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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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祖約(? ~ 330)
동진의 반란자. 자는 사소(士少). 유주 범양군(范陽郡) 주현(遒縣) 출신. 동진 초에 북벌을 도전한 것으로 유명한 명장 조적의 동생.
2. 생애
조약은 초기에 효렴으로 살펴져 성고(成皋) 현령을 지냈고, 형 조적과는 우애가 무척 깊었다. 영가의 난으로 서진이 큰 혼란에 빠지자, 조약은 형과 함께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피난갔다. 당시 건강(建康)을 거점 삼아 자리를 잡아가던 낭야왕 사마예는 그들을 불러 연속(掾屬)으로 삼으니, 둘은 진류군 출신 명사 완부와 나란히 유명세를 떨쳤다. 이후 조약은 종사중랑이 되어 인재 선발과 천거의 임무를 맡았다.건무 원년(317년) 6월, 형 조적이 분위장군, 예주자사에 임명되고, 북벌에 나서서 초(譙)와 패(沛) 지역을 장악하자, 조약도 점점 중용받았다.
대흥 4년(321년) 9월, 대장군 왕돈과 조정의 갈등으로 인해 북벌에 지장이 가자, 조적은 마음의 병을 얻고 옹구(雍丘)에서 사망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10월 7일에 조약을 평서장군, 예주자사로 삼아 조적 대신 그 무리를 통솔케 하였다. 이때 조약의 이복형인 광록대부 조납(祖納)이 은밀히 원제 사마예에게 진언했다.
"조약은 내심 능상(陵上)의 마음을 품고 있어 억제해야만 합니다. 지금 그는 좌우에서 명성을 뽐내고 있으니, 여기에 권세를 더하여 주었다가는 장차 혼란의 실마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원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당시 사람들은 조납이 그저 배다른 동생인 조약을 시기하여 모함하는 것이라 여겼다. 여하튼 조약은 조적의 군사를 물려받게 되었지만, 그는 형과 달리 장병들을 위로할 줄도 모르고, 무리를 통솔하는 능력도 모자라 사졸들이 진심으로 따르지 않았다.영창 원년(322년) 10월, 조적의 사망 소식은 후조에도 알려져, 후조군이 지속적으로 하남(河南) 지역을 경략해 양성(襄城)과 성보(城父)를 함락시키고 초(譙)를 포위하였다. 조약은 이를 막을 재간이 없어 수춘(壽春)으로 전선을 후퇴시켰고, 후조군은 진류(陳留)를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조적 덕분에 잠시나마 안정되었던 연주(兗州)는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태녕 2년(324년) 5월, 승상 왕돈이 재차 거병하자, 조약은 명제 사마소로부터 건강을 보위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에 조약은 출진하여 왕돈이 임명한 회남태수 임태(任台)를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5등후(五等侯)에 봉해졌다. 또, 진남장군으로 승진하고 수춘에 그대로 주둔하여 북쪽 국경의 수비를 맡았다.
태녕 3년(325년) 7월, 명제 사마소가 붕어하고 평소 신뢰하던 대신들을 친히 불러모아 유조를 남겼는데, 조약이 그 자리에 빠져있어 보정대신이 되지 못 하였다. 조약은 스스로 자신의 명성이 치감, 변곤에 비해 꿇리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조정에 여러 차례 개부(開府)를 요구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여 원망을 품었다.
함화 원년(326년) 11월, 후조의 급군태수 석총이 군대를 이끌고 수춘을 공격하자, 조약은 조정에 상표하여 여러 번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군이 이르지 않았고, 석총은 수춘 남쪽에 위치한 준주(逡遒), 부릉(阜陵)까지 나아가 5,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으면서 실컷 유린하였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도 동진 조정은 그저 왕도를 강녕(江寧)에 주둔시켜 건강의 방어만 신경쓸 뿐, 수춘을 구원해주지 않았다. 다행히 역양내사 소준이 장수 한황(韓晃)을 보낸 덕에 석총은 달아나 후조로 돌아갔다.
석총의 침략 이후에 조정에서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도수(塗水)에 제방을 쌓았다. 도수에 제방을 쌓으면 상류가 범람하여 도수 북쪽에 위치한 수춘이 적진 한복판에 완전히 고립되는 형세에 놓이기에, 조약은 조정에서 자신을 버렸다고 여겨 더욱 노여워하였다. 황태후 유문군은 조약을 달래고자 채모를 파견해 그간의 노고르 치하하였는데, 조약은 조정의 사신으로 온 채모를 보고도 눈을 부릅 뜨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에 조정을 비난하였다.
함화 2년(327년) 10월, 소준은 조약이 조정을 얼마나 원망하는지 잘 알고, 참군 서회(徐會)를 파견해 함께 유량(庾亮)을 토벌하자 청하였다. 조약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고, 조카 조지(祖智)와 조연(祖衍) 또한 일이 성공할 것이라며 적극 찬성하였다. 반란을 반대하던 환선은 아들 환융(桓戎)을 보내 조약과의 면담을 청했으나, 조약은 환선이 필시 간하려는 것임을 파악하고 거절했다. 이에 환선은 조약과 단교하고 반란에 일체 가담하지 않았다.
