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12-29 01:02:53

감탁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colbgcolor=#800080><colcolor=#fff> 우호경후(于湖敬侯)
甘卓 | 감탁
시호 (敬)
작위 도정후(都亭侯) → 남향후(南鄕侯) → 우호현후(于湖縣侯)
(甘)
(卓)
계사(季思)
생몰 ? ~ 322년 5월
출신 단양군(丹陽郡) 단양현(丹陽縣)
부친 감창(甘昌)
자녀 감번(甘蕃) 외 아들 3명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서진동진의 인물로 자는 계사(季思). 양주 단양군(丹陽郡) 단양현(丹陽縣) 출신으로, 증조부 대부터 조부 감술(甘述), 부친 감창(甘昌)까지 그의 집안은 최소 3대에 걸쳐 오나라를 섬겼다.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로 유명한 감녕의 증손자이며,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전국시대 진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감무도 있다.

2. 생애

오나라에서는 벼슬이나 출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나라 멸망 후, 감탁은 물러나 스스로를 지켰다. 이후 군(郡)의 부름을 받고 주부, 공조를 지내던 중, 주(州)의 수재로 천거되어 오효왕 사마안의 상시로 발탁되었다.

태안 2년(303년) 12월, 반란자 장창(張昌)의 부하 석빙(石冰)이 양주자사 진휘(陳徽)를 격파하고 시상(柴桑)을 점령하자, 의랑 주기(周玘), 남평내사 왕구(王矩) 등이 군사를 일으켜 저항했다. 오흥태수 고비(顧費)도 각 주와 군에 격문을 띄우니, 여강내사 화담, 갈홍, 감탁 등도 호응했다. 석빙의 부하 강독(羌毒)이 수만 대군으로 제압하려 했지만 주기에게 대패하고 참수되었다. 석빙은 놀라 수춘(壽春)으로 달아났으며, 감탁은 석빙 토벌에 공을 세웠다 하여 도정현후(都亭縣侯)에 봉해졌다. 동해왕 사마월은 그를 불러 자신의 참군으로 삼았다가 이호현령으로 옮겼다.

영흥 2년(305년) 12월, 감탁이 관직을 내려놓고 다시 강동으로 돌아가던 중, 역양(歷陽)을 들러 자신의 딸을 우장군 진민의 아들과 혼인시키고 서로 사돈을 맺었다.

영가 원년(307년) 2월, 진민이 역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수만 대군을 동원해 동생 광무장군 진창(陳昶)을 오강(烏江)에, 역양태수 진굉을 우저(牛渚)에 주둔시켰다. 안풍태수 주기는 자신과 동향인 진창의 사마 전광(錢廣)을 은밀히 꾀어내 진창을 암살하게 했다. 전광이 주기의 말에 따라 진창을 죽이고 그 군대를 흡수해 주작교(朱雀橋) 남쪽에 이르니, 진민은 감탁에게 정예 철갑병을 모두 주고 전광을 토벌하도록 보냈다. 주기와 내통하고 있던 단양태수 고영(顧榮)은 이 틈에 감탁에게 접근해 그를 설득했다. 감탁은 본래 명사인 고영을 존경하고 있었고, 앞서 진창이 암살된 사건에 두려움 또한 품고 있었으므로, 한참을 고민한 끝에 주기, 고영에게 붙어 진민을 배반하기로 했다.

감탁은 진민에게 서신을 보내 병에 걸려 딸의 얼굴을 보고 싶다 거짓말을 쳤다. 진민이 감탁의 딸을 보내오자, 딸의 안전을 확보한 감탁은 즉시 주작교를 끊어버리고, 선박을 거두어 남안(南岸)으로 갔다. 그제서야 감탁이 배반했음을 알게된 진민은 친히 10,000 군사를 거느리고 감탁을 토벌하러 출진했다. 감탁은 고영, 주기, 기첨과 군을 합쳐 진민의 군대를 박살내고 강승(江乘)에서 단기로 도망치던 진민을 사로잡았다. 진민은 압송되어 건업(建業)에서 처형당했으며, 진민의 동생들을 포함해 3족이 멸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9월, 안동장군 낭야왕 사마예가 건업에 자리를 잡고 사방의 명사들을 소집했다. 이때 감탁도 부름을 받고 전봉도독, 양위장군, 역양내사에 임명되었다.

