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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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팔달(江左八達) | |||||||
사곤 | 필탁 | 광일 | 완방 | 양만 | 환이 | 완부 | 호무보지 |
阮孚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서진과 동진의 인물이며 자는 요집(遙集)으로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위씨현(尉氏縣) 출신. 죽림칠현 중 한 명인 완적의 종손이다.2. 생애
서진에 있을 때 태부의 속관으로서 일하다가 영가의 난을 피해 강동으로 피난가니, 사마예가 그를 안동참군으로 삼았다. 완부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술만 마시며 업무를 게을리했음에도, 당시 동진에서 성행한 청담사상 덕에 명성이 높아져 오히려 승상부의 종사중랑으로 승진하였다. 그가 하루종일 술에 취해 방종하여도 황제를 비롯한 권력자들이 명사로 취급하며 죄를 묻지 않았다.낭야왕 거기장군 사마부의 장사가 되어 광릉에 진수하다가, 조정에 돌아와 황문시랑으로 옮겨지고 산기상시를 겸했다. 완부는 전보다 관직이 올랐음에도 술을 탐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고, 국고의 금과 담비 가죽을 훔쳐 술과 바꿔먹다 걸려서 탄핵을 받았지만 원제가 그를 용서하였다. 이후로도 완부는 별탈 없이 관직 생활을 이어나가 태자중서자, 좌위솔, 둔기교위를 역임했다.
진명제가 즉위하고 시중에 임명되었고 왕돈의 난 진압에 참전해 남안현후에 봉해졌다. 완부는 이부상서로 옮겨져 동해 왕사를 거느도록 명 받았지만, 완부는 병을 핑계로 집에서 조서를 받겠다 떼를 썼다. 그를 모시러 갔던 상서령 치감이 곁에서 예의에 어긋난다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이를 전해들은 명제는 실제로 병에 걸려 앓아 누웠기에 매우 불쾌히 여기면서도 일단 입궁하라 재촉했다. 황제가 날이 갈수록 위독해지고 있음에도 완부가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치감과 중서령 온교가 완부를 억지로 수레에 태워 입궁시키려 했다. 수레가 궁문 앞에 다다르고 궁궐에 들어가기 위해 일행은 수레에서 내렸는데, 이때만을 노린 완부가 온교를 떨쳐내고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온교와 치감만이 궁에 들어가 명제의 최후를 지켰고 완부는 끝내 조서를 집에서 받았다.
진성제 즉위 후 승상 왕도, 유량 등은 완부의 방탕함을 이유로 중앙에서 내보내 평월중랑장, 광주자사에 임명했다. 완부는 수도에서 나와 부임지로 가던 중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