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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31 18:50:53

맹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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孟觀
(? ~ 301)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이며 자는 숙시(叔時)로 기주 발해군 동광현 출신. 가족관계에 대해선 알려진 바 없다.

2. 생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천문에 능통했다고 한다. 무제 사마염이 죽고 혜제 사마충이 즉위하자 전중중랑에 임명되었다. 맹관은 당시 권력을 독차지하고 있던 양준에게 홀대받아 남몰래 원망하고 있었는데, 황후 가남풍이 시인감 동맹(董猛)을 통해 그를 부추겨 양준의 주살과 양태후 폐위를 논의케 하였다.

291년 3월, 가남풍의 계략에 말려든 초왕 사마위가 양준을 살해하자, 맹관은 즉시 군사를 거느려 양준의 동생 양요, 양제와 그 무리인 단광, 무무, 이빈, 문앙 등을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 이로써 권력은 전부 가남풍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맹관은 양준 제거를 도운 공으로 황문시랑, 적노장군으로 승진하여 측근 40명을 거느릴 수 있게 되었고 상곡군공에 봉해졌다.

296년 8월, 저족의 수장 제만년이 관중에서 칭제하고 무리 10만으로 경양(經陽)을 포위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서진 조정은 양왕 사마융[1]을 필두로 중서령 진준, 중서감 장화, 주처, 해계 형제 등을 보냈으나, 위아래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큰 진전은 없었고, 되려 아깝게 주처만 잃었다.

299년, 여러해가 지나도록 제만년이 관중의 근심거리로 남으니, 조정에서는 맹관을 정토대도독으로 임명한 뒤 군사를 주어 관중으로 보냈다. 맹관이 이끄는 숙위병들은 당시 서진의 최고 정예병들로 하나같이 민첩하고 용맹하였고, 맹관 또한 앞장서서 화살과 돌 세례를 받아가며 반란군을 상대로 10여차례나 승리했다. 이윽고 맹관은 중정천(中亭川)에서 마지막으로 반란군을 격파하고 제만년을 사로잡았다. 조정에서는 맹관의 공로를 치하해 그를 동강교위로 옮기고 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301년, 조왕 사마륜이 황위를 찬탈하자 저족 평정의 공이 있는 맹관에게 안남장군, 도독면북제군사를 더하고 완성에 주둔하게 했다. 오래지 않아 제왕 사마경이 제후들과 연합해 사마륜 토벌을 개시하였다. 맹관은 그날 밤에 천문을 보고 황제를 상징하는 자궁성(紫宮星)에 변화가 없으므로 사마륜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판단해 굳게 지켰다. 그러나 사마륜이 곧 패망해 목숨을 잃으니, 맹관은 사마륜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영요야(永饒冶) 현령 공동기(空桐機)에게 체포되어 참수당하고 그 삼족이 멸문당했다. 공동기는 맹관의 수급을 낙양으로 보냈다.


[1] 원래 조왕 사마륜이 대장이었으나 자신의 측근 손수해계와 말다툼을 벌일 때 과하게 편들어주다 중앙으로 소환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