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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20:00:37

유외(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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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

1. 개요

劉隗
(273 ~ 333)

동진의 인물로 자는 대련(大連). 서주 팽성국(彭城國) 팽성현(彭城縣) 출신으로 전한 초원왕 유교(劉交)의 후손이자, 후한 초기의 학자 유무(劉茂)의 6세손이며, 서진에서 동광현령을 지낸 유지(劉砥)의 아들.

2. 생애

어려서부터 문장에 능해 비서랑(祕書郎)에 임명되었고 이후 옮겨져 관군장군, 팽성내사를 역임했다. 영가의 난이 발발하자 장강을 건너 강동으로 피난갔다. 건강(건업)에서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낭야왕 사마예는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유외는 문학과 역사에 능통했고 상대의 뜻을 잘 헤아리는 재주도 있어 사마예의 총애를 받았다.

건흥 원년(313년) 5월, 민제 사마업이 조서를 내려 낭야왕 사마예를 좌승상, 대도독, 독섬동제군사에 임명했다. 사마예는 유외를 승상사직(丞相司直)으로 삼아 형벌과 법을 관장하게 했다. 성품이 강직했던 유외는 자신의 직무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수많은 명사(名士)들의 허물을 들춰냈다. 숙모의 장례 기간에 혼인식을 올린 세자문학 왕적지(王籍之), 숙부의 장례 기간에 딸을 시집보낸 동각좨주 안함(顏含)과 같이 대신일지라도 법을 어겼으면 어김없이 유외에게 탄핵당했다.

노강태수 양감(梁龕)이 자신의 처가 죽은 바로 다음 날에 상복을 벗고 연회를 열어 승상장사 주의 등 30여 명의 손님들을 초대했다. 당연히 이는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기에 유외가 사마예에게 상주했다.
"과거 주경왕은 정실과 장남이 모두 죽어 3년상을 치러야 했음에도 즉시 상복을 벗고 연회를 열어 《춘추》에서 비웃음을 샀습니다. 왕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필부에 불과한 양감은 마땅히 상복을 입고 엄숙히 장례를 치러야 했음에도 그러하지 아니하고, 거만하게도 바로 다음 날 아침에 연회를 즐기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에 감(龕)을 면직시키고 그의 후작(侯爵)을 박탈하길 청하는 바입니다. 또, 양감이 상 중임을 알았음에도 연회에 참석한 의(顗) 등 역시 예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한 달치 봉급을 몰수하여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여야 합니다."
사마예가 이를 그대로 따르면서 주의, 양감을 포함한 여러 명사들이 처벌받았다.

승상행참군 송정(宋挺)은 본디 양주자사(揚州刺史) 유도(劉陶)의 문하생이었으나, 유도가 사망하자 스승의 애첩을 취해 자신의 첩으로 들였다. 또, 국가 소유의 포(布) 600여 필을 횡령하여 시장에 가져다 파는 짓거리를 하다가 유외에게 걸려 면직당했으나, 분무장군 완항(阮抗)의 도움을 받고 장사(長史)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이에 유외가 송정을 탄핵했다.
"송정은 죽은 주인을 멸시하고 그 집안을 차지해 세 가지의 의(義)를 어겼으며, 인륜의 서열을 망가뜨렸으므로 그를 변방으로 쫓아내어 이매(魑魅)를 막아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 이유로 송정을 삭탈관직하고 금고종신(禁錮終身)을 선고한 것입니다. 하나, 분무장군 태산태수 완항이 그를 다시 불러 장사로 삼았습니다. 완항은 문무 양면으로 국가를 위해 노력하고 인현(仁賢)한 자를 가까이 해야 함에도, 도적을 구해주고 그를 완고히 보호하고 있습니다. 청하옵나니 완항을 면직시키시고 하옥하여 죄를 다스리소서."
사마예는 이번에도 유외의 청을 들어주었다. 완항은 그대로 투옥되었으며 송정은 근심하다가 병을 얻어 이내 사망했다. 유외는 다시 상주하여 송정이 취한 유도의 첩을 그와 이혼시켜 원래대로 되돌렸다.

