는 청의가 크게 무너진 것으로 또한 승진과 좌천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위나라의 인재등용제도인 구품관인법을 버리자는 건의를 올렸다. 하지만 두예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례교위 석감이 묵은 감정으로 두예에 관한 탄핵 상주를 올리니 면직하였다. 당시에 독발수기능이 농우를 침범했는데 두예를 안서군사에 임명하고 병사 300명 기병 100필을 주었다. 장안에 도착하자 다시 진주자사에 제수하고 동강교위, 경거장군, 가절을 겸하도록 했다. 적군의 병세가 강성한 때를 당하여 석감은 당시에 안서장군으로 있었는데 두예로 하여금 출병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두예는 적군이 병사가 강하고 말들이 살졌는데 관군은 역량이 궁핍하니 마땅히 힘을 모아 좋은 시기를 기다려 모름지기 봄이 퇴면 진군하여 토벌해야 한다고 여겨 다섯 가지 하면 안 되는 일과 네 가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진술하였다. 석감은 대노하여 다시 상주를 올려 두예가 자기 마음대로 성문, 관사를 수식하고 출군을 늦춰 군량을 소진한다고 탄핵하였는데 어사를 보내 함거[10]에 넣어서 정위에게 보내도록 하였다.[11] 두예는 공주와 결혼하였으므로 형벌을 감경해주는 8가지 사안에 해당하여 후작으로 속죄 하도록 판결하였다. 그 후에 농우의 일들은 끝내 두예의 예측대로 되었다.

당시에 조정은 모두 두예가 책략에 밝다고 여겨 흉노의 수령 유맹(劉猛)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니 병주의 서쪽에서부터 하동, 평양에 이르는 곳까지 두예로 하여금 산후의 신분으로 궁정에서 계책을 세우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탁지상서로 임명하였다. 두예는 이에 적전을 세우고 변방을 안정시키며 군국의 중요한 사무에 관한 결정을 상주하였다. 또한 상평창을 일으키며 곡가를 정하고 소금운반을 감찰하며 조세법을 제정하는 등 안으로는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바깥으로는 변방을 구하는 방법 50여 조를 (상주했는데) 모두 채납하였다. 석감이 군무로부터 돌아와 논공하는 것이 실질에 맞지 아니하므로 두예에게 탄핵당했는데 마침내 서로가 원수처럼 미워하여 심하게 다투므로 더불어 관직을 면하고 후작의 신분으로 본직을 겸하게 하였다. 수년 후인 271년 다시 두예를 탁지상서에 임명하였다.

274년에 무원황후의 장사를 지낼 때 조정에서 상복을 벗자 진규(陳逵)가 태자 사마충은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두예는 마음속으로 예를 갖추는 것으로 충분하며 굳이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예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으나, 사마광은 그의 저서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두예의 의견은 고전을 교묘하게 인용했을 뿐 진규의 의견만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당시의 역법에 차이가 나서 태양의 각도에 맞지 않아 《이원건도력》을 상주하였는데 세간에서 통행하였다. 황하의 맹진의 건널목이 험하기 때문에 부평지에 황하교를 건설하자고 청해 사마염이 이를 따랐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은나라나 주나라가 수도를 세운 지방이고 역대 성현도 만들지 않은 것은 반드시 만들 수 없기 때문인 것이라 여겼다. 두예가 말하길 "배를 만들어 교량으로 삼는다면 이것 바로 하교(河橋)라는 것입니다." 다리가 완성되는 데 이르러 황제가 백료들과 (다리에) 모였는데 술잔을 들고 두예를 향해 말하길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다리는 세워질 수 없었다." 두예가 대답하길 "폐하의 총명이 아니라면 신 역시 미미한 기술을 베풀 수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주나라의 의기[12]한나라에 이르러 여전히 동경의 어좌에 있었다. 한나라 말기의 난리에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 형태와 만드는 방법이 마침내 끊어지게 되었다. 두예가 창의적으로 만들어 상주하니 황제가 굉장히 기뻐하고 찬탄하였다. 함녕 4년(278) 가을 큰 비가 오고 메뚜기 떼가 발생하였다. 두예는 상소를 올려 중요한 농사에 관한 사안을 진술하였으니 이 일은 《진서》 《식화지》에 있다.[13]

2.2. 오나라 정벌

당시에 사마염이 암암리에 나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품고 있었는데 조정의 의론이 황제의 뜻에 많이 위배되었지만 276년에 양호, 장화와 함께 오나라 토벌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양호가 병에 걸리자 두예를 천거하여 자기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본래의 관직으로 부절을 받아 평동장군의 사무를 대행하고 정남군사를 겸했다. 278년 11월 26일에 양호가 죽은 때에 이르러 그의 천거로 진남대장군,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추봉거, 제이부마를 주었다. 두예가 진에 이르자 병기를 수선하고 위력을 보였으며 임지인 양양으로 내려가 정예병을 간택하여 오나라의 서릉독 장정을 습격하여 크게 깨트렸다. 이 공로로 봉읍 365호를 더했다. 장정은 오나라의 명장으로 요해지에 주둔했으면서 아무 준비 없이 패배한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사망한 병사의 실제 수를 손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두예는 오나라 변방의 장수를 이간시키고자 표를 올려 잡은 포로들을 손호에게 돌려보냈다. 손호는 과연 장정을 불러들이고 무창감 유헌을 보내 대신하도록 하였다. 그런 이유로 대군이 임하는 데 이르러 그 장수를 바꾸게 하니 이로써 멸망의 태세가 갖춰졌다.

