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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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蔡豹(269 ~ 320)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자는 사선(士宣). 연주 진류군(陳留郡) 어성현(圉城縣) 출신. 조부 채목(蔡睦)은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상서를 지냈고, 부친 채굉(蔡宏)은 서진 시기에 음평태수를 지냈다. 채모와는 육촌이다.
2. 생애
채표는 기개와 재간이 있어, 바로 하남승(河南丞)으로 출사했고, 장락(長樂)과 청하(清河)의 태수직을 차례로 지냈다. 서진 말기에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채표는 장강 이남으로 피신해 건업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낭야왕 사마예의 휘하로 들어가, 진무장군, 임회태수, 건위장군, 서주자사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대흥 원년(318년) 12월, 팽성내사 주무(周撫)가 패국내사 주묵(周黙)을 살해하고 후조에 투항하자, 채표는 하비내사 유하와 태산태수 서감과 함께 주무를 토벌했다. 주무는 한산(寒山)에서 격파되어 패주하다가 서감의 장수 우약(于藥)에게 사로잡혀 참살당했다. 하지만 논공행상을 시행할 때, 서감은 자신의 공적이 유하보다 뒤처지는 것을 보고 노하여 태산을 들어 후조에 투항하고, 스스로를 안북장군, 연주자사라 칭했다.
대흥 2년(319년) 6월, 서감이 제수(濟水) 인근을 노략질하면서 동완(東莞)까지 공격해오니, 동완태수 후사모(侯史旄)는 제방에 의지해 위태롭게 성을 지켰다. 사마예는 조서를 내려 정로장군 양감, 서주자사 채모, 무위장군 후예(侯禮), 임회태수 유하, 선비족 장수 단문앙(段文鴦) 등에게 서감을 토벌하라 명했다. 하지만 동진의 장수들은 서감군이 두려워 하비(下邳)에 진을 치고 나아가지 않았다. 채표는 거듭 진군해야 한다 주장했으나, 이번 작전의 대장인 양감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대흥 3년(320년) 5월, 보다못한 채표가 자신의 군대만이라도 움직여 단구(檀丘)에서 서감을 무찔렀다. 다급해진 서감이 후조에 구원을 요청하자, 석륵은 장수 왕복도(王伏都)에게 300명의 기병을 주어 서감을 돕게 하고, 장경(張景) 등으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했다. 이때 석륵이 서감의 청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고, 구원하러 왔다는 장수 왕복도 또한 음란하고 포학하니, 서감은 앞으로의 일을 크게 근심하였다. 왕복도의 후발대인 장경 등의 군대가 동평(東平)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서감은 의심이 깊어져, 장경이 자신을 습격해오리라 판단하고, 먼저 왕복도를 공격해 후조군 300명을 몰살해버렸다.
왕복도의 구원병이 동진군이 아닌 서감의 배신으로 전멸했다는 소식에 석륵은 크게 노하여 장경에게 자리를 지키라 전하고, 석호를 보내면서 본격적으로 토벌하려는 모양새를 보였다. 서감은 재빨리 동진에 다시 항복하겠다는 서신을 전달했지만, 원제 사마예는 자주 배신하는 서감을 미워해 항복을 거절하고 양감과 채표에게 서감을 토벌하라 재촉했다.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음에도 의심하며 진격하지 않은 양감은 이내 상서령 조협에게 탄핵당해 면직되었고, 채표도 책임을 면치 못해 절충장군으로 강등당하는 대신 양감의 토벌군 전부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양감의 일로 동진군이 허송세월하는 사이에 서감은 처자식을 볼모로 다시 후조에 투항했고, 이미 석호의 군대도 전부 내려와 거평(鉅平)에 주둔한 상황이었다.
대흥 3년(320년) 8월, 채표는 서감을 토벌하기 위해 변성(卞城)까지 나아갔지만, 석호가 진군을 개시하자 야밤에 다시 하비로 퇴각했다. 그때 서감이 퇴각하던 채표를 단구에서 야습해 치중을 빼앗았다. 장수 유총(留寵), 육당(陸黨)이 힘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이기지 못하고 모두 전사했다. 겨우 패잔병을 수습해서 하비에 들어간 채표는 자진하여 건강(建康)에 출두하려 하니, 북중랑장 왕서가 제지하며 말했다.
"오랑캐의 군대가 이르렀으니, 그대는 잠시 이곳에 머무르며 백성을 보호해주시오. 사죄는 적이 물러간 후에 해도 늦지 않소."
채표도 왕서의 말을 일리있다 여기고 이에 따랐다. 한편, 채표의 패전 소식을 들은 원제는 바로 조서를 내려 당장 채표를 수도로 체포해 오게 했다. 원제의 사신으로부터 체포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은 왕서는, 그 날 밤에 군대를 이끌고 채표의 진영을 포위했다. 채표는 정체불명의 적이 침입해온 줄로만 알고 응전하려 했으나, 이내 체포하라는 조서를 들고 온 왕서임을 깨닫고 순순히 사로잡혔다. 이후 건강으로 압송된 채표는 적을 앞에 두고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죄목으로 참수되고, 그의 시체는 3일간 저잣거리에 효시되었다. 향년 52세. 자식이 한 명도 없어 대가 끊겼다.채표는 안으로는 부하들을 위무하고, 밖으로는 백성들을 잘 보살펴 인망이 높았는데, 이토록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깊이 슬퍼했다. 참고로 형의 아들인 조카 채예(蔡裔)는 삼촌과 달리 출세하여 산기상시, 연주자사를 지냈고, 고양향후(高陽鄉侯) 작위에까지 봉해졌으며, 훗날 은호가 북벌할 때도 참여해 군대를 지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