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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6:38:10

속석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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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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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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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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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기(戴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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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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束皙
(262 ~ 300)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로 자는 광미(廣微). 사례 양평군 원성현 출신의 문학가이며, 전한의 유학자 소광(疏廣)의 후손이다.[1] 할아버지 속혼(束混)은 농서태수, 아버지 속감(束龕)은 빙익태수를 지냈으며, 형으로는 속구(束璆)가 있다.

2. 생애

어려서부터 공부를 무척 열심히 하기로 유명해, 박사 조지로부터 "양평의 광미는 학문을 좋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니,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무제 시기, 효렴으로 천거되어 저작랑, 박사, 상서랑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279년 또는 281년에 급군(汲郡)에서 위양왕의 묘가 농부 부준(不准)에 의해 도굴되었는데, 그곳에서 대나무 책이 수십 수레나 발견되었다. 부준과 급군의 관리들은 화려한 부장품과 보물만을 소중히 다루고 죽서들을 함부로 다뤄,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이 도착했을 때는 파손된 죽서가 많았고 배열도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한다. 무제는 죽서들을 한 데 모으고 명을 내려 자신이 알아볼 수 있게끔 해독하라 지시하면서, 중서감 순욱과 중서령 화교를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속석은 이들의 지시를 받으며 위항, 왕접 등 여러 학자들과 머리를 맞대어 왕묘에서 발굴된 《죽서기년》과 《목천자전》[2] 등의 고서들을 정리해 75권으로 이루어진 《급총서》를 편찬했다.

300년, 조왕 사마륜이 상국으로 삼아 기록실의 업무를 담당하게 했으나, 속석은 서둘러 사직을 청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거처하며 문하생을 가르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니,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위해 묘에 비석을 세웠다. 그는 뛰어난 문학가로 여러 저서를 남겼지만 《삼위인사전(三魏人士傳)》, 《칠대통기(七代通紀)》 등은 혼란기에 소실되었으며, 《오경통론(五經通論)》, 《발몽기(拔蒙紀)》, 《박망지(朴亡詩)》를 비롯한 문집 수십 편만이 남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속석이 나름 고위관직을 누렸던 것에 비해 속석의 후손이나 친척들은 태수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속석의 형 속구가 석감의 조카딸과 결혼했다가 이후에 그녀를 배신하고 버렸기 때문이다. 대관료였던 석감은 이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다른 속씨들을 억압했고 결국 속씨들의 출세길은 전부 막혀 일반 백성처럼 살아야 했다.


[1] 훗날 왕망으로 인해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소광의 증손자 소맹달은 동해군 사록산으로 숨어든 뒤 속씨로 성을 바꿨다.[2] 주목왕이 여덟 마리의 명마를 타고 서역을 여행하면서 서왕모를 만났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