영가 5년(311년) 정월, 수춘(壽春)의 양주도독 주복이 난을 일으키자 회남태수 배석이 그를 쳤다가 되려 패배해 동성(東城)으로 도주했다. 배석이 낭야왕 사마예에게 구원을 요청하니, 사마예는 감탁에게 명령을 내려 수춘을 치게 했다. 감탁은 수춘을 진공해 주복의 무리를 무너뜨렸고, 주복은 사마월에게 도망치다가 신채왕 사마확에게 사로잡혀 이내 분사했다.

영가 5년(311년) 6월, 양주자사 왕돈, 양열장군 주방과 함께 낭야왕 사마예를 따르길 거부하는 강주자사 화일을 토벌했다.

영가 6년(312년), 두도가 촉의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정토도독 왕돈은 감탁, 도간, 주방을 보내 두도를 토벌하게 했고, 감탁 등은 3년에 걸쳐 수십번을 싸운 끝에 마침내 두도의 세력을 뽑았다. 낭야왕 사마예는 감탁을 남향현후(南鄕縣侯)로 다시 봉하고 예장태수에 임명했다. 감탁은 여러 차례 승진해 상주자사가 되었고 작위도 우호현후(于湖縣侯)로 전봉되었다.

태흥 3년(320년) 8월, 양양(襄陽)에서 대장군 왕돈을 견제하던 양주자사 주방이 사망했다. 원제 사마예는 감탁을 양주자사, 안남장군, 독면북제군(督沔北諸軍)으로 삼아 주방의 뒤를 이어 양양을 지키게 했다. 감탁은 정무를 간소히 하고,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어 세금을 감면하는 동시에 시장의 불공정한 거래 행위를 단속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이 유외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면서 감탁에게도 서신을 보내 함께 하자 했다. 감탁은 일단 수락했으나 마음 속으로는 왕돈과 생각이 달랐다. 왕돈이 배에 올라 진군하려 할 때, 감탁은 참군 손쌍(孫雙)을 보내 중지할 것을 권고했다. 감탁의 말을 전해들은 왕돈은 크게 놀라 말했다.
"감후(甘侯)는 전에 내게 가능하다 일렀건만, 이제와서 말을 달리 하는가! 나라가 올바르게 흘러가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는 내가 오히려 조정을 위태롭게 한다니 무슨 말인가? 나는 지금 간사하고 흉악한 관리들만 제거하려는 거라네. 일이 성공하면 감후를 공(公)으로 승격시켜 줄 테니, 경은 돌아가 내 말을 전하시오."
손쌍이 돌아가 왕돈의 말을 전하니, 감탁은 왕돈을 따를 지, 막을 지 능히 결단하지 못했다. 혹자가 고민에 빠져있는 감탁에게 일단 왕돈을 따라 진군하다가 도성에 이르렀을 때 그를 공격해 사로잡자는 계책을 내놓았으나, 감탁이 거절하며 말했다.
"과거 진민의 난 때에도 나는 그저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주기를 따랐을 뿐인데, 의자(議者)들은 내가 핍박이 두려워 진민을 배반했다며 흉봤소. 비록 내 본래의 감정은 그들이 말하는 사실과 다르나, 그래도 비슷한 점이 있어 마음 속으로 항상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소. 한데, 만약 지금 그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진다면, 누가 나의 오명을 밝히려 하겠는가!"
그때 초왕 사마승이 보낸 주부 등건이 감탁에게 나아가 유세했다.
"유외가 비록 권세를 타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천하를 해롭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대장군은 사적인 아쉬움으로 위나라와 같이 병사를 일으켜 천하의 기대를 져버렸으니, 이 순간이야말로 충신과 의사(義士)가 일어나 나라를 구할 때입니다. 과거 노중련은 필부에 불과했으나 천하를 구하려는 뜻을 품고 자신과 상관없는 나라를 도왔는데, 하물며 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이와 다르겠습니까! 지금 천하 사람들은 마음으로 제환공진문공을 받들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몽둥이 들어 역적을 쓸어버리고, 의병을 일으켜 왕실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감탁이 웃으며 말했다.
"제환공과 진문공의 일을 내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국난은 최선을 다해 진압하고자 하는 마음뿐이라네. 마땅히 함께 자세히 생각해 보도록 하세."
참군 이양(李梁)이 간했다.
