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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5:15:17

등유(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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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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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

鄧攸
(? ~ 326)

서진동진의 인물. 자는 백도(伯道). 사례 평양군(平陽郡) 양릉현(襄陵縣) 출신. 중서자 등은(鄧殷)의 손자.

2. 생애

등유는 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도 연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나이에 9년상을 치르게 되었다. 등유는 9년상을 무사히 치르는 와중에도 동생을 잘 돌보니,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효자라 칭찬했다. 조정에서는 할아버지 등은이 과거 관리를 지냈던 경력을 인정하여 그 손자 등유에게도 관직을 하사하였다.

시간이 흘러 등유가 장성하자, 평양태수는 등유에게 제후의 관직을 버리고 중앙으로 나아갈 것을 권하며 조정에 효렴으로 천거해주려 하였다. 하지만 등유는 할아버지의 덕분에 받은 관직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 말하고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우연한 기회로 진군장군 가혼의 눈에 들어 그의 딸과 혼인했다.

할아버지 등은이 적어도 태강 초까지는 관직을 지낸 것으로 보이며, 가혼이 태강 연간에 진군장군을 지낸 것을 미루어보면 부모님과 할머니를 여의고 상을 치룬 것은 태강 이전으로 보인다.

관직은 2품 이상 올라 오왕문학(吳王文學), 태자선마, 동해왕 사마월의 참군을 역임하였다. 사마월은 등유를 존경하여 세자문학, 이부랑으로 삼았다가, 동생 사마등이 동중랑장에 임명될 때 등유를 그의 장사로 배속시켰다. 이후 등유는 다시 옮겨져 하동태수로 부임하였다.

영가의 난으로 낙양 일대가 흉노족이 세운 한나라에게 완전히 넘어갔고, 등유는 안동대장군 석륵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석륵은 포로로 잡힌 진나라의 관리들 중 2천석 이상에 해당하는 이들을 꺼렸기에, 진영 내에 등유가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고자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하였다. 당시 군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등유가 이부랑이던 시절의 부하였는데, 등유가 문 앞에 이르자 옛 상관을 알아보았다. 등유는 그에게 부탁해 종이와 붓을 구하고, 그 자리에서 석륵에게 사죄를 구하는 글을 썼다. 문지기가 이를 석륵에게 전달하니, 석륵은 그 글솜씨를 중히 여기고 죽이지 않았다. 그때 등유와 친분이 있던 석륵의 장사 장빈이 석륵에게 등유의 명성과 지조를 적극적으로 칭찬하자, 석륵은 등유를 막사 안으로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친 후, 석륵은 흡족해하며 등유를 참군으로 삼고 마차와 말을 하사했다.

석륵은 출정을 나갈 때마다 등유를 언제나 데리고 다니며 진영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던 중, 야밤에 진영 내에서 어떤 이가 실수로 등유의 마차 수레바퀴에 불을 붙이는 바람에 마차가 전소되는 일이 터졌다. 석륵은 군법으로 야간에 불을 사용하는 것을 엄금하여 사형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해당 사건은 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진범은 자신의 범행이 탄로나면 사형당할 것을 우려해 신문받을 때 등유에게 모든 책임을 돌렸다. 등유는 진범과 더불어 논쟁할 수 없음을 알고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제수씨를 위해 따뜻한 술을 데우다가 화재가 발생했다는 핑계를 대니, 석륵이 그를 용서하였다. 그러자 깊이 감동한 범인은 스스로 석륵을 찾아가 모든 사실을 고하고, 등유에게는 남몰래 노새 한 마리를 선물하였다.

석륵이 군대를 이끌고 사수(泗水)를 건널 때, 등유는 수레를 부수고 말과 소 위에 처자식을 태워 도주했다. 하지만 도중에 도적떼를 만나 말과 소를 모두 빼앗기는 바람에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등유는 죽은 동생의 어린 아들인 등수(鄧綏)를 업고 도망치기를 계속하였는데, 도저히 아이 2명을 모두 먹여 살릴 형편이 되지 못 하여 아내에게 말했다.
"내 동생은 아들 하나만 남기고 사망하였으니, 그 대가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응당 내 아이를 버려야 할 것이오. 우리가 운 좋게 살아남기만 한다면 내 뒤를 이을 아들은 얼마든지 다시 나을 수 있소."
아내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지못해 등유의 말에 따랐다. 등유와 그의 아내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아들을 그 자리에 내버려둔 채 조카 등수만을 챙기고 길을 떠났다. 등유의 아들이 부모의 뒤를 쫓아 그 날 저녁 무렵에 그들을 따라잡으니, 다음 날 등유는 아들이 더이상 쫓아오지 못하도록 나무에 아들을 단단히 묶은 다음 다시 길을 떠났다.