진동장군 왕돈의 형인 남중랑장 왕함(王含)은 집안 사람들의 권세가 강대함을 믿고 교만해져 제멋대로 행동했다. 왕함은 참좌(參佐)와 수장(守長) 20명을 임명했으나 대부분이 재주보다는 비리로 임용된 것이었다. 유외가 상주해 이를 지적했지만 사마예는 왕돈, 왕도의 체면을 생각해 비리를 알고도 묵인했다. 사마예 선에서 사건을 덮은 것으로 일은 마무리 되었으나 유외는 낭야 왕씨 집안의 노여움을 샀다. 유외의 강직함이 이러하니 동진의 권세가와 명사들은 그를 심히 미워하여 안팎으로 적이 많았다.

건흥 4년(316년) 12월, 승상 사마예는 북벌에 필요한 물자를 기한 내에 준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세한 사정도 알아보지 않은 채 독운령 순우백(淳于伯)을 처형했다. 유외는 증거와 주변인들의 증언 등을 수집하여 순욱백이 억울하게 처형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구체적인 제반사정 등을 고려하면 책임은 중랑 주연(周莚), 법조참군 유윤(劉胤)에게 있으며, 이들이 이광(李匡)의 비호를 받으면서 순우백에게 그 책임이 씌워졌다 상주했다. 이에 사마예가 주연, 유윤을 불러 심문하니 과연 순우백은 억울하게 처형된 것이 맞았고, 그 배후에는 사마예가 제일 신임하는 신하인 왕도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상이 드러나자 왕도는 사직을 청했지만 사마예가 거부하고 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다.

건무 원년(317년) 3월, 승상 사마예가 진왕(晉王)에 올라 동진 정권을 수립하자 유외는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태흥 원년(318년), 진왕 사마예가 마침내 즉위하여 황제를 칭했다. 유외는 시중을 겸하고 도향후(都鄉侯) 작위를 받았다. 원제 사마예는 시중 유외, 단양윤 설겸, 상서령 조협을 곁에 두어 총애하고, 이들을 이용해 명문 호족들을 억누르려 했다. 동진은 황제가 아닌 강력한 명문 호족들의 뜻대로 좌지우지 되는 면이 있었는데, 유외와 조협이 황제를 숭상하고 호족들을 배척하자 비로소 정치가 세워졌다. 제일 세력이 강했던 낭야 왕씨를 중심으로 동진의 귀족들은 유외와 조협을 무척 원망했다.

태흥 3년(320년) 8월, 대장군 왕돈의 권력이 너무 강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사마예가 근심했다. 이에 유외가 심복들에게 군사를 주고 각 지방에 보내 왕돈에 대비할 것을 권했다. 사마예는 유외의 제안에 따라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承)을 상주자사(湘州刺史)로 삼아 상주에 주둔하게 했다.

태흥 4년(321년) 7월, 원제 사마예가 유외를 진북장군, 도독청서유평사주군사(都督青徐幽平四州軍事), 산기상시에 임명해, 10,000명의 병력으로 사구(泗口)에 주둔하게 하고, 대연을 정서장군으로 삼아 합비에 진수시켰다. 유외는 비록 외지로 나가게 되었으나 주둔지에서도 조정의 사정을 보고받으며 정사에 관여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유외와 조협 토벌을 명목으로 무창(武昌)에서 거병했다. 원제 사마예는 크게 노해 왕돈을 토벌하는 자를 5,000호의 후로 봉한다는 조서를 내렸다. 초왕 사마승은 왕돈을 막기 위해 사마 우괴, 장사 우망(虞望), 영릉태수 윤봉(尹奉), 건창태수 왕순(王循), 형양태수 유익(庾翼), 용릉현령 이웅과 함께 왕돈 토벌에 나섰다. 초반에는 양주자사(梁州刺史) 감탁의 형주군이 조정 편은 들면서 전세가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 기대했지만, 왕돈의 장수 위예(魏乂)와 이항(李恒)이 갑사 20,000명으로 임상(臨湘)을 기습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당시 임상에 치소를 두고 있던 사마승은 아직 토벌군이 모이기 전에 습격당하니 농성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양양에 있던 감탁은 왕돈군의 퇴로를 끊어서 임상의 포위를 풀고자 무창으로 진군했으나 감탁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지체되었다. 결국 윤봉을 비롯해 사마승에게 호응했던 여러 군의 태수들은 뜻밖의 상황에 자리를 지키며 형세를 관망했고, 그 사이 왕돈의 주력은 건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원제 사마예는 외지에 주둔해있는 대연와 유외를 불러 들여 건강을 보위하도록 했다. 건강으로 돌아온 유외는 의기양양하게 입조하여 조협과 함께 사마예에게 도성 내 낭야 왕씨들을 모조리 멸할 것을 청했으나, 원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그제서야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왕돈이 마침내 건강 인근에 이르렀을 때, 유외는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해 금성(金城)에 주둔했다. 하지만 석두성을 지키던 주찰이 성문을 열고 왕돈을 맞이하면서 석두성이 어이없게도 반란군에게 넘어갔다. 원제는 유외, 조협, 대연, 왕도 등에게 명해 황급히 석두성을 쳤지만 왕돈에게 대패했다.

