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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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方
(? ~ 306)
1. 개요
서진의 인물.사마옹의 행동대장격 인물이나, 단지 하수인이라고만 하기에는 여러모로 대단한 악행을 알아서 저지른 인물이다.
팔왕의 난에서 주조연급 악역 정도가 되는 인물로, 이 자의 잔인함은 그 당시 기준으로도 엄청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팔왕의 난이라는게 전 국가를 초토화시킨 전면전으로 만든 것도 사마예 축출 때 부터인데, 그 전투에서 말 그대로 낙양을 초토화 시켰다.
훗날 영가의 난까지 쭉 연결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비극을 만든 또 다른 악당에 가까운 인물이다. 위진남북조 시대 연구자인 서울대 박한제 전 교수는 그의 연재 칼럼에서 장방을 이 시대의 이근안 같은 자였다고 평가한 일이 있었는데, 그만큼 잔혹한 정치적 폭력을 휘두른 자이기도 하다.
2. 사마륜과의 싸움
기주 하간국 사람으로 집안은 가난하고 낮은 신분으로 사마옹에게 기용되었고 여러 차례 승진해 진무장군이 되었으며, 301년 1월에 사마륜이 제위를 찬탈하자 사마영이 여러 왕에게 격문을 돌려 사마륜을 토벌하려고 했다. 사마옹이 처음에 사마륜을 도우려고 했는데, 하후석이 사마경에게 호응하려 하자 장방은 사마옹의 명령으로 하후석을 공격해 사로잡아 허리를 베어 죽였다.사마경의 격문이 도착하자 사마옹이 사신을 잡아 보내면서 장방은 사마륜을 돕도록 명령받았는데, 장방이 회음으로 가다가 사마경, 사마영의 군사가 강하다는 것을 들은 사마옹이 돌아오게 하고 사마영에게 가담했다. 장방은 이함, 석원 등과 함께 동관까지 갔다가 4월에 낙양에서 사마최, 왕흥 등이 정변을 일으켜 사마륜, 손수 등을 죽이자 군사를 돌려보냈다.
3. 사마경, 사마예와의 싸움
302년 12월에 사마옹이 사마경을 토벌하자는 글을 올리면서 장방은 이함에게 소속되어 낙양에서 120리까지 다가갔으며, 사마예가 사마경을 격파해 죽이자 군을 돌려보냈다. 303년 8월에는 사마옹, 사마영이 사마예를 토벌하자는 글을 올리자 장방은 7만의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점거했으며, 의양에서 황보상을 격파하고 서명문을 공격했다.사마예가 혜제를 받들고 장방을 공격하자 장방의 병사들은 황제의 수레를 보고 모두 물러나서 달아나자 장방은 패해 5천여 명을 잃었으며, 물러나서 십삼리교에 주둔했지만 무리들이 두려워 밤 중에 숨으려 했다.
그러자 장방은 승패는 항상 군사에서 있는 일로 군사를 잘 쓰는 사람은 실패를 이용해 성공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 나아가 보루를 만들어 저들이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기묘한 계책을 쓸 것이라 했다.
숨어서 몰래 접근해 낙양에서 서쪽으로 7리 정도 떨어진 곳에 보루를 여러 겹 구축해 밖에서 창고의 곡식을 끌어다가 군사들에게 밥을 먹도록 했으며, 사마예는 이긴 것으로 인해 장방이 걱정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여겼다가 장방이 보루를 완성한 것을 듣고 11월에 공격했지만 장방은 이를 막아냈다.
낙양의 포위를 풀기 위해 유침이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러 갔는데, 사마옹이 보낸 우기가 호치에서 유침에게 패하자 장방은 사마옹의 명령으로 낙양에서 서쪽으로 향했다. 낙양의 노비 1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면서 굶주린 소고기나 말고기, 인육을 양식으로 썼으며, 유침이 장안성을 침입해 사마옹을 쫓아냈지만 장보의 구원으로 유침이 격퇴되자 장방은 휘하의 돈위를 파견해 유침에게 야습을 걸어 붙잡았다.
