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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04:48:40

채모(동진)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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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제양문목남(濟陽文穆男)
蔡謨 | 채모
시호 문목(文穆)
작위 제양남(濟陽男)
(蔡)
(謨)
도명(道明)
생몰 281년 ~ 356년
출신 진류군(陳留郡) 고성현(考城縣)
부친 채극(蔡克)
자녀 채소(蔡邵), 채계(蔡系)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서진동진의 인물. 대대로 명망높은 집안인 진류 채씨 출신.[1]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상서를 지낸 채목(蔡睦)의 증손자. 서진 시기 낙평태수를 지낸 채덕(蔡德)의 손자. 동영공 사마등의 종사중랑을 지낸 채극(蔡克)의 아들.[2] 채표와 증조부가 같은 육촌이다.

명성이 무척 높아 영천의 순개(荀闓), 낭야의 제갈회와 함께 "중흥삼명(中興三明)"의 일원이자, 완방, 치감, 호무보지 등과 더불어 "연주팔백(兗州八伯)"으로 꼽혔다. 정치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부모승이의(父母乘離議)〉, 〈연단주공소(練斷酬功疏)〉, 〈역자격(易子檄)〉 등 다양한 글을 남겼다.

2. 생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 효렴으로 천거되어 주의 종사로 부름 받고, 다시 수재로 천거되어 동해왕 사마월 휘하의 사공연(司空掾)으로 부름 받았으나 채모는 이를 모두 사양했다. 이윽고 하북이 화란에 휩싸이자, 채모는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피난갔다. 당시 광릉(廣陵)에 주둔 중이던 동중랑장 사마소가 그를 맞이하고, 자신의 참군으로 삼았다.

건흥 3년(315년) 2월, 승상에 오른 낭야왕 사마예는 채모를 건강으로 징소해 승상연(丞相掾)으로 삼았다가 참군으로 옮겼다. 그리고 동진 정권이 본격적으로 건국된 후에는 중서시랑, 의흥태수, 대장군 종사중랑, 사도좌장사, 시중을 역임했다.

함화 3년(328년) 3월, 반란을 일으켜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한 역양내사 소준은 회계(會稽)로 도망친 오국내사 유빙(庾冰)을 쫓기 위해 군대를 준비하면서 채모를 새로운 오국내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소준을 따르고 싶지 않았던 채모는 오군(吳郡)으로 부임해 장개, 고중, 고양(顧颺) 등과 의군을 일으키기로 약조했다. 회계내사 왕서가 유빙을 선봉으로 삼고 의군을 일으키자 채모, 고중 등도 모두 군을 들어 왕서에게 호응했다. 채모는 유빙을 영접하고 오국내사 직책을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함화 4년(329년) 2월, 소준의 반란이 완전히 평정되고 조정이 다시 정상화되자, 채모는 다시 시중으로 복직되었다가, 오병상서(五兵尚書), 영낭야왕사(領瑯邪王師)로 승진했다. 채모는 상소해 승진을 사양하려 했지만 조정에서 그의 청을 불허하였다. 오래지 않아 조정에서 그를 다시 이부(吏部)로 되돌리고, 소준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다 하여 제양남(濟陽男)에 봉했다. 채모는 이번에도 사양하려 했지만 조정에서 또 그의 사양을 불허하였다.

어느 겨울 날, 채모는 상서의 업무를 처리하던 중, 명제 사마소의 위패를 세우는 것을 깜빡하는 바람에 태상 장천(張泉)과 나란히 면직당했다. 하지만 얼마 뒤에 조정에서 그를 불러 태상, 영비서감(領祕書監)으로 삼았다. 채모는 병으로 인해 직책을 받들 수 없다며 사양하려 했지만, 조정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시 관직에 올랐다.