"과거 외효가 농서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하서의 두융은 형세를 관망한 후 광무제에게 귀순했습니다. 오늘날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장군께선 천하에 이름이 높으나, 패망을 멀리하고 안전히 존립하기 위해서라도 앉아서 사태를 관망해야 합니다. 만약 대장군이 승리한다면 장군을 높이 받들어 중히 여길 것이고, 설령 대장군이 패하더라도 조정에서는 장군으로 하여금 대장군을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부귀하지 않음을 걱정하고, 조정이 승리할 것이라 속단해 나서려 하십니까. 한순간의 결정과 한 번의 전투로 존망이 갈릴 수 있다는 점을 부디 헤아려 주십시오!"
이양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느낀 감탁이 다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등건이 반박했다.
"광무제가 막 창업했을 때, 중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 농우의 외효 세력과 정족지세를 보였기 때문에 두융은 하서에서 형세를 관망한 것입니다. 이후 천하의 정세가 결정되어 농우가 뒤집어지고 군신 관계가 정립되자, 하서의 두융은 입조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저 서신으로 복종을 선언하는 것은 의리상 용납되지 않아서 입니다. 심지어 양양의 대부(大府)는 두융이 하서에서 거느리던 것보다 작기에, 지금 장군의 상황을 두융에 빗대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또, 신하로서의 의리를 저버리고 국난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쓰지 아니하면, 어찌 북면하여 천자를 마주 볼 수 있겠습니까! 대장군이 유외를 평정하고 무창으로 돌아온다면 석두성의 수비를 강화해 형주와 상주를 통제할 터인데 장군께서 과연 무사하실 거라 생각합니까?"
그럼에도 감탁은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등건이 재차 설득했다.
"지금 즉시 의거(義擧)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장군을 따르는 것도 아니라면, 이는 우둔한 지혜로 필시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또, 의자(議者)들은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하다고 떠들지만, 이는 허실을 헤아리지 못한 자들의 소문일 뿐입니다. 지금 대장군의 병력은 10,000여 명에 불과하고, 무창에 잔류하는 병력은 그 절반인 5,000명도 채 되지 않으나, 이미 장군께서는 많은 무리를 모았습니다. 장군님의 위명은 천하에 널리 퍼졌고, 부하들도 하나같이 정예라 전투에서 질 군대가 아닙니다. 강대한 무리를 끼고 위명에 의지해 역적을 벌한다면 어찌 왕함(王含)[1] 따위가 능히 이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강대한 군중에 맞서는 자는 스스로 기세를 구할 수 없어, 장군께서 거병한다면 무창은 썩은 나무와 같이 뽑힐 텐데 무엇을 걱정하시는 겁니까! 무창을 평정해 그곳을 거점으로 두 주(州)를 진무하고, 사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람들을 귀의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여몽이 승리한 방법과 같습니다. 이리한다면, 대장군은 전투 한번 못해보고 스스로 자멸할 것입니다. 지금 필승의 계책을 놔두고 앉아서 관망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해 주시옵소서."
감탁은 등건의 계속된 설득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시간만 허비했다.

감탁이 아무런 행동을 보이지 않자, 왕돈은 행여나 그가 변심할 것을 우려해 참군 악도융(樂道融)을 보내 설득하게 했다. 악도융은 언변이 탁월했지만 왕돈을 배반할 생각을 품고 있어, 원래의 목적과는 반대로 감탁이 왕돈에게 대항하게끔 설득했다. 악도융의 설득에 완전히 넘어간 감탁은 병력을 소집하고 왕돈에게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동감군 유순(柳純), 남평태수 하후승(夏侯承), 의도태수 담해(譚該) 등 10여 명에게 명해 역적 왕돈을 토벌한다는 격문을 돌리게 했다. 그리고 참군 사마찬(司馬讚)과 손쌍을 조정으로 보내 표문을 받들게 하고, 참군 나영(羅英)을 광주자사 도간에게 보내 함께 진격하기로 약조했다. 한편, 건강성에서 감탁의 행보를 유심히 살피던 동진 조정은 감탁이 왕돈을 토벌하기로 결정했다는 표문을 받자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감탁에게 진남대장군, 도독형양2주제군사(都督荊梁二州諸軍事), 시중, 형주목을 더했다.