두예가 앞으로 할 처분을 이미 정하자 이에 오나라를 정벌할 시기를 주청하였다. 황제는 다음해가 돼서야 대규모 거병을 하고자 한다는 대답을 했는데 두예가 표를 올려 상책을 진술해 말하길
윤월로부터 적들은 다만 경비를 삼엄하게 할 뿐 하류로부터 병사를 상류로 불러 올린 적이 없습니다. 사리와 형세에 비추어 추측컨대 적의 역량이 부족하여 양쪽을 완전하게 방어할 힘이 모자르니 반드시 먼저 상류를 보호하고자 할 것이고 하구의 동쪽을 부지런히 보호하면서 생명을 구차하게 연장할 뿐 많은 병사를 서쪽으로 파견하여 나라의 수도를 텅 비울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폐하는 간언을 잘못 들어 훌륭한 계책을 버리고 적군에 대한 근심이 생겨나는 것을 방임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국가의 장래를 도모하는 것이라 병사를 일으켜서 실패한다면 거병하지 않는 게 옳습니다. 일을 처리하는 계획은 완벽하기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혹 성공한다면 태평의 기초를 여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한다면 일정한 시간을 소모하는데 불과할 것인데 어찌 그것을 아껴 한번 시험해보지 않는 것입니까! 만약 수년 뒤를 기다린다면 하늘의 시기와 사람의 일이 항상 일정하지 않아 신은 더욱 어려워질까 두렵습니다. 폐하께서 이전에 가졌던 생각으로는 신 등에게 나눠 명령하길 국경을 따라 나눠 전진하되 각자가 지닌 계획의 동쪽과 서쪽이 마치 부절처럼 들어맞아 만전지책으로 패배할 우려가 없었습니다. 신은 실로 마음속으로 그 계획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감히 애매한 견해로 후환을 자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이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두예가 10여 일 후에 다시 표를 올려 말하길
양호와 조정의 신하들의 의견이 다른 곳이 많아 공중과 널리 계획을 상의하지 않고 몰래 폐하와 더불어 이런 계책을 시행했기에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이의를 가지게 만들었습니다. 범사에 있어 응당 이해로 계산해야 하는데 지금의 거병은 십중팔구가 이득이고 그 중의 일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공업이 없는 데 그칩니다. 그들이 말했던 질만한 형세를 얻을 수 없고 다만 계책이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았고 공로가 자신의 신상에 있지 아니하니 각자가 일전에 했던 자신의 말을 치욕스럽게 여겨 주장을 고수할 뿐인 것입니다. 근래의 조정에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다른 의견이 많았는데 비록 사람의 마음이 다르다 하더라도 또한 은총을 믿고 후환을 고려하지 아니한 연고로 가볍게 서로 간에 다른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한나라의 선제는 조충국의 상소를 의논하는 데 일의 효험이 나타난 연후에 이의를 가진 사람들을 책망하니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고 이로써 이단을 막았습니다. 가을 이래 적을 토벌하는 형세가 파다하게 드러났습니다. 만약 지금 중지하게 된다면 손호는 두려워하여 계책을 짜내 혹 무창으로 도읍을 옮겨 더욱 완전하게 강남의 여러 성을 보수할지도 모릅니다. 거민들을 멀리 옮기고 성을 공격해 함락시킬 수 없으며 들판에는 약탈할 만한 게 없고 커다란 함선을 하구에 모아 놓는다면 명년의 계책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당시에 황제와 중서령 장화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때마침 두예가 올린 표가 도착하였다. 장화는 바둑판을 밀어내고 두 손을 모아 말하길
폐하께서 성명신무하여 조정 내외가 깨끗하고 평온하며 국가는 부강하고 군대는 강성하여 호령에 따르는 것이 마치 한 사람 같습니다. 오나라의 군주는 황음, 교만하고 포학스러워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죽이니 당금의 토벌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마염이 마침내 허락하였다.

두예는 280년 정월에 강릉에 군진을 펴고 참군 번현, 윤림, 등규, 양양태수 주기 등을 보내 무리를 이끌고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명령을 내린 후 10여 일만에 누차 성읍을 공격해 이기니 모두 두예의 계책 같이 되었다. 또한 아문 관정, 주지, 오소 등을 보내 기병(奇兵) 800명을 이끌고 밤에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악향을 습격하는데 깃발을 많이 꽂고 파산에 불을 지르며 요해지에서 나와 활동함으로써 적의 군심을 빼앗도록 하였다. 오나라의 도독 손흠이 공황에 빠져 오연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길
북쪽에서 온 군대들이 마침내 날아서 강을 건넜소.

오나라의 남녀로 항복한 사람이 만여 명이고 주지, 오소 등은 악향성 바깥에 군대를 매복시켰다. 손흠은 군대를 보내 왕준(王濬)을 막도록 했는데 대패하고 돌아왔다. 주지 등은 복병을 발하여 손흠의 군대를 따라 성으로 들어왔는데도 손흠은 깨닫지 못했는데 바로 군막에 이르러 손흠을 사로잡고 돌아왔다. 그러므로 군중에서 다음과 같은 요언이 돌았는데
계책으로 전투를 대신하니 한 명으로 만 명을 당한다.