4. 사마예를 죽이다
낙양으로 돌아가서 포위해 군량이 떨어지게 하고 천금도 제방을 공격해 낙양의 물을 마르게 했으며, 성 안은 혼란하고 궁핍해져 쌀 1석이 1만 전이 되었다. 사마영이 여러 차례 낙양을 공격하다가 6, 7만의 군사를 잃고 304년 1월에 낙양의 식량은 결핍되었지만 사마예가 인망이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지지 않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 장방은 낙양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여겨 장안으로 퇴각하려 했다.성 내에 있던 사마월이 사마예에게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그를 붙잡아 금용성으로 보내 가두었는데, 황문시랑이 만류하자 사마월은 사마예를 죽이는 것을 주저하다가 장방은 이를 알고 기습해 사마예를 붙잡아 불에 태워죽였다. 적이라지만 사마예는 번왕이자 황족이었고 인망이 있었는데 이처럼 잔혹하게 처형하니 이를 지켜본 장방의 부하장수들조차 치를 떨 정도였다. 이 때 장방은 낙양을 약탈해 죽은 사람이 만여 명에 달했으며, 사람들을 장안으로 옮겼고 장방은 우장군, 빙익태수가 되었다.
5. 사마월과의 싸움
304년 7월에 사마월이 사마영을 토벌하기로 하자 장방은 사마영을 돕기 위해 군사 2만을 거느리고 갔다가 사마영 휘하의 석초가 혜제의 신병을 확보하자 사마옹의 명령으로 낙양을 공격해 상관사, 묘원을 격파했다. 태자 사마담이 밤에 상관사, 묘원을 습격하고 그 둘이 도망가자 장방은 낙양으로 들어갔으며, 사마담이 광양문에서 영접하면서 절하자 수레를 내려 그를 부축해 중지시켰고 사마월이 옹립한 인물이었기에 사마담과 혜헌황후를 폐위시켰다.8월에 왕준이 사마등과 함께 사마영 토벌을 내걸고 궐기하자 사마영이 두려워해 업을 포기하고 혜제를 데리고 낙양으로 오자 아들 장비에게 기병 3천을 주어 맞이하도록 했으며, 장방은 망산 아래에서 3천 기를 이끌고 맞이했다. 장방이 혜제를 배알하자 혜제는 수레에 내리면서 배례하지 못하게 했으며, 장방이 낙양에 있는 동안 그의 병사들이 약탈을 했기에 많은 보물들이 사라졌다.
11월에 병사들이 장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자 장방은 종묘 배알을 구실로 혜제를 장안으로 데려가려고 했다가 거부하자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강제로 수레에 태우려 했는데, 혜제가 후원의 죽림으로 도망가자 병사들은 혜제를 데리고 나와 수레에 태웠다. 장방은 도적이 증가하고 있는데 숙위가 부족해 자신의 진영에 데려가서 지킨다고 말했으며, 병사들을 시켜 궁중의 보물이나 궁인들을 실어 나르라고 하자 이로 인해 위진 이래로 모아진 보물이 모두 없어졌다.
장방은 귀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낙양을 불태우려다가 노지가 동탁이 낙양을 불태워 그 원망의 목소리가 백 년이 지나도 남았다면서 반대하자 장방은 이를 멈췄으며, 장안에 이르고 12월에 중령군, 녹상서사, 영빙익태수가 되었다.
305년 4월에는 순번, 유돈, 주복 등이 옹립한 혜헌황후를 다시 폐위시켰으며, 7월에 사마월이 사마옹, 장방의 토벌을 위해 서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사마무, 왕준, 사마효 등이 호응해 관중이 진동하자 장방은 사마옹에게 10만의 군사를 거느렸다면서 혜제를 낙양으로 보내 성도왕(사마영)을 귀환시키고 공(사마옹)은 관중에 머물러 위로하면서 북방에서 박릉을 치면 천하가 안정되고 다시 거병할 것은 없을 것이라 했지만 사마옹은 허락하지 않았다.
사마월이 묘파, 묘윤을 장안으로 파견해 사마옹에게 혜제를 받들어 낙양으로 들어오게 하면서 섬현을 기준으로 나누어 방백이 되자고 약속했는데, 사마옹이 이를 따르려 하자 장방은 자신의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목이 베어질 것을 두려워해 장방은 지금 형세 좋은 땅을 점거하면 세력이 장해져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할 수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으려 하냐고 묻자 사마옹이 중지했다.
