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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23:57:45

순숭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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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몽손 혁련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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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평락경백(平樂敬伯)
荀崧 | 순숭
시호 (敬)
작위 평락백(平樂伯)
(荀)
(崧)
경유(景猷)
생몰 262년 ~ 328년 9월
출신 영천군(潁川郡) 임영현(臨潁縣)
부모 부친 - 순군(荀頵)
모친 - 원씨(袁氏)
자녀 아들 - 순유(荀蕤), 순선(荀羡)
딸 - 순관(荀灌)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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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진동진의 인물. 삼국시대 조위에서 태위를 지낸 순욱의 현손자. 아버지 순군은 서진 시기 우림우감을 지냈고, 안릉향후(安陵鄉侯)에 봉해졌다.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문학을 좋아하고 청순한 지조가 있어, 당조부 순의는 이를 기이하게 여기며 훗날 반드시 순군의 가문을 빛낼 아이라 평했다. 아버지의 친구인 왕제도 순숭을 보고 재상의 그릇이 있다 여겼고, 외조부 원간(袁侃) 또한 자신의 동생 원오(袁奧)에게 순숭의 비범함을 칭찬해 마지 않았다.

태시 연간(265년 ~ 274년), 아버지 순군이 요절하는 바람에 일찍이 부친의 작위인 안릉향후를 습작하고, 복양왕 사마윤(司馬允)의 문학으로 임명되었다. 순숭은 관직 생활 중 왕돈, 고영, 육기 등 여러 호걸들을 만나 서로 친분을 다졌다.

영강 원년(300년) 4월, 조왕 사마륜이 정변을 일으켜 가남풍을 제거하고 스스로 상국, 시중에 올랐다. 조정을 장악한 사마륜은 널리 인망을 얻기 위해 각지의 명성과 덕망 높은 인재들을 모집했는데, 이때 순숭도 사마륜의 휘하로 배속되어 상국참군이 되었다.

영녕 원년(301년) 9월, 조왕 사마륜이 멋대로 혜황제 사마충을 폐위시키고 본인이 황제로 즉위했다. 순숭은 호군사마에 임명되었고, 이후 팔왕의 난이 절정으로 치닫는 와중에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해 급사중, 상서이부랑, 태제중서자, 시중, 중호군을 역임했다.

영가 5년(311년) 6월, 전조왕미 등이 낙양을 함락하면서 서진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모친상을 치르던 순숭은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해 수레에 싣고 성을 빠져 나오려 했다. 전조군에게 시신을 옮기던 수레까지 빼앗기고, 몸에 4군데의 상처를 입어 중태에 빠졌음에도 어머니의 시신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다행히 여러 백관과 순조(荀祖) 등 집안 친척을 거느리고 피난 가던 삼촌인 사공 순번(荀籓) 일행과 합류해 겨우 위기에서 벗어나고, 순번 일행과 함께 양성(陽城)으로 도망쳤다.

당시 대기근에 영가의 난까지 겹치자, 후도(侯都) 등과 같은 도적 무리가 일어나 매번 사람을 납치해 잡아먹었다. 순번의 무리도 예외는 아니라서 후도의 공격을 여러 번 받았으며, 도적에게 붙잡혀 고기가 된 이들이 매우 많았으나, 여음태수 이구의 도움으로 후도를 멸하고 밀(密) 땅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안전을 확보하게 된 순숭은 비로소 어머니의 시신을 밀산(密山)에 안장하고 남은 상을 마저 진행했다. 이후 임시로 조정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순번에 의해 감강북군사(監江北軍事), 남중랑장, 후장군, 가절, 양성태수에 임명되었다. 순숭은 주부 석람(石覽)을 보내 전조군에게 도굴된 황릉을 수복해, 그 공으로 무양현공(舞陽縣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도독형주강북제군사(都督荊州江北諸軍事), 평남장군으로 승진하고 곡릉공(曲陵公)으로 전봉되었다.