이에 강릉에 가까이 갔다. 오나라 독장 오연은 가짜로 항복을 청하고 군대를 진열하고 성가퀴에 올랐지만 두예는 그를 공격하여 이겼다. 상류를 평정하자 이에 원강과 상수 이남에서 교주, 광주에 이르기까지 오나라의 주군들이 모두 기세를 보고 항복하며 인수를 바쳐 보냈는데 두예는 부절을 들고 황제의 명을 칭하여 그들을 위무하였다. 무릇 죽이고 생포한 오나라의 도독과 감군이 14명이고 아문, 군수는 120여 명이었다. 또한 군대의 위세를 빌려 장사와 둔수의 가문을 이주시켜 강북을 채우고 남군의 옛 땅에 각기 장리를 세우니 형토(荊土)가 숙연하고 오나라 백성들이 투항하여 귀순하는 것이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왕준은 먼저 위에 손흠의 머리를 얻었다고 보고했는데 두예가 이후에 살아있는 손흠을 보내자 낙양의 사람들은 이를 큰 웃음거리로 여겼다. 익주자사 왕준과 더불어 정벌에 나서 강릉을 함락하고 형주를 평정해 오나라로 육박해 들어갈 때 당시에 여러 장군들이 모여 회의를 할 때 혹자가 말하길
백년의 적은 (한꺼번에)전부 공격해 이길 수 없습니다. 지금 여름이 오고 있어 비가 많이 오고 역병이 번질 것이니 응당 오는 겨울을 기다려 다시 대규모의 거병을 해야 합니다.

두예가 말하길
옛날 악의는 제수의 서쪽에 의지해 한 번 전쟁을 치러 강대한 제나라를 병합했는데 지금 군대의 위무가 이미 떨쳐졌고 대나무를 쪼개는 것에 비유하자면 몇 마디 뒤에는 모두 칼이 닿자마자 쪼개져 다시는 손을 댈 곳이 없는 것과 같소.

마침내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내려 곧바로 말릉을 향하도록 하였다. 지나가는 성읍마다 저항 없이 항복하였다. 의논하던 사람들은 마침내 편지를 보내 사죄하였다. 이것이 파죽지세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오나라 정벌 후 군려를 떨쳐 개선하였는데 공로로 작위를 올려 당양현후(當陽縣侯)로 하고 식읍을 증가하여 전의 것과 더불어 9600호였다. 아들인 두탐(杜耽)을 정후에 봉하고 식읍을 1000호로 하며 비단 8000필을 내렸다.

두예가 진으로 돌아오자 누차 세가의 관직을 진술하면서 무장은 그가 잘하지 못한 것으로 퇴직을 청했지만 불허하였다.

2.3. 오나라 정벌 후

두예는 천하가 비록 평안하지만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으로 여겨 군사적 대비를 갖추는데 근면하고 학교를 세웠으니 강한지역의 사람들이 (그의) 덕을 마음속으로 품고 교화가 만 리를 뒤덮었다. 산이(山夷)를 공파하고 둔영을 세우며 요해지를 나눠 점령해 유지하고 있는 세력을 공고히 하였다. 또한 소신신의 유적을 중수하고 치수와 육수 등 여러 강을 막아 이로써 경작지 만여 경을 적시고 밭의 경계를 나누고 비석을 새겨 규칙이 있게 만들어 공사(公私)가 동시에 이득을 얻게 하였다. 백성들이 신뢰하여 자발적으로 '두보(杜父)'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옛날의 수도는 다만 면수와 한수에서 강릉에 이르는 수천백리가 있었을 따름이고 북쪽으로는 통로가 없었다. 또한 파구호가 원강, 상수와 만나는 곳은 내외로 산천이 있어 실로 험고한 지역으로 형만(荊蠻)이 믿고 있는 바였다. 두예는 마침내 양구를 열고 하수로부터 파릉에 달하는 천 여리에 안으로는 장강의 험준한 곳으로 쏟아내고 바깥으로는 영릉과 계양의 조운에 통하도록 하였다. 즉 형주에서 운하를 파고 관개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였다. 남방의 노래에 이르길 "후세에 반란이 없는 것은 두옹(杜翁: 두예) 때문이니 그 누가 지혜와 용맹스러운 공적을 (정확하게) 알겠는가."라고 했다.

두예는 공무에 있어 안다면 실천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무릇 어떤 일을 일으키면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고찰하여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혹자가 두예가 뜻을 세쇄한 곳에 둔다고 비웃자 두예가 말하길 "우나 직의 공로도 세상을 구하는 데 그 뜻이 있었으니 (이것은 나의 뜻과) 거의 비슷합니다."라고 했다. 그는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자 했는데 항상 말하길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이 된다." 돌을 새겨 2개의 비석을 만들어 훈적을 기리고 하나는 만산의 아래에 가라앉히고 하나는 현산의 정상에 세웠는데 말하길 "어찌 차후에 구릉과 골짜기가 되지 않을 것을 알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말을 타지 않았고 화살을 쏠 때 갑옷을 뚫지 않았지만 매번 큰일을 담당함에 있어 항상 장군의 열에 거하였다. 다른 사람과 교우할 때 공손하면서도 예법을 지켰고 물어보면 숨기는 것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일은 민첩하게 하고자 했으면서 말하는 것은 삼갔다.

만년에는 정치보다는 저술에 전념해 여생을 보냈으며, 여러 가문의 족보를 참고하여 『석례(釋例)』를 지었다. 또한 『맹회도(盟會圖)』, 『춘추장력(春秋長曆)』을 지었는데 일가의 학문을 이루었고 노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또한 『여기찬(女記贊)』을 지었다. 당시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두예의 문장이 질박하고 직설적이라 말해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직 비서감 지우(之重)가 찬상하며 말하길 "좌구명은 본래 춘추를 위해 전을 지었는데 좌전이 마침내 스스로 홀로 행해지게 되었다. 석례는 본래 좌전을 위해 지었는데 발명하는 것이 어찌 단지 좌전에만 국한되겠는가? 그러므로 역시 홀로 행해지게 된 것이다."라고 했다.