10월에 사마옹이 장방을 대도독으로 임명했고 이 때 사마월이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 칭하면서 유교를 안북장군, 기주자사로 전속시키도록 했는데, 유교가 황제의 명이 아니라면서 군대를 내서 거부했다. 사마옹의 명령으로 장방은 10만을 거느려 건무장군 여랑, 예주자사 유교를 후원하러 갔는데, 12월에 유교가 사마효, 유곤 등에게 패하고 사마월이 낙양을 점령하자 장방은 패상에 주둔했다.
6. 최후
사마옹의 참군 필원이 장방에게 모욕당한 적이 있어서 원한을 품고 사마옹에게 장방이 효산 동쪽의 군사가 강하다는 소식을 듣고 주둔하는 것을 보면 반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며, 싹 트기 전에 제거해야 하고 그와 가까운 질보가 그의 꾀를 모두 알고 있다고 했다. 또한 묘파, 묘윤 등이 장방의 목을 베고 사죄하면 효산의 동쪽은 조용할 것이라고 했다.필원이 질보를 불러 사람들이 경은 장방이 반역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자 질보는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서 어찌해야 하냐고 하자 필원은 왕이 물어보면 오로지 그렇다고만 대답하라고 했는데, 사마옹은 질보에게 장방이 반란을 일으켰냐는 것과 경을 파견해 장방을 잡을 것이라 하자 질보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에 질보가 사마옹의 지시를 받아 장방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장방은 질보와 매우 친해 그가 칼을 가지고 들어가도 집을 지키는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장방이 불 밑에서 편지 봉함을 열고 있을 때 질보에게 참수되었다.
7. 창작물에서
삼국지 이후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후삼국지에 역사대로 사마옹의 부하 장수로 등장한다. 실제로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인물답게 소설상에서도 개인의 무용이 대단히 뛰어나 8왕의 수많은 부하 장수들 중에서도 기홍과 함께 탑급으로 묘사된다.[1][2][3] 다만 거칠고 잔인한 성격과 행적 또한 그대로 묘사되었고,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사마옹의 명령을 받은 질보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자신을 죽인 질보에게 빙의하여 사마옹에게 실컷 욕을 퍼붓고 난 후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시키는 호러씬을 연출하기도.[1] 친왕과 자사들의 대군 120만이 모여 한군을 치러 가며 선봉을 정하는 장면에 무용이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처음 나오는 장수들은 스트롱맨 대회를 하고 있었다면 장방과 기홍은 아예 마하 브레이커스를 보여주고 있었다.[2] 백명이 함께 당겨야 쏠 수 있다는 활을 쏘고 무쇠로 만들어서 굉장히 무거운 동표를 들어올리는 장수에게 선봉을 맡을 자격이 주어지는데 여기서 장방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며 등장 하는데 칼을 휘두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휘두르는 칼에 장방이 가려서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백명이 함께 당겨야 쏠 수 있다는 활을 혼자서 가볍게 당겨서 연거푸 다섯 번을 쏘아서 다섯 번 모두 과녁에 명중 시키고 그걸로는 성에 안 차는지 다시 다섯 번을 쏘아 모두 명중 시킨 다음 무쇠로 만든 동표를 가볍게 들어서 마치 칼을 다루듯 휘두르는데 그 속도가 굉장히 빨라서 맨처음 칼을 휘두르는 속도와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할 정도로 무서운 괴력과 신기를 선보여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친왕과 자사들에게 탄식과 충격을 선사한다. 물론 장방 다음으로 나온 기홍도 이에 지지않고 달리는 말의 배 아래에 숨어서 활을 당겨 모두 명중 시키는 묘기에 가까운 힘과 기마술을 선보이고 동표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바람개비 돌리듯 휘둘러대자 안그래도 장방의 괴력에 넋이 나가있던 친왕과 자사들을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어 장내를 탄식과 충격의 도가니로 만든다.[3] 장방과 기홍의 힘이 어느 정도냐면 맨 처음 나와서 힘을 선보인 왕호라는 장수는 전투에서 수많은 군사를 도끼로 장작 패듯이 찍어 넘기는 용맹함을 보이는 만만치 않은 장수로 활을 세 번 쏘아서 두 번은 명중 했지만 세 번째 화살은 과녁 앞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동표를 드는 것 까지는 성공하였지만 무게가 무게이다보니 동표를 어깨에 메고 말을 타고 장내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그쳤다. 그만큼 백명이 당겨야 쏠 수 있다는 활을 여러 번 당겨 모두 명중시키고 동표를 무슨 가벼운 몽둥이 다루듯 하는 장방과 기홍의 힘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