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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1-18 22:05:20

손구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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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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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孫晷
생몰연도 불명

동진의 인물. 자는 문도(文度). 양주 오군(吳郡) 부춘현(富春縣) 출신. 동오 시기 복파장군을 지냈던 손수의 증손자.

2. 생애

손구는 어릴 적부터 행실이 준수하여 어른에게 한번도 혼난 적이 없었다. 명사 고영은 그런 손구를 보고 손구의 외할아버지인 설겸에게
"이 아이의 정신은 청명하고 심오하며, 기개는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는 것을 보아하니, 보통의 아이와는 다르구려."
라며 칭찬해 마지 않았다. 손구는 장성하여서도 그 행실에는 변함이 없어, 항상 부모 곁에서 효도를 극진히 하고, 부유한 집안임에도 형제들처럼 사치 부리는 일 없이 시를 노래하며 즐겁게 직접 밭을 갈았다. 언제나 새벽 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밭일을 하고, 옷은 언제나 무명옷을 입으면서 밥은 채식만 고집하니, 그의 부모는 그가 좀 더 편하게 생활했으면 하는 마음에 근심하였다.

부춘현은 본래 마찻길이 적었기에 그곳의 주민들은 주로 하천으로 이동했는데, 손구는 아버지가 풍파를 만날 것을 우려해 매번 아버지가 외출할 때마다 아버지를 대나무로 만든 가마에 태운 뒤, 직접 가마를 짊어지고 이동하였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 아버지가 가마에서 내리면 손구는 가마를 내려놓고 문 밖에서 나무나 울타리 사이에 숨어서 그 집의 주인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숨겼다.

손구는 부모는 물론 형제들도 잘 보살폈다. 손구의 형이 수년간 매우 독한 병으로 고생할 때, 손구는 몸소 형의 병을 간호하고 여러가지 약과 치료법을 조합하여 극진히 돌보았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형의 병세가 호전되기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하였다.

그는 남의 좋은 소식을 들으면 항상 함께 기뻐해주었고, 안 좋은 소식을 들으면 항상 함께 슬퍼해주었다.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니,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언가를 선물 받아도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손구의 친척이나 지인 중에 가난한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항상 손구의 집을 왕래하며 지원을 받는 것을 보고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손구 또한 이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기꺼이 감싸주어, 추울 때는 그들과 더불어 같은 잠자리에서 잠을 자고, 밥 먹을 때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하고, 자신의 옷을 벗어주거나 이불을 양보하기도 했다.

때때로 흉년이 들어 곡물 가격이 폭등하면 손구의 논에 침입하여 설익은 벼를 베어서 훔쳐가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다가 한번은 손구가 벼를 베어가는 사람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손구는 일단 아무데나 숨어서 자취를 감추고 그 자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그 자가 벼를 어느정도 베고 떠나자, 손구는 나와서 남은 벼까지 모두 베고 벼를 훔쳐간 이에게 전부 넘겨주었다. 이 일화를 들은 마을 이웃들은 이런 손구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는 손구의 벼를 함부로 범하지 않았다.

회계군(會稽郡) 바닷가 근처 산간 지역에 우희라는 고명하기로 이름 높은 은사(隱士)가 있었다. 손구는 우희의 덕을 흠모하여 우희의 동생인 우예의 딸을 처로 맞이하였다. 우희는 평소 자신의 집안의 여성 자제들에게 항상 화려함을 버리라고 교육하였는데, 이는 손구도 그와 뜻을 같이 했다. 당시 사람들은 손구 부부를 가리켜 "양홍(梁鴻) 부부"에 빗대었다.[1]

손구는 제양(濟陽) 사람 강순(江淳)의 학식과 덕행이 비범하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만나보기 위해 강순이 은거하고 있는 동양산(東陽山)에 올랐다. 손구와 강순은 서로 초면이었음에도 뜻이 들어맞아 하루종일 담론을 나누면서 금새 오랜 친구처럼 친분을 쌓고는 이내 헤어졌다.

건원 2년(344년) 8월, 사공, 양주자사 하충이 손구의 명성을 듣고 그를 주부로 삼고자 했고, 사도 채모도 손구를 불러 자신의 속관으로 삼고자 했으나, 손구는 이들의 청을 모두 거절하였다. 또, 상서 장국명(張國明)이 손구를 주의 명망높은 선비라 칭송하면서 조정에 천거하고, 그의 집으로 관용 마차를 보내 특별히 모셔가려 했지만, 그 무렵에 손구가 사망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니, 조정과 백성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향년 38세.

손구의 시신을 염하고 관에 넣었을 때, 갑자기 낡은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은 노인이 손구의 집에 들어와,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관을 쓰다듬으며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제법 애절하고 강개하여 좌우의 사람들까지 감응할 정도였다. 이윽고 울음을 그친 노인은 바로 집을 나왔는데, 손구 집안의 문지기가 그 노인의 얼굴이 깨끗하고 눈동자가 네모난 것을 보고 즉시 상주에게 보고했다. 상주는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노인을 뒤쫓았지만, 그가 밖에 나왔을 때 이미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같은 오군 사람인 고화를 비롯해 그 자리에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도 신비한 노인의 모습을 목격했다고는 하나, 누구도 그 노인의 정체를 밝혀낼 수 없었다고 한다.


[1] 후한 초기의 은사 양홍과 그의 처인 맹관은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여 후대에 모범적인 부부로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