그 후에 사례교위에 징벽되고 특진의 지위를 더했는데 등현에 이르러 죽으니 당시의 나이가 63세였다. 황제는 매우 슬퍼하면서 정남대장군, 개부의동삼사에 추증하고 시호를 성후(成侯)로 내렸다. 두예는 먼저 유언을 내려 말하길
고대에 합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끝과 시작의 도리를 밝히고자 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중고의 성인이 고쳐서 합장을 한 것은 대체로 (뜻이) 별장과 합장에 있지 아니하고 다시금 생명으로 인해 보여 알려줄 뿐이었다. 이로부터 지금까지 대인군자들은 혹 합장을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였는데 생을 알지 못하고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그런 연고로 각자 자기의 의욕에 따라 한 것이다. 내가 전날 대랑을 지냈을 때 일찍이 공사로 말미암아 밀현의 형산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산 위에 무덤이 있었는데 밭 가는 노인에게 물어보니 정나라의 대부 제중의 무덤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자산의 무덤이라고도 하였는데 마침내 (나는) 따르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제사를 올리고 (주위를) 구경하였다. 무덤은 산의 정상에 만들어 놓았는데 4면의 시야가 확 트여 산체의 남북으로 봤을 때 중앙에 있으면서 동북쪽으로 치우쳐 신정성을 향했는데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하는 데 뜻이 있었다. 그 무덤의 길을 오직 뒷부분을 메웠을 뿐 앞은 비워 놓고 메우지 않았으니 묻힌 것 중에 진귀한 보물이 없음을 보이고 시신을 깊이 매장하지 않았다. 산에 훌륭한 석재가 많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유수의 자연석을 모아 무덤의 재료로 썼다. 공인의 노력을 아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돌이 세상 사람들에게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자는 그 정감이 있는 것을 높이 여기고 소인은 움직일 만한 이익이 없어 천 년이 지나도록 훼손되지 않았으니 검소함이 불러온 결과이다.

나는 작년 봄에 입조하여 곽씨가 죽은 것으로 인해 배릉의 옛 법도에 따라 스스로 표를 올려 낙양성의 동쪽 수양산 남방에 장래의 묘소를 영위할 수 있도록 청했다. 얻은 땅의 가운데에 작은 산이 있고 그 정상에는 무덤이 없다. 그 높이는 현저히 형산에 비교할 게 못되지만 동쪽으로 2릉에 가깝고 서쪽으로 궁궐이 보이며 남쪽으로 이수와 낙수가 보이고 북쪽으로 백이, 숙제를 볼 수 있으니 땅은 넓고 시야는 트여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마침내 나무를 심고 길을 열어 일정한 제도에 따라 (무덤을 건설했다.) 그때에 이르러 모두 낙수의 둥근 돌을 사용했고 무덤의 길을 남쪽으로 향하게 열었으며 방법은 정대부의 것을 따와 검소한 장례로 스스로를 완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관기나 소렴 등의 일들은 응당 이와 비슷하게 해야 할 것이다.

자손이 그의 유언을 전부 따랐다. 아들인 두석(杜錫)이 자리를 이었다.

3. 일화

의 시성 두보의 선조다. 두보가 지은 시 중에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구절이 남아 있다.

용맹하지는 못했으나 군을 지휘하는 것에 능했다. 271년부터 8년간 상서를 지낼 때 박학다식하고 민생 문제에 여러 일을 도맡아 처리해 당대 사람들이 그를 꽉 찬 무기창고에 견주어 '두무고'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말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서툴러 많은 사람들을 뿜게 했다는 구절이 있다. 말타기와 활쏘기가 중요했던 시대였던 걸 생각해보자면 약골인 것 같다. 노숙·미축도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두예는 전략에 능한 장군인 건 맞지만, 무예는 전혀 뛰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4]

오만한 면이 있는지 손님들을 대접할 때 자신만 손님을 존대한다는 의미를 가진 독탑에 앉고 손님의 홀대를 의미하는 연탑을 손님들에게 앉게 했는데,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양수가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가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당초에 강릉을 공격할 때 오나라 사람들이 두예가 혹으로 병을 앓는 것을 알아 그의 지모를 두려워하여 표주박을 개의 목에 달아 보이기도 하고 커다란 나무에 혹처럼 생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잘라서 나무 속살의 흰색이 보이게 했는데 제목을 붙이길 '두예경(杜預頸: 두예 모가지)'이라 하였다. 성을 평정하는데 이르러 이런 사람을 모두 잡아 죽였다.