건흥 3년(315년) 8월, 순숭은 완(宛)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경릉태수 두증이 형주자사 도간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완을 포위했다. 완성의 병력도 적고 양식도 다 떨어진 상태라 순숭은 13세에 불과한 어린 딸 순관을 보내 양성태수 석람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순관은 수십 명의 용사들과 함께 나가 싸워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석람에게로 가 순숭의 서신을 보여줬다. 석람이 다시 주방에게 구원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니, 주방은 아들 주무(周撫)와 군사 3,000을 완으로 보냈다. 두증은 지원군을 보고 도망친 뒤, 이내 순숭에게 단수(丹水)의 도적을 토벌할 테니 투항을 받아달라 청했다. 순숭은 도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증을 세력으로 편입시키고자 이를 허하였으나, 두증은 약조를 어기고 곧바로 양양(襄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순숭은 장수 왕국(王國), 유원(劉願) 등을 보내 양현(穰縣)을 습격케 하고, 두증의 사촌형인 신야태수 두보(杜保)를 사로잡아 참수했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원제 사마예가 건강(建康)에서 칭제하여 동진 정권을 세우자, 상서좌복야에 임명되어 상서령 조협과 공동으로 조정의 예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주력했다. 이후 태상으로 옮겨졌을 때, 원제에게 학교를 세우고 《주역》, 《상서》, 《시경》, 《춘추좌전》 등 각 분야에 정통한 박사를 둘 것을 건의했다. 원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으나, 하필 그 시기에 대장군 왕돈이 난을 일으키면서 무산되었다. 왕돈은 원제의 친위군을 박살내 조정을 장악하고, 조정에 상표해 순숭을 다시 상서좌복야로 삼게 했다.

영창 원년(322년) 11월, 왕돈에게 패한 후부터 그의 통제를 받던 원제 사마예가 결국 분사하고, 명제 사마소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군신들은 모두 모여 원제의 묘호를 어떻게 정할지 의논하고 있었는데, 왕돈이 보낸 사자가 이르기를,
"이리와 승냥이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니, 선제의 묘호는 마땅히 나중에 정하는 것이 옳습니다."
라 하였다. 그러나 순숭은 그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의논을 이어나갔다.
"예법에 따르면 공이 있을 때 조(祖)를 쓰고, 덕이 있을 때 종(宗)을 쓴다 하였습니다. 원황제께선 하늘의 선택을 받은 명철한 인물로 나라의 중흥을 이끄셨고, 백성에게 태무의 은덕을 베풀기 위해 힘쓰셨으니, 그 공과 은혜는 한나라의 선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신이 감히 말하옵나니, 선제의 상호(上號)를 중종(中宗)으로 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명제도 순숭의 의견에 동의하여 원제의 묘호는 중종으로 정해졌다. 묘호가 정해지고 순숭은 왕돈에게 서신을 써 그를 다그쳤다. 왕돈은 본래 순숭을 절친한 친구라 여겨 사공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 일이 있은 후로 그를 사공으로 삼으려던 계획을 취소했다.

태녕 원년(323년), 산기상시가 더해지고, 영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 또, 2차 왕돈의 난 진압에도 공을 세워, 금자광록대부, 녹상사서로 옮겨지고, 평락백(平樂伯)에 봉해졌다. 이후 우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 영비서감을 역임했으며, 친병(親兵) 120명을 하사받았다.

함화 3년(328년) 2월, 역양내사 소준이 반란군을 거느리고 도성 건강을 함락시켰다. 순숭은 사도 왕도 등과 함께 어린 황제 성제 사마연의 곁을 보위했고, 소준이 성제를 석두성으로 끌고 갈 때도 황제의 곁을 지켰다.

함화 3년(328년) 9월, 소준이 어이없이 전사하고 온교 등의 의군이 그 잔당을 무찌르면서 석두성을 되찾았다. 온교는 성제를 도성으로 모시기 위해 배에 태웠는데, 순숭은 안그래도 노쇠한데다 병환까지 위독했음에도 온 힘을 다해 황제를 따라 배에 올랐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향년 67세. 사후 시중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경(敬)'.

승평 4년(360년), 조정에서 순숭의 묘지를 이장하고, 조서를 내려 돈 100만 전과 베 5,000필을 하사했다.

3.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