등유는 신정(新鄭)에 이르러 이구에게 의탁했다. 그리고 3년 후, 등유는 이구를 떠나려 했지만 이구가 그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허창(許昌)에 있는 사공 순조(荀組)는 등유를 진군(陳郡)이나 여남(汝南)의 태수로 삼으려 했고, 민제 사마업은 등유를 상서좌승, 장수교위로 징소하려 했으나 이구의 방해로 전부 실패하였다. 결국 등유가 몰래 도망쳐 순조에게 귀순하니, 이구는 등유를 무척 원망하였지만 얼마 뒤에 그의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이후 등유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조협, 주의 등과 함께 남쪽으로 달아나, 당시 강동에서 세를 키우고 있던 낭야왕 사마예에게 귀순했다. 사마예가 칭제한 뒤에는 태자중서자에 임명되었다가 오군태수로 부임했으며, 태수로 재직할 동안 녹봉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대흥 4년(319년) 4월, 강동에 대기근이 들어 오군의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등유는 조정에 보고도 없이 곧바로 관아의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얼마 후, 등유는 조정의 명을 받고 오군으로 파견 나온 산기상시 환이와 황문시랑 우구(虞騑)에 의해 보고도 없이 멋대로 곡식을 풀었다며 탄핵받았으나,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사면해주었다. 이후로도 등유는 형벌과 정치를 청명하게 하여 백성들은 기꺼이 그를 따랐고 지역은 잘 다스려졌다.

등유가 병으로 오군태수 직책을 내려놓게 되자, 군의 백성들은 그에게 항상 수백만 전에 달하는 돈을 보내왔지만 등유는 이를 떠날 때까지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등유가 오군을 떠나는 당일에 백성들이 그의 배를 붙잡고 떠나는 길을 막으니, 등유는 잠시 머무르다가 밤 중에 몰래 오군을 빠져나왔다. 오군의 백성들은 조정에 등유를 다시 태수로 보내달라 1년 내내 청했으나, 조정에서는 끝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고 등유를 시중으로 삼았다. 등유는 1년 남짓 시중을 지내다가 이부상서로 옮겨졌다.

영창 원년(323년) 3월, 왕돈에게 처형당한 주의를 대신해 호군장군에 임명되었다.

태녕 2년(324년) 6월, 왕돈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등유는 명제 사마소와 거병을 의논했고 회계태수로 옮겨졌다. 등유는 회계태수에 임명되면서 호군부 사무에 더이상 관여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관리가 명제 사마소를 알현해 "등유는 이제 호군장군이 아님에도 평소 하던 것처럼 왕돈에게 전국의 병력 수를 보고했다."라 무고하였다.[1] 명제 사마소는 그 관리의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등유를 태상으로 고쳐 임명해 중앙에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명제 사마소가 남교(南郊)에서 제천의식을 행할 때, 태상으로서 황제와 동행해야 했던 등유는 병에 걸려 제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명제가 제사를 마친 뒤, 친히 등유의 집까지 행차하여 병문안을 오자, 등유는 어쩔 수 없이 병든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집 밖으로 나와 어가 앞에 엎드려 절했다. 이때 길가에서 황제를 영접할 수 있으면 당연히 제사에도 참여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느냐라는 탄핵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면직당했다.

태녕 3년(325년) 8월, 다시 관직에 올라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함화 원년(326년) 4월, 재직 중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성제 사마연에 의해 광록대부로 추증되었고, 금장자수(金章紫綬)를 수여받았다. 제사는 소뢰(少牢)로 치렀다.

3. 기타



[1] 왕돈은 1차 반란을 성공시킨 후, 조정에 국내외 병력의 수를 자신에게 보고할 것을 요청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