두예가 진에 주둔하면서 수 차례 낙양의 중요한 귀족에게 뇌물을 보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두예가 말하길 "나는 다만 (그들이) 해가 될까 두려울 뿐이니 이익을 구하는 게 아닙니다." 라고 했다. 당시 서진의 귀족들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왕제가 말의 관상을 잘봤는데 또한 매우 (말을) 좋아하였다. 화교는 자못 돈을 많이 모았는데 두예는 항상 칭하길 "왕제는 마벽(馬癖)이 있고 화교는 전벽(錢癖)이 있다." 고 하였다. 사마염이 이를 듣고 두예에게 말하길 "경에게는 어떤 벽이 있는가?" 대답하길 "신에게는 좌전벽(左傳癖)이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렇듯 춘추좌씨전을 워낙 깊이 탐독하고 연구해 '좌전벽'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춘추와 춘추좌씨전을 한데 엮어 정리한 《춘추좌씨경전집해》를 저서로 펴내 훈고학자로서의 업적도 남겼다. 원래 춘추좌씨전은 공자가 썼다고 여겼던 경과 좌구명이 썼다고 여겼던 전이 나뉘어 있었던 체제였는데, 두예가 전을 쪼개고 경의 각 구절 뒤에 붙여 하나의 체제로 만들었다. 좌씨전 연구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

예문유취에 따르면 세설(世說)에서 이르길, 두예는 형주자사가 돼 당시에 연회를 벌이며 모이면 술에 몹시 취해 번번이 방을 닫고 홀로 잤는데, 밖에서는 방안에서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매우 괴로워 소리(小吏)가 지게문을 열고 이를 보니, 평상 위에 뱀 한 마리가 있어 평상 곁에 고개를 숙여 토하는 것만 단지 보였고 전혀 사람은 보이지 않아 나가고 나서 비밀이 이와 같이 드러났다. 즉, 두예의 정체가 뱀이었다는 야사. 이는 정사인 진서 두예 열전에도 그대로 나오는 일화로 진서가 괴이한 일화를 모으기 좋아했다는 증거 중 하나다.

대한민국에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명나라의 장수로 임진왜란조선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두사충을 시조로 하며, 농구선수 두경민이 그의 후손이다.

4. 두예 좌전학에 대한 찬반

두예의 춘추좌전경전집해는 이후 좌전학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되고, 훗날 춘추좌전에 대한 재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두예에 대한 공격도 가차없이 가해진다. 청나라의 초순(焦循)은 두예가 춘추좌전을 주석하면서 찬탈자 사마씨를 편들었고 이는 부친 두서의 원수인 사마씨를 섬긴 자신의 패륜을 감춘 것이라고 했다. 청나라 이후의 경학자들이 반박한 것이 없어 이들은 초순의 주장을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춘추학자 자오 바이슝(趙伯雄) 역시 “난신적자라는 비난에 대해 두예는 입이 백 개라도 할말이 없을 것”이라고 《춘추학사》에서 원색적인 비난을 남겼다.

초순 이래의 통설에 따르면, 사마소는 황제 조모를 죽이고 곽황태후에게 조서를 내리게 해 '불효'한 조모는 황제의 지위에 있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서진이 건국되자 곽황태후와는 관계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사마소의 황제 시해 정당화는 서진의 안정화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두예는 여기서 '서시례'라는 의례를 준비했다. 춘추좌씨전에는 군주가 시해당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그 중 군주가 무도한 일곱 가지 예에 대해서 '군주라 하더라도 무도하면 시해된다.'라는 주를 반복해서 붙였다. 두예는 '범례'를 중시했는데 이런 예들이 바로 주공의 범례에 있다. 두예는 이 범례를 통해 공자 대신 주공을 높이고 '주공이 무도한 군주를 시해해도 좋다 했다'고 정당화함으로써 서진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두예가 정통성을 부여한 서진은 어리석고 우매한 정치를 펼친 결과 팔왕의 난으로 무너진다. 난이 한창일 때 조왕 사마륜은 제실을 뒤엎고 어리석은 황제 진혜제(사마충)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했다. 이에 맞서 제왕 사마경,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때 사마영의 군사 노지(노식의 증손)는 "조왕은 무도하므로 시살해도 무방하다."라고 진언했다. 두예의 경전 해석은 중국을 분열로 이끈 경전 해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세의 견해가 다 이와 같은 것은 아니라서 현대의 리우자허(劉家和)는 청대 좌전학을 연구하면서 청나라의 전제군주제와 민본주의적인 두예의 사상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학자들이 두예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다.

두예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청대의 학자들 중 경전학의 경우에는 강유위 등의 신공양학으로 발전하고 좌전 자체가 위작되었다는 주장까지 나아가는데, 후세에서는 신공양학이 필요 이상으로 좌전을 깎아내리려 보다 보니 무리한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청나라의 경전학 자체가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증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경전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주석 달아놓은 걸 대놓고 비판하면서 내용을 갈아엎으려는 것을 감안하면 두예는 비판하기 좋은 요소였다.

초순은 두예가 아버지의 원수와 손잡은 치부를 가리기 위해 곡학아세했다고 보는데, 샤핑(夏平)과 한국의 김석우 등, 두서가 실제로는 사마씨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며 초순의 논지 전개에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초순의 설은 그저 두예의 좌전학에 대해 비판을 넘어 혐오한 당시 고증학자들의 통설일 뿐으로 사마의가 자신이 벼슬길을 막은 원수의 아들을 사위로 들여 중용했다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삼국지 위서 권16에 나온 두서의 열전과 진서에서 나온 두예의 열전에 나온 두서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차이가 있는데, 삼국지의 두서 열전에 따르면 두서가 파직된 이유는 같이 일하던 사람과 갈등이 있던 중에 두서가 보고 없이 투항해 온 이민족을 죽인 것 때문이었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었으나 아버지 두기가 공을 세우다 죽었기 때문에 서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끝났고 이는 249년의 일이다. 이 기록을 보면 사마의와의 문제로 종신토록 금고를 당했다가 죽었다는 진서의 서술과는 차이가 좀 있으며, 시대의 인접함으로 보나, 사료의 엄정함으로 보나, 진서는 삼국지보다는 좀 아래로 인정받는다. 그렇기에 두서가 사마의에 찍혀서 두예의 앞길까지 막히다 보니 두예가 곡학아세하는 출세지상주의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5. 미디어 믹스

5.1. 삼국지 시리즈

파일:Du_Yu_2_(1MROTK).png 파일:external/vignette4.wikia.nocookie.net/Du_Yu_%28ROTK11%29.png
100만인의 삼국지 삼국지 11
파일:external/san.nobuwiki.org/0715.jpg
삼국지 12, 13
파일:두예14.jpg
삼국지 14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도 거의 끝머리 시나리오 내지 영웅집결에서만 사용 가능하다. 인재가 드문 극 후반에 쓸 만한 장수로 활약하며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지 4부터다. 초기작에서 높았던 무력은 갈수록 너프되었지만,[15] 다른 수치는 대체로 80대 정도라 그럭저럭 참모급으로 쓸 만하다.