함강 4년(338년) 4월, 성황제 사마연이 조정에 들어와 임헌(臨軒)하여 태부 왕도, 태위 치감, 사공 유량(庾亮)을 불렀다. 그들이 황제의 부름에 응해 도착하니, 성제가 전정(殿庭) 위에서 향악을 즐기려 했는데, 문하의 관리들이 제사와 연회가 아니면 향악을 연주한 선례가 없다고 말했다. 성제가 태상 채모에게 대책을 물으니, 채모는 황제가 임헌했을 때는 금과 돌로 된 악기로 향악을 연주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성제는 채모의 말에 따라 향악을 즐겼다. 이 일은 곧 선례로 남았고, 후대의 황제들이 평대(平臺)에 앉아 향악을 즐기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팽성왕 사마굉(司馬紘)이 상소해, 명제 사마소가 손수 그린 불상(佛象)이 낙현당(樂賢堂)에 있다고 보고했다. 성제가 직접 이를 확인했는데,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을 겪었음에도 불상은 멀쩡히 잘 보존된 상태였다. 성제는 이 일을 어떻게 할지 조정의 신하들을 모아 의견을 물었다. 이때 여러 사람들이 조서를 내려 사마굉을 칭송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채모는 사적인 일로 조정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의리에 합치하지 않다며 반대했다. 성제도 채모의 의견에 동의해 그의 말에 따랐다.

함강 5년(339년) 4월, 후조의 황제 석륵이 사망하자, 정서장군 유량은 후조 정벌과 중원 회복을 꾀하면서 조정에 상표해 석성(石城)으로 옮겨 주둔하길 청했다. 성제가 이를 조정에 논의하도록 하니, 승상 왕도만 찬성할 뿐, 채모를 필두로 태위 치감 등 대부분의 공경대신들이 북벌 불가론을 주창했다. 결국 성제는 조서를 내려 유량이 진을 옮기는 것을 불허하였다.

성제의 어머니인 명목황후 유문군이 매년 황릉에 참배 의식을 진행했는데, 이를 행할 때마다 물자와 인력 손실이 어마어마했다. 채모가 황태후는 태묘에 알현만 하면 되지 황릉까지 가서 참배할 필요는 없다고 조정에 건의하자, 조정에서도 황태후에게 참배를 그만하도록 했다.

함강 5년(339년) 8월, 병세가 위독해진 태위 서주자사 치감은 채모를 자신의 후임으로 삼고자, 그를 태위군사(太尉軍司), 시중에 임명했다. 이윽고 치감이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채모를 정북장군, 도독서연청3주양주지진릉예주지패군제군사(都督徐兗青三州揚州之晉陵豫州之沛郡諸軍事), 영서주자사(領徐州刺史), 가절로 삼았다. 당시 좌위장군 진광(陳光)이 오랑캐를 정벌하겠다 상소했는데, 조정에서 그의 요청을 수락하고 수양(壽陽)을 공략하게 했다. 이에 채모도 상소해 후조의 강성함과 수양성의 단단함을 논하며, 다시 조정에 북벌이 불가함을 일깨웠다. 성제도 채모에게 수긍하고 수양성 공략을 중지하게 했다.

후조의 석호가 청주(靑州)에서 함선 수십 척을 건조하고, 배를 띄워 동진 연안의 여러 현들을 약탈했다. 그들이 노략질 하는 곳마다 백성들을 살육하고 피와 불바다를 만드니, 조정에서도 이 일을 크게 근심하였다. 채모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용양장군 서현(徐玄) 등에게 중주(中州)를 지키게 하고, 후조의 함선을 탈취하는 자에게 작은 배는 베 100필, 큰 배는 1,000필에 달하는 현상금을 내리겠다고 선언했다. 또, 채모는 병사 7,000명을 토산(土山)에서 강승(江乘)에 이르는 지점까지 총 여덟 군데로 나누어 배치하고, 30여 개의 봉화를 설치해 상황에 따라 일사불란한 방비 태세를 보여주었다. 이로써 석호가 애써 만든 함대도 순식간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함강 8년(342년) 6월, 성제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강황제 사마악이 즉위하자, 채모는 좌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임명되었다.

영화 2년(346년) 2월, 영사도(領司徒)에 임명되면서, 사망한 보정대신 하충을 대신해 회계왕 사마욱과 함께 어린 목황제 사마담을 보정했다.

영화 3년(347년), 부친상을 이유론 사직한 양주자사(揚州刺史) 은호를 대신해 양주자사가 되었고, 녹상서사, 영사도도 겸하였다.

