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22:04:26

후사광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侯史光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

1. 개요

서진의 인물. 청주 동래군 액현 사람으로 자는 효명(孝明). 참고로 후사는 성씨이다.[1]

2. 생애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 사물에 대한 이해가 좋았고 동향 사람 유하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인이 되고 효렴에 천거되어 주에서 별가로 부름을 받았다.

264년, 낙양 전농중랑장이 되고 관중후에 봉해졌다. 265년에는 산기상시, 시중을 겸임했으며, 황보도(皇甫陶), 순고(荀暠) 등과 함께 천자의 사자로 부절을 들고 민간의 풍속을 시찰해 그 풍속을 따르게 했다. 그리고 낙양으로 귀환해서 무제 사마염에게 보고를 올리니, 성문교위, 어사중승에 올랐고 임해후로 개봉되었다.

후사광은 직위가 높아졌음에도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며, 태보 왕상이 병으로 오랫동안 조정에 참여하지 않아 파면을 상주했지만, 사마염은 오히려 조서로 왕상을 우대하면서 후사광의 상주는 기각되었다. 이후 소부로 옮겼다가 사망하니, 사마염은 조서를 내려 그의 일가에게 조복 1구와 상복 1벌, 돈 50만 전, 베 100필을 모두 하사하였다. 장남 후사현(侯史玄)이 대를 이었고 현도태수를 지냈다.


[1] 후사씨의 시조는 진나라의 태사 동호(董狐)로, 조돈의 권세에 굴하지 않고 '임금을 시해한 자'라 적은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다. 동호의 일화는 널리 알려져 중국에서 사관들의 롤모델로 길이 남았으며, 진후(晉侯)의 사관(史官)을 지냈다 하여 그 자손들은 후사(侯史)씨로 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