처음 등장한 삼국지 4에서는 무력이 86이나 되었다. 정확한 능력치는 통솔력 84/무력 86/지력 82/정치력 71/매력 79. 특기는 정보, 제조, 풍문, 보병, 기병, 해전, 화계, 연환, 수복, 허보다. 등장년도가 241년이라서 비교적 빠른 편이다.

통솔력이 사라지고 무력이 통솔력의 역할을 대신한 삼국지 5에서는 241년에 등장하며, 능력치는 무력 85/지력 85/정치 75/매력 80이다. 보유 진형은 추행/학익/수진이고, 습득 특기는 화계/수계/침착/응사/속공/강행이다.

삼국지 6에서도 여전히 무력이 이상하게 높다. 통솔력 88/무력 80/지력 84/정치력 81/매력 77의 능력치이나 일기토 작전이 거짓퇴각 한 개만 있어서 일기토 모드에서 자기보다 무력이 높은 맹장급 장수들에게는 잘 털렸다.
전술 시뮬레이션 모드 사마의편 최후반부에 등장하며 수군을 가지고 증원군으로 합류한다. 해당 전투에서 통솔력과 지력이 가장 높기 때문에 두예의 병력을 잃지 말고 총대장 장제부대를 도발하거나 병력끼리 일대일로 맞붙어 싸우면 이길 수 있다. 해당 전투에서 두예가 얼마나 빨리오고 잘 활용할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5/무력 66/지력 84/정치력 81에 분투, 연사, 투함, 투석, 파괴, 덫을 가지고 있어 야전, 공성전, 수전, 책략 모두 활용가능한 만능형 지휘관이나 이 게임 특성상 병법의 위력이 무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두예 본인의 타격력은 크지 않다. 부대 지휘관으로 쓰면서 전방에 세우진 말자.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6/무력 30/지력 85/정치력 80/매력 81로 무력이 심하게 너프 당했는데,[16] 삼국지 10에서 무력은 일기토할 때 아니면 크게 중요하지 않아서 패널티는 적다. 명사 특기가 있어서 직접 플레이할 때 도적들은 설전으로 제압해 버릴 수 있기 때문. 특기가 14개나(기술, 보수, 치안, 훈련, 화시, 일제, 진정, 은밀, 반목, 혼란, 위압, 명사, 제독, 간첩) 되고 두예가 등장할 때쯤 두예보다 특기가 많은 장수는 강유, 등애, 육항, 진태 정도 밖에 없다.

삼국지 11에서는 일러스트는 주유처럼 나왔는데 무력이 삼국지 10 때와 동일한 30. 11에선 부대 공격력은 장수의 무력을 따르기 때문에 주장급으로는 심각하게 너프를 먹었다. 하지만 통솔력 85/지력 85/정치력 80/매력 81이라서 인재가 부족한 후반 시나리오의 특성상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다. 춘추좌씨전이 아이템으로 있을 경우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수상전에 강한 오나라를 멸망시켜서인지 수군 적성이 S이며 병기 적성도 S다. 하지만 특기가 잉여급인 앙양이라서 문제인데, 무력 탓에 공격력이 한참 떨어져서 보유자 중에서도 가장 써먹기 어려운 성능이다. 파워 업 키트라면 능력치나 특기 연구를 통해 참모형 무장으로 육성하면 되지만, 그게 곤란하다면 주장으로는 절대 내세우지 말고 고무력/저지력 부대의 부장으로만 활용하자.

삼국지 12에서도 여전히 무력은 30이고 통솔력이 84으로 너프되고 나머지 능력치는 11 시절과 같다. 엄청나게 쓸 만한 전군맹공이 있기 때문에 완벽초인으로 변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보조 캐릭터에서만. 가능한다면 일기토가 일어나지 않게 조심하자. 무력 상승을 해도 정사 인증 몸 두예는 일기토에서 무조건 진다.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사마의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사마의의 속전고수와 동시에 사용한다면 대규모 전투에서 엄청난 화력을 자랑한다. 다만 전군맹공과 속전고수 모두 7 포인트를 잡아먹는 전법이라 채배지책이 없는 한 정말 동시에 쓸 수는 없기는 하다. 일러스트는 오른손으로 지휘봉을 든 채 지휘하고 있다.

