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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9 10:21:49

진군(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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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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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陳頵
생몰연도 미상

서진동진의 인물로 자는 연사(延思). 예주 진국(陳國) 고현(苦縣) 출신.

2. 생애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문장의 뜻을 잘 파악했다. 한번은 아버지 진흔(陳訢)이 자택의 정문을 새로 세우고 있었는데 진군이 말하길,
"마땅히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는 돼야 합니다."
라 하자, 진흔은 웃으면서 문을 더 크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군의 독우(督郵)에 제수받은 진군은 은닉자 3,000명을 검거하여, 예주의 관리들 중 최고의 성과를 거두면서 태수 유향(劉享)에 의해 주부(主簿)로 발탁되었다. 이후 주의 부름을 받아 종사(從事)에 임명되어 마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그의 집안 사람들은 이를 영광으로 여겼다.

패왕(沛王) 사마도(司馬韜)가 탄핵을 받자 예주자사 양준(楊準)이 그 사건을 맡았으나, 수사를 마무리 하기도 전에 기주자사로 옮겨졌다. 새로 부임한 예주자사 해결(解結)이 양준을 대신해 수사를 계속 진행했는데, 해결은 하간왕 사마옹의 사람이었으므로 사마옹의 사촌동생인 사마도를 봐주려 했다. 그는 예주의 관리들을 전부 소집시키고 사마도를 구속하는 데에 근거 법령이 있느냐 따졌지만, 진군은 조정의 조서에 따라 행한 일이라며 반박했다. 해결은 이를 재반박하지 못하고 조서에 따라 사마도 탄핵 사건을 처리했으나, 한편으로는 진군의 재능이 다른 관리들과 다름을 눈치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결은 상서로 옮겨지면서 예주를 떠나야 했는데, 그는 떠나면서도 진군의 재능이 완전히 발휘되지 못하고 일개 지방의 하급 관리에 머무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원강 연간(291 ~ 299), 효렴으로 천거받았으나 예주에서는 진군을 보내고 싶어하지 않은 나머지, 같은 고현 출신의 초보(焦保)를 대신 천거해 보냈다.

영강 2년(301년) 3월, 제왕 사마경이 거병하자, 예주에서는 진군을 부마도위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사마경에게 호응하게 했다. 진군은 군대를 거느리고 가던 중 적을 만나 강서(江西)로 도망쳤는데, 역양내사 주언(朱彥)의 부름을 받고 그의 휘하로 들어가 참군이 되었다.

영가 5년(311년) 5월, 팔왕의 난을 피해 건강(建康)에서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낭야왕 사마예가 진동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이때 진동종사중랑 원수(袁琇)가 사마예에게 진군을 천거하니, 사마예는 진군을 불러 진동행참군사로 삼고, 법과 군사 분야의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건흥 원년(313년), 녹사참군으로 옮겨졌다. 당시 조정은 조왕 사마륜이 황위를 찬탈하면서 제정한 《기해격》(己亥格)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는데, 진군은 이 법을 유지시키는 것이 그릇되었다 생각해 《기해격》 폐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낭야왕 사마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홀로 여러 차례 주장을 펼치다가 초군태수(譙郡)로 내보내졌다.

대흥 원년(318년), 조정에서 그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상서로 삼았다. 진군이 조정에 상소하여, 과거 한나라 시절처럼 주나 군의 천거를 받은 문관의 경우 경책(經策)을, 무관의 경우 무략을 면접 형식으로 엄격히 검증해야 한다 주청했다. 조정에서도 그의 말에 따랐으나, 이로 인해 3년 가까이 효렴이나 수재로 천거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천거가 된다 하여도 입조해 시험 받기를 거부했다. 인재가 심각하게 모이지 않자, 조정은 시험을 관직 임용 후에 치르는 형식적인 절차로 바꿈으로써 조건을 대폭 완화하고 진군을 천문태수로 내보냈다.

천문(天門)에 부임한 진군은 민생 안정에 힘쓰고, 사건이 터지면 항상 빠르게 움직여 능숙하게 일을 해결했다. 도간은 진군의 재능을 인정하고, 조정에 상표해 그를 양주자사(梁州)로 천거했다. 그렇게 양주를 다스리게 된 진군은 폐단을 축출하고 위엄과 은혜로 지역을 다스리니, 치안이 크게 안정되었다. 하지만 양주의 호족들은 그런 진군을 미워해, 도간에게 진군이 늙어서 귀가 잘 안 들린다며 자주 헐뜯었다. 이에 도간은 진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서양태수 장손(蔣巽)으로 하여금 그를 대신하게 했다. 이후 진군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