석두성 전투에서 패전 소식을 들은 원제는 갑옷을 벗고 왕돈에게 사자를 보내 양위할 뜻이 있음을 밝히며 항복했다. 패배하고 돌아온 유외와 조협이 태극전에서 원제를 알현하자, 원제는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오열하면서 그들에게 말을 내어주고 도망치게 했다. 유외는 무리를 거느리고 건강에서 도망쳐 회음에 머물던 중 연주자사 유하에게 다시 쫓겨나 오갈 데가 없어졌다. 결국 그는 가족과 부하 200여 명을 데리고 후조로 가 석륵에게 투항했다. 석륵은 유외를 받아주고 종사중랑, 태자태부로 삼았다.

함화 8년(333년) 10월, 고조 명제 석륵 사후 해양왕 석홍이 즉위했지만 정권을 잡은 승상 석호가 전횡을 부렸다. 석호는 유외를 승상좌장사에 임명해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다. 이때 장안의 하동왕 석생과 낙양의 무위대장군 석랑이 석호 토벌을 명목으로 거병했다. 석호는 태자 석수를 남겨 수도 양국(襄國)을 지키게 하고, 보•기 70,000을 일으켜 친히 반란을 토벌했다. 석호는 순식간에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을 무너뜨리고 석랑을 사로잡아 월참형에 처하고, 아들인 양왕 석정을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유외와 함께 장안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석생은 선비족 섭괴와 손을 잡고 장수 곽권을 보내 20,000 군대로 포판(蒲阪)에 주둔하게 했다. 곽권은 이내 동관(潼關)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석정군을 요격해 전멸시키니, 석정과 유외는 대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향년 61세. 손자로는 유파(劉波)가 있다.

3. 평가

당대에는 가차없는 법 집행으로 동진의 수많은 호족들에겐 그야말로 눈엣가시로 여겨져 조협과 묶여 간신이라 까였고, 후대의 여러 사관들도 꽤나 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일례로 당나라 역사가 방현령은 너무 강직한 정치를 행하여 결국 국가는 물론 자신의 집안에까지 해를 미쳤다 평했다. 또, 명-청 교체기의 학자 왕부지는 강결함의 재주를 너무 믿고 융통성 없이 일말의 작은 허물도 용납하지 않아 인망을 잃었고 이는 곧 왕돈의 난으로 이어졌다며, 유량이 소준을 지나치게 몰아세워 반란으로 이어졌듯이 유외와 조협도 왕돈의 난에 대한 책임이 크다 여겼다. 추가로, 석두성에서의 패전 후 원제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1] 말 받아서 냅다 튀어버린 일 때문에 원제에 대한 충성심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2]


[1] 원제가 항복을 선언했다지만 왕돈이 워낙 막나가는 인물이라 해를 입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2] 조협은 도망치라는 원제의 권유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남아서 원제의 곁을 지키겠다는 말을 했지만 유외는 그런 묘사가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