삼국지 13에서는 삼국지를 마무리한 인물에 걸맞게 통솔력이 89, 지력이 86으로 상향되어 역대 최강의 두예가 되었다. 지난 작에서 전군맹공이라는 매우 좋은 전법을 들고 왔던 것처럼 점점 최신시리즈로 갈수록 능력치가 오르고 있다. 중신특성은 병참관리로써 중후반부 전쟁이 길어질 때 큰 힘을 발휘한다. 전수 특기는 신속, 병과 적성은 창병 A/기병 C/궁병 S. 활쏘기에 서툴렀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궁병 S를 받았다. 제갈량, 주유, 육손 등 군사 겸 사령관형인 장수들이 궁병 적성이 높은 점을 감안해서인지 두예에게도 버프를 준 것. 다만 말을 못 탔다는 설정은 잘 반영돼서 기병 적성은 C를 받았다. 이번 작에서 제대로 밀어주는 장수 중 하나. 보유 전법은 지휘를 5 소모하는 속방지휘로 방어와 기동을 40씩 사기를 20 올려준다. 보유특기는 상업 3, 농업 5, 훈련 7, 언변 4, 신속 8, 연전 6, 공성 8, 견수 5, 수영 3, 귀모 1로 내정, 전투 모두 잘 분배되어 있고 레벨도 높다. 너무 늦는 등장 시기를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S급 무장. 딱 하나 흠이 있다면 저질스러운 무력에도 불구하고 장수 타입이 무관이라 전투 중 확률적으로 발생하는 일기토에 얄짤없이 휘말린다는 것. 궁병으로 출진해서 안전 거리만 유지하면 일기토가 없으니 낫다.

삼국지 14에서는 100만인의 삼국지 일러스트로 변경되었으며 능력치는 통솔 86, 무력 30, 지력 85, 정치 80, 매력 81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3, 지력이 1 하락했다. 개성은 장구, 앙양, 수전, 법률, 문화, 주의는 왕도, 정책은 학익강화 Lv 4, 진형은 안행, 학익, 추행, 정란, 전법은 화시, 연노, 고무, 정란, 구축, 강습, 친애무장은 등애, 양호, 혐오무장은 석감, 위관, 전속이다. PK에서는 고유 전법으로 아군의 공군과 기동을 동시에 상승시키는 파죽지세이라는 지력 의존 전법을 부여받았는데 서량의 군벌인 한수와 같은 효과의 전법이다.
전기제패 시나리오 중 '오 평정전'에서 군주로 나오며 작위는 대사마이고 당시 생존인물 중 서진황실인물과 독발수기능의 난 참전장수를 제외한 모두를 가지고 시작한다. 난이도는 엄청 쉬우며 병력과 훈련상태, 장수질 모두 오나라보다 압도적으로 좋고 가충의 트롤링을 제외하면 진나라에게 유리한 이벤트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게임한다. 해당 시나리오의 유일한 고유전법 소유자이기 때문에 빠른 클리어를 위하여 기동을 늘려 빠르게 정복하는 것이 좋다. 승리조건에 건업 한곳만 먹어도 되지만 두예 본인은 양양에 있고 강릉에서 건업까지 장강따라 한방향이기 때문에 고사 파죽지세로 왼쪽부터 쭉 밀고가면 순식간이다.

5.2. 삼국전투기

삼국전투기에선 닥터 슬럼프노리마키 센베로 등장. 말을 못탄다는 것 때문인지 접시를 타고 다니고, 비밀로 활을 못 쏜다고 한다.[17] 삼국 통일(2) 편에서 사마염을 형님이라 부르고 사마염이 그를 두서방이라 부르는 오류개족보를 저질렀다. 매부 처남 관계로 착각한 모양인데 실제로는 두예는 사마염의 고모부. 삼국 통일 (3)편의 타이틀 컷을 장식하기도 했으며 소개컷에서는 직접 몸으로 싸우는 거 빼고는 못 하는게 없고 뭐든지 만들어 내는 척척박사라고 서술되었다. 삼국지 장수들의 최종진화형이라고 고평가한건 덤.

독발수기능의 난 편에서 처음 등장. 호열이 진주자사로 부임했다가 독발수기능에게 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호열의 후임 진주자사가 되어 난 제압을 위해 도독진주제군사로 임명된 석감과 함께 서량으로 향했다. 석감이 속전속결을 주장하며 독발수기능을 치라고 명하자 현재 진주의 군비로는 아무것도 정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무리고, 차근차근 정비하고 준비해서 내년 초 즈음에 움직이자고 했지만 석감은 이에 납득하지 못해 다시 한 번 명했고, 두예는 이에 아무리 명령이라도 못 하는 건 못 한다며 움직이지 않았으며, 결국 석감에게 모함을 당하며 중앙으로 소환됐다.

삼국 통일 편에서는 장화와 더불어 양호의 오 정벌을 찬성했다고 언급되었다. 가진 게 없어 두려운 게 없던 장화와는 정반대로 두예는 빽이 사마염으로 엄청나게 든든했기에 가충 일파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묘사되었다. 동시에 장화와 더불어 엄청난 수재라 나라를 굴리는 핵심 인재였다고 고평가되기도 했다.

양호 사후에는 양호가 직접 지명하여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그렇게 진남장군 겸 도독형주제군사가 되어 양양으로 향했다. 오를 정벌하기 위한 준비를 하려 하지만 하필 그 시점에 독발수기능이 양흔이 죽은 틈을 타 서량을 털어먹어버렸고, 이에 사마염은 또 오 정벌을 미루게 된다. 두예, 왕준 등은 오는 이제 한계에 봉착했으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두예와 왕준은 하루가 멀다하고 상소를 올려 오 정벌을 주장했다.[18]