영화 4년(348년) 12월, 조정에서 채모를 사도, 시중에 삼으려 하자, 채모는 이번에도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황태후 저산자가 조서를 내려 그의 사양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채모는 출근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영화 5년(349년) 4월, 후조의 무황제 석호가 죽고 11살에 불과한 태자 석세가 즉위하면서 후조는 큰 혼란에 빠졌다. 후조의 양주자사 왕협(王俠)이 수양을 들어 동진에 항복했고, 정북대장군 저부(褚裒)가 기세를 올려 북벌을 단행하니, 동진에서는 조야로 마침내 중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채모는 그런 소문을 듣고도 별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자신과 친한 이들에게만 이런 말을 했다.
"오랑캐의 멸망은 진심으로 경축할 만한 일이나, 이는 곧 왕실의 우환을 끼치게 될 걸세."
어떤 이가 어째서 그러느냐고 묻자 채모가 대답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때를 알고, 어두운 세상에서 백성들을 구하는 일은 위대한 영웅호걸이 아닌 이상에야 감당할 수 없네. 하나, 지금 이 나라의 덕망과 능력을 헤아려 살펴보면 이 일을 감당할 만큼 현달한 인물이 없지 않은가. 능력도 없는 이가 함부로 나섰다가는 그 뜻에 미치지 못하고 백성들만 지칠 뿐이네. 결국, 재능이 부족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재물, 군사력을 모두 소진하고 지혜와 용맹이 꺾여 양쪽 모두 죽어나갈 것이라네."

영화 6년(350년) 12월, 채모가 출근을 거부하기 시작한 이래로, 황태후는 거의 2년 가까이 매번 사신을 파견해 타일렀으나 소용없었다. 저 태후와 목제 사마담은 조회를 열고, 시중 기거(紀據)와 왕문랑 정찬(丁纂)을 보내 채모에게 참석할 것을 종용했지만, 채모는 또 병을 핑계로 사양했다. 이 날은 저 태후도 양보하지 않아, 아침 일찍부터 오후 4시까지 사자가 10여 차례를 왔다갔다 했다. 당시 8세였던 목제 사마담은 심히 지루함을 느끼고 좌우에 물었다.
"부른 사람이 어째서 지금까지 오지 않는 건가? 조회는 대체 언제 끝날 예정이오?"
하루종일 서서 기다리던 신하들도 모두 피폐해져 있으니, 저 태후가 마침내 조서를 내려,
오지 않을 자이니 조회를 파하라.
하였다. 이를 본 회계왕 사마욱이 말했다.
"채공(蔡公)은 오만하여 상명(上命)을 거역하니,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다. 만약 폐하께서 비굴하게 행동하신다면, 신하들이 군신의 대의(大義)를 행하지 아니할 것인 즉, 나라의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조정의 공경들도 모두 사마욱의 말에 동조하며, 채모를 체포해 정위에 넘기기로 결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후에야 비로소 두려움을 느낀 채모는 자제들을 거느리고 조궐(詣闕)로 들어가, 이미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면서 사죄했다. 이후 몸소 정위에 출두해 자신의 징계를 기다렸다. 채모는 처형될 뻔했으나, 저 태후가 이전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준 덕에 겨우 목숨만 구하고 면직되었다.

관직에서 쫓겨난 채모는 이후로 두문불출하면서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에 힘썼다. 수년이 지나고, 저 태후는 다시 조서를 내려 채모를 복권시키고 광록대부, 개부의동삼사에 임명했다. 알자복야 맹홍(孟洪)이 조서를 들고 채모의 집을 찾아갔지만, 채모는 병이 위독하다는 이유로 또 사양했다. 그가 진짜 아픈 것을 확인한 조정은 그에게 범장(几杖)을 하사했다.

영화 12년(356년),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 조정에서 예를 갖추어 부의하고, 장례를 치를 때 태위 육완의 전례에 의거하게 했다. 사후 시중, 사공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 채모의 장남 채소는 조정에 출사해 영가태수를 지냈고, 막내아들 채계는 무군장사를 지냈다.


[1] 위나라 시절에는 나름 번성했으나 영가의 난 이후로 대가 완전히 끊긴 양양 채씨와는 완전히 다른 가문이다.[2] 아버지 채극은 영가의 난이 일어나기 직전, 급상의 반란으로 인해 업성(鄴城)이 함락되면서 살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