감탁이 왕돈의 근거지인 무창을 노린다는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 무창성 내의 병사들은 두려워 탈영하기 시작했다. 초왕 사마승이 장사군 임상(臨湘)에 치소를 두고 각지의 토벌군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면서 왕돈의 반란군을 압박해 나갔다. 왕돈의 반란은 동진 조정 쪽으로 승세가 기울면서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전황은 왕돈이 별동대를 보내 초왕 사마승의 치소를 기습하면서 급변했다. 사마승은 임상성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농성했으나 사마 우망이 전사하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감탁이 참군 등건과 우충(虞沖)을 초왕 사마승에게 돌려보내며 굳게 지키라고만 하니, 사마승은 감탁이 빨리 무창을 차지하고 직접 구원하러 오지 않는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탄식했다.

비록 감탁은 호기롭게 선전포고를 했으나 원래 우유부단한 성격에 나이가 들면서 의심까지 많아졌다. 왕돈이 크게 두려워 감탁의 조카인 참군 감앙(甘卬)을 보내 유세하자, 감탁은 무창으로의 진격을 멈추고 수십 일 동안 저구(豬口)에 머물렀다. 그렇게 감탁이 다시 허송세월 하는 사이, 왕돈은 석두성에서 황제의 군대를 무찔러 버렸다. 건강 조정을 장악한 왕돈은 사자를 파견해 추우번(騶虞幡)[2]을 감탁에게 보내니, 감탁은 계속해서 싸우자는 도위 진강(秦康)과 악도융의 제안을 거절하고 양양으로 회군했다. 악도융은 밤낮으로 울면서 감탁에게 간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울분과 걱정으로 병을 얻어 사망했다. 참고로 감탁만 기다리며 버티던 사마승은 결국 성이 함락되고 왕돈의 부하 장수에게 살해당했다.

영창 원년(322년) 4월, 양양으로 돌아온 감탁에게는 예전과 같은 관대함이나 온화함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강압적이고 고집이 쎈 모습만 남았다. 특히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주의대연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항상 심란해 했다. 이때부터 그의 주변에서 기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감탁이 어느 날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는데, 뒷배경에 비춰진 정원 나무 위에 자신의 머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또, 그의 집안에 있는 금궤 안에서 항상 망치로 거울을 치는 듯한 맑고도 슬픈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막상 열어 보면 소리가 날만한 물건이 없었다. 이에 무당이 이르길,
"금궤가 장차 주인이 떠날 것을 알고 구슬프게 우는구나."
라 하였다. 주부 하무기와 집안 사람들은 이런 징조들을 꺼림칙하게 여겨 왕돈을 경계하라 조언했지만, 감탁은 무시하고 그럴 때마다 괴팍해져 버럭 화를 냈다. 오히려 그는 대비하기는 커녕 병사들을 해산시켜 농사를 짓게 하면서 아무런 대비도 갖추지 않았다. 공조 영건(榮建)이 간곡히 간했으나 이번에도 듣지 않았다.

영창 원년(322년) 5월, 왕돈의 심복인 양양태수 주려(周慮) 등은 왕돈으로부터 밀명을 전달받고 감탁을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감탁이 무방비하게 다님을 알고, 감탁에게 거짓으로 호수에 물고기가 많다 고했다. 감탁은 그들의 말을 믿고 좌우 사람들을 모두 호수로 내보내 물고기를 잡아오게 했다. 주려 등은 감탁의 집안 사람들이 호수로 이동하자, 병사를 이끌고 그의 집으로 쳐들어가 침실에서 감탁을 살해하고 그 수급을 왕돈에게 보냈다. 주려는 뒤이어 산기시랑 감번을 포함한 4명의 아들들도 아울러 죽였다.

태녕 3년(325년) 2월, 왕돈의 난을 평정한 명제 사마소에 의해 표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경(敬).


[1] 왕돈의 형으로 당시 무창에 남아 성을 지키고 있었다.[2] 고대 중국에서 전투 중지를 알리는 깃발이다.