결국 장화의 설득으로 사마염이 오 정벌을 결의하면서 두예 또한 당연하다는 듯 오 정벌에 참여했다. 두예는 양양에서 강릉 방면의 루트로 움직이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왕준이 이릉과 오의 수군을 차례대로 박살내며 기세를 올리는 동안 두예는 강릉과 낙향을 제외한 강릉 주변지역을 싹 정리했다고 묘사됐다. 두예는 주지에게 낙향을 점령하고 오라고 명했고,[19] 여차저차해서 낙향과 강릉을 모두 평정하는데 성공했다. 제장들은 이것만 해도 충분한 성과[20]이므로 재정비를 하고 다음을 도모하자고 권했지만, 두예는 파죽지세의 고사를 언급하며 오나라는 대나무에 칼을 꽂아넣은 상태나 다름없으니 살짝만 힘을 줘도 무너질 거라며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두예는 왕준에게 계속 건업으로 공격을 이어갈 것을 명하고 자기 병력까지 일부 보태준 뒤, 자신은 그대로 남하하여 형남4군(영릉, 계양, 무릉, 장사)과 교주까지 점령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영주들은 알아서 항복했다고 묘사됐다.

오 멸망 이후에는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며 국가와 백성들에게 공헌했다는 내용이 살짝 지나간다. 두예는 댐 역할을 할 수 있는 댐 로봇을 만들었지만 주지에게 그냥 댐을 만들면 안 되는 거냐는 소리만 들었다(...)

5.3.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파일:조조전 온라인 두예.png

연의에서는 강유전에서 적으로 등장. 연의 이외 컨텐츠에서는 장수특성이 영 좋지 않아서 고유외형과 고유음성이 있음에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5.4. 진삼국무쌍 시리즈

진삼국무쌍 BLAST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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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삼국무쌍 시리즈에는 사전에만 표기되고 클론으로도 코빼기도 안보이는 무장이었다. 그나마도 무장 사전에는 없고 항상 삼국지연의를 정리한 스토리 사전에 이름만 올라왔다. 왜 저런 사단이 났느냐 하면 현재 8편까지 오나라의 멸망이 스토리에 편입이 안되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외전 게임인 진삼국무쌍 BLAST에서 드디어 일러스트가 공개되었다. 역시나 활 못쓰는 장수 답게 경갑을 입고 춘추좌씨전을 들고있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수염이 없지만 얼굴에서 숙장의 느낌이 풀풀 풍겨온다.

일단 8편까지도도 오의 멸망이 스토리에 들어가지 않은 관계로 나오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8편에서 양호는 한발 먼저 클론으로(...)참전한다. 현재 시점에서 오정벌 멤버인 왕준과 함께 클론 등록이 안된 유력 무장 중 하나.


[1] 석감에 모함에 의한 면직[2] 또 다시 석감과 다투어서...[3] 수년 후 복직[4] 사후 추증[5] 그것도 사마씨가 사실상 묵인, 동조한 것이다.[6] 실제로 이 비난 이후 촉한 출신 번건이 등애의 복권을 주장하기 이전까지 두예가 힘을 썼다는 얘긴 없다.[7] 그러다 보니 당시 인물들 열전을 읽다 보면 석감처럼 덕망이 있다느니, 명망이 높았다느니 하는데 실제로는 인성질을 일삼는 놈들이 많아서 혼란을 주는 경우가 많다.[8] 하나 더하자면 위관의 성품상 욕받이를 위해서 자기가 독박 써가며 나설 사람이 못 되다보니 아예 무고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일에는 구태여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꼭 해야 되는 일이지만 자기가 욕을 다 먹어야 하는 일은 또 절대 안 하는 사람이었다. 위관이 그저 '내가 살아야 하니 등애를 죽였다.'는 식으로만 볼 수 없고, 도리어 등애를 죽이는 데는 여러 모로 암묵적인, 흑은 어쩌면 명시적인 주변의 동의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9] 민간에서는 등애의 묘도 만들어 주고 했었다. 다만 종군하던 병사들이 등애를 어떻게 여겼는지는 사서에서도 좀 갈리는 편인데, 엄격하고 가혹한 장수라서 병사들이 싫어하던 분위기가 있었음은 사실이다.[10] 죄인을 호송하는 수레다.[11] 이때 엄헌이 두예에게 치욕을 참으면 삼공에 이른다는 속담을 인용한 서신을 보낸 일화가 있다.[12] 중국 주나라 때에 임금을 경계하기 위하여 기울게 만들었다는 그릇이다.[13] 여기서는 등애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회하의 관개시설과 운하를 비판한다.[14] 그래서인지 코에이삼국지 시리즈 10탄부터 두예의 무력은 제갈량보다 아래인 30대다.[15] 정사에서 말타기와 활쏘기에 매우 서툴러 남의 비웃음을 샀다는 구절을 반영한 듯하다.[16] 이게 어느 정도로 낮은 거냐면, 제갈량의 무력이 37이다.[17] 처음 등장했을 때 석감과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인데, 석감은 이것 때문에 두예를 영 못미더운 놈으로 생각했다(...)[18] 두예는 실패해 봐야 시간, 돈 좀 낭비하는 것 외에는 손해도 없고, 이것은 감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다년간의 조사를 통한 결과를 토대로 말하는 것이라 덧붙였다. 사마염은 많은 관원들이 시기상조라 주장한다며 망설였지만 두예는 그들 중 제대로 된 수치가 쓰인 자료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일축했다.[19] 주지가 강은 어떻게 건너냐고 묻자 그대로 새총 비스무리한 기구로 쏴서 강 건너로 날려 주기도 했다.[20]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불과 몇 년 전에 양호가 내부 호응자가 있었음에도 서릉(이릉) 공략에 실패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릉에 강릉까지 쌍으로 평정했으니 충분히 엄청난 성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