함화 2년(327년) 11월, 조약이 조적의 아들인 패내사 조환(祖渙), 사위인 회남태수 허류(許柳)를 파견해 소준과 합류하도록 하였다. 조적의 아내는 허류의 누나였으므로, 허류에게 조약을 따르지 말 것을 간곡히 간했지만, 허류가 듣지 않았다.
함화 3년(328년) 2월, 도성 건강을 함락하고 조정을 장악한 소준은 스스로 표기장군에 오르고, 조약을 시중, 태위, 상서령으로 삼았다.
함화 3년(328년) 4월, 후조의 석감이 완(宛)을 공격해 남양태수 왕국(王國)의 투항을 받아내고, 회수(淮水) 이북에 주둔하여 수춘을 위협하였다. 이때 조약의 장수 진광(陳光)과 그를 따르는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조약을 공격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약은 큰 위기에 빠졌으나, 측근 염독(閻禿)이 조약으로 위장하고 진광에게 붙잡힌 덕에 조약은 담을 넘어 겨우 빠져나왔다. 진광과 그 부하들은 염독이 진짜 조약이라 생각해 그를 붙잡아 석륵에게 바치고 후조에 투항하였다.
함화 3년(328년) 5월, 온교와 유량이 의병을 일으켜 형주자사 도간을 맹주로 추대하고, 소준과 조약의 반란군과 맞섰다. 소준은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석두(石頭)에 주둔한 뒤, 조약에게 군량 10,000석을 지원하니, 조약은 사마 환무(桓撫) 등을 보내 이를 영접하게 하였다. 하지만 온교의 선봉장인 모보가 중간에서 습격하여 죽거나 사로잡힌 자가 10,000명에 달했고, 군량은 모두 빼앗기면서 조약군은 한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함화 3년(328년) 6월, 조약이 조환과 환무를 파견해 분구(湓口)를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조환과 환무는 분구로 향하다가 환(皖)에서 일전에 조약과 절교한 초국내사 환선을 쳤다. 그러나 환선을 구원하러 급히 달려온 모보에 의해 격파당해 도망쳤고, 모보는 그들을 추격하여 조약의 세력권인 동관(東關)과 합비(合肥)를 점령하였다.
조약의 패배가 어느정도 명확해지자, 조약 휘하의 장수들은 후조와 내통하여 내응을 약조하였다. 이에 석륵은 석총과 석감을 보내 수춘을 침공하니, 조약의 무리는 일시에 무너졌고 조약은 역양(歷陽)으로 달아났다. 석총은 수춘에서 20,000여 호를 노획하고 돌아갔다.
함화 4년(329년) 정월, 관군장군 조윤(趙胤)이 부장 감묘(甘苗)를 보내 역양의 조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때 반란군을 진두지휘하던 소준은 이미 관군에게 전사한지 오래라,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조약 역시 두려운 마음에 측근 수백 명만 데리고 후조로 망명하였다. 역양에 남아있던 조약의 장수 견등(牽騰) 등은 성문을 열고 관군에게 항복하였다.
조약이 후조에 귀순했을 때, 후조의 천왕 석륵은 조약의 사람됨을 얕잡아보고, 기실참군 왕파(王波)를 보내
"경은 반역을 하였다가 세력이 극히 궁핍해져 어쩔 수 없이 귀순하였는데, 우리 조정을 죄 짓고 숨는 수풀이라 여기는가? 경은 무슨 염치로 그 낯짝을 감히 들이미려 하는가?"
라며 책망하였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가, 격문을 내려 비로소 조약을 사면하고 그의 귀순을 받아주었다. 태화 3년(330년) 2월, 우복야 정하(程遐)가 석륵에게 유세하며 말했다.
"천하가 안정되어 갈 때, 마땅히 역순(逆順)을 분명히 하여야 하므로, 과거 한나라의 고조는 정공(丁公)을 참수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임금을 충실히 섬겨도 발탁되지 않는 자가 없었고, 반역하여 불신(不臣)한 자들 중에서 죽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이로 인해 천하가 대왕께 복종한 것입니다. 하나, 조약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에 신은 무척 당혹스럽습니다. 또, 조약은 대대적으로 빈객을 모으고, 마을의 선인(先人)들의 밭을 점거하니, 지주들의 원성이 자자합니다."
안서장군 요익중도 정하의 말에 찬동하면서 조약을 죽일 것을 권하자, 석륵은 마침내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조약과 그 일족을 친히 만나보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 조약은 석륵의 거짓말을 간파하고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지만, 이미 화를 피하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해 술을 퍼마시고 만취하였다. 이윽고 석륵이 군사를 풀어 조약의 친족들을 연행하니, 조약은 만취한 상태로 체포당해 끌려갔다. 조약이 저자에 이르렀을 때, 같이 잡혀온 외손자를 보고는 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에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조약을 죽였다. 이후 석륵은 조약의 친족 100여 명을 붙잡아 처형하였고, 그 집안의 처, 첩이나 어린 아이들은 여러 이민족들에게 각기 분배하여 주었다. 이때 10살이었던 조적의 서자 조도중(祖道重)은 과거 조적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던 좌위장군 왕안에게 구출되고, 무사히 동진으로 돌아가서 조